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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이기적 유전자 - 리처드 도킨스

by JoAn Healing 2020. 1. 14.

제1장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
        진화와 다위니즘
  어떤 행성에서 지적 생물이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생물이 자기의 존재 이유를 
처음으로 발견했을 때이다. 만약 우주의  다른 곳으로부터 지적으로 뛰어난  생물이 지구를 
방문했다고 할 때, 그들이 우리의 문명도를 파악하기 위해 우선 묻는 것은 우리가 "이미 진
화를 발견했는가?"라는 문제일 것이다. 지구의 생물은 어느  한 사람이 진실을 이해하기 전
까지 30억 년 동안 자기가 왜 존재하는가를 모르고 살았다.  그 사람의 이름은 찰스 다윈이
었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사람들도 어느 정도 진실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우리가 왜 존재하
는지에 대하여 일관성 있고 조리 있는 설명을 매듭지은 사람은 다윈이었다. 다윈은 이 장의 
표제와 같은 질문을 하는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에게 우리가 이치에 맞는 답을 가르쳐 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생명에는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나? 인간이란 무엇
인가? 등등 심오한 문제에 부딪힐지라도  우리는 이제 미신에 의지할  필요는 없다. 저명한 
동물학자 심프슨(G.G. Simpson)은 이런 의문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의문에 대하여 답하고자 하는  1859년 이전의 시도는 모두 가치
가 없으며 차라리 그것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편이 나올 것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진화론은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이론과 같이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다윈 혁명이 뜻하는 모든 것은 아직 널리 이해되지 않았다. 대학에서 동물학은 아직도 소수
의 연구 분야이며 동물학을 선택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깊은 철학적 의미를 평가한 후에 그
와 같이 결심하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철학과 인문학 분야에서는  아직도 마치 다윈이 
존재조차 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교육을 하고 있다. 이런 일이  언젠가는 고쳐질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쨌든 이 책의 의도는 다위니즘의  일반적 옹호에 있는 것이 아
니다. 대신에 어떤 논쟁점에 대하여 진화론의 중요성을 추구함에 있다. 나의 목적은  이기주
의와 이타주의의 생물학을 연구하는 것이다.
      동물은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
  학문상의 흥미는 별문제로 하더라도 이 문제가 인간에게 중요함은 명백하다. 그것은 우리
의 사회 생활의 여러 면, 예를 들어 사랑과 미움, 싸움과 협력, 줌과 훔침, 탐욕과 관대에 관
한 것이다. 로렌츠(Lorenz)의 (공격에 대하여), 아드레(Ardey)의 (사회계약), 그리고 아이블-
아이베스펠트(Eibl-Eibesfeld)의 (사랑과 미움)도 이와 같은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이 책들의 어려운 점은 그 저자들이 전전체적으로, 또한 완전하게 틀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진화의 과정을 오해했기 때문에 틀렸다. 그들은 진화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개체(또
는 유전자)의 이익이 아닌 종(또는 집단)의  이익이라고 잘못 된 가정을 하고  있다. 몬태규
(Ashley Montagu)가 로렌츠를 "19세기의  '이빨도 발톱도 피범벅이 된 자연'파 사상가의 직
계 자손이다"라고 비판한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진화에 관한  로렌츠의 견해를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는 테니슨(Tennyson)의 이 유명한 어구가  의미하는 것을 배척한다는 점에서 몬
태규와 같다. 그 두 사람과는 달리 나는 '이빨도 발톱도 피범벅이 된 자연'이라고 하는 표현
이 자연 선택의 현대적 이해를 아주 잘 요약하고 있다고 본다.
  나의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그것이 어떠한 성격의 논의이며,  어떠한 성격의 논의가 아닌
가를 간단히 설명해 보고자 한다. 만약 어떤 남자가  시카고의 갱간에서 오랫동안 순조롭게 
살아왔다고 할 때,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아
마도 그는 굉장히 빠른 총잡이이고 의리의 친구를 많이 거느릴 수 있는 능력의 사나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절대로 확실한 추론은 아닐지라도 그가 생존했고, 성공해 온 조건에  관해
서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그 사람의 성격에 관해서 약간은 추론을 할  수 있다. 이 책이 주
장하는 바는 사람과 기타 모든 동물이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성
공한 시카고의 갱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유전자는 경쟁이 격심한 세계를 때로는 몇 백만 년
이나 생을 계속하여 왔다. 이 사실은 우리의 유전자에 무엇인가의 특별한 성질이 있다는 것
을 말하고 있다. 내가 이제부터 말하는  것은, 성공한 유전자에게 기대되는 특질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정한 이기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전자의 이기성은 이기적인 개체 
행동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볼 바와 같이  유전자가 동물 한 개체 수준
에서 한정된 이타주의를 육성함으로써 자신의 이기적 목표를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특별
한 경우들이 있다.  전자의 '한정된(limited)'과 '특별한(special)'이라고  하는 용어는 중요한 
말이다. 우리가 믿고 싶다고 하더라도 보편적인 사랑이든가 종  전체의 번영이든가 하는 것
은 진화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천성이냐 교육이냐
  여기서 우선 나는 이 책의 성격이 아닌 첫번째 사항을  말하고자 한다. 나는 진화에 따른 
도덕성을 주장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사물이  어떻게 진화되어 왔는가를 말할 
따름이다. 나는 우리 인간이 도덕적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
가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어떠해야 한다는  주장과 어떠하다고 하는 진술을 구별  못하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내 자신의 느낌으로, 단순히 그
리고 항상 비정한 이기주의라는 유전자의 법칙에  기초한 인간 사회는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매우 싫은 사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안됐지만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탄식할지라도 그것
이 사실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 책은 주로 흥미롭게 읽도록 의도하였으나 이 책으로부터 도
덕을 이끌어 내려고 하는 사람은 이것을 경고로써 읽어 주기  바란다. 만약 당신이 나와 같
이 개개인이 공통의 이익을 향하여 관대히 비이기적으로 노력할 수 있는 사회를 이룩하기를 
원한다면 생물학적 본성은 거의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경고한다. 우리가 이기적으로 태어
난 이상, 우리는 관대함과 이타주의를 가르칠 것을 시도해 보지 않겠는가. 우리 자신의 이기
적인 유전자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가를 이해하려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적어도 우리는 유
전자의 의도를 뒤집어 볼 기회를, 즉 다른 종이 결코  바라지 못했던 기회를 잡을지도 모르
기 때문이다.
  교육에 관해서 이와 같은 의견을 말하는 것은 유전적으로 계승되는 특성이 고정되고 변경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기  때문이다(덧붙여 말하자면 이 오류는  아주 흔히 
볼 수 있다). 우리의 유전자는 우리에게 이기적인  것같이 보이나 반드시 우리의 전 생애가 
유전자에 따르도록 강제당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확실히  이타주의를 배우는 것은 유전
적으로 이타주의인 것같이 프로그램되어 있는 경우보다는 훨씬 어려울 것이다. 오로지 인간
만이 문화에 의하여 학습하고 전승되어온 영향에 의해서 지배된다. 어떤 사람은 문화야말로 
중요하기 때문에 유전자가 이기적인든 아니든 간에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는 실제로 관
계가 없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그렇지만은 않다고 하는 사람도있다. 이것은 모두 인간의  속
성에 대한 결정 요인이 "천성이냐 교육이냐"라고 하는 논의에서  어느쪽의 입장을 취하느냐
에 달려 있다. 여기서 나는 이 책의 성격이 아닌 두 번째  사항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 책은 "천성이냐 교육이냐" 논쟁에 있어서 어떤 입장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나는 
이에 대하여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푶명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마지막 
장에서 제시할 문화에 대한 견해는 여기서 제외된다. 만약  유전자가 현대인의 행동 결정에
는 전혀 무관함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이 점에서 동물계에서 유일한 
존재임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극히 최근에 인간이 예외로 됐다는 그 규칙에 대하여 아는 것
은 여전히 흥미 있는 일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 종이  우리가 생각하고 싶은 만큼 예외적이 
아니라면 그 규칙을 배우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이 책의 성격이 아닌 세 번째 사항은 인간의 행동이나 기타 동물의 상세한 행동을 기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들은 자세한 사실은 설명할 때 예로서 사용할 것이다.  나는 "원
숭이의 행동을 보며 그 행동이 이기적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행동도 이기적이라고 
생각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의 '시카고 갱단론'의 논리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이
러한다. 인간도 비비(원숭이의 일종)도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되어  왔다. 자연 선택의 과정
을 보면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되어 온  것은 무엇이든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비, 인간 그리고 기타 모든 생물의 행동을 보면 이 행동이  이기적
임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 예상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면, 즉 인
간의 행동이 참으로 이타적이라고 관찰될 경우 우리는 곤혹스러운 사태와 설명을 필요로 하
는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기에 앞서, 성의가 필요하다. 어떤 실재(예를 들어 한 마리의 비비)가 자기를 희
생하여 또 다른 같은 상태의 실재의 행복을 증진시키 위해 행동했다고 하면 그 실재는 이타
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기적 행동에는 이것과는 정반대의 효과가 있다. '행복'은 '생존의 기
회'로 정의된다. 가령 실제의 생사 가능성에 대한 효과가 극히 적고 무시할 수 있게  보여도 
다윈 이론의 현대적 설명의 놀라운 결과의 하나는 생존의 가능성에 대한 사소한 작용이 진
화에 주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와 같은 작용에 영향을 끼치는 데 필요
한 시간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상술한 이타중의와 이기주의의 정의가 주관적인 것이 아닌 행동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이
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여기서 행동의 동기에 대한 심리학에 관여할 생각은 없다. 이타
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정말로'숨은 혹은 무의식의 이기적인 동기로 그것을 하고 있나  아
닌가를 논의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든 아니든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없을 
것이므로, 그것은 이 책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다만이 행위의 결과가 이타행위자로  보여지
는 자의 생존 가능성을 갖추고 동시에 수익자로 보이는 자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 주면 나는 
이것을 이타 행위로 정의한다.
  오랜 기간에 걸친 생존 가능성에 대한 행동의 효과를 설명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다. 실제의 문제로서 실재하는 행동에 정의를 적용할 때는 '~과 같이 보인다.'라는 말을 보충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는  표면상 이타주의자의 죽을 가능성을 (비록 
얼마나 적든 간에) 높이고 동시에 수익자의 장수의 가능성을 높인다고  생각게 하는 행위이
다. 잘 조사해 보면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는 실은 모양을 바꾼 이기주의인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나는 근원적인 동기가 실은 이기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의 가
능성에 대한 행위의 실제 효과가 우리가 처음 생각한 것과는 반대라고 말하고 있다.
      검은머리갈매기와 사마귀
  이기적으로 보이는 행동과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의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우리가 우
리 자신의 종을 취급할 때에는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버릇을 억제하기 어려운 고로 다른 종
의 동물을 예로 들기로 하겠다. 우선 개체에 의한 이기적 행동의 여러 가지 예를 들어보자.
  검은머리갈매기는 커다른 집단을 이루어 집짓기를 하는데 둥지와 둥지 사이는 불과  수십 
cm밖에 안 된다. 갓 태어난 어린 새끼는 작고 무방비  상태여서 포식자에게 먹히기가 쉰다. 
어떤 갈매기는 이웃 갈매기가 집을 떠나는 것을 기다렸다가 그 둥지를 습격하여 어린 새끼
를 삼켜 버리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이렇게 하여 그 갈매기는 출어 시간을 줄이고 자기 둥지
를 지키면서도 풍부한 영양을 섭취할 수가 있다.
  더 잘 알려진 예로 암놈 사마귀의 동족끼리 서로 잡아먹는 무서운 성질이 있다. 사마귀는 
커다란 육식성 곤충이다. 그들은 보통 파리와 같은 작은 곤충을 먹는다, 움직이는 것은 무엇
이든 공격한다. 교미시 수놈은 주의 깊게 암놈에게 접근하여 위에 타고 교미한다. 암놈은 교
미가 끝난 후에 수컷을 잡아먹기 시작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머리가 없
다는 것이 수놈의 남은 몸통 부분의 성적 행위의 진행을 멈추게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실제
로 곤충의 머리는 억제 중추 신경의 자리이므로 암컷은 수컷의 머리를 먹음으로 인해 수컷
의 성행위를 활발하게 할 수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이점을 높이는 결과가 된다.  물
론 첫째의 이점은 암컷이 좋은 먹이를 얻게 되는 것이다.
      펭귄과 바다표범
  이기적이라는 말은 공식성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에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표현이 부드러울
지 모르겠으나 이와 같은 예는 우리의 정의에 잘 맞는다. 남극의 황제펭귄에서 보고된 비겁
한 행동에 관해서 라면 아마도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펭귄은 바다표범에
게 먹힐 위험이 있기 때문에 물가에 서서 물에 뛰어들기를 주저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중 한 마리가 뛰어들기만 하면 나머지 펭귄은 바다표범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다. 
당연히 누구도 자기가 희생물이 되기는 싫기 때문에 전원이 그저 서서 기다리고 있다. 그리
고 때때로 서로 밀치다가 누군가를 수중에 떠밀어 버리려고까지  한다. 더 일반적으로는 이
기적인 행동이란 다만 먹이나 영역, 또는 교미의 상대 같은  가치가 있는 자원을 서로 나누
기를 거부하는 행위이다. 이타적인 행동으로 보이는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일벌의 이타적 행동
  일벌이 침으로 쏘는 행동은 꿀  도둑에 대한 아주 효과적인 방어  수단이다. 그러나 쏘는 
벌은 육탄 특공대다. 쏘는 행위로 인해 생명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내장이 흔히 침과 함께 
빠져 버리기 때문에 그 벌은 그후 곧 죽게 된다. 그 벌의  자살적 행위가 집단의 생존에 필
요한 먹이저장을 수호했을 지는 몰라도 그 벌 자신은 그  이익을 바지 못한다. 우리의 정의
로 이것은 이타적 행동이다. 의식적인 동기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 경우
에도 또 이기주의의 경우에도 의식적인 동기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것은  우
리의 정의와 무관하다.
      경계음
  동무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는 것은 이타적 행동임에 틀림없으나 동무를 위해 작은 위험을 
당하는 것도 역시 이타적 행동이다. 대부분의 작은 새는 매와  같은 포식자가 떠 있는 것을 
보면 특징적인 '경계음'을 내는데, 이에 의해 무리 전체가 적당한 도피 행동을  한다. 경계음
을 내는 새는 포식자의 주의를 자신에게 끌리게 하므로 특별히 몸을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있다. 그것은 남보다  위험이 좀더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나 역시 이것은 
적어도 언뜻 보면 우리의 정의에 따른 이타적 행위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인다. 동물의 이타
적 행동 중에서 가장 흔히 그리고 뚜렷이 볼 수 있는  것은 양친, 특히 새끼에 대한 어미의 
행동이다. 그들은 집 곳에서나 체내에서 알을 부화시킴으로써 많은 희생을 치르며, 새기에게 
먹이를 주고 큰 위험에 몸을 던져 포와  같은 포식자가 접근할 때 소위 '혼란 과시'를  행한
다. 어미새는 한쪽 날개가 꺾인 양 몸 짓을 하며 여우를 집으로부터 먼 곳으로 유인한다. 포
식자는 잡기 쉬워 보이는 목적물에게 유인되며 새끼가 있는  집에서 멀어진다. 마침내 어미
새는 이 몸짓을 멈추고 공중으로 날아올라 감으로써 여우의 습격을 피한다. 이 어미새는 자
기 새끼의 생명을 구하였으나 이러한 행동으로 자기 자신을 어느 정도의 위험 속에 던졌다. 
나는 지어낸 이야기로 어떤 점을 주장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적당히 선택된 예를 훌륭한 
일반론의 정당한 증거로 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말은 단지 개체 수준의 이타적 
행동과 이기적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예를 들었을 뿐이다. 이 책에
서 나는 유전자의 이기성과 나의 기본 지식에 의하여 개체의 이기주의와 개체의 이타주의가 
어떻게 설명되는가를 표명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전에 우선 이타주의에  관해서 틀린 
설명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이와 같은 말하는 것은 이와 같은 설명이 일반에게 알려
져 있고, 학교에서도 널리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이 설명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은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 즉, "생물은  '종의 이익을 위하여' 
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행위를  하도록 진화한다."라고 하는 오해이다.  생물학에서 이 
사고 방식이 어느 정도로 우세한지는 쉽게 볼 수 있다.  동물의 생활은 대부분을 번식에 이
바지하고 있고 자연계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이타적 자기 희생 행위는 어미가 새끼에게 
하는 것이다. '종의 존속'이란 번식이라고 하는 것에 잘 사용되고 있는 완곡된 표현이다.  확
실히 그것이 번식의 결과임은 틀림없다. 논리를 조금 비약시켜 번식의 '기능'이 좋을 존속시
키는 '일'이라고 추론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사실로부터 동물이 일반적으로 종의 존
속에 유리한 방향으로 행동한다고 결론짓기에는 약간의 잘못이 있으나  그 정도로 하고, 그 
다음에는 같은 동족에 대한 이타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룹 선택설
동족에 대한 이타중의라는 사고 방식은 어쩐지 다위니즘적인 느낌을  준다. 진화는 자연 선
택에 의하여 진행되고 자연 선택은 '최적자'의 생존에 가담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최적
자'란 최적 개체에 관한 것일까, 아니면 최적의 품종 또는 최적의 종에 관한 것일까? 이것은 
목적에 따라서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이타주의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이것은 매
우 중대한 것이다. 다윈이 생존 경쟁이라고 말한데 있어서 경쟁하고 있는 것이 종이라고 하
면 개체는 장기 게임의 졸로 볼 수가 있다. 졸은 종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하다면 희생
이 되는 것이다. 좀더 좋게 말하면 각 개체가 그 집단의 행복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종 
내지는 종내 개체군과 같은 집단은 각 개체가 자기 자신의 이기적 이익을 우선으로 추구하
고 있는 다른 경쟁자 집단보다 아마도 절멸의 위험이 적을  것이다. 따라서 세계는 자기 희
생을 치르는  개체로 이루어진  집단에  의해 대부분  점령되게 된다.  이것이  '그룹선택설
(theory of group selection)'이다. 이 설은 윈-에드워즈(V.C. Wynne-Edwards)의 유명한 저
서를 통해 소개되었고, 아드리(Robert Ardrey)의 (사회계약(The Social Contract))이란 책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이는 진화론의 상세한 것을 모르는 생물학자에게 오랫동안 진실이라고 
생각되어 온 설이다. 옛부터 지지받아 온  '개체 선택(individual selection)'이 라는 설도  있
다. 나로서는 '유전자 선택(gene selection)'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은데...
      반역자
  이 그륩 선택설에 대한 '개체 선택론자'의 답은 간단히 말해서 다음과 같다. 이타주의자의 
집단 중에는 어떤 희생도 거부하고 의견도 다른 소수파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다른 이타
주의자를 이용하려고 하는 이기적인 반역자가 한 개체라도 있으면 -정의에  의하면,- 그 개
체는 아마도 다른 개체보다 생존의 기회도, 새끼를 낳는 기회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새
끼는 각각 이기적인 성질을 이어받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몇  세대의 자연 선택을 거친 후 
이 '이타적 집단'에는 이기적인 개체가  만연해 이기적인 집단과 구별이  어렵게 될 것이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최초에 반역자가 전혀 없는 순수한 이타적 집단이 약간 있었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이웃의 이기적 집단에서 이기적인 개체가 이주해 오는 것이나 이기적 개
체와의 교배에 의해서 이타적 집단의 순혈통이 오염되는 것을 막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기
는 어렵다.
  개체 선택론자는 집단이 실제로 멸망하는가 하지 않는가는 그 집단의 개체의 행동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함에 틀림없다. 또 어떤 집단의  개체들이 선견지명이 있다면 그들은 
결국 이기적인 욕망을 억제하고 집단 전체의 붕괴를 방지하는 것이 자기들의 최대의 이익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이를 인정도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최근에 영국
의 노동자에게 수없이 말해 온 것이다. 어쨌든 집단의 멸망은 개체간의 가열된 경쟁에 비교
하면 매우 느린 과정이다. 집단이 느리게 그리고 확실히  쇠퇴하여 가는 사이에도 이기적인 
개체는 이타주의자를 희생하여 단기간에 성공한다. 영국의  시민이 선견지명의 혜택을 받고 
있든 않든 간에 진화는 미래에 대하여 맹목적이다. 
  '그룹 선택설'은 이제 진화를 이해하고 있는 전문적인 생물학자들 사이에는 별로 지지받고 
있지 못하나 이 설은 직관적으로 호소하는 면이 있다. 동물학을 전공하는 학생의 후속 세대
는 학교를 졸업한 후에 이것이 정통적인 견해가 아님을 알고 놀란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책망하는 것은 좀 심하다.  왜냐하면 영국의 수준  높은 생물학 교사를  위한 책인 (너필드
(Nuffield) 생물학 교사 지도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고등 동물에서는 종의 생존 확
보를 위해서 개체의 자살이라는 행동 형태를 취하는 수가  있다." 이 지도서의 무명의 저자
는 다행히도 논쟁거리가 되는 것을 논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노벨상 수상자에 해당된다. 로렌츠는 (공격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공격 행동의 '종 보
존' 기능의 하나는 최적 개체만이 번식이 허용되도록 보증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
은 순환 논법 가운데 일품이나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너필드 생물학  교사 지도서) 의 
저자와 같이 분명히 로렌츠도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이 정통 다위니즘에 반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그룹 선택설은 뿌리가 깉다는 것이다.
  요젠에 나는 오스트레일리아산 거미에 관한 BBC  TV 프로에서 비슷하고 재미있는 예를 
들었다. 출연한 '전문가'는 대부분의 거미 새끼가 다른 종의  먹이가 되는 것을 관찰하고 다
음과 같이 말했다. "아마도 이것이 그것들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종의 유지를  위해서는 극
소수가 살아 남으면 그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사회계약' 중에서 아드리는 일반적인 사회 질서 전반의 설명하는 데 그룹 선택설을  이용
했다. 명백히 그는 인간을 동물의 정도에서 벗어난 종이라고 보고 있다. 이로써 아드리는 적
어도 그의 숙제는 끝냈다. 권위 있는 설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그의 결의는 명백히 의식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론은 평가받을만 했다.
  아마도 그룹 선택설이 특별한 취급을 받는 것은 첫째로, 그것이 대부분 우리가 갖고 있는 
논리적 이상이나 정치적 이상과 조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으로서 우리는 종종 이
기적으로 행동하나 이상적 측면으로는 타인의 행복을 위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칭찬한다. 그
러나 우리가 '타인'이란 말을 어느 범위까지 설정해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다소 혼란이 있다. 
집단 내의 이타주의는 집단간의 이기주의를 동반할 때가 많다. 이것이 노동조합주의의 기본 
원리이다. 또 다른 수준에서 국가는 이타적 자기 희생의  주요한 수익자이며 젊은이는 자기 
나라 전체의 영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도록 되어 있다. 또한 그들은 타국인이라는 것 외에
는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을  살상하도록 장려받는다(이상하게도 개개인에 대하여  자기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속도를 좀 희생하라고 하는 평화시의 호소는 개인에게 자신의 생명
을 바치도록 격려하는 전시의 호소만큼 효과적이지 않은 것 같다.
      종의 이익론
  최근 인종 차별주의나 애국심에 반대하여 동지 의식의 대상을 인류의 종 전체로 대치하려
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타주의의 대상을 확장하는  인도주의자들은 흥미로운 자연적 결론을 
낳는다. 즉, 그것은 역시 진화에 있어 '종의 이익론'을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적
으로 자유주의적인 사람은 보통 종의 윤리를 가장 강하게 믿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이타
주의를 더욱 확산시켜서 다른 종까지도 포함시키려고 하는 사람을  매우 경멸한다. 만약 내
가 사람들의 주택 사정을 개선하는 일보다 대형 고래류의 살육 방지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면 몇몇 친구들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이기적인 종
  동족의 일원이 다른 종의 일원과 비교하여 윤리상 특별한 배려를 받아야 당연하다는 감각
은 원래 강하다. 전쟁 이외의 상황에서 살인하는 것은 통상 범죄 중에서 가장 큰 죄로 생각
되어 왔다. 우리의 문화에서 이것보다 더 강하게 금지되고 있는 유일한 것은 깃인 행위이다
(비록 이미 죽은 자일지라도). 그러나 우리들은 다른 종의 일원을 기꺼이 먹는다. 우리들 대
부분은 극악스러운 범인에 대해서까지도 사형 집행을 꺼려하는 데 반해 별로 해로운 야수도 
아닌 동물을 재판에도 부치지 않고 기꺼이 쏴  죽인다. 그뿐인가! 우리는 많은 무해한 동물
을 오락이나 놀이를 위해 죽이고 있다. 아메바만큼도 인간적 감정을 갖지 않는 태아는 장성
한 침팬지보다 월등히 경의와 법적 보호를 받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실험적 근거에 의하면 
침팬지는 풍부한 감정을 가지며 생각도  하고 어떤 인종의 말을 기억할  수도 있다. 태아는 
우리의 종에 속하므로 특혜와 특권이 부여되는 것이다. 라이더(Richard Ryder)가 말하는 '종
차별주의' 윤리가 '인종 차별주의' 윤리보다  어느 정도라도 확실한 윤리적  입장에서 설 수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은  그것에는 진화 생물학적으로 엄밀한 근
거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수준에서의 이타주의가 바람직한가?  가족인가, 국가인가, 인종인가,  종인가 아니면 
전체 생물일까라는 문제에 대한 인간의 윤리에 있어서의 혼란은 어느 수준에서의  이타주의
가 진화론적으로 보아 타당한가라는 생물학에 있어서의 문제와 같은 혼란을 반영하고 있다. 
그룹 선책주의자까지도 적대 집단의 일원끼리 서로 미워하고 옥신각신하는 것을 보아도  놀
라지는 않을 것이다. 즉, 그들은 노동조합주의자나 병사처럼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싸움에서
는 자기네 집단에 동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그룹 선택주의자가 어느 수준이 
중요한가를 어떻게 해서 정했는가 하는 것은 물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만약 선택이 같은 
종 내의 집단간이나 이종간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더 큰 집단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은 
왜 그럴까. 종은 속으로 집단을 이루고 속은 목으로 되어 묶이고 목은 강에 속한다.  사자와 
영양은 둘 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포유강의 일원이다.  그러면 '포유류의 이익을 위해'영양을 
죽이지 말라고 사자에게 요구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강의  절멸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자는 
영양 대신에 새나 파충류를 잡을 것이다. 그렇다면 척추  동물문 전체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는 어떨게 하면 좋을까?
      경계 도약
  간접 증명법으로 논하고 그룹 선택설의 난점을 지적하는 것은 이만하고, 개체의 이타주의
의 겉보기상의 존재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아드리는 "톰슨가젤(영양의  일종)에서 
'경계도약(stotting)'과 같은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룹 선택뿐이다"라고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포식자 앞에서 행해지는 이 (사람의 눈을 끄는) 박력 있는 도약 행동은 새의 경계
음에 상당하는 것이다. 이 행동은 위험에 처해 있는  동지들에게 경고를 발하면서 한편으로
는 경계 도약을 하고 있는 개체 자신에게 포식자의 주의를 끈다. 우리에게는 톰슨가젤의 경
계 도약이나 기타 이와 같은 현상 모두를 설명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다음 장
에서 다루어 보려고 하는 문제이다.
  우선 진화를 바라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장 낮은 수준에서 일어나는 선택의 관점에서부
터 보는 것이라고 하는 나의 신념에  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신념에 관하여 나는 
윌리엄스(G.C. Williams)의 명저  (적응과 선택(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내가 이 책에서 활용하는 중심적인 아이디어는 금세기 초, 유전자이전 시
대에  와이즈만(A.Weismann)이  예시하고  있었다.  '생식질의  연속성(continuity  of   the 
germ-plasm)'이라는 그의 학설이 그것이다. 나는 자연 선택과 자기 이익의 기본 단위가 종
도, 집단도 엄밀하게는 개체도 아님을 논하려고 한다. 그것은 유전의 단위인 유전자이다. 일
부의 생물학자에게 있어 이것은 최초이며 극단적인 견해인 양 느껴질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가 어떠한 의미로 그러는지를 알면, 그들은 비록 그것이  낯선 방법으로 표현되어 있을지
라도 실제로 그것이 정통이라는 것에 동의해 줄 것으로 믿는다. 이 논의를 전개하기에는 시
간이 걸린다. 그리고 우리는 우선 '생명' 그 자체의  참된 기원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2장
          자기 복제자
        안정을 향하여
  처음에는 단순하였다. 그 단순한 세계마저 어떨게  시작되었는가를 충분히 설명하기는 어
렵다. 하물며 복잡한 질서 -생명 내지는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의 돌연한 발생을 빈
틈없이 설명한다는 것이 더욱더 힘들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
라는 다윈의 학설에 납득이 가는 것은 단순한 것이 복잡한 것으로 변할 수 있는 방법을, 즉 
무질서한 원자가 스스로 보다 복잡한 패턴을  이루고 나아가서는 인간을 만들어 낸  방법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다윈은 우리들의 존재에 관한 심원한 문제에 대한 해석을 제공해 준다. 
그것은 지금까지 암시된 것들 중에서 유일한 가능성 있는 해석이다. 나는 진화 자체가 시작
되기 이전의 시기부터 시작하여 종래의 것보다 더 일반적인 방법으로 이 위대한 학설을 설
명해 보려고 한다.
      최적자 생존
  다윈의 '최적자 생존'은 실은 '안정된 것의  생존'이라는 보다 더 일반적인 법칙의  특수한 
예이다. 세계는 안정된 것에 의해 차지되어 있다. 안정된 것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을  정도
로 지속적이거나 보편적인 원자 집단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알프스의 마터호른(Matterhom)
산처럼 이름을 붙이기에 합당할 만큼 오래도록 이어지는 유일무이한 원자 집단일 경우도 있
을 것이다. 또는 빗방울과 같이 그 하나하나는 단명할지라도 집합적인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만큼 고비율로 생기는 일단의 존재일 수도 있다.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설명을 요
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 -바위나 은하나 바다의 파도 등- 은 많든 적든 간에 원자의 안정
된 패턴이다. 비누의 거품은 구상으로 되는 성질이 있는데, 이것은 기체가 둘러싸인 얇은 막 
속에서 구형은 안정된 모양이기 때문이다. 우주선 내에서는 물도  역시 작은 구형체로 안정
하나 지구에서는 중력이 있기 때문에 정지하고 있는 물의  안정된 표면은 평탄한 수평이다. 
소금의 결정은 입방체를 이루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나트륨과 염소 이온을 같이 꾸려 넣을 
때의 안정된 방법이기 때문이다. 태양에서는 모든 원자 중에서 가장 단순한 수소 원자가 융
합하여 헬륨 원자를 만들고 있다. 태양 조건하에서는 헬륨의 상태가 안정하기 때문이다.  그 
밖에 보다 복잡한 원자는 우주의 여러 별에서  만들어지고 있고 또 널리 인정되어 온 설에 
의하면 우주를 생성한 '대폭발' 과정에서도 형성됐다. 이것이 우리 세계에 있는 원소의 유래
이다. 
      원자와 분자
  때때로 원자들은 서로 만나 화학 반응을 일으켜 결합하여 많든 적든 간에 안정된 분자를 
형성한다. 이 같은 분자는 매우 클 수가 있다. 다이아몬드와 같은 결정은 단일 분자로 이 경
우에는 주지하는 바대로 안정된 분자라고 생각되나 그 내부의 원자 구조가 무한의 반복이기 
때문에 아주 단순한 분자이기도 하다.  형재 생물은 극히 복잡한 큼  분자들로 구성되며 그 
복잡성에는 몇 개의 단계가 있다. 우리의 혈액 중의  헤모글로빈은 전형적인 단백질 분자이
다. 그것은 아미노산이라는 더 작은 분자의 사슬로 되어 있고, 각 아미노산에는 정확한 패턴
으로 배역된 수십 개의 원자가 함유되어 있다. 헤모글로빈 분자에는 574개의 아미노산이 함
유되어 있다. 이들 아미노산이 4개의 사슬로 줄지어, 이 연결이 설로 물려 풀 수 없게  복잡
한 구형의 3차원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헤모글로빈 분자의 모형을 보면 마치 울창한 가
시나무 덤불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은 진정한 가시나무 덤불과는 달리 불규칙하고 어설
픈 패턴이 아닌 일정 불변의 구조이다. 그것이 인체 내에서는 어느 부분에서나 똑같은 형태
의 헤모글로빈 분자로 평균 6*1021개나 존재한다. 같은 아미노산 배열의 단백질 두  개를 떼
어 내면 마치 두 개의 용수철처럼 똑같이 꼬여서 완전히 같은 3차 구조를 나타내고  안정하
게 된다. 헤모글로빈과 같은 단백질 분자의 가시덤불 형태가  세부적인 것싸지 일정한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의 체내에서는 헤모글로빈의  가시덤불식 번성이 매초 4*1014개의  속도로 
그 '선정된 '형태로 만들어지고, 다른 헤모글로빈이 같은 비율로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헤모글로빈은 오늘날 볼 수 있는 분자이고 원자가 안정된 패턴으로 낙착되는 경향이 있다
는 원칙을 설명하는 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구상에 생물이 생기기 이전에 분자의 초
보적인 진화가 물리나 화학의 일반적인 과정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설계나 목
적이나 지시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에너지가 있는 곳에 일군의 원자가 안정된 패턴이 되면 
그것은 그대로 머물려고 할 것이다. 최초 형태의 자연 선택은 단순히 안정된 것을 선택하고 
불안전한 것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것은  정의대로 
당연히 될 것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과 같이  복잡한 존재를 완전히 같은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정확한 수의 원자를  취하여 약간의 외부 에너지와 같
이 혼합하여 그것들이 바른 패턴이 되는 것을 기다려도 안 된다. 그렇다면 아담은 출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십 개의 원자로 된 분자라면 그와 같이 만들어졌는지 몰라도 인간은  1027
개 이상의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을 만들려면 우주의 전시대가 한 순간으로 생각될 정
도로 긴 시간 동안 생화학의 칵테일 셰이커를 흔들지 않으면 안 되겠으나 그래도 성공은 못
했을 것이다. 이즈음에서 다윈의 학설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도움의 손을 뻗쳐 준다. 느린 
분자 형성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부터를 다윈의 학설이 떠맡게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이야기할 생명의 기원은 아무래도 추론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정의로 보아 이
에 관한 기원을 본 사람은 없으므로 대립되는 학설이 많이 있으나 그것들은 모두 어떤 공통
된 특징이 있다. 이제부터 시작할 단순화된 설명은 아마도 진실로부터 그리 멀지 않을 것이
다.
  생명의 탄생 이전의 지구상에는 어떤 화학 원료가 풍부하게 있었는가? 확실한 것은 몰라
도 가능성이 높은 것은 물, CO2, 메탄, 암모니아 등 태양계의 적어도 몇 개의 행성에 있다고 
알려진 단순한 화합물이다. 화학자들은 옛날의  지구의 화학적 상태를 재현해  보려고 많은 
시도를 했다. 이들 단순한 물질을 플라스크에 넣고 자외선이나 전기 방전(원시 시대의 번개
를 인공적으로 모방한 것) 등의  에너지원을 가했더니 2~3주 지나서 보통은  플라스크 속에 
흥미 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 넣어 준 분자보다 복잡한  분자를 많이 포함한 연갈색의 액
체가 생기는 것이다. 특별히 그 속에서 아미노산이 발견됐다. 이것은 생물체를 구성하는  두 
개의 대표적 물질의 하나로 단백질의 구성 요소이다. 이와  같은 실험이 행하여여지기 전만 
하더라도 자연에 나타나는 아미노산은 생명이 존재하고 있는 증거라고 생각되어 왔다. 가령 
화성에서 아미노산이 발견되면 그 행성에 생물이 있다는 것은 대개 틀림없다고  생각되었었
다. 그러나 지금은 만약 아미노산의 존재가 제시될지라도 공기 중에 단순한 기체가 얼마 정
도 있다는 것과 화산이나 햇빛이나 번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다. 또한 최근에
는 생명 탄생 이전의 지구의 화학적 상태를 본딴 실내 실험에서 퓨린(purine)이라든가 피리
미딘(pytimidine)이라고 하는 유기물이 생성됐다. 이것들은  유전 물질 DNA자체의 구성 요
소이다.
  생물학자나 화학자가 3~40억  년 전에  해양을 구성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원시 수프
(primeval soup)'에서도 이와 비슷한 과정이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이들 유기물은 아마도 해
안 부근의 말라붙은 물거품이나 떠 있는  작은 물방울 속에서 국부적으로 농축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다시 태양으로부터 자외선과 같은 에너지의 영향을 받아 화합하고 더한층 
큰 분자로 되어 갔다. 오늘날에는 거대 유기 분자가 사람이  느낄 정도로 오랫동안 계속 존
재하지는 않는다. 거대 유기분자는 진한 수프 속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표류하고 있었
다.
      자기 복제자
  때로는 우연히 특별한 분자가 생겼다. 이것을 자기 복제자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것은  반
드시 최대의 분자도 아니고 가장 복잡한 분자도 아니었건만 스스로의 복제물을 만든다는 놀
랄 만한 특성을 가졌다. 이것의 탄생은 전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로 보일 수도 있다. 확
실히 그렀다. 그것은 도저히 생길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의 시간 관념으로는, 이와 같은 생
길 것 같지도 않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것이 축구 시합에 돈을 걸어
서 결코 재미를 못 보는 이유이다. 그러나 생길 수 있는 것과 생길 수 없는 것을 판단할 때 
우리는 수억 년이라는 세월을 취급하는 것에 습관이 되어 있지  않다. 만약 수억 년간 매주 
축구에 돈을 걸면 필히 몇 번이고 큰 현상금을 탈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스스로 복제를 하는 분자는 실로 처음 생각했던 것만틈 상상하기 어려운 것은 아
니다. 또한 그것은 단 한번만 생기면 족하다. 주형으로서의 자기 복제자를 생각해보기로  하
자. 그것은 여러 가지 종류의 구성 요소 분자의 복잡한 사슬로 된 하나의 큰 분자라고 한다. 
이 자기 복제자를 둘러싼 수프 속에는 이들 작은 구성  요소가 부단히 떠다니고 있다. 이제 
각 구성 요소는 자기와 같은 종류의 것에 대하여 친화성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수
프 속의 어떤 구성 요소는 이 자기 복제자의 일부분으로 자기가 친화성을 갖고 있는 부분과 
만나게 되면 필히 들러붙으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들러붙은 구성 요소는 필연적으
로 자기 복제자 자체의 순서에 따라 줄짓는 것이 된다.  이때에 그것들은 최초의 자기 복제
자가 된 때와 마찬가지로 점점 결합하여 안정된 사슬을 만든다고 생각해도 좋다. 이 과정은 
순서에 따라 단계적으로 계속해 가다. 이것은 결정이 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한편 두 가닥의 
사슬이 세로로 쪼개질 수도 있을 것이다.l 그러면 두 개의 자기 복제자가 되어 그 각각이 다
시 복제를 계속하게 된다.
  더 복잡하게 생각해 보면, 각 구성 요소가 동종이 아닌 어떤 특정한 다른 종류와 상호 친
화성을 갖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경우 자기 복제자는  동일한 복제 주형이 아닌 일종
의 '음각'의 주형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음각'이 본래의 '양각'의 정확한 복제를 만
드는 것이다. 원래의 자기 복제자의 현대판인 DNA 분자가 양-음형이었는지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안정성'이  돌연히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수프  속에 
이미 특정한 종류의 복잡한 분자가 많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면 그와 같은 분
자는 각기 운좋게 특정한 안정된 형태로 되어 있는 구성 요소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새로 생긴 자기 복제자의 복제물들이 해양 속에 널리 퍼졌음엔 틀림없다. 이 때문에 소형의 
구성 요소 분자는 축적이 줄고 다른 대형 분자도 그 형성량이 점점 줄어갔다.
      복제의 오류
  그래서 같은 복제가 많이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복제 과정에서도 수
반되는 중요한 특성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것은 이 과정이 완전하지 않다
는 것이다. 오류가 생길 수 있다. 나는  이 책에 오자가 없기를 원하나 주의 깊게  찾아보면 
두셋은 발견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분히 문장의 의미를 심히 왜곡할 정도의 것은 아
닐 것이다. 왜냐면 그 오자가 '제1대'의 오류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쇄술 발명 이전에 복
음서 등의 책이 필사로 출판되던 시대를 생각해 보자. 필사자들은  누구나 다 주의 깊게 했
겠지만 틀림없이 몇 개의 오류를 범했음에 틀림없고 그 중에는 고의로 약간의 '개량'을 가하
기를 서슴지 않은 자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모두 하나의 원본에서 베꼈다면 내용이 심하
게 곡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본을 복사하고 그 사본을 복사하여 몇 번이고 이어 
나가면 오류는 누적되어 심각한 것이 된다 우리는 잘못된 복사를 나쁜 것으로 생각하기 쉽
다. 확실히 인가의 문서인 경우에는 오류가 개선으로 이어진다는 예는 생각하기 어렵다.  나
는 그리스 어역 구약 성서를 만든 학자들이 '젊은 여성'이라는 히브리어를 '처녀'라는 그리스
어로 오역하여 "보라 처녀가 아들을 잉태하여..."라고 하는 예언을 덧붙였을 때 그들은 대단
한 것을 출발시켰다고 생각된다. 하여튼 후술한 바로 생물학적인  자기 복제자에게서 볼 수 
있는 틀린 복제는 진정한 의미로  개량을 불러일으키고 , 어떤 오류가  생기는 것은 생명의 
점진적 진화를 해서 필수적이었다. 최초의 자기 보제자가 실제로  어떻게 해서 자기의 복제
를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그것들의 자손인 움 분자는 인간의 가장 충실도가 높은 복사 기술
에 비해서도 놀랄 정도로 충실하기는 하나 그 움 분자까지도 때로는 오류를 범한다. 그리고 
진화를 가능케하는 것은 결국 이와 같은 잘못인 것이다. 아마도 최초의 자기 복제자는 더더
욱 잘못이 많았을 것이다. 어쨌든 오류가 생겼음에 틀림없고, 이 같은 잘못이 누적되어 왔다
는 것도 틀림없다.
  틀린 복제가 됐고 그것이 확대되면서 원시 수프는 모두가 같은 복제의 개체군이 아닌 '선
조'는 같으나 형태를 달리한 몇 개의 '변종 자기 복제자'로 채워졌다. 형태에 따라 수의 차이
가 있었을까? 물론 있었을 것이다. 어떤  형태는 본래 다른 종류보다 안정됐음에  틀림없다. 
어떤 분자는 일단 만들어지면 다른 것보다 분해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는 수프 
속에서 비교적 많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것은 '장수'의 직접적 결과일 뿐만이 아니라 이들
의 분자가 장기간에 걸쳐 스스로  사본을 만들 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장수한 
자기 복제자는 다시 수를 늘리는 경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조건이 같다고 할 때 
분자의 개체군에는 한층 더 장수하는 '진화 경향'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복제의 속도와 정확도
  그러나 아마도 다른 조건도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자기 복제자에게는 개체군 내에
서 확대되어 가는 데 있어 보다 중요했던 하나의 특성이 있었다 그것은 복제의 속도, 즉 '다
산성'이다. 만약 A형의 자기 복제 분자가 평균 주 1회의 비율로 자기의 사본을 만들고 한편 
B형의 자기 복제 분자가 1시간에 1회씩 만든다고 하면 A형 분자가 B형 분자보다  훨씬 '장
수'한다 할지라도 A형 분자는 수적으로 많이 뒤떨어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수프 속의 분자
에는 적지않게 더욱 더 '다산성'으로 향하는 '진화경향'이 존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선택
된 자기 복제자의 제 3의 특징은 복사의 정확도이다. 가령 X형 분자와 Y형 분자가 동일 시
간 존속하여 같은 속도로 사본을 만들 때에 X형 분자가 평균 10회에 1회 정도로 틀린 사본
을 만드는 데 비하여 Y형 분자가 100회에  1회밖에 틀리지 않는다면 분명히 Y형 분자편이 
수적으로 많아진다. 이 개체군 내의 X형 분자단은 잘못된 '자식'그 자체를 잃어버릴 뿐만 아
니라 형재의 자손 또는 가능성이 있는 자손을 모두 잃게 된다.
  우리가 진화에 관하여 어느 정도라도 알고  있다면 이 최후의 관점이 약간  역설적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복제의 오류가 진화에 필요 불가결하다는 설과 자연 선택이 충실한 복제
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설은 과연 양립하는 것일까? 우리는 자기가 진화의 산물이기 때무
에 진화를 막연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 진화하고 싶다고 '바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 그 답이다. 진화란 자기 복제자(오늘날의 유전자)가 오류를 막기 위해 모든 노
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생겨난  일이다. 모노(Jacques Monod)는 그의 스
펜서(Herbert Spencer) 강연에서 이 점을 잘 지적했는데, 그 전에 비꼬아 말하기를 "진화론
의 또 하나의 괴이한 점은  누구나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잇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원시 수프로 돌아가자. 수프는 여러 가지의 안정된 분자, 즉 개체의 분자가 장시간 존속하
거나 또는 복제 속도가 빠르거나 또는 복제의 정확도가 높은 안정된 분자에 의하여 점유되
게끔 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이들 세 종류의 안정성을 향하는  진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다
음과 같은 의미이다. 즉, 일정한 시기를 두고 수프에서 샘플을 취할 경우 두 번째  샘플에는 
수명, 다산성, 복제의 정확성 등 세 가지 점에서 우수한 분자의 함유율이 보다 높아져  있을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는 생물학자가 생물에 관해 말할 때의 진화와 다름없다. 그  메커
니즘도 같은 것이다. 즉 자연 선택인 것이다.
  그러면 이 최초의 자기 복제 분자는 '살아 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아무려면 어떤가? 
나는 "지금까지의 가장 위대한 인물은 다윈이다"라고 하고, 당신은 "아니 뉴턴이다"라고  할
지도 모르나 그런 논의를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논의가 어떻게 
귀착되든 본질적인 결과에는 영향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뉴턴이나 다윈을 '위대'하다고 
하든 않든 간에 글의 생애와 업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마찬가지로 자기 복제자를 '살아 
있다'라고 하든 않든 간에 그들 분자가 겪어 온 길은 아마도 내가 주장하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한 것이었을 것이다. 말이라는 것은  우리가 자유로이 사용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또 가령 '살아 있다'라는 말이 사전에 있다고 해서 그 말이 현실 세계에 있어서 무엇인가 명
확한 것을 가리키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인간의 고난은  이와 같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서 발생하고 있다. 초기의 자기 복제자를  '살아 있다'거 하든 않든 간
에 그들은 생명의 조상이며, 우리의 기초가 되는 선조였다.
      생존 경쟁
  이 논의에 있어서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는  다윈 자신이 강조한 '경쟁'이다)특히 그는 동.
식물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으며 분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원시 수프로서 무한의 자
기 복제자를 유지하여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이유의 하나는 지구의 크기가 한정되어 있
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외에도 중요한 잔정 요인이 존재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우리의  상
상으로, 주형으로써 작용하는 자기 복제자는 복제를 하는 데  필요한 구성 요소의 소분자를 
많이 포함한 수프 속에서 떠돌아 다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자기 복제가 늘어가면 
구성 요소의 분자는 보통 속도로 사용되어지며 소수의 귀중한 자원이 되어갔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자원을 통하여 자기 복제의 여러 가지 변종 내지는 계통이 경쟁을 전개했을 것이
다. 우리한 종류의 자기 복제자가 수를 증가시키는 데 필요했던 요인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
서 검토한 바 있다.
  사실, 별로 유리하지 않은 종류는 경쟁에 의해 수가 줄었다. 결국은 그 계통의 많은  것이 
사멸했음이 분명하다. 자기 복제자의 변종간에도  생존 경쟁이 있었다. 그들 자기  복제자는 
스스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지도  않았다. 이 싸움은 아무런 
악감정도 없이, 또한 아무런 감정도 품지 않고 행해졌다. 그러나 그것들은 분명히 싸우고 있
었다. 잘못된 복사나 경쟁 상대의 안정성을 감소시키는 등의  새로운 방법으로 생성된 새롭
고 보다 높은 수준의 안정성을 갖게 된 자기 복제자는 모두 자동적으로 보존되어 증가했다
고 하는 의미에서이다. 개량 과정은 누적적이었다. 안정성을 증가시켜 경쟁 상대의 안정성을 
감소시키는 방법은 점점 교묘해지고 효과적으로 되어 갔다. 그  중에는 상대 변종의 분자를 
화학적으로 파괴하는 방법을 '발견'하여 그로 인해 방출된 구성 요소를 자기의 복사  제조에 
이용하는 개체도 출현했을 것이다. 이들 원시 육식자는 먹이를  얻음과 동시에 경쟁 상수단
을 강구하든가 아니면 그들 자신 둘레에 단백질로 물리적 벽을 만들거나 하여 스스로를 방
어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렇게 하여 최초의 살아 있는  세포가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닐까.  자기 복제자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 아니라 스스로의 용기, 즉 계속 존재하기  위한 장소까지도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살아 남은 자기 복제자는 자기가 사는 '생존기계(survival machine)'를 축조한 것들
이다. 최초의 생존 기계는 아마 보호용의 외피 정도의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경쟁 
상대가 더 우수하고 효과적인 생존 기계를 몸에 감추고 나타남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져 갔다. 생존 기계는 더 커지고 더 정교해졌다. 그리고 이 과정은 누적적이며  점
진적인 것이었다.
  자기 복제자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유지해 가는 데 사용한 기술이나 책략의 점진적 개량 
때문에 언젠가는 종말이 다가오게 돼 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개량을 위한 시간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장구한 세월은 도대체  어떠한 자기 보존의 기관을 만들어  내게 했을 것인
가? 40억 년이 지난 지금, 고대의 자기 복제자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것들은 절멸되
지 않았다. 어쨌든 그것들은 과거에 생존 기술의 명수였다. 그래서 지금도 바닷속을  마음대
로 떠다니고 있다고 기대해서 그것들을 찾으려 해도 소용이 없다. 그것들은 머 옛날에 기사
와 같은 자유를 포기하고 말았다.  오늘날 그것들은 외부로부터 차단된  거대하고 꼴사나운 
로봇 속에 거대한 집단으로 떠지어 살면서  구부러진 간접적인 길을 통하여 외계와  연락을 
갖고 리모트 컨트롤에 의하여 외계를 조절하고  있다. 그것들은 당신 속에도, 내 속에도  있
다. 그것들은 위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것들의 우지야말로 우리의 존재의  최종
적 논거이다. 그것들은 자기 복제자로서 기나긴 길을 걸어 왔다. 이제 그것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걸음을 계속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들의 생존 기계인 것이다.
            제3장
          불멸의 코일
        생존 기계
  우리는 생존 기계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인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동.
식물, 박테리아 그리고 바이러스가 포함되어  있다. 지구상의 생존 기계 전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심지어 종의 총수마저도 알지 못하는 석이 현실이다. 곤충만을 취해 보아
도 현재 약 300만 종으로 추정되, 그 개체수로 말하면 1018까지 된다.
      다양한 생존 기계
  생존 기계는 종류에 따라 그 외형도,  체내 기관도 매우 다양하다. 문어는 생쥐와  유사한 
듯하나 닮지 않았으며, 이 둘은 차나무와는 전혀 다르다. 반면에 기본적인 화학 조성은 오히
려 균일하다. 특히 그들이 갖고 있는 자기 복제자, 즉 유전자는 박테리아에서 코끼리에 이르
기까지 모두 기본적으로 동일한 종류의 생활 방법이 있고, 자기 복제자는 다종 다양한 기계
를 만들어 이용하고 있다. 원숭이는 나무 위에서 유전자를 유지하는 기계이다. 물고기는  물 
속에서 유전자를 유지하는 기계이다. 심지어 독일의  맥주잔 받침(beer mat) 속에서 유전자
를 유지하고 있는 보잘것없는 작은 벌레도 있다.  이처럼 DNA는 매우 이상한 일을하고 이
TEk.
  지금까지는 간단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DAN로부터 만들어진 현대의  유전자가 원시 수프 
속의 최초의 자기 복제자와 꼭 같은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이것은 논의상 아무런 지장이 없
으나, 실제로는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최초의 자기 복제자는 DNA와 유연  관계가 가까운 
분자였을지 모르나 전혀 다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다른 것이었다면  그것들의 생존 
기계는 나중에 DNA에 의해 탈취당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그랬다면 최초의 자기 복제
자는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을 것이다.  오늘날의 생존 기계에는 그것들의  흔적이 없으므로 
이것들은 덮어두기로 하자.  케언스-스미스(A.G. Cairns-Smith)는 우리들의  선조인 최초의 
자기 복제자가 유기 분자가 아닌 금속이라든가 점토의 작은 조각 같은 무기 분자였지 않았
나 하는 흥미로운 추측을 하고 있다. 강탈자이건  아니건 오늘날 DNA는 생존 기계를 손아
귀에 빈틈없이 쥐고 있다. 내가 11장에서 시험적으로 시사함과 같이 현재 새로운 권력 쟁취
가 시작되고 있지 않다면...
     DNA의 구성 단위
  DNA 분자는 뉴클레오티드(nucleotide)라고 부리는 소형 분자를 구성단위로 하는 긴 사슬
이다. 단백질 분자가 아미노산의 사슬인 것과 같이 DNA  분자도 뉴클레오티드의 사슬이다. 
DNA 분자는 작아서 볼수 없으나 그 정확한  형태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잘 파악되고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나선형으로 맞물린 한 쌍의 뉴클레오티드의  사슬인 '이중 나선'으로 '불멸
의 코일'이라고 불리고 있다. 뉴클레오티드를  구성하는 단위는 단지 네  종류밖에 없다. 그 
이름은 A, T, C 그리고 G라고 한다. 이것들은 여러  동.식물에서 동일하다. 단지 틀린 것은 
그것들이 연겨되는 순서이다. 인간의 G구성 단위는 여러 점에서 달팽이의 G구성 단위와 같
다. 그렇데 한 인간의 이들 구성 단위의 서열과 다를 뿐만 아니라 같은 사람 사이에서도(그 
정도는 큰 것이 아니나) 다르다는 것이다(일란성 쌍생아라는 특수한 경우는 제외하고).
  우리의 DNA는 우리의 몸 속에서 살고 있다. 그것은 몸의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
니고 각 세포에 분포해 있다. 한 인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 수는 평균 약 1015개이다. 
무시할 정도의 예외는 있으나 그들 세포 모두에는 그 몸의 DNA의 완전한 사본(dopy)이 함
유되어있다. 이 DNA는 뉴클레오티드의 A, T, C, G 라는  알파벳으로 쓰인 몸을 만드는 법
에 관한 한 세트의 지령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빌딩의 하나하나의 방에 
그 빌딩 전체의 설계도를 넣어 둔 '책장'이 있는 것과도 같다. 세포 내의 이 '책장'은 핵이라
고 불린다. 인간의 설계도는 46권이나 된다. 이 수는 종에 따라 다르다. 우리는 각 '권'을 염
색체라고 부른다. 현미경으로 보면 염색체는 기다란 실처럼 보인다. 유전자는 그 위에  질서
정연하게 줄지어 있다. 어떤 유전자가 어디에서 끝나고 다름 유전자가 어디에서부터 시작하
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으며, 실제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닐지 모른다. 이 장에서 
말하듯이, 다행히 이것도 우리의 목적과는 벼로 관계가 없다.
  이제부터는 실물을 표시하는 용어와 비유를 적당히 섞어 가면서 건축가의 설계의 예를 들
어 기술하기로 하자. '권'과 '염색체'라는 말은 같은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또 유
전자간의 경계는 책의 페이지 사이의  경계만큼 분명치는 않으나 '페이지'는 유전자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로 한다. 이 비유는 앞으로  자주 사용될 것이다. 이것이 결국 파괴되면  또 
다른 비유를 쓰기로 한다. 물론 '건축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DNA의 지령은 자연 선택에 의
해 조립되어 온 것이다.
      복제
  DNA 분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그 하나는 복제이다. 즉, DNA 분자는 스
스로의 사본을 만든다. 이 작용은 생명의 탄생이래 쉬지 않고  계속되어 왔고, DNA 분자는 
현재 실제로 이 점에서 아주 우수하다. 성장한 인간은 1015개의 세포로 되어 있는데, 처음으
로 태내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설계도의 원본 하나를 받은 단 한 개의 세포이다. 이 세포
는 각기 본래의 세포 설계도 사본을 받은 두 개의 세포 분열된다. 다시 분열이 계속되어 세
포 수는 4, 8, 16, 32...로 불어나 몇 조로 됐다. 분열 때마다 DNA의 설계도는 거의 틀림없이 
충실히 복제되어 왔다.
  이것이 DNA 복제라는 첫 번째 이야기이다. 그러나 만약 DNA가 실제로  몸을 만들기 위
한 한 세트의 설계도라고 하면 그 설계도는 어떻게 하여 실행되어 나갈까? 어떻게 몸의 구
조로 번역될 것인가? 여기서 DNA가 작용하는 두 번째의 중요한 문제를 보기로 하자. DNA
는 다른 종류의 분자인 단백질의 제조를 간접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앞 장에서 말한 헤모글
로빈은 많은 종류의 단백질 분자의 일례에 지나지  않는다. 4분자의 뉴클레오티즈 알파벳으
로 쓰인 암호화된 DNA의 메시지는 단순한  기계적 방법으로 별도의 알파벳으로 번역된다. 
그것은 단백질 분자를 한자 한자 읽어 가는 아미노산의 알파벳이다.
  단백질을 만드는 것은 몸을 만드는 것과는 아주 무관한 것처럼 생각이 되나 사실은 그 방
향으로의 작은 첫걸음인 것이다. 단백질은  몸의 물리적 구조를 구성하고  있을뿐더러 세포 
내의 화학적 과정 전반에 예민한 제어를 하여 정확한 시간, 정확한 장소에서 화학적 과정의 
스위치를 선택적으로 켰다 껐다 한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유아의 발육에 연결되는가 
하는 문제를 발생학자가 확실히 해결하는 데는  몇십 년, 아니 몇 백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행하여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유전자는 인체를 조작하며 간접적으로 지배
하고 있는데, 그 영향은 엄밀히 일방 통행이다. 즉, 획득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생애에 수
많은 지식과 지혜를 얻었더라도 유전적 수단으로는 그 중 한 가지도 자식에게 전해지지 않
는다. 새로운 세대는 각각 무에서 시작해야 한다. 몸은 유전자를 불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하
여 유전자가 이용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배 발생을 제어하고 있다는 사실이 진화상에 갖는 중요성은 다음에 있다. 즉, 그
것은 유전자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장래의 자기 존재에 책임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유전자의 존재는 그 것들이 만들어 내서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몸의 효율에 의존하
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 자연 선택은  원시 수프 속에서 자유로이 떠다니는 자기  복제자의 
살아 남는 방법의 차이에 의하여 성립되고 있었다. 반면에 지금의 자연 선택은 생존 기계를 
잘 만드는 자기 복제자, 즉 배  발생의 제어 기술이 뛰어난 유전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하여 자기 복제자는 전처럼 변함없이  의식적이거나 의도적이 아니다. 수
명의 길이, 다산성, 복제의 충실도에 의한 경쟁자 분자간의 자동적 선택이라는 낡은  과정은 
아직도 먼 옛날과 같이 계속되고 있다. 유전자는 선견지명이 없다. 그것들은 미리 계획을 세
우지 않는다. 유전자는 그저 있을 뿐이다. 어떤 유전자는 다른 것보다 많이 있다. 그리고 다
만 많이 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유전자의 수명의 길이와  다산성을 결정하는 능력은 옛날
처럼 단순하지는 않다. 훨씬 복잡한 것이다.
  최근 6억 년 동안 자기 복제자는 근육, 심장,  눈(몇 번인가 독립적으로 진화하고 있다)과 
같은 생존 기계 기술에서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이전에 그것들은 자기 복제자로
서의 생활 양식의 근본적 특성을 철저히 변혁했다. 이에 관해서는 계속 논의하는 중에 자연
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현대의 자기 복제자에 관하여 우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떠지어 사는 성질이 대단
히 강하다는 점이다. 하나의 생존 기계는 단 하나만이 아닌 수십만이나 되는 유전자를 가진 
하나의 운반체(vehicle)이다. 몸을 구축한다는 것은 개개의  유전자의 분담을 구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협동 사업인 것이다. 하나의 유전자가 몸의 여러 부분에 대하
여 각각 다른 효과를 미치는 수도 있다. 또 신체의 어떤 부위는 여러 유전자의 영향을 받으
며, 어떤 한 유전자는 다른 많은 유전자들의 상호 작용에 의해 효과를 나타내는 수도  있다. 
또 그 중에는 다른 유전자군의 작용을  제어하는 지배 유전자(master gene)의 작용을  하는 
것도 있다. 이를테면 설계도의 각각의 페이지에는 건물의 각각 다른 부분에 관한 지시가 씌
어 있고, 각 페이지는 많은 다른 페이지의 앞뒤를 참조함으로써 의미를 갖는다.
        유전자는 개체의 특성을 정한다
  유전자는 어느 정도의 복잡한 상호 의존성을 갖는데도 도대체 왜 '유전자'라는 말을  쓰느
냐고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유전자 복합체'와 같은  집합 명사를 쓰지 않을까? 과연 
그것은 많은 목적으로 보아 좋은 생각이다. 그러나 또 다른  견해로 보면 이 유전자 복합체
란 것이 불연속인 자기 복제자, 즉 유전자로 나뉘었다고  생각하기에는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성이라고 하는 현상 때문이다. 유성 생식에는 유전자를 섞어 붙이는 작용이 있
다. 이것은 개개의 몸이 모두 유전자의 단명한 조합을 위한 임시적 매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하나의 개체에 머물고 있는 유전자의 조합은 단명하지만 유전자 자체는 
매우 오래 살아 남는 잠재력이 있다. 그것들이 밟는 길은 끊임없이 만나고 떨어지면서 세대
에서 세대로 이어져 간다. 한 개의 유전자는 몇 세대라도  개체의 몸을 통하여 살아가는 단
위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이것이 이 장에서 논하는 중심 과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매우 
존경하는 몇 사람의 동료가 완강히 동의를 거절하는 점이기도 하므로 나의 설명은 다소 지
겹게 생각될 것이나 용서하기 바란다. 우선 성의 실태를 간단히 설명해야 하겠다.
      인간 설계도
  나는 인간의 몸을 만들기 위한 설계도가 46권 속에 똑똑히  그려져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다. 사실은 다소 기묘하다. 46개의 염색체는 23쌍의 염색체로 이루어
져 있다. 즉, 모든 세포의 핵 속에 정리되어 있는 것은 23권의 설계도 두 세트라고  해도 좋
을 것이다. 이것들을 1a 권과 1b 권, 2a 권과 2b  권...23a 권과 23b 권으로 하자. 물론 어떤 
원이나 어떤 페이지에 어느 번호를 매기는가는 전혀 임의적이다.
  우리는 양친으로부터 각기 한 세트씩의 염색체를 받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양친의 정소
와 난소 안에서 조립된 것이다. 예컨대 1a  권, 2a 권, 3a 권...은 부친으로부터 받은  것이고 
1b 원, 2b 권, 3b 권...은 모친으로부터 온 것이다. 실제로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지만 논리상
으로는 어떤 세포의 46개의 염색체를 현미경으로 보아 부친에서 유래하는 23개와  모친에서 
유래하는 23개를 분별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 쌍으로 된 염색체는 서로 물리적으로 붙어서 전생애를 지낼 수도 없고 서로 가까이 지
낼 수도 없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짝지어진'것일까? 그것은 부친 기원의  각 권이 모친 
기원의 특정한 권과 페이지를 바꿔 넣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짝지어진' 상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가령 13a권의 6페이지와 13b권의 6페이지는 둘 모두 눈의 색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한편에는 '청색'이라고 씌어지고 또 한편에는 '갈색'이라고 씌어 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두 개의 바꿔치기가 가능한 페이지에 같은 것이 씌어져 있는 경우도 있으나 눈 색
깔의 예와 같이 틀릴 수도 있다.  그것들이 모순된 '추천'을 할 때  몸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은 다양하다. 어떤 경우에는 한쪽의 표시가 다른 쪽의 표시를 이긴다. 눈 색깔이이 그  예
이다. 실제로 갈색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푸른 눈을 만들기  위한 지령이 무시되어 있는 것
이다(그러나 푸른 눈을 만드는 지령이 자손에게 전해지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니다). 이와 같
이 무시되는 유전자를 '열성 유전자'라고 한다. 열성 유전자의 반대는 '우성  유전자'이다. 갈
색의 눈을 만드는 유전자는 청색 눈을 만드는 유전자에  대해 우세하다. 대응하는 페이지의  
두 개의 사본이 일치하여 푸른 눈을 추천할 경우에만 푸른  눈이 되는 것이다. 더 일반적인 
경우 상대하는 유전자가 동일하지 않을 때에 그 결과는 어떤 종류의 타협이 된다. 즉,  몸은 
중간 형태의 설계가 되든가 또는 어떤 쪽과도 전혀 다른 것이 되는 것이다.
  갈색 눈의 유전자와 푸른 눈의 유전자와 같이 두 개의 유전자가 염색체상의 동일 위치에
서 경쟁자일 경우 그것들을 서로의  '대립 유전자'라고 부른다. 우리의  목적을 위하여 대립 
유전자라는 말을 경쟁자라는 말과 동의어라고 가정하자. 건축가의 설계도의 권을 루스 리프
(loose leaf)식 바인더로 여기고 페이지를 분리 교환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서 생각해 보자. 매 
13권에는 6페이지가 있는데 5페이지와 7페이지 사이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는 6페이지가  몇 
종류 있다. 어떤 것은 '푸른 눈'을 표시하고  있고 어떤 것은 '갈색 눈'을 나타내고 있다.  또 
개체군 전체에는 녹색 등 다른  색을 나타내는 것도 있을지 모른다.  아마도 개체군 전체에 
흩어져 있는 13번째 염색체상의 6페이지에 위치하는 대립 유전자는 대여섯 개 정도가 있음
에 틀림없다. 어떤 사람이라도 13권의 염색체는 두 개 이상을 갖지 못한다. 따라서 한  사람
이 6페이지의 부위에 갖는 대립 유전자는 최대 2개이다. 즉, 푸른 눈의 사람처럼 같은  대립 
유전자의 사본을 갖고 있든가, 또는  개체군 전체에 이용되고 있는 대여섯  개 중에서 뽑힌 
어떤 것이든 두 개의 대립 유전자를 갖고 있다.
      윤전자 풀
  물론 개체군 전체로써 이용되는 유전자 풀(pool) 속을 스스로 나가서 유전자를 선택해 낼 
수는 없다. 어떤 시점에서도 모든 유전자는 개개의 생존 기계 속에 포함되어 있다. 유전자는 
수정시에 우리에게 나누어지는 것으로서 이에 관해서는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하
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개체군의 유전자는  일반적으로 유전자 풀로 생각되는 성격의  것이
다. 이 말은 유전학자가 사용하는 학술 용어이다. 유성 생식은 주의 깊게 조직된 방법에  따
르기는 하나 유전자를 서로 섞어 붙이기 때문에 유전자 풀이라는 것은 좋은 개념이다. 특히 
페이지나 페이지의 뭉치를 루스 리프 바인더로부터 풀었다 바꾸어 넣었다 하는 것 같은 일
이 실제로 행하여지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곧 기술하겠다.
  앞에서 말한 바대로 한 개의 세포가 두 개로 갈라지는 정상적인 세포 분열에 있어 그  각
각의 세포는 46개의 모든 염색체 사본을 전부 받는다. 이 정상적인 세포 분열을 '체세포  분
열'이라 한다. 그런데 이외에도 '감수 분열'이라고 하는 다른 형태의 세포 분열이 있다. 이것
은 생식 세포, 즉 난자와 정자를 만들 때에만 일어나는 세포 분열이다. 난자와 정자는  염색
체를 46개가 아니 23개밖에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의 세포 중에서 유일한 존재이다. 
물론 이 수는 46개의 꼭 절반이며, 이것은 수정에 의하여 융합하여 새로운 개체를 만들기에 
안성맞춤인 수이다. 감수 분열은 정소와 난소에서만 일어나는 특수한 형태의 세포 분열이다. 
거기에서는 두 세트의 46개의 염색체를 갖는 1개 세포가 분열하여 한 세트에 23개의 염색체
를 갖는 생식 세포가 되는 것이다(설명에는 인간의 경우의 수를 쓰기로 한다).
      정자-23개의 염색체
  23개의 염색체를 가진 정자는 정소 내의 46개의 염색체를 갖는 보통의 세포가 감수 분열
하여 만들어진다. 한 정자 세포에 어떤 23개의 염색체가 들어갔을까? 매우 중요한 것은,  46
개 중에서 무조건 아무거나 23개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13권의 사본이 둘
이 있어 17권의 사본이 하나도 없게 되는 상태로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론상은 어떤 
개체가 그 정자 하나에, 이를테면 모친  기원의 염색체만을, 즉 1b 권,  2b 권, 3b 권, ...23b 
권을 주는 것이 가능하다. 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경우, 자식은 그 유전자의 절반을 
친할머니로부터 계승하여 친할아버지로부터는 아무것도  계승하지 않은 셈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와 같은 전체 염색체의 통일된 배분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은 더 복잡하다. 권
(염색체)은 루스 리프 바인더라고 생각된다고 한 것을 다시 생각해 보고 싶다. 어떻게 되는
가 하면 정자형성 중에서 단일 페이지 또는  여러 페이지가 벗어나 짝이 되는 권의 그것에 
맞는 페이지와 교환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정자는 1a 권의 처음 65 페이지와 1b 권의 66 
페이지부터 끝까지를 취하여 제 1권을 만드는 수가 있다. 이 정자 세포의 다른 22권도 같은 
식으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가령 어떤 개체의 모든 정자 세포가 같은 세트의 46개의 염색체
의 작은 조각에서 23개의 염색체를 모았다고 해도 그 정자 세포는 모두 유일한 것이다 난자
는 난소 내에서 같은 식으로 만들어지고 역시 어떤 것이든 유일하다.
      교차
  이 혼합 메커니즘은 어느 정도 잘 알려져  있다. 정자(또는 난자) 형성 중에 각 부친쪽의 
일부 염색체는 물리적으로 떨어져서 모친쪽의 염색체에 있는해당되는 부분과 바뀐다(전술한 
바대로, 여기서 부친쪽, 모친쪽 이라고 하는 것은 그 정자를 만드는개체의 양친에서  유래하
는 염색체라는 것이다). 염색체의 일부를 교환하는 이 과정을  '교차(crossing over)'라고 한
다. 이것은 이 책의 논의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하다. 교차라는 것이 행해지는 이상, 당신이 
현미경을 가지고 자기의 정자(당신이 여자라면 난자)의 염색체를  본다고 해도 당신의 부친
으로코더 온 염색체와 모친으로부터 온 염색체를 구별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이것은 보통의 체네포의 경우와는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한 개의 정자내에 있는 염
색체는 어떤 것이든 모친쪽의 유전자와 부친쪽의 유전자의 모자이크로 된 잡종인 것이다.
  페이지와 유전자의 비유는 여기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루스 리프 바인더에서는 한 페이지 
전체가 삽입되거나 삭제되거나 교환되거나 하지만 한 페이지의 일부분이 삭제되거나 교환되
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렇지만 유전자 복합체는 유클레오티드의  문자를 연결한 긴 실이며 
페이지에 따로따로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지  않다. 확실히 '단백질 사슬메시지의 종결과  개
시'에는 단백질 메시지와 같은 4 분자의  알파벳으로 쓰인 특별한 심벌이 있다. 이들  2개의 
구두점 사이에는 1개의 단백질을 만들기 위한 암호화된 지령이 있다. 원한다면 단일 유전자
란 개시와 종결의 심벌 사이에 1개의 단백질 사슬을 암호로 나타내고 있는 일련의 뉴클레오
티드 문자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시스트론(cistron)'이란 말은  이와 같이 정의되는 단위로
서 쓰여지고 있고, 일부의 사람들은 유전자라는 말과 시스트론이란  말을 같은 것으로 사용
하고 있다. 그러나 교차는 시스트론간의 간격을 지키지 않는다. 시스트론 사이와 마찬가지로 
시스트론 내에서도 쪼개지는 수가 있다. 그것은 마치 설계도가  별개의 페이지에 씌어져 있
는 것이 아니고 46권의 두루마리 테이프에 씌어져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시스트론의 길이
는 일정치 않다. 어떤 시스트론이 어디에서 끈나고 다음의 시스트론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를 아는 유일한 방법은 테이프상의 심벌을 읽고 '메시지의 새기와 종결'의 테이프상의  심벌
을 읽고 '메시지의 개시와 종결'의 심벌을 찾는 것이다. 교차는 상대하는 모친쪽의 테이프와 
부친쪽의 테이프를 잡아 들고, 그것들에게 쓰이어진 것과는 무관하게 대응하는 부분을 잘라
서 서로 교환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 책의 제목에 쓴 유전자라는 말은 단일 시스트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좀더 미묘한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다. 나의 정의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하며, 또한 유전자에  대
하여 모든 사람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정의는 없다.  가령 있다손 치더라도 신성하여 범하
기 어려운 정의라는 것은 없다. 어떤 말을 뚜렷이 의심의  여지없이 정의한 다면 자기의 목
적에 맞추어 마음대로 정의할 수 있다. 내가 사용하고 싶어하는 것은 윌리엄스의  정의이다. 
그에 의하면 유전자는 자연 선택의 단위로서 역할할 수 있을 만큼 긴 세대에 걸쳐 지속되는 
염색체 물질의 일부로 정의된다. 앞 장에서 사용한 말로  표현하면 유전자는 복제 충실도가 
뛰어난 자기 복제자라고 할 수 있다. 복제 충실도라는 것은 복제형의 수명을 나타내는 별도
의 표현이다. 나는 이것을 단순히 수명이라고  하기로 한다. 이 정의는 어느 정도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유전 단위
  어떤 정의에 있어서도 유전자가 염색체의 일부라는 것은 틀림없다.  문제는 어느 정도 크
기의 일부인가, 즉 테이프의 어느 정도의 부분인 가라는 것이다. 테이프상의 인접한 암호 문
자의 서열을 고려해 보자. 이 암호의 서열을 유전 단위라 부르기로 하자. 그것은 한  시스트
론 내의 겨우 10문자의 서열일지도 모르고, 8개의 시스트론의 서열일지도 모른다. 또는 시스
트론의 중간쯤에서 시작과 마무리를 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것은 다른 유전 잔위와 중복
되는 수도 있을지 모른다. 작은 단위를 몇 개라도 함유할 수도 있을 것이고, 큰 단위의 일부
를 이룰 수도 있겠다. 현재의 논의에는 길이가 어떻든 상관없다. 이것이 우리가 유전 단위라
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염색체상의 일정한 구간의 일이고, 물리적으로  나머지 
염색체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에 착안한다. 유전 단위는 짧으면 짧을수록  몇 세대에 이르기까지도 장
생하는 것 같다. 특히 교차에 의하여  쪼개지는 일이 적다고 생각된다. 감수 분열에  의하여 
정자나 난자가 만들어질 때마다 한 염색체에 대하여 평균 1회 교차가 일어나 그 교차가  염
의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염색체의  길이의 절반의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염색체의 길이의 절반의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염색체의 길이의 절반에 이르는 대단히 큰 유전 단위를 생각하면, 그 단위가 1회의 감수 분
에 이르는 대단히 큰 유전 단위를 생각하면, 그 단위가 1회의 감수 분열에서 쪼개지는 확률
은 50%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유전 단위가 염색체 길이의 1%밖에 없으면 1회의 감수 
분열에서 절단되는 확률이 1%밖에 없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것은 그 단위가 개체의 자손 
중에 몇 세대를 걸쳐서라도 살아 남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단일 시스트론은 염색체 길이의 
1%보다 휠씬 작은 것 같다. 인접한 몇 개의  시스트론까지도 교차에 의해 해체되기까지 몇 
세대에 걸쳐 살아 나가는 것으로 생각된다.
      유전자의 평균 수명
  유전 단위의 평균 수명은 편의상 세대수로 나타낼 수 있고, 다시금 그것을 연수로 환산할 
수가 있다. 만약 하나의 염색체 전체를 유전 단위라고  가정하면 그 생활사는 1세대밖에 이
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부친으로부터 이어받은  8a번 염색체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당신이 수태되기 직전에 당신 부친의 정소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세계의 모든 역사를 통
하여 그 이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감수분열의  혼합 과정에 의해 생겼다. 즉, 
당신의 부친쪽의 조부모로부터 온 염색체 절편이 함께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모두 
특정의 정자 내에 배치되어 있고, 유일한 존재였다. 그 정자는 막대한 수에 달하는 아주  작
은 배의 대선단 중의 한 척이고 그들 배는 일제히 당신의 모친 속으로 노를 저어 들어갔다. 
이 특별한 정자는(당신이 이란성 쌍생아가 아니면) 당신 모친의 난자 중 하나에 도달했으며, 
선단 유일의 정자였다. 이것이 당신의 존재 이유이다.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유전 단위, 즉 
당신의 8a번 염색체는 나머지 모든 유전 물질과 같이 스스로 복제를 시작했다. 지금 그것은 
짝을 갖춘 형태로 당신의 몸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당신이  자식을 만드는 차례가 되면 이 
염색체는 당신이 난자(또는 정자)를 만들 때에  파괴된다. 그 일부는 당신의 모친쪽의 8b번 
염색체의 일부와 교환될 것이다. 모든 생식 세포에서 새로운 8번 염색체가 만들어진다. 그것
은 헌 염색체보다 '좋을'지도 모르고 '나쁠'지도 모르나,  매우 이루어지기 어려운 우연의 일
치가 없는 한 전혀 다르고 아주 유일한 것이다. 한 개의 염색체 수명은 한 세대인 것이다.
  더욱 작은 유전 단위, 예컨대 당신의 8a번 염색체의 1/100의 길이의 유전 단위 수명은 어
떨까? 이 단위도 역시 당신의 부친으로부터  온 것인데 그것은 당신의 부친 속에서  비로소 
모아진 것은 아니다. 전술한 추론에 의하면 당신의 부친의 조모로부터 온 것으로 하자. 조모
가 자신의 양친의 한 사람으로부터  그 단위를 전부 받아들일  확률도 역시 99%이다. 작은 
유전 단위의 선조를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은 그 최초의 창조자를 만나게 될 것
이다. 그것은 어느 단계에서 당신의 조상의 한 사람의 정소  또는 난소 내에서 비로소 만들
어졌음에 틀림없다.
  나는 '만들어진다'라는 말을 어느  정도 특수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거듭 말해  두게
TEk.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유전  단위를 구성하고 있는 더 작은  소단위는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유전 단위가 어떤 시점에서  생겨났다고 하는 것은 소
단위의 배치(이것에 의하여 단위가 규정된다)가 그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만들어진 시기는 예컨대 당신의 조부모의 세대 정도로 아주 최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극히 작은 단위를 생각하면 그것은 처음에  아주 먼 조상 중 아마도 원숭이와 닮은 
유인원에서 조립되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당신  속의 작은 유전 단위는  먼 미래까지 
살아나가 먼 자손에게 완전하게 전해질지도 모른다
  어떤 개체의 자손은 하나의 계통을 밟는 것이 아니라 분지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
의 8a번 염색체의 그 짧은 일부분을  '만들어낸' 것이 당신의 어느 선조이든 그  사람에게는 
다분히 당신 외에 많은 다른 자손이  있을 것이다. 당신의 유전 단위의  하나는 당신의 6촌 
형제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내게 있을지도 모르고 수상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신이 키우는 개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옛날로 되돌아가 보면 우리는 다 같은 조상에 
도달하기 때문에, 또 동일 한 작은 단위가 우연히 독립적으로 몇 번이고 긁어모아지는 수도 
있을 것이다. 유전 단위가 작으면 작을수록 그것이 다른  개체에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즉, 
사본의 형태로 이 세상에 몇 번이고 나타날 확률이 높다.
      돌연변이
  전부터 존재하던 소단위가 교차에 의해 모이는 기회는 새 유전 단위가 만들어지는 보통의 
방법이다. 또 하나의 방법-그것은 수가 적으나 진화상 매우 중요하다-은 '점 돌연변이(point 
mutation)'라고 한다. 점 돌연변이는 어떤 책 속의 하나의 문자의 오식에 의한 잘못이다. 그
것은 드물지만 유전 단위가 길면 길수록 그 길이의 어디엔가 돌연변이에 의해 변할 가능성
이 크다.
  또 다른 중요하고도 드문 종류의 과실 또는 돌연변이를 '역위'라고 한다. 염색체의 일부가 
양단으로 잘려서 거꾸로 되어 역의 위치에서 다시 붙는 것이다. 앞에서의 비유로 말하면 이 
경우 페이지를 다시 세어 볼 필요가 있게 된다. 때로는  염색체의 일부가 단순히 역으로 되
어 있을 뿐만이 아니라 염색체의 전혀 다른  부분에 붙은 경우도 있고 아주 다른 염색체에 
붙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어떤 권에서 다른 권으로 페이지의 다발을 옮기는 것이 된다.  보
통은 유해한 이런 종류의 과오가 중요한 것은 시시때때로 함께 작용하는 유전 물질 조각에 
긴밀한 '연관'을 불러일으키는 수가 있다. 양쪽이 존재하는 때만이 유효하게 작용하는 두 개
의 시스트론(이것들은 어떤 점에서 서로 돕고 있다)은 아마도 역위에 의하여 서로 가까워질 
것이다. 이때에 자연 선택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새로운 '유전 단위'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경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경우 그 유전 단위는 미래의 개체군 내에 퍼질 것이다.  유전자 
복함체는 세월이 지나는 사이에 이와 같이 큰 폭으로 재조립되어 '편집된' 것으로 생각된다.
      나비의 의태
  가장 훌륭한 예의 하나는 '의태'로써  알려진 형상이다. 어떤 종류의  나비는 구역질 나는 
맛이 있다. 그것들은 보통 선명하고 눈에 띄는 색깔을 하고 있어서 새들은 그 '경고색'을 기
억하여 그것을 피한다. 반면에 맛이 나쁘지  않은 타종의 나비는 쉽게 잡혀 먹힌다.  그래서 
이것들은 나쁜 맛의 나비를 흉내낸다. 즉, 나쁜 맛의 나비를 닮은 색깔과 형태(맛은 닮지 않
은)를 가지고 태어난다. 박물학자들은 종종 그것들에게 속으며 새들도 역시 속는다. 정말 싫
은 맛의 나비를 한 번 맛본 새는 비슷하게 보이는 나비를 모두  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 중
에는 의태종도 포함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의태의 유전자는 자연 선택상 유리하게 된다. 이것
이 의태가 발달하는 이유이다.
  '나쁜 맛'의 나비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그것들이 모두  닮은 것은 아니다. 의태종이 그
것들을 전부 닮을 수는 없다. 나쁜 맛을 내는 한 특정한 종류에 자신을 맡겨야만 한다. 일반
적으로 의태종은 각각 특정한 나쁜  맛을 내는 종으로 흉내낼 수  있는 전문가이다. 그러나 
그 중에는 아주 묘한 짓을 하는 의태종이 있다. 그 의태종의 이부 개체는 어떤 하나의 나쁜 
맛을 내는 종에 의태하며 다른 개체는  또 다른 나쁜 맛을 내는 종에  의태하고 있다. 중간 
상태의 개체나 양쪽에 의태하려고 하는 개체는 즉시 먹혀 버리기가 십상이나 실은 이와 같
은 중간형은 안 생긴다. 한 개체가 암놈이거나 수놈이거나  양단간에 하나이어야 함과 같이 
한 개체는 어떤 하나의 나쁜 맛을 내는 종에 의태하든지  양자 중에서 택일한다. 어떤 나비
는 A종에 의태하는 반면에 그 형제 나비는 B종에 의태한다.
  그것은 마치 한 개의 유전자가 A종을  닮거나 B종을 닮거나를 결정하고 있는 듯이  보인
다. 그러나 단 한 개의 유전자가 의태의 다종다양한  면 -색깔, 형태, 점 모양, 비행의 리듬
까지-의 모든 것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 아마도 한 시스트론의 의미의 유전자로는 그
것은 가당치 않다. 그러나 실은 역위와 그 밖의 우연한  재배열에 의하여 유전 물질에 무의
식으로 자동적인 '편집'이 행해진 결과 이전에는 마구 흩어져 있던 다수의 유전자가  염색체
상의 한 장소에 모여 긴밀한 연관  집단을 이룬 것이다. 이 집단 전체는  한 개의 유전자와 
같이 행동하여- 실제로 우리의 정의로는 이것은 단일 유전자이다- 별도의  집단인 '대립 유
전자'를 가지고 있다. 어떤 집단에는  A종으로 의태하는 데 관여하는  시스트론이 함유되어 
있다. 각 집단이 교차에 의해 분열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자연계에서는 중간형의 나비
는 전혀 볼 수 없으나, 다수의 나비를 실험실에서 사육하면  극히 드물게 나타날 것임에 틀
림없다.
  나는 유전자라는 말을 몇 세대까지도 계속되고  많은 사본의 형태로 배분될 정도로  작은 
유전 단위라는 의미에서 쓰고 있다. 이것은 전부냐 또는 아니냐라는 엄밀한 정의는  아니고, 
'큰' 또는 '늙은' 등의 정의와  같이 이를테면 윤곽이 차차  흐려져 가는 정의이다. 염색체의 
어떤 길이의 한 부분이 교차에 의해 분열되거나 여러 종류의 돌연변이에 의해 쉽게 변한다
면 내가 말하는 의미로써 유전자로 불릴 자격은 없다. 시스트론은 아마도 그러한 자격이 있
다고 생각되나 그보다는 더 색체상의 극히 가까이 있는 수가  있어, 이 경우 우리의 목적에 
따라 그것은 단일의 장수하는 유전 단위를 구성하고 있다고  한다. 의태하는 나비의 집단은 
좋은 예이다. 시스트론은 어떤 몸을 이탈하여 다음의 몸으로 들어갈 때, 즉 차세대로 여행하
기 위해 정자나 난자에 실릴 때 이전의 항해에서 서로 이웃하던 자들, 즉 먼 조상의 몸으로
부터 긴 방랑의 여행을 같이 해 온 옛 길동무와 한 조각배에  같이 타는 수가 많을 것이다. 
같은 염색체상의 서로 이웃한 동지의 시스트론은 단단히 뭉친  길동무를 이루고 있고, 감수 
분열 시기가 도래할지라도 한 배에 탑승하므로 손해볼 일은 절대로 없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이 책에는 '이기적인 시스트론'도 '이기적인  염색체'도 아닌 '어느 정도 이
기적인 염색체의 큰 도막과 더욱 이기적인 염색체의 작은  도막'이라는 제명을 붙여야 마땅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이것은 매혹적인 제명은 아니다. 거기서 나는  유전자를 
몇 대를 계속할 가능성이 있는 염색체의  작은 도막이라고 정의하고 이 책에 "이기적  유전
자"라는 표제를 붙인 것이다.
  여기서 1장의 마지막에 남긴 문제로 돌아가자. 1장에서는 자연  선택의 기본 단위라는 대
표적인 모든 단위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았다. 또한 사람에 따라 종을 자연 선택
의 단위라고 여기는 사람, 종 내의 개체군 또는 집단을 단위로 여기는 사람, 개체를  단위로 
여기는 사람도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자연 선택의 기본 단위로서 그리고 이기주의의 기본 
단위로써 유전자를 생각하는 편이 좋다고 말했다. 나는 이제 나의 주장이 정당할 수밖에 없
게끔 유전자를 '정의'하려 한다.
        자연 선택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말하면 자연 선택이란 각 단위의 생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생
존하는 것이 있으면 죽는 것도 있는데, 이 선택적인 죽음이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기 위
해서는 좀더 조건이 필요하다. 각 단위는 많은 사본형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단위의 적어도 일부는 진화상으로 의미 있는 기간(사본형으로) 동안  생존할 수 있는 능
력이 없으면 안 된다. 작은 유전 단위는 이들의 특성을 갖추고 있다. 개체, 그룹,  그리고 종
에는 그것이 없다. 유전 단위를  실제로 불가분의 독립한 입자로써 다룰  수 있음을 제시한 
것은 멘델(Gregor Mendel)의 위대한 업적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이 어느 정도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시스트론까지도  때로는 분할되는 수가 있고, 동일  염색체상의 
두 개의 유전자는 둘 다 완전히 독립하여 있지 않다. 내가 행한 것은 불가분의 입자라는 이
상에 극도로 가까워지는 단위로서의 유전자를 정의하는  것이다. 유전자는 불가분은 아니나 
좀처럼 분할되지 않는다. 확실히 그것은 어떤 개체의 체내에  존재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유전자는 조부모로부터 손자 손녀까지 다른 유전자와  섞이지 않고 그냥 그
대로 중간 세대를 통과하여 여행한다. 유전자가 끊임없이 혼합된다면 우리가 현재 이해하고 
있는 자연 선택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다윈 시대에 증명된 것이다. 당시는 유전이 혼합 과정
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다윈을 대단히 곤란하게 했다.  멘델의 발견은 이미 발표
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에 다윈을 도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윈은 그것
을 몰랐다. 사람들이 그것을 읽은 것은 다윈과 멘텔이 죽고 난 후 몇 년이 지나서였다. 멘델
은 아마도 자신이 발견한 것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다
윈에게 편지를 썼을 것이다.
      유전자는 불사신이다
  유전자의 입자성의 또 하나의 측면은 그것이 노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전자가 100만 
년을 살았다고 해서 100년쯤 산 유전자보다 쉽게 죽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기의 목적에 
맞추어 자기의 방법으로 다음에서 다음으로 몸을 조절하며, 죽을  운명에 있는 몸이 노쇠하
거나 죽음에 이르기 전에 차례를 따라 그들의 몸을 버리며, 세대를 거치면서 몸에서 몸으로 
옮겨 간다.
  유전자는 불사신이다. 아니 불사신에 가까운 유전 단위로서 정의된다. 세계에 존재하는 개
개의 생존 기계인 우리들 인간은 수십 년은 산다고 예측된다. 그런데 세계의 유전자의 예상 
수명은 십년 단위가 아닌 1만 년 또는 100만 년 단위로서 재지 않으면 안된다.
  유성 생식을 하는 종은 개체가 자연  선택의 중요한 단위로서 자격을 얻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허황된 유전 단위이다. 개체의 그룹은 더한층 큰 단위이다. 하늘의 구름이나 사막의 모
래 바람 같은 것이다. 그들은 일시적인  집합 내지는 연합이다. 진화적 시간의 척도로  보면 
불안정하다. 개체군은 장기간 계속되나 다른  개체군과 끊임없이 배합되고 있고, 그로  인해 
그 자체의 정체성을 잃어 간다. 개체군은 또 내부로부터 진화적 변화를 받는다. 그것은 자연 
선택의 단위로 될 수 있을  만큼 독립된 존재는 아니다.  즉, 다른 개체군보다 좋은  것으로 
'뽑힐' 정도로 안정하지도 않고 단일하지도 않다.
  개체의 몸은 그것이 유지되고 있는 한은 충분히 독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것이 도대체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 각 개체는 유일하다. 그러나  실체의 사본이 한 개씩밖
에 없을 때에는 그들 실체간에 선택이 작용하여 진화가 일어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유성 
생식은 복제가 아니다. 개체군이 다른 개체군에 의해 오염되듯이 한 개체의 자손은 성적 파
트너에 의해 오염된다. 당신의 자식은 당신의  절반밖에 안 되고, 당신은 당신의 아주  작은 
부분-몇 개의 유전자-을 가진 다수의 자손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비록  그들이 당신의 
성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개체는 안정한 것이 아니다. 정처없이 떠도는 존재이다. 염색체도 또한 트럼프 놀이의  카
드장처럼 즉시 혼합되고 즉시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카드 자체는 섞여져도 살아  남는다. 
이 카드가 유전자이다. 유전자는 교차에  의해서도 파괴되지 않는다. 그저 파트너를  바꾸어 
행진할 따름이다. 물론 그들은 계속 행진한다. 그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그들은 자기 복제자
이고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인 것이다. 우리는 목적으로 쓰여진 후 버려진다. 그러나 유전
자는 지질학적 시간을 사는 거주자이다. 유전자는 영원하다.
      유전자는 영원하다
  유전자는 다이아몬드처럼 영원하나 다이아몬드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원자의 불변하는 
패턴으로서 지속되는 것이 개개의 다이아몬드의 결정이다.  DNA는 그와 같은 영구성을 가
지고 있지 않다. 자연의 DNA 분자는  어느 것이든 그 생명이 극히  짧다. 분명히 일생보다 
길지는 않고 아마도 수십  개월일 것이다. 그러나 DNA  분자는 이론적으로는 자신의 사본 
형태로 1억 년이라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원시  수프 속의 고대의 자기 복
제자와 꼭 같은 특정 유전자의 사본이 세계  속에 널리 분포할 수도 있다. 단지 다른  점은, 
오늘날의 복제자들은 모두 생존 기계인 몸 속에 완전하게 들어 있다는 점이다.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유전자가 그 정의상 사본 형태로 거의 불멸이라는 것이다. 유
전자를 단일 시스트론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어떤 목적에는 적절하나 진화론을 논하려면  그
것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확대의 정도는 정의의 목적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는 자연 선택의 
실제 단위를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자연 선택에 성공하는 단위가 가져야 할 
특성을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앞 장에 의하면 그것은 장수, 다산성, 복제의 정확도이다. 
그래서 '유전자'를 적어도 잠재적으로 이와 같은 특성을 갖고 있는 최대의 단위라고  간단히 
정의하자. 유전자는 많은 사본 형태로 존재하는 장수의 자기 복제자이다. 그러나 무한  장수
는 아니다. 다이아몬드라 해도 문자대로 영원한 것은 아니고, 시스트론도 교차에 의해  둘로 
갈리는 수가 있다. 유전자는 충분하게 존속할 수 있을 정도로 짧고, 자연 선택의 의미  있는 
단위로서 일할 정도로는 '충분히 긴' 염색체의 한 조각으로 정의된다.
  '충분히 긴'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게 어느 정도의 길이일까? 엄밀히 답할 수는 없다. 그
것은 자연 선택의 '압력'이 어느 정도로 강한가에 달렸다. 즉, '열세'로 생각되는 유전 단위가 
'우세' 대립 유전자보다 얼마만큼 많이 소멸하는가에 달렸다. 이것은 양적  문제이며, 개개의 
경우에 따라 다르다. 실제 자연 선택의 단위로서 최대인  유전자는 시스트론과 염색체 사이
의 중간 어디엔가에 위치하는 크기라는 것을 알 것이다.
      유전자-이기주의의 기본 단위
  유전자가 자연 선택의 기본 단위의 첫 번째 후보가 될 수 있는 것은 유전자가 잠재적으로 
갖고 있는 불멸성 때문이다. 이제 '잠재적'이라는 말을 강조해야 할 때가 왔다. 어떤  유전자
는 100만 년을 살수가 있으나 많은 새로운 유전자는 최초의 세대조차 다 살지 못한다. 소수
의 유전자가 성공을 거두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운이 좋아서이지만,  대개는 그 유전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는 곧 그들의  유전자가 생존 기계를 만드는 데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유전자는 자기가 붙어살고 있는  각각의 몸의 배 발생에 
영향하에 있을 때보다 조금 더 장수하고 더 많이  번식하도록 한다. 예컨대 '우세한' 유전자
는 자기가 붙어살고 있는 몸에 긴 다리를 주어 그 몸이 포식자로부터 도망하기 쉽게 하므로 
자기의 생존을 확실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개별적인 예이지  보편적인 예는 아니다. 즉, 긴 
다리는 반드시 이점이라고 만은 할 수 없다. 두더지에게는 긴 다리가 핸디캡일 수밖에 없다. 
개개의 세부적인 것에 치우치지 말고 모든 뛰어난(즉, 장수의) 유전자에 공통되는 어떤 보편
적인 특성을 생각할 수가 있을 것인가?  반대로 어떤 유전자를 '열세'의 단명한  유전자라고 
간단히 구별할 수 있는 특성은 무엇일까? 이 같은 보편적인 특성이 몇 개 있을지도 몰라도, 
이 책에 특히 관계 깊은 특성이 하나 있다. 즉, 유전자 수준에 있어 이타주의는 악이고 이기
주의는 선이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에 대한 유리의 정의로 보아, 이와 같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유전자는 생존 중에 그 대립 유전자 풀 내의 대립 유전자는 다음 세대의 염색체상
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대립 유전자를 희생하여 유
전자 풀 속에서 자기의 생존 기회를 늘리도록 행동하는 유전자는 어느 것이든 그 정의로 보
아 장수하는 경향이 있다. 유전자는 이기주의의 기본 단위인 것이다.
      유전자의 협동 사업
  지금까지 말한 것이 이 장에서 주로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몇 개의 복잡한 문
제와 가정을 숨긴 채 설명해 왔다. 복잡한  문제의 첫 번째 것은 이미 간단히 말한  것이다. 
독립된 자유 유전자가 세대를 통해 여행을 하는데, 그것은 배 발생의 제어에 있어서는 별로 
자유로운 인자도 독립된 인자도 아니다. 그것은 규칙도 없이  복잡한 방법으로 서로서로 그
리고 외부 환경과 협력하여 상호 작용을 하고 있다. '긴 다리의 유전자'라든가  '이타적 행동
의 유전자'라든가 하는 표현은 말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한 비유일 뿐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의
미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길든 짧든 다리를 혼자 힘으로 만드는 유전자는 없다. 다리를 
만드는 일은 많은 유전자의 협동 사업이다. 외부 환경의  영향도 불가결하다. 즉, 다리는 실
은 먹이로부터 만들어진다. 그러나 다른 조건이 같다면 다른  대립 유전자의 영향하에 있는 
것보다는 다리를 길게 하는 경향을 갖는 단일 유전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와 비슷한 예로서 밀의 생장을 촉진하는 비료인 질산염의  영향을 생각해 보자. 질산염
이 없는 곳보다 있는 곳에서 밀이  잘 자란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질산염 
비료만으로 말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바보는  없다. 종자, 토양, 햇빛, 물 그리고  여러 
가지 무기물도 모두 필요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지만 이들  다른 요인이 일정하게 유지
된다면 제한된 범위내에서는 다소 다를지라도질산염 비료의 시비로 밀은 더 크게 자랄 것이
다. 같은 식으로, 배 발생에 있어서 개개의 유전자에 대해서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배 발생
은 매우 복잡하게 맞물린 짜임새에 의해 제어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그 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유전 인자든 환경 인자이든  간에 어린아이의 어떠한 부분
의 단일 '원인'으로 생각되는 것은  없다. 어린아이의 모든 부분에는  거의 무한의 선행하는 
원인이 있다. 그러나 한 어린아이와 또 다른 어린아이 사이에 있는 하나의  '차이', 이를테면 
다리 길이의 차이에는 환경이든 유전자이든 어디엔가 하나내지 두셋의 단순히 선행하는  원
인이 쉽게 발견될지도 모른다. 여하튼 살아 남기 위하여 다투고  싸우는 데 관계가 있는 것
은 개체간에서 볼 수 있는 '차이'이고, 진화에 관계  있는 것은 유전적으로 지배되는 차이인 
것이다.
  어떤 유전자에 관해 말하면, 그것의 대립 유전자는 생명이 걸린 경쟁 상태이나 다른 유전
자는 온도, 먹이, 포식자 또는 동지와 같은 환경의  일부에 불과하다. 어떤 유전자의 작용은 
그 환경에 좌우되며, 그 환경에는 다른 유전자도 포함된다. 유전자의 작용은 그 환경에 좌우
되며, 그 환경에는 다른 유전자도 포함된다. 유전자는 다른 특정 유전자가 존재하면 또 전혀 
다른 작용을 나타낼 수 있다. 몸 속의 유전자 세트 전부는 일종의 유전적 풍토나 배경을 이
루고 있고, 개개의 유전자의 작용을 변경하거나 그것에 영향을 주거나 한다.
  여기서 우리는 역설에 빠져든 듯이 생각된다. 어린아이를 만드는  것이 이 정도로 복잡한 
협동 사업이라면, 그리고 모든 유전자가 그 일을 달성하기 위해 수천의 동료의 유전자를 필
요로 하는 것이라면, 세대를  통하여 몸에서 몸으로  불사신의 샤모아(chamois)같이 도약해 
가는 불가분의 유전자는 자유롭고 구속되지 않으며, 자기 추구적  생명의 인자라는 나의 도
식과 이 일은 어떻게 양립할  수 잇는 것일까? 그것은  모두 난센스였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꾸민 문구에 의해 도취한  부분도 있었을지 모르나 결코 무의미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모순은 없다. 이것은 또 다른 비유로 설명할 수가 있다.
      조정 선수의 예
  한 사람의 조정 선수는 자기 혼자만으로  옥스퍼드 대 케임브리지의 조정 경기에서  이길 
수 없다. 그에게는 8명의 동료가 필요하다. 각각의 선수는 항상 보트의 특정 부분에 앉는 전
문가이다. 즉, 뱃머리에서 노젓는 자든지  조정수든지 키잡이든지 그들은 각각 어떤  역할을 
맡고 있다. 보트를 젓는 것은  협동 작업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는 다른 사람보다 
팔심이 좋은 자가 있다. 코치는 뱃머리에서 노젓는 전문의 선수진, 키잡이 전문의 선수진 등 
한 그룹의 후보 중에서 자기의 이상으로 하는 조정 팀(크루, Crew)을 뽑아야 한다. 그가 다
음과 같이 뽑았다고 하자. 그는 매일 각 위치의  후보자를 무작위로 조합하여 새로이 3조의 
크루를 짜서 그 3조의 크루를 서로 경쟁시킨다. 이것을  몇주간 계속하면 이긴 보트에는 종
종 동일 인물이 타고 있는 경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인물은 우수 선수로서 기록된다. 
또 그 중에는 항상 뒤지는 크루 속에 얼굴을 보이는 선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자들은 
결국 제거된다. 그러나 특별히 팔심이 좋은 선수라도 때로는 뒤지는 크루에 들어 있는 수가 
있다. 다른 멤버의 팔이 나빴던 탓이든지  운이 나빠서 -반대편에서 강풍이 불어  와서- 이
다. 가장 뛰어난 선수들이 이긴 보트에 있다는 경향은 그저 '평균'해서 그런 것이다.
  이 선수들에 해당하는 것이 유전자이다. 보트의 각 위치에  관한 경쟁자는 염색체상의 동
일 위치를 점할 가능성이 있는 대립 유전자이다. 노를 빨리  젓는 것은 생존에 성공하는 몸
을 만드는 것과 같다. 바람은 외부 환경에 해당한다. 교체 요원의 집단이 유전자 풀이다. 하
나의 몸에 관하여 말하면 그 몸의 유전자 전부가 한 보트에 타고  있는 꼴이 된다. 좋은 유
전자가 나쁜 동료 속으로 들어가 치사 유전자와 한 몸 속에서 동거하는 수도 흔히 있다. 이 
경우 치사 유전자가 그 몸을 어릴 때에 죽여 버리고 좋은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와 같이  파
괴된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몸은 아니다. 좋은 유전자와 같은 복제물이 치사 유전자를 갖
지 않는 다른 몸 속에서 살고 있다. 좋은 유전자의 많은 사본은 때로는 버릇 나쁜 유전자와 
한 몸에 동거했기 때문에 그것에 이끌려서 멸망하는 수도 있고,  또 머물고 있는 몸이 벼락
을 맞는 등 불운한 일에 휩쓸려서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의에 따르면 운, 불운은 무작위
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일관해서 손실되는  쪽에 있는 유전자가 불운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몹쓸 유전자인 것이다.
      팀워크(teamwork)
  훌륭한 조정 선수의 자질의 하나는 팀위크, 즉 크루의 나머지  멤버와 협조할 수 있는 능
령이다. 이것은 강한 근육만큼이나 중요하다. 나비의 예에서 말한 대로 자연 선택은  역위와 
다른 염색체 일부의 대규모적 이동에 따라 무의식으로 하나의 유전자 복합체를 '편집'해  잘 
협조하는 유전자를 모아서 긴밀하게 결합한 입단으로 만들어 낸다. 그러나 물리적으로는 전
혀 결부될 수 없는 유전자끼리 서로 양립하기 위하여 선택될 수도 있다. 다음 세대의 몸 속
에서 만나는 대개의 유전자, 즉 유전자 풀의 나머지 전부의 유전자와 잘 협조하는 유전자는 
유리하게 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유능한 육식 동물의 몸에는 여러 가지 특성이 필요하다. 그 중에는 고기를 자르
는 이빨, 고기를 소화하기에 적합한  소화관,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특성이 있다. 한편 
유능한 초식 동물은 풀을 씹기 위한 넓은 이빨과 특별한 소화 기구를 가진 아주 긴  창자를 
필요로 한다. 초식 동물의 유전자 풀 속에서 육식용의 날카로운 이빨을 그 소유자에게 제공
하는 새로운 유전자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  것은 일반적으로 육식이라는 착상이 
나빠서가 아니다. 적합한 소화관과 기타 육식 생활에 필요한  모든 특성까지도 갖추고 있지 
않으면 고기를 효율적으로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육식용의  예리한 이빨에 관한 유전자가 
본래 열등한 유전자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초식성을 위한 유전자가 우세한 유전자 풀 속에 
있을 때에만 열등한 유전자이다.
  이것은 미묘하고 복잡한 개념이다. 어떤 유전자의 '환경'이  대개 다른 유전자로 구성되어 
있고, 다른 유전자의 각각이 다시금 또다른 유전자라는 환경과 협력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선택되어 가기 때문에 복잡한 것이다. 이 미묘한 점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비유가 있는데 이
것은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게임 이론'과 유사하다. 게임  이론에 
관해서는 개체간의 공격적인 경쟁에 관련하여 제 5장에서  소개할 예정이다. 그래서 이점에 
관한 이 이상의 논의는 제 5장의 끝부분으로 미루고, 이 장의 중신 과제로 이야기를 돌리자. 
즉, 자연 선택의 기본 단위로  생각하기에 가장 적합한 것은 종도  아니고 개체군도 아니고 
개체조차도 아닌 유전 물질의 약간 작은 단위(이것을  유전자라고 부르면 편리하다)라는 것
이다. 이 논의의 기초가 되는 것은 전에도 언급했듯이 유전자가 잠재적으로 불사신인 데 대
하여 몸과 모든 다른 더 상위의 단위는 일시적인 것이라고  하는 가정이었다. 이 가저은 두 
개의 사실, 즉 유성 생식과 교차라는 사실과 개체는 죽는다라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은 뚜렷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들이 왜 사실일까라는 물에 
주저하지는 않는다. 왜 우리와 대부분의 다른 생존 기계가 유성생식을 하는 것일까? 우리의 
염색체는 왜 교차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우리는 영원히 살지 못하는가?
        노화 이론
  '우리는 왜 늙어서 죽는가'하는 의문은 복잡한  문제이고 그 상세한 것은 이 책의  범위를 
넘는 것이다. 특별한 이유에 덧붙여 보다  일반적인 이유가 몇 가지 제안되었다. 예를  들면 
노쇠는 개체의 생애 동안에 일어나는 복제 과정의 유해한 잘못과 다른 유전자의 손상이 축
적된 것이라는 이론이 있다. 또  메다워(Peter Medawar) 경이 제창하는  또 하나의 이론은 
유전자 선택에 의한 진화 사상의 좋은 예이다.
  메다워는 우선 "늙은 개체는 그 종의 나머지 개체에  대한 이타적 행위로서 죽는다. 왜냐
하면 번식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늙어서 공연히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이다"라고 하
는 종래의 설을 버렸다. 메다워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것은 증명하려고 하는 것을, 즉 개체가 
너무 늙어서 번식할 수 없음을 처음부터 가정하는 하나의 순환  논법이다. 그 부분은 더 훌
륭하게 바꿔 말할 수 있을지라도 이것은 역시 단순한 그룹 선택 내지는 종 선택과 같은  종
류의 설명이다. 메다워 자신의 이론은 훌륭한  논법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꾸밀 수가  있
다.
      우수한 유전자와 치사 유전자
  '우수한 유전자'의 가장 일반적인 특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다. 
그리고 '이기성'이 그 하나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성공한 유전자가 가지는 또 하나의 일반적 
특성은 자기의 생존 기계의 죽음을  적어도 생식 활동 뒤로 미루는  경향이다. 확실한 것은 
당신의 사촌과 종조부 중에는 아이 적에 죽은 자가 있다고 해도 당신의 조상은 단 한  사람
도 아이 적에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젊어서 죽지 않은 자야말로 조상이다.
  자신을 지니고 있는 개체를 죽게 하는 유전자를 '치사 유전자'라고 한다. 반치사 유전자는 
어느 정도 개체를 쇠약하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고, 다른 원인에  의해서 죽을 가능성을 
높인다. 어떤 유전자도 생애의 한  특정 단계에서 몸에 최대의 효과를  나타내나  이점에서 
치사 유전자와 반치사 유전자도 예외는 아니다. 대부분의 유전자는  태아기에 그 영향을 나
타내나 어떤 유전자는 유아기에, 어떤 유전자는 청년기에, 어떤 것은 중년기에, 그리고 어떤 
것은 노년기에도 계속 영향을 끼친다(한 마리의 유충과 그것이 변태한  나비는 똑같은 유전
자 세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분명히 치사 유전자는 유전자 풀로부
터 제거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후기에 작용하는 유전자는 적어도 개체가 생식 활동을 할 
때까지 그 치사 효과를 나타내지 않는다면 유전자 풀 속에서 지금도 번창할 것이다. 이를테
면 늙은 몸에 암을 유발시키는 유전자는 암의 발현 전에 개체가 번식하기 때문에 다수의 자
손에게 전해진다. 한편 젊은 성인에게 암을 일으키는 유전자는  벼로 많은 자손에게 전해지
지 않으며, 어린아이에게 치명적인  암을 일으키는 유전자는 자손에게  전혀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노쇠는 후기에 작용하는 치사  유전자와 반치사 유전자가 유전자 
풀에 축적되는 현상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이들 치사 및 반치사 유전자는 단지 후기에 작용
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연 선택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게 허락되어 온 것이다.
  메다워 자신이 강조하고 있는 점은 선택이 다른 치사 유전자의 작용을 늦춰 주는 효과를 
가진 유전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좋은 유전자의 효과를 빠르게 하는 효과를 가진 유전자
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진화의 많은 부분의 유전자  활동의 개시 시기를 유전적
으로 조절하여 변화시키므로써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
  이 이론에서는 번식이 어떤 연령일 때에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 주의하길 바란다. 모든 개체가 연령에 상관없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첫째 가
정으로 해도 메다워 이론은 후기에 작용하는 유해한 유전자가 유전자 풀 내에 축적되는 것
을 즉시 예언한다. 그리고 그  다음 과정으로서 노년이 되면 번식하기  어렵게 되는 경향이 
생긴다는 것은 틀림없다.
        인간의 수명
  의미는 좀 다르나 이 이론의 좋은 점의 하나는 이것으로부터 퍽 재미있는 추찰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고 싶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한 방
법이 두 가지 있다는 것이다. 그 하나는 어떤 연령, 예컨대 40세 이전에는 번식을  금지하는 
것이다. 그 수백 년 후에는 최저 연령 한계를 50세로 올리고 그 후에도 조금씩 올려간다. 이 
방법으로 인간의 수명은 수백 세까지 연장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누구도 이와 같은 방법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싶어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두 번째는 유전자를 '속여서'품고 있는 몸이 실제의 연령보다 젊도록 생각하게 하는  것이
다. 실제로 이것을 행하려면 나이가 들어가는 사이에 일어나는 몸 속의 화학 환경의 변화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들 변화의 어떤 것이 후기에 작용하는 치사 유전자의 '스위치
를 켜는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면 젊은 몸의 표면적인 화학 특성을 흉내내는 것으
로 인해 후기에 작용하는 유해한 유전자의 'switch on'을 막을 수가 있는 것은 아닐까. 흥미
롭게도 노화의 화학신호는 통상의 어떤 의미로도 그 자체가 유해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물
질 S는 젊은 개체보다 늙은 개체의 몸에 많이  농축되어 있다고 하자. S는 그 자체로는 전
혀 무해하며 먹이에 함유되어 있던 것이 나이를 먹음에 따라 점점 몸에 농축된 것일지도 모
른다. 그러나 종종 S의 존재하에서는  유해한 효과를 끼치는데 그렇지 않으면  좋은 효과를 
끼치는 유전자가 유전자 풀에서 자동적으로 확실히 선택되어 남아 있고, 그것이 사실상  '노
쇠사의 유전자'라는 것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 경우 그 치료법은 몸에서 S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 생각의 혁명적인 점은 S자체가 노령의  '표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S의 대량  축적이 
죽음에 이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에 주목한 의사는 아마도 S를 일종의 독으로 생각하고 S와 
몸의 기능 부전과의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 관계를 발견하려고  고심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말한 가설과 같이 되어 있다면 그는 시간을 낭비할 뿐이다.
  늙은 몸보다 젊은 몸에 많이 저장되어 있다는 의미로 젊음의 '표시'인 물질 Y가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역시 Y의 존재하에서는 좋은 효과가 있는데 Y가  없을 때에는 유해한 유
전자가 선택될지도 모른다. S와 Y -이와 같은 물질은 만이 있을 수  있다- 가 무엇인지 모
르더라도 단순히  늙은 몸으로 젊은 몸의  특성을 (그들의 특성이 아무리 표면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흉내낼 수가 있으면 그만큼 늙은  몸은 장수한다라고 하는 일반적인  예언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은 메다워 이론에 기초한, 완전히 추측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메다
워 이론이 논리적으로 어떤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는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노쇠의 어떤 실례에 대한 옳은 설명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의 중요성은 유전자 선
택 진화설이 개체가 늙어서 죽는 경향을 용이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 논
의의 중심인 개체가 죽어야 한다는 가정은 이 이론의 체계 내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내가 말한 다른 가정, 즉 유성  생식과 교창의 존재라는 가정은 증명하기가 더욱  어렵다. 
교차는 필히 일어나지 않아도 좋다.  초파리 수놈에게서는 교차가 일어나지 않는다.  암놈도 
교차를 억제하는 유전자가 있다. 만약 이 유전자가 널리 퍼져 있는 파리의 개체군을 사육하
려고 하면 유전자 풀이 아닌 '염색체  풀'내의 염색체가 자연 선택의 초소기본 단위로  됨은 
틀림없다. 사실 우리의 정의의 논리적 결론에  따르면 한 개의 염색체 전체를 하나의  '유전
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성 구별의 이로움
  한편, 유성 생식에 대신하는 것도 존재한다. 초록진드기의 암놈은 부친이 없는 살아  있는 
암놈새끼를 낳을 수 있으며 그 암놈들은 모두 모친의 유전자를  깡그리 이어받고 있다(때로
는 모친의 '자궁'내의 배가 그 자궁 내의 더 작은 배를 기르고  있는 수가 있다. 이 경우 진
드기의 암놈은 딸과 손녀딸을 한꺼번에 낳는 꼴이  되어 깔과 손녀는 둘 다 모친의 일란성 
쌍생아에 상당한다). 많은 식물은 흡착근을 뻗어서 무성적으로 번식한다.  이럴 경우에는 번
식이라기보다 '생장'이라고 하고 싶으나 생각해 보면 생장과 무성 생식은 단순히 체세포  분
열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어쨌든  이 양자간에는 거의 구별이 없다.  때로는 무성 생식에 
의해 번식한 식물이 '부모'로부터 떨어지는 일도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  예컨대 느릅나무
에 있어서는 흡착근이 그대로 남아  이어져 있다. 실제로 느릅나무 사밈  전체를 한 개체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초록진드기와 느릅나무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데 우리는 왜 아이
를 만들 때까지 자기의 유전자와 다른 누군가의 유전자를 겄어 붙여야 하는 귀찮은 짓을 하
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런 방법이 생기는 것은 기묘한 것처럼 생각된다. 단순 명쾌한 무성 
생식대신에 성이라는 어쩌면 기묘하고 번거로운 방식을 취하게 된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
까? 성의 장점은 무엇일까?
  이것은 진화론자가 답하기에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다. 이 의문에  대해 신중한 답을 시도
한다면 대개 복잡한 수학적 추리가 따라야 한다. 그러나 나는 다음 한 가지 이야기만  하고, 
복잡한 수학적 추리는 솔직하게 피하려고  한다. 그것은 이론가가 성의  진화를 설명하려고 
하다 부딪치는 어려움의 일부는 그들이 관습적으로  개체란 살아 남는 유전자 수를  최대로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기인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 방식에 
의하면 성은 역설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체가 자기의 유전자를 증식시키
기 위한 방법으로서는 '비능률적인'것이기  때문이다. 즉 각각의  새끼에는 개체의 유전자의 
단 50%만이 주어지며 다른  50%는 배우자로부터 공급되기 때문이다.  만약 진드기와 같이 
다만 무성 생식에 의해 자기의 정확한 사본인 새끼를 만드는 것이라면 모든 새끼의 몸을 토
해 차세대에게 자기의 유전자를 100% 전할 수가 있다.  이 뚜렷한 모순에서 일부의 이론가
들은 그룹 선택설로 빠져들었다. 성에 대한 그룹 수준의 이점은 비교적 생각하기 쉽기 때문
이다. 보드머(W.F.Bodmer)가 간결히 지적한 것처럼 성은  "다른 개체에서 따로따로 일어난 
유리한 돌연변이를 개체에 모으는 역할을 한다."
      유전자의 이기성
  그러나 이 역설도 이 책의 논의에 따라서 개체를 영원한 유전자의 잠깐 동안의 연합에 의
해 만들어진 생존 기계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역설 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경우 개체 
전체라는 관점에서의 "효율성'은 잘못 본 것 같다. 유성 생식 대 무성 생식은 푸른 눈 대 갈
색 눈과 똑같이 단일 유전자의 제어하에 있는 특성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유성 생식을 위한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 모두를 자기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조작한다. 교차의 유전자도 역시 
그렇게 한다. 다른 유전자 복제의 오차율을 조작하는 유전자(돌연변이 유전자)까지 있다. 정
의에 따르면 복제 과정의 실수는 복제되는 유전자에게는 명백히  불리하다. 그러나 만약 이 
일이 그것을 유발시킨 이기적인 돌연변이 유전자를 이롭게 한다면 그 돌연변이 유전자는 유
전자 풀 속에 분포를 넓힐 수가 있다. 같은 식으로  교차가 교차의 유전자를 이롭게 한다면 
이 때문에 교차의 존재가 충분히 설명된다. 무성 생식에 대립하는 유성 생식이 유성 생식의 
유전자를 유리하게 한다면 이것으로서 유성  생식의 존재는 충분히 설명된다.  그 유전자가 
개체의 나머지 유전자 모두에게 필요한가 아닌가의 여부는 별로  관계가 없다. 유전자의 이
기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결국에 가서 성은 그다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이렇다면 논의가 순환 논법이 될 우려가 있다. 성의 존재는 유전자를 선택의 단위로 생각
하는 일련의 논의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순환성을 피할  방법이 있다고 보나 이 책
은 이 문제를 추구하는 입장은 아니다. 성은 존재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작은 유전 단위, 즉 
유전자를 진화의 기본적인 독립한 인자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과 교
차가 있기 때문이다.
  유전자의 이기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기 시작할 때에 역설이 풀리 게 되는 것은 성뿐만
이 아니다. 예컨대 생물체의 DNA 총량은 그 생물체를 만드는 데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것 같다. DNA의 많은 부분이 단백질로 번역되지 않는다. 개개의 생물체의 관점에서 고찰해 
보면 이것은 역설적으로 생각된다. 만약 DNA의  '목적'이 몸을 만드는 과정을 지휘하는 것
이라면 그런 일을 하지 않는 DNA가 대량으로 발견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생물학자들은 
이 여분으로 생각되는 DNA가 어떤  유익한 일을 하고 있나를 생각해  내려고 머리를 쓰고 
있다. 그러나 유전자의 이기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모순은 업다. DNA의  진정한 '목적'은 
생존하는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여분의  DNA를 가장 단순하게 설명하려면 
그것을 기생자 또는 대체로 다른 DNA가 만든 생존 기계에 편승하고 있는 무해하고 무용한 
길손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어떤 사람들은 지화를 지나치게 유전자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결국 실제로 살거나 죽거나 하는 것은 유전자 전부를  가진 개체 바로 그것이다. 이 
점에 이견이 없는 것은 이장에서 충분히 기술한 탓이다. 경기에  이기로 지는 것은 보트 자
체인 것과 마찬가지로 살거나 죽거나 하는 것은 개체이고, 자연 선택이 직접 나타나는 것은 
항상 개체 수준이다. 그러나 개체의 죽음과 번식의 성공이 아무렇게나 생기는 것은 안기 때
문에 오랜 동안에 유전자 풀내의  유전자 빈도가 변한다는 결과를  초래한다. 조건부이기는 
하나 유전자 풀은 원시 수프가 옛날의 자기 복제자에 대해 하고 있던 것과 같은 역할을  현
대의 자기 복제자에 대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과 염색체의 교차에는 현대판 원시 수
프의 유동성을 유지시키는 효과가 있다. 성과 교차에 의해 유전자 풀은 잘 섞어지며 유전자
는 부분적으로 뒤섞여진다. 진화는 유전자 풀 속에서 어떤 유전자는 수를 늘리고, 어떤 유전
자는 수를 줄이는 과정이다. 이타적 행동 등과 같은 어떤  형질의 진화를 설명하려고 할 때
는 언제든지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좋다. "이 형질은 유전자 풀 속에
서 유전자의 빈도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때로는 유전자 용어가 다소 지루할 수가  있으므
로 간결히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비유를 쓰기로 한다. 비유에 대해서는 항상 의심을 품
어 오던 사람도 필요한 때에는 그것을 유전자 용어에 적용할 작정을 한다.
  유전자의 측면에서 보면 유전자 풀은 새로운  형태의 수프, 즉 생활을 하고 있는  곳이다. 
옛날과 달리 오늘날의 유전자는 죽을 운명에 있는 생존 기계를 하나하나 만들어 나가기 위
하여 유전자 풀로부터 계속 뽑아낸 동지들의 집단과 협력하여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
음 장에서는 생존 기계 자체에 주목하여 유전자가 어떤 의미로 그 행동을 제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눈을 돌려보자.

            제4장
          유전자 기계
        세포는 유전자의 화학 공장이다
  유전자의 수동적 피난처로서 생긴 생존  기계는 처음에는 경쟁자들과의 화학전과  우연한 
분자 충격의 피해로부터 몸을 지키는 벽을 유전자에게 제공하는  데 불과했다. 처음에 그들
은 수프 속에서 자유롭게 얻을 수  있는 유기 분자를 먹이로 하고 있었다.  이 편한 생활이 
끝난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활발한 햇빛의 영향 밑에서 수프 속에 형성된 유기적인 먹이가 
모두 다 사용되어 없어졌을 때였다. 오늘날 식물이라고 부리고 있는 생존 기계의 주요한 갈
래는 생존 기계 스스로가 직접 햇빛을 사용하여 단순한 분자로부터  복잡한 분자를 만들기 
시작하여 원시 수프의 합성 과정을 더 높은 속도로 재연했다. 동물이라고 불리는 또 하나의 
갈래는 식물을 먹든지 다른 동물을 먹든지 하여 식물의 화학적 작업을 가로채는 방법을 발
견했다. 생존 기계의 두 갈래는 다양한 생활 방법으로 자기의 효율을 높이려고 더욱 교묘한 
책략을 발달시켜 부단히 새로운 생활  방법을 개발해 갔다. 이 두  갈래에서는 그 곁갈래에 
또 곁갈래가 생겨 특수화된 생활 양식을 진화시켰다. 그들은 각각 바다에서, 지상에서, 공중
에서, 땅 속에서, 나무 위에서 나아가서는  다른 생물체 내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데만  힘써 
왔다. 이 가지 뻗기가 오늘날 우리를 감동시킬 정도로 동식물의 다양성을 생성하게 된 것이
다.
      개체는 세포의 군체
  동식물은 여러 가지 세포로 모든 유전자의  완전한 복사가 분배되어 있는 다세포  생물로 
진화해 왔다. 이와 같은 것이 언제, 왜 혹은 독립적으로 몇 번이나 생겼는가는 모른다. 어떤 
사람은 몸을 세포의 군체(colony; 집단)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나는 몸을 유전자
의 군체, 세포를 유전자의 화학 공장으로서 적합한 작용 단위라고 생각하고 싶다.
  몸은 유전자의 군체일지라도 행동 양상은  끊임없이 그 자체의 개체성을  획득하고 있다. 
하나의 동물은 통제된 전체로서, 즉 하나의 단위로서 행동한다. 주관적으로 인간은 자기  스
스로를 하나의 군체가 아닌 하나의 단위라고 느끼고 있다. 이것은 당연하다. 선택은 다른 유
전자와 협조하는 유전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적은 자원을 건 치열한 싸움에서는 공동체
적인 몸의 내부가 무통제적인 것보다 중추에 의해 싸움에서는 공동체적인 몸의 내부가 무통
제적인 것보다 중추에 의해 통합되어  있는 쪽이 유리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전자간의 
상호 공동 진화가 계속적으로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개개의 생존 기
계가 상호간의 공동체적인 성질을 갖는다는 점을 간하기 쉽다.  확실히 그것을 발견 못하는 
생물학자가 많고 그들은 나와는 의견을 달리한다.
  다행히 저널리스트들이 이 책의 나머지 부분 속에 있는 '신뢰성'에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대부분 의견의 불일치는 학술적인 것이다. 자동타의 성능을 논할  때 양자나 소립자에 관해 
말해 보았자 소용이 없듯이 생존 기계의 행동을 논할 때 유전자의 말을 끄집어내는 것은 지
루하고 불필요할 때가 많다. 사실 일반적으로 개체라는 것은  그 전체 유전자를 후세대에게 
보다 많이 전하려고 '애쓰는'것이다라고 생각해 두는 것이 많은 경우 편리하다. 나는 편하게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따라서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  이상 '이타적 행동'과 '이기적 행동'은 
동물의 어떤 개체가 별개의 개체에 대해서 행해지는 행동을 말한다.
      동물의 행동
  이 장에서는 '행동', 즉 동물이라고 불리는 생존 기계가  대체로 이용해 온 재빠르게 움직
이는 묘기에 대해 기술한다. 동물은 민첩하고 활발한 유전자의 운반자, 즉 유전자 기계가 되
었다. 생물학자가 쓰는 의미로 '행동'의 특징은 움직임이 빠르다는 것이다.  식물도 움직이는 
하나 매우 느리다. 고속도 영화로 보면 덩굴식물은 활동적인 동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부
분의 식물 운동은 사실상 비가역적인 생장이다. 한편 동물은 식물보다 수십만 배나 빨리 움
직이는 방법을 발달시키고 있다. 무엇보다도 동물의 운동은 가역적이고 무한히 반복할 수가 
있다.
  동물이 빠른 운동을 하기 위하여 진화시킨 기관은 근육이었다.  근육은 증기 기관이나 내
연 기관과 같이 화학 연료로 저장된  에너지를 사용해서 기계적 운동을 발생시키는  엔진이
다. 단지 차이점은 근육의 직접적인 기계적이 증기 기관이나  내연 기관의 경우처럼 증기압
이 아닌 긴장의 형태로 생긴다는 점이다. 그러나 근육은 가끔 끈이나 경첩이 붙은 지렛대에 
힘을 주는 점에서 엔진과 유사하다. 우리의  몸에서 지렛대는 뼈, 끈은 힘줄 그리고  경첩은 
관절이다. 근육의 움직임의 엄밀한 분자적 측면에 관해서는 대단히  많은 것을 알게 되었으
나, 나는 근육 수축의 시간적 조절 문제에 대해 더 흥미가 있다.
  당신은 어느 정도 복잡한 인공 기계, 예컨대 편물  기계, 재봉틀, 베틀, 자동 병공장, 건초 
묶음기 등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동력은 전동기나 트랙터로부터 공급된다. 그러나 더욱 이
상한 것은 조작 타이밍의 복잡성이다. 밸브가 올바른 순서로  개폐되고 강철 손가락이 재치 
있게 건초의 단을 묵고 칼이 나와서 그 끈을 자른다.  대개의 인공 기계에서는 굉장한 발명
품인 캠(cam)에 의해 시간적 조절이 행해지고 있다. 이것은 편심륜 또는  특수한 형의 바퀴
에 의해 단순한 회전 운동을 복잡하고 리드미컬한 패턴의  조작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뮤
직박스에서도 같은 원리가 사용되고 있다. 그 밖에 증기 기관이나 자동 피아노와 같은 기계
에서는 어떤 패턴의 구멍을 뚫은 카드나 두루마리 종이가 사용된다. 최근에는 이와 같은 단
순한 기계적 타이머가 전자 타이머로 대체되어 가는 경향이  있다. 디지털형 컴퓨터는 복잡
한 시간적 조절이 일어나는 운동 패턴을 발생시키는 데 사용되는 다재다능한 대형 전자 장
치의 예이다. 컴퓨터와 같은 근대적 전자  기기의 기본적 구성 요소는 반도체이다. 그  중에 
낯익은 것으로 트랜지스터가 있다.
        뉴런과 컴퓨터
  생존 기계는 캠과 펀치 카드 등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행동의 
시간적 조절에 쓰고 있는 장치는 컴퓨터와  공통점이 많다고는 하나 기본적인 조작은  전혀 
다르다. 생물 컴퓨터와 공통점이 많다고는 하나 기본적인 조작은 전혀 다르다. 생물  컴퓨터
의 기본 단위인 신경 세포, 즉 뉴런은 그 내부 작용이 트랜지스터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확실히 뉴런에서 뉴런으로 전해지는 신호는  디지철형 컴퓨터의 펄스(pulse) 신호와 조금은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개의 뉴런은 트랜지스터에 비해 정교한 데이터 처리 단위이다. 
세 개의 다른 부품과 연결되는 트랜지스터에  비해 하나의 뉴런에는 다른 성분과의  연결이 
수십만에 이른다. 뉴런은 트랜지스터보다 정보 처리의 속도는 느리나  과거 20년간 전자 산
업계가 추구해 온 소형화라는 점에서는 많이 앞서 있다. 이것은 인간의 뇌에는 수십억 개의 
뉴런이 있는데 하나의 두개골에는 겨우 수백  개의 트랜지스터밖에 넣을 수 없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식물은 움직여 다니지 않고도 생활하기 때문에 뉴런을 필요로 하지 않으나 대부분의 동물 
집단에서는 뉴런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동물의 진화에서 일찍이  '발견'되어 모든 집단에게 
계승되거나 또는 독립적으로 몇 번인가 재발견됐을 것이다.
      뉴런은 세포이다
  뉴런은 기본적으로 그 자체가 세포이고, 다른 세포와 같이 핵과 염색체를 가지로  이TEk. 
그러나 그것들의 세포막은 가늘고 길며 철사 모양의 돌기를 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하나
의 뉴런에는 축삭 돌기라는 특별히 긴 '철사'가 한 가닥 있다. 축삭 돌기의 폭은 현미경적인 
것이나 길이는 수미터에 달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한 가닥의 길이가  기린의 목의 전체 
길이에 이를 정도로 긴 축삭 돌기도 있다. 축삭 돌기는 보통 다발로 되어 있어 많은 섬유로 
된 굵은 케이블을 형성한다. 이것이 신경이다. 신경은 몸의 어떤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마
치 전화 케이블 간선처럼 메시지를 운반한다.  어떤 뉴런은 축삭 돌기가 짧고, 신경절  또는 
더 큰 경우에는 뇌라고 하는 밀집된 신경 조직의 집합 속에 수용되어 있다. 뇌는 기능상 컴
퓨터와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어느  것이나 복잡한 입력 패턴을 분석
하여 저장되어 있는 정보와 조회하고 나서 복잡한 출력 패턴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유사하
다.
      뇌-근수축의 제어와 조정
  뇌가 생존 기계의 성공에 실제로 공헌하는 방법으로서 중요한 것은 근수축의 제어와 조정
이다. 뇌가 이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근육으로 통하는 케이블이 필요하다. 그것이 운동  신경
이다. 그러나 근수축의 제어와 조정이  유전자의 효과적인 보존에 이어지는  것은 근수축의 
타이밍이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타이밍과 어떤 관계가 있을 때뿐이다. 깨물 것이 입 속
에 있을 때만 턱 근육을 수축시키고, 뛰어 쫓아야 할 이유도 그 대상이나 뛰어 도망해야 할 
이유가 존재할 때에만 다리의 근육을 주행시의 패턴으로 수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때문
에 자연 선택은 감각 기관, 즉 외계의 물리적 사건의 패턴을 뉴런의 펄스 신호로 바꾸는 장
치를 갖추도록 되어 있어 동물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뇌는  감각 신경이라는 신경삭에 의
해 감각 기관-눈, 귀, 맛봉오리-등에  이어져 있다. 감각계의 작용이 매우  난해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들이 가장 고가인 최량의 인공 기계에 비교해서도 훨씬 복잡한 패턴 인식을 행하
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타이피스트는 전원 필요 없게 되어 말을 인지하는 기계와 
손으로 쓴 문자를 읽는 기계로 교체되어 있을 것이다. 타이피스트는 앞으로도 수십 년은 필
요로 할 것이다.
  진화 중에 감각 기관이 뇌를 거치지 않고 근육과 연결되어 있던 시기가 있었다. 말미잘은 
현재도 이 상태에서 별로  진화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의  생활 양식에서는 그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근수축의 타이밍 사이에서 더욱 복
잡하고 간접적인 관계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매개물로서 어떤 종류의 뇌가 필요했다. 굉장
한 진보는 기억이라는 진화적 '발명'이었다. 이 장치에 의해 근수축의 타이밍은 직전의 과거
의 사건만 아니라 먼 과거의 사건의 영향도 받게 될 수 있었다. 디지털 컴퓨터에서도  기억, 
즉 메모리가 그 본질적인 주요 부분이다. 컴퓨터의 기억은  인간의 기억보다 확실하지만 그 
용량은 작고 정보 수정의 기술은 많이 떨어진다.
  생존 기계의 행동에서 가장 뚜렷한  특성의 하나는 합목적성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동물의 유전자의 생존에 필요하도록 잘 계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기는 싫다. 물
론 그럼에는 틀림없으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의도적인 행동에 잘 닮아 있다는 
것이다. 동물이 먹이를 '찾거나'배우자를 찾거나, 또는 잃은 새끼를 찾고 있는 것을  보면 우
리들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을 때 경험하는 어떤 종류의 주관적 감정을 그 동물이 가지고 있
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감정에는 어떤 것에 대한 '욕망',  바라는 것을 '머리에 그리는 
상' 또는 '목적' 내지 '설계도'가 포함되어 있다. 누구나 자신을 돌이켜보면 알 수  있는 것처
럼 우리는 적어도 현대의 생존 기계에서는 이 합목적성이 '의식'이라는 특성을 발달시켰음을 
알고 있다. 나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논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철학자는 아니
지만, 다행히도 목적에 따라 동기가 주어지는 것과 같이 행동하는 생존 기계의 일을 말하는 
것은 쉽고 생존 기계가 실제로 의식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미해결 상태로 남길 수도 있으
므로 우리의 현재 목적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이들 생존 기계는 기본적으로 극히 단순하
여 무의식의 합목적적 행동의 원리는  공학의 어디에나 흔히 널려 있다.  이 고전적인 예는 
와트(James Watt)의 증기 기관의 조속기이다.
      피드백
  이것에 포함되는 기본 원리는 음(-)의 '피드백(feedback)'이라는 것으로 이에는 여러 가지
의 형태가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목적  기계', 즉 의식적 목적을 가지고 있
는 양 행동하는 기계 내지 물건은 사물의 현재 상태와 '바랐던' 상태와의 차이를 재는  일종
의 측정 장치를 가지고 있다. 이 차이가 클수록 기계는  더 열심히 돌아가도록 만들어져 있
다. 이렇게 해서 기계는 자동적으로 차이를 줄이려고 한다. 이것이 음의 피드백이라고  불리
는 이유이다. 그리고 '바랐던'상태에 도달하면 기계는 멈춘다. 와트의 조속기는  증기 기관의 
힘으로 도는 한 쌍의 볼(ball)로 되어 있다. 볼은  각각 돌쩌귀가 붙은 암(arm)의 끝에 붙어 
있다. 볼이 빨리 돌수록 원심력이  강하게 작용하여 암을 수평 위치로  밀어 올리는데 이에 
반하여 중력이 작용하고 있다. 이 암은  엔진에 증기를 보내는 밸브에 연결되어 있고,  암이 
수평 위치에 접근하면 증기의 공급이 감소하도록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엔진이 지나치게 빨
라지면 공급되는 증기의 양이 줄고, 엔진은 느려지게 된다. 엔진이 너무 느리면 밸브에 의해 
보다 많은 양의 증기가 엔진으로 자동적으로 보내져 엔진은 다시 속도를 되찾는다. 이와 같
은 목적 기계는 종종 도가 지나치거나 시간이 지연되는 것  때문에 진동을 일으킨다. 이 진
동을 억제하는 부속 장치를 조립하는 것이 기술자에게 요구되는 솜씨이다.
  와타가 조속기에 대해 '바랐던' 상태는  하나의 일정한 회전 속도이다.  분명히 이 기계는 
의식적으로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계의 '목표'란 단순히 기계가 도달해야 하는 
상태라고 정의된다. 현대의 목적 기계는 더욱 복잡한 '살아  있는 것과도 같은' 행동을 달성
하기 위해 음의 피드백과 같은 기본 원리를 확대하여 이용하고 있다. 예컨대 유도 미사일은 
얼핏 적극적으로 목표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사정 거리 내의 표적을 발견하면 
표적이 도망치려고 지그재그로 가거나 방향을 바꾸는 것 등을  계산하여 때로는 그것을 '예
측'까지 하여 추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것이 행해지는 방법의 상세한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 거기에는 여러 종류의 음의 피드백, 실행 전에 결함을 예기하고 행하는 피드백 
과정의 제어(feed-forward), 그리고 기술자에게는 잘 이해되어 있고 현재로는 생물체의 활동
에 널리 포함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는 기타의 원리가 포함되어 있다. 원격 조정하는 식으로 
외부에서 전달되는 의식은 전혀 없다. 가령 문외한이 그  신중하고 의도적으로 보이는 행동
을 보고 미사일이 인간 조종사에 의해 직접 조정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해
도 말이다.
      컴퓨터 장기
  유도 미사일과 같은 기계는 본래 의식  있는 인간의 손으로 설계되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서 마치 의식 있는 인간에 의해 직접 조정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흔히 있는  잘
못이다. 이와 같은 오해의 또 하나의 예는 "컴퓨터는 기사가 명한 것밖에 못하기 때문에 컴
퓨터는 진정한 의미로 장기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왜 오해인
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유전자가 행동을 '제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의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컴퓨터 장기는 이 점을 설명하는 데  매우 좋은 예이므로 간단히 다
루어 보기로 하자.
  컴퓨터는 아직 명인과 상대할 정도로 장기의 명수는 못되나 잘 두는 아마추어의 실력 정
도는 될 것이다. 대개 아마추어의 상수 실력 정도는 된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마추어의 
상수 수준에 달하고 있는 것은 프로그램 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프로그램은 장
기를 두는 데 어떤 컴퓨터를 이용하든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프로그램 작성자의 역
할은 무엇일까? 첫째로 분명히 그는 인형을 실로 조작하는 인형사처럼 계속 컴퓨터를 조작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컴퓨터가 장기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프로
그램을 짜서 컴퓨터에 넣는다. 이때부터 컴퓨터는 독립한다. 즉, 자기의 수를 컴퓨터에 입력
시키는 대전자를 제외하면 인간의 개입은 더 이상 필요  없다. 프로그램 작성자는 가능성이 
있는 말의 위치를 모두 예측하고 만약 일어날지도 모르는 각각의 말의 위치에 대한 솜씨를 
기다란 리스트로 하여 컴퓨터에 입력시켜 주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거의 틀림없다. 
장기에서 가능성이 있는 말의 위치는 너무 많아서 그것을 전부 다 써 넣기도 전에 이  세상
이 끝나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필승의 작전이 발견될  때까지 가능성이 있는 
모든 수와 가능성이 있는 모든 수 읽기를 헛되게 시험토록 컴퓨터의 프로그램을 짤 수는 없
다. 가능한 장기 게임은 은하계의 원자 수보다도 많다. 그래서 컴퓨터가 장기를 두도록 프로
그램을 짜는 것에 관한 상세한 미해결 문제에 이 이상  깊이 개입하는 것을 그만하자. 사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며, 가장 잘 된 프로그램일지라도 아직 명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프로그램 작성자의 역할은 오히려 아들에게 장기를 가르치는 아버지의 역에 가깝다. 그는 
컴퓨터에게 개별적으로 가능한 수 모두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경제적으로 나타낸 규
칙에 따라 게임의 기본적인 수를 가르킨다. 그는 그라 뜻 그대로 알기 쉽게 "비숍은 대각선
으로 움직인다"라고 하지 않고 수학적인 언어로 다음과 같이(단, 더 간단히)말한다. "비숍의 
새운 좌표는 본 X 좌표와 본 Y좌표의 양방에  동일 정수(단, 부호는 필히 동일하지 않아도 
좋다)를 더 함으로써 얻어진다." 그리고 그는 같은 종류의 수학적 또는 논리적인 말로 쓰여
진 어떤 '충고'를 프로그램에 짜 넣는다. 보통 우리말로  하면 "왕은 무방비 상태로 두지 말
라."라고 하는 힌트나 기사에 의한 '겹장'과  같은 유효한 책략이 그것이다. 이  상세한 것은 
흥미를 끌게 하나 너무 개입하면 옆 길로 너무 빠져들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다. 컴
퓨터가 실제로 승부를 할 때 그것은 이미 독립하고 있고 명수의 도움은 필요없다. 프로그램 
작성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미리 특수한 지식의 리스트와 전략과 기술에 대한 힌트 간에  균
형이 맞게 짜 넣어서 컴퓨터의 상태를 가급적 좋게 하는 것이다.
      유전자-생존 기계 행동 제어 
  유전자는 또한 직접 스스로 인형을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의 프로그램  작성자처럼 
간접적으로 자기의 생존 기계의 행동을 제어하고 있다. 그것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미리 생
존 기계의 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그 후에는 생존 기계가 독립하기  시작하여 유전자는 그 
속에서 그저 점잖게 앉아 있게 된다. 그것들은 왜 그렇게 수동적이 될까? 왜 부단히 고삐를 
잡고 지시를 척척 하지 않을까? 시간적 지연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 그 해답이다. 이 사실은 
공상 과학 소설(SF)에서 끄집어낸 다른 예를 들면 잘 알 수 있다. 호일(Fred Hoyle)과 엘리
엣(John Elliot)의 저서 (안드로메다의 A)는 마음  설레는 책이다. 그리고 우수한 공상 과학 
소설이 다 그렇듯이 그 배경에는 흥미 깊은 과학적인 문제점이  어느 정도 들어 있다. 묘하
게도 이 책은 이들 기초가 되는 문제의 가장 중요한 점에 대해 뚜렷한 서술이 부족한  것처
럼 보인다. 그것은 독자의 상상에 맡기고 있다. 내가 여기서 그것을 똑똑히 설명했다고 하더
라도 저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200광년이나 멀리 있는 안드로메다좌에 어떤 문명 세계가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문화
를 먼 외계에까지 전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직접 여행 따위
는 논외이다. 광속은 우주의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할  수 있는 속도의 이론적인 상
한선이다. 거기에다 기계 공학적 문제를 생각하면 사실상의 한계는 광속보다 훨씬 더  낮다. 
또한 외계 전체가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
무선 전파는 우주의 다른 장소와 교신하는 좋은 수단이다.  모든 방향으로 신호를 발송하는 
힘이 있으면 아주 많은 세계(그 수는 신호가 가는 거리의  제곱에 비례하여 증가한다)에 도
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선 전파가 광속으로 가더라도  그 신호가 안드로메다로부터 지구
까지 오는 데는 200년이 걸린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거리로 말미암아 결코 통화가 성립되
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구로부터 송출된 메시지가 각기 12대를  지난 사람들에 의해 전달된
다는 사실을 아무리 생각해도 이와 같은 거리에서 서로 말을 교환한다는 시도는 분명히 헛
된 일이다.
  이 문제는 곧 우리에게도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무선 전파가 지구와 화성 사이를 오가는 
데는 약 4 분이 걸린다. 우주 비행사는 짧은 문장으로 말을 교환하는 습관을 버리고 통화라
기보다 편지와도 같은 긴 혼잣말을 쓰지 않으면 안되게 될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페
인(Roger payne)이 지적한 대로 바다는 어떤 독특한 음향 특성을 갖추고 있다. 일정한 깊이
에서 헤엄치고 있는 혹고래들의 엄청나게 큰 소리의 노래는 이론상 세계의 모든 곳에서 들
려야 할 것이다. 그것들이 실제로 매우 먼 곳에 있는  친구와 교신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그렇다면 그것들은 아마도 화성에 있는 우주 비행사와 같은 곤란에 직면하
고 있음에 틀림없다. 수중의 음속으로 하면 그 노래가  대서양을 횡단하여 회답이 오기까지
는 약 2시간이 걸린다. 나는 고래들이 서로 말을 교환하지  않고 8분간이나 계속 독백을 하
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들은 그 후 노래의 처음으로 돌아와 또다시 그 노
래 전부를 되풀이하여, 매번 약 8분씩 완전한 사이클을 몇 번이고 되풀이한다.
  이야기 속의 안드로메다 사람도 같은 일을 했다. 회답을 기다려 봤자 별다른 수가 없으므
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모두 모아 멀리멀리 이어지는 방대하고 끊기지 않은 메시지를 담아 
수개월을 한 사이클로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우주로 계속해서  발사했다. 그러나 그들의 메
시지는 고래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거대한 컴퓨터의  건설과 프로그램 작성에 관
한 암호화된 지령이었다. 몰론 그 암호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숙련된 암호 
해독자의 손에 걸리면 거의 어떤 암호라도 해독되고 마는 것이다. 특히 암호 작성자가 일부
러 간단히 풀 수 있도록 만든 경우는 그렇다. 조드렐 뱅크(Jodrell  Bank) 전파 망원경에 걸
린 이 메시지는 실제로 해독되어  컴퓨터가 조립되고 프로그램이 작동됐다.  결과는 인간의 
파멸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안드로메다 사람의 의도는 당연히 이타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
이다. 이 컴퓨터는 세계를 장악하여 독재 정치를 수행하다가 결국 영웅의 도끼에 의해 파괴
된다.
  우리의 관점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안드로메다 사람이 지구상에서 생긴 일을 조작하고 있
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인가라는 문제이다. 그들은 컴퓨터가 척척 해내는 것
을 직접 제어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들은 컴퓨터가 만들어진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 정
보가 그들에게 미치려면 200년이나 걸리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주인에게서 일반적인 방침의 
지시를 받는 것까지도 불가능했다. 넘을 수 없는 200년이란 벽 때문에 그 지령은 모두 미리 
짜여져 있어야 한다. 원칙적으로 그것은 장기를 두는 컴퓨터의 경우와 똑같이 프로그램되어 
있었을 것이나 국부적인 정보의 흡수에 관한 능력과 융통성은 훨씬 컸을 것이다. 이것은 그 
프로그램이 지구상만 아니고 진보된 기술을 가졌다면 어떤 세계에서도, 즉 안드로메다 사람
이 상세한 상태를 알고 있지도 않은 어떤 세계에서도 통용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유전자는 예언한다
  안드로메다 사람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나날의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지구상에 컴퓨터
가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의 유전자도 뇌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됐다. 그러나 유전자는 암호화
된 지령을 보낸 안드로메다 사람에 상당할 뿐만 아니라 그 지령 자체이기도 하다. 우리들이 
조작 인형을 실로 조작할 수 있는 것처럼 유전자가 우리를 직접 조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마
찬가지로 시간 지연 때문이다.  유전자는 단백질 합성을 제어하는 데 작용한다. 이것은 세계
를 조정하는 강력한 방법인데 그 속도는 매우 느리다. 배(embryo)를 만드는 데 는  몇 개월 
동안 인내 있게 단백질 합성의 실을 조작해야만 한다. 반면에 행동의 특징은 빠르다는 것이
다. 그것은 수개월이라는 시간 단위가 아닌 몇 초 또는 몇  분의 1초라는 시간 단위로 작용
한다. 이 세상에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부엉이가 머리 위를 휙  지나가고 키 큰 풀숲이 부시
럭거리며 포획물이 있는 곳을 알려서 1/1000초 단위로 신경계가 팔딱 흥분하여 근육이 떨리
고 누군가의 생명이 구해지기도 하고  또는 잃기도 한다. 유전자는 이와  같은 반응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 유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안드로메다  사람처럼 자기의 이익을 위해 컴
퓨터를 조립하여 '예측'할 수 있는 한 불의의 사건에 대처하기 위한 규칙과  '충고'를 사전에 
프로그램하여 미리 최선의 대책을 강구해 두는 것뿐이다. 그러나  장기 게임이 그렇듯이 생
물은 너무도 많은 경우의 사건에 부딪히게 될 가능성이 있어 도저히 그 모두를 예측할 수는 
없다. 장기의 프로그램 작성자의 경우처럼 유전자는 스스로의 생존 기계에 생존술의 각론이 
아니라 살기 위한 일반 전략이나 일반적 비결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안 된다.
  연(J.Z. Young)이 지적하였듯이 유전자는 예언과 비슷한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
존 기계의 배가 만들어질 때, 그 배에게 닥칠 생명 위험이나 문제는 미래의 일이다.  어떠한 
맹수가 어떤 숲속에 숨어 있는가, 어떤 발빠른 포획물이  눈앞에 튀어나와 지그재그로 도망
치거나 하는 것은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예언자도, 어떤 유전자도 말할 수 없다.  그
러나 어느 정도 예측은 할 수 있다. 북극곰의 유전자는 곧 생겨날 생존 기계의 미래가 춥다
는 것을 틀림없이 예측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유전자가 생각하고 예언하는 것은 아니다. 전
혀 생각조차도 못한다. 그것들은 그저 묵묵히 두터운 모피를 만든다. 이것은 그것들이  이전
의 몸으로 항상 해 온 것이고 그것들이 또 유전자 풀 속에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
것들은 또 지면에 눈이 올 것을 예언하고 그 예언은  모피를 백색으로 위장한다. 북극의 기
후가 급변하여 아기곰이 열대의 사막에서 태어나든디  하면 그 예언은 빗나가 그들은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아기곰은 죽고 그 속의 유전자도 망하고 말 것이다.
      프로그래머 유전자
  복잡한 세계를 예언하는 것은 불확실한 일을 동반하는 것이다. 생존기계가 내리는 결정은 
모두 도박이다. 그리고 평균하여 잘 되는 결정을 내리도록 뇌를 미리 프로그램해 놓은 것이 
유전자의 일이다. 진화의 카지노에서 쓰이는 통화는 생존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유전자
의 생존인데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개체의 생존을 그 타당한 비슷한 일로 보아도 좋다. 만
약 물을 마시러 물가로 내려 간다면 물가에 접근하는 포획물을 숨어서 기다리는 포식자에게 
먹힐 위험이 많다. 물가로 가지 않는다면 결국은 목이 마라 죽을 것이다. 어느쪽을 택하든지 
위험은 있으며 자기의 유전자가 살아 남는 기회를 긴 안목으로 보아 최대로 하도록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아마도 최선의 수단은 목마름을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다가 정 못 참을 지
경일 때 내려가서 오랫동안 견딜 수 있도록 물을 잔뜩  마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물가에 
가는 횟수를 줄일 수가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최종적으로  물을 마실 때에 오랫동안 머
리를 숙이고 있어야 한다. 이에 대신하는 가장 좋은 요령은 조금씩 마시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가 옆을 뛰어가는 도중에 황급히 조금씩 마신다. 작전 요령으로서 어떤 것이 가장 좋은지
는 여러 가지의 복잡한 사정에 따른다. 가령 포식자의 수렵 습성들이 그것인데, 이것들은 각
각의 포식자의 입장에서 최대의 효과를 올리도록 진화하고 있다.  안정성의 성공 여부에 관
해서는 무엇인가 평가를 내려야 한다고는 하나, 물론 동물이 의식적으로 계산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유전자가 가급적 개체로 하여금 도박을 할 수 있도록 뇌를 만들어 준 그 개체
는 당연히 보다 잘 살아 남고, 따라서 그 같은 유전자를 늘려갈 석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유전자는 도박꾼이다
  도박의 비유를 좀더 써 보기로 하자. 도박꾼은 주로 거는  돈과 승산과 상금이라는 세 가
지 요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상금이 크면 기꺼이 큰 돈을 걸 것이다. 일확천금을 노리
는 도박꾼은 큰 돈을 모을지도 모른다. 또는 큰 손실을 볼지도 모른다. 평균적으론 큰  돈을 
거는 도박꾼은 적은 돈을 걸어서 적은 상금을 노리는 승부사와 비교하여 벌이가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 마찬가지로 주식  시장에서 투기적인 투자가와 착실한  투자가의 경우에도 
그렇다. 어떤 점에서 주식 시장의 예는 카지노의 예보다 더 많이 닮았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카지노는 주인에게 유리하도록 미리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돈을 
많이 건 승부사는 조금 건 승부사보다 할당이 나쁘고 조금 건 사람도 전혀 안 건  사람보다
는 재미 볼 확률이 나쁘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논의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 이것을 무시
하면 건 돈이 큰 도박이건 돈이 적은 도박이건 둘 다 이치에 맞는 것처럼 생각된다. 동물에
도 큰 판돈이 적은 도박이건 둘 다 이치에 맞는 것처럼 생각된다. 동물에도 큰 판돈을 거는 
도박꾼이나 작은 판돈을 거는 도박꾼이 있을까? 제 9장에서 보게 되듯이 수놈은 큰 돈을 건 
모험적인 큰 도박꾼이고, 암놈은 착실한 투자가로 봐 줄 수가 있다. 여러 수놈이 암놈을  놓
고 싸우는 일부 다처형의 종류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박물학자는 판돈도 
크고 위험도 큰 승부사로 볼 수 있는 종과 더 작은 승부를  거는 종이 생각날 것이다. 그렇
다면 여기서 유전자가 어떻게 미래를 '예측'하는가 하는 보다 일반적인 테마로 이야기를  돌
려 보자.
      시행 착오
  다소 예측 불가능한 환경에서 예측해야만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전자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는 학습 능력을 짜 넣는 것이다. 이  경우 프로그램은 생존 기계에게 다음
과 같은 지령을 행할 것이다. "여기에 보수가 되는 사물의 리스트가 있다. 즉, 달콤한 것, 오
르가슴, 따스한 기후, 방실거리는 아이, 그리고 싫은 사물의 리스트가 있다. 즉, 여러 가지의 
고통, 토할 기분, 공복, 울고 있는 아이이다. 만약 무엇인가를 하고 그 후에 싫은  것이 생기
면 또다시 그것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좋은 일이 생기면 그것을 반복하는  것이 좋다." 
이와 같은 프로그램의 이점은 최초의 프로그램에 짜 넣어야만 될 자세한 규칙의 수를 대폭 
줄일 수 있다는 것과 자세히 예측 못한 환경의 변화에 대처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다른 한
편으로 어떤 예측들은 여전히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서 유전자는  사탕의 섭취나 교미가 유
전자의 생존에 적합하다는 의미로 입속의 단맛이나 오르가슴은 '좋은 것'이어야 된다라고 예
측하고 있다. 이 예를 따르면 사카린과 수음의 가능성은 예측되지 않으며, 사탕이  부자연스
럽게 과다한 오늘날의 환경하에서 사탕의 과다도 예측되지 않고 있다.
  장기를 두는 컴퓨터의 프로그램 속에도 학습 전략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있다. 이와 같은 
프로그램은 인간이나 다른 컴퓨터를 상대로 승부하는 데 따라  실제로 장기가 숙달된다. 그
것은 규칙과 전술의 레퍼토리를 갖추고 있는데 결정의 수순에는 다소 거칠은 경향도 짜 넣
어져 있다. 이와 같은 컴퓨터는 과거의 결정을 기록해 가며  승부에 이길 때마다 승리로 이
어지는 전술에 더 많은 비중이 놓여지게 되어 다음에 그 전술을 또다시 선택할 확률이 조금 
놓아지는 것이다.
        시뮬레이션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 중에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의 하나는 시물레이션(simulation:모의 실
험)이다. 한 장군이 어떤 작전 계획이 좋은가 하는 여부를 알고 싶을 때 그것을 예언하기는 
어렵다. 날씨도, 자기 부대의 사기에도, 적의 작전에도 미지의 요소가 있다. 그것이 좋은  계
획인지 어떤지를 아는 하나의 방법은 그것을 시험해 보는 것인데 '나라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한 젊은이가 얼마가 있든 한계가 있고 가능한 작전 계획이 매우 많은 것만 보아도 여러  모
양의 계획을 닥치는 대로 모두 시험해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목숨을 걸고 착실히 행
하는 것보다 모의적으로 여러 가지의 작전 계획을 시도해 보는 편이 좋다. 이것은 공포탄을 
써서 '북'과 '남'이 싸우는 대훈련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시간과 자재면에서 비경제적이
다. 덜 허비하려면 큰 지도상에서 인형 군대와 장난감 탱크를 가지고 전쟁놀이를 하면 좋다.
      컴퓨터와 시뮬레이션
  최근에는 군사 전략뿐만 아니라 경제학, 생태학, 사회학, 기타 미래의 예측을 필요로 하는 
모든 분야에서 컴퓨터가 대부분의 시뮬레이션을 맡아 보고 있다. 그 기술은 다음과 같이 작
용하고 있다. 세계의 한 측면을 컴퓨터로 꾸민다고 해도 이것은 컴퓨터의 뒷뚜껑을 열면 속
에 시뮬레이크된 것과 같은 형의 작은 모형이 보인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장기를 두는 컴
퓨터의 기억 장치 속에 기사나 졸이 놓인 장기판으로  보이는 '상상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장기판과 그 편재 위치는 전자적으로  기호화된 수치표로 표시되어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는 세계의 일부를 2차원으로 압축한 축소 모형이다. 컴퓨터가 필요로 하는 지도는 아마
도 거리와 다른 지점을 각각  위도와 경도라는 두 가지 수치로  표시한 도표임에 틀림없다. 
어떻든 간에 컴퓨터가 머리 속으로 세계의  모형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
다. 그것을 조작하고 처리하고 그것을  사용해서 실험하는 형태로 파악하고 있다면,  그리고 
오퍼레이터가 이해할 수 있도록 보고를 해 온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시뮬레이션 기술 중에 
모델 전쟁은 이기는 수도 있고 지는 수도 있으며, 시뮬레이트 된 항공기는 날 수도 있고 추
락할 수도 있다. 경제정책은 번영으로 이끌기도 하고 파멸에 귀착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
도 컴퓨터는 실생활에서 걸리는 시간의  몇 분의 일로도 전과정에 걸리는  일을 한다. 물론 
훌륭한 세계 모형이 있으면 좋지 못한 모형도 있고, 좋은  모형조차도 그저 유사한 것에 불
과하다. 시뮬레이션의 결과일지라도 실제로 생기는 것을 반드시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그래도 엉터리 시행 착오보다는 훨씬 낫다. 시뮬레이션은 대리 시행 착오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안됐지만 이것들은 오래 전에 쥐 심리학자에 의해 사용된 말이다.
  시뮬레이션이 그렇게 좋은 방안이었다면 생존 기계는 벌써 옛날에 그것을 발견했을  것이
다. 무엇보다도 생존 기계는 인간이 쓰고 있는 기타 여러  가지의 공학 기술을 우리가 등장
하기 훨씬 이전에 발명해 낸 초점 렌즈와 반사 망원경, 음파의 주파수 분석 장치, 항공 서보 
조정장치, 수중 음파 탐지기, 인력 정보의 완충 기억 장치,  그 밖의 긴 이름이 붙은 무수한 
기술(이들의 상세한 것은 중요치 않음)이 그것이다. 시뮬레이션에 대해서는 어떠할까? 아마
도 당신 자신이 미래의 미지수를 견적한다는  어려운 결정을 요구당했을 때 당신은  반드시 
시뮬레이션이라는 형태를 취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취할 수 있는 길을  각각 취했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가를 상상한다.  머리에 그리는 것은 세계의 모든  모형이 아닌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는 한정된 일련의 모형이다.  당신은 그것을 생생하게 마음에  그리기도 하고 
그것들의 형태로써 추상 개념을 상상할  수도 있겠다. 여하튼 당신의 뇌  속에 있는 장소가 
상상하고 있는 사실의 실험 공간 모형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컴퓨터의 경우와 같
이 뇌가 어떻게 세계의 모형을 표현하느냐는  세부보다는 뇌가 그 모형을 사용하여  가능한 
사건을 예언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미래의 시뮬레이션을 행하는 생존 기계는 명
백한 시행착오에 근거하지 않고는 학습이 안 되는 생존 기계보다 일보 진보되어 있다. 명백
한 시행의 난점은 시간과 에너지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명백한  착오의 난점은 생명이 위험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시뮬레이션은 보다 안전하면서도 신속하다.
  시뮬레이션 능력의 진화는 주관적인 의식의 발생으로 장점에 이른다.  왜 그와 같은 것이 
생기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는 현대  생물하기 당면한 가장 심오한  미스터리이다. 컴퓨터가 
시뮬레이션을 할 때에 의식이 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으나, 그것들이 장래에 그렇게 될 수
도 있다는 가능성은 인정해야 한다. 다분히 의식이 생기는 것은 뇌에 의해 세계의 시뮬레이
션이 완전하게 되어 그 자체의  모형을 포함해야만 될 정도로 되었을  때일 것이다. 분명히 
생존 기계의 사지와 몸은 그것이 시뮬레이트 되어 있는 세계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음
에 틀림없다. 아마도 비슷한 이유에서 시뮬레이션 그 자체가  시뮬레이트 되어야 할 세계의 
일부로 생각된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자기를 알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 되는데,  나는 이
로 인해 의식의 진화가 충분히 설명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의 하나는 무한 복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형의 모형이 있다면 왜 모형의 모형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뇌는 유전자의 독재에 반항할 수 있다
  이 책의 논지로 말한다면, 의식에 의하여 어떤 철학적  문제가 생기든 의식이란 실행상의 
결정권을 갖는 생존 기계가 궁극적인 주인인 유전자로부터 해방된다고 하는 진화 경향의 극
치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뇌는 생존 기계의 일을 매일  관리할 뿐만 아니라 미래를 예언하
고 그것에 따라 행위하는 능력도  손에 넣고 있다. 뇌는 유전자의  독재에 반항하는 힘까지 
갖추고 있다. 예를 들어 가급적 많은 아이를 낳기를 거부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후술하
는 바대로 인가는 이런 점에서 대단히 특수한 경우인 것이다.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나는 이타적이든 이기적
이든 간에 동물의 행동이 그저 간접적이라는 것만으로도 매우 강력한 의미에서의  유전자의 
제어하에 있다고 하는 견해를 확립하려고 하고 있다. 생존  기계와 신경계를 조립하는 방법
을 지령하는 것에 따라 유전자는  행동에 기본적인 힘을 내고 있다.  그러나 다음에 무엇을 
할까를 순간순간 결정해 가는 것은 신경계이다. 유전자는 방침 결정자이고 뇌는 실시자이다. 
그러나 뇌는 다시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차츰 실제의 방침 결정까지도  맡게 되어, 이때에 
학습이나 시뮬레이션과 같은 책략을 쓰게끔 됐다. 어떤 종도  아직 거기까지는 도달되어 있
지 않으나 이 경향이 계속적으로 진행되면 논리적으로는 결국 유전자가 생존 기계에 단 하
나의 종합적인 방침을 지령하게끔 될 것이다. 즉, 우리를 살려 두는 데 가장 좋다고  생각되
는 것은 무엇이든 하라고 명령을 내리게 될 것이다.
  컴퓨터의 비유와 인간의 의지 결정과의 비유는 어느 것이나 매우 좋은 것이다. 그러나 우
리는 여기서 현실 문제로 돌아와 진화는 실제로 유전자 풀 속의 유전자 생존에 차이가 있다
는 것을 통하여 단계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된다.  따라서 행동 패턴-이타적인 
것이든 이기적인 것이든- 이 진화하기 위해서는  그 행동을 위한 유전자가 행동을 '위한'또 
다른 경제적 유전자, 즉 대립 유전자보다도 유전자란 신경계의  발달에 영향을 주고 신경계
를 이타적으로 행동하기 쉽도록 하는 유전자이다. 그러면 이타적  행동의 유전에 대한 실험
적 증거는 있는 것일까? 그것은 없다. 그러나 놀랄 것은 없다. 왜냐하면 행동에 관해서도 유
전의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불행히도 완전히 이타적인 것이
라고 할 수는 없으나 매우 복잡하여 흥미로운 행동 패턴의 연구에 관해 이야기하도록 하자. 
이 이야기는 이타적 행동이 어떻게 유전할  수 있는가를 가리키는 모형으로서 필요하게  될 
것이다.
      꿀벌의 유충버리기
  꿀벌은 부저병(foul brood)이라는 세균성 전염병에 걸린다. 이것은 봉방 속의 유충을 해치
는 병이다. 양봉가가 키우고 있는  꿀벌에서는 어떤 계통이 다른 계통보다  이 병에 걸리기 
쉽고 이러한 계통간의 차이는 적어도 몇 개의 예로서 행동의 차이에 의한다는 것을 알고 있
다. 말하자면 위생적이 계통은 병에 걸린 유충을 발견하고 봉방에서 끄집어 내어 벌집 밖으
로 버리고 병을 빨리 근절해 버린다. 한편 감염되기  쉬운 계통은 이 '유충버리기'를 안하기 
때문에 병에 걸리기 쉽다. 이 위생법은  실제로는 매우 복잡한 행동이다. 일벌은 병에  걸린 
각각의 유충 봉방을 발견해 그 봉방의 뚜껑을 떼고 유충을 벌집의 출입구로 끄집어내어 쓰
레기장에 내던져야 한다. 
  꿀벌을 이용하여 유전 실험을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매우 귀찮은 일이다. 일벌 자
신은 번식하지 않으므로 한 계통의 여왕벌과 다른 계통의 수벌을 섞어서 그것에서 생긴 일
벌의 행동을 보아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한 사람은 로센부러(W.C. Rothenbuhler)였다. 그는 
잡종 제 1세대의 꿀벌이 모두 위생적이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즉, 위생적인 어미의  행동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후에 알았는데 위생적 형질의  유전자는 인간의 푸른 눈의 
유전자처럼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열성이었던 것이다. 로센불러가 잡종 제  1세대
와 위생적 형질의 계통과를 '역교배'해 본 결과(물론 여왕벌과 수벌을 써서) 아주 좋은 결과
를 얻었다. 태어난 꿀벌은 3개의 그룹은 전혀 위생적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세 번째 그룹은 
어중간한 생동을 했다. 맨 나중 그룹은 병에 걸린 유충이 있는 봉방의 뚜껑을 뜯는 데는 성
공했는데도 유충을 버리는 데 관한 두 종류의 유전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정상적인 위생적 
계통은 그 양쪽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감염되기 쉬운 계통은  이 두 개의 유전자의 라이
벌인 대립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어중간한 일밖에 못하는 잡종은 아마도 뚜껑을 떼는 유전
자를 (2배수로) 가지고 있으나 버리는 쪽의 유전자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로센불러는 완
전히 비위생적으로 보이는 꿀벌의 그룹 중에 유충을 내버리기 위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나 
뚜껑을 떼는 유전자를 잃었기 때문에 그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그룹이 숨겨져 있지나 않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뚜껑을 열어 주고 이 추측의 정확함을 잘 증명했다.  비
위생적으로 보이는 벌의 반수는 이때에 완전히 정상처럼 '유충버리기' 행동을 보여 주었다.
  이 이야기는 앞 장에서 나온 수많은 중요한 문제점을 예증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가령 
유전자로부터 행동에 이르는 배발생상의 원인의 화학적인 사슬이 어떠한 것인가를 전혀  모
르면서조차도 '무슨 무슨 행동을 위한 유전자'라는  논법을 써도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원인의 사슬에는 학습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예컨대 뚜껑을  떼
기 위한 유전자는 벌이 병에 감염된 밀랍의 맛을 좋아하게 하므로 그 효과를 발휘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즉, 그들로서는 병에 걸린 유충을 덮고 있는 밀랍의 뚜껑을 먹는 것이  보수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되풀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유전자의  일하는 법이 이렇다 할지라
도 다른 조건이 같을 때에 그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벌은  뚜껑을 뜯고, 갖지 않은 벌은 뚜
껑을 떼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뚜껑을 떼기 위한' 유전자라고 해도 좋다.
  둘째로 그것은 유전자들이 공동 소유하고 있는 생존 기계의 행동에 '협력해서' 작용을  미
치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유충을 버리는 유전자는 뚜껑을 떼는 유전자가 없다면 
필요 없게 되고, 그 역도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유전 실험에서 분명히 아는 바대로 이  두 
개의 유전자는 세대를 통한 그들의 여행에서 원칙상 전혀 따로따로 행동한다. 그 작동을 보
는 한 그것들은 단일 협동 단위가 되나  복제에 임해서는 두 개가 자유롭고 독립된 인자가 
되는 것이다.
  논의를 진행시키 위해 모든 종류의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을 수행하기 '위한' 유전자에 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 '물에 빠진 친구를 건지기 위한' 유전자에 
대해 기술하고, 당신이 그와 같은 개념을 믿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위생적인 꿀벌의 이야
기를 상기하라. 복잡한 근수축이나 감각 통합, 더  나아가서는 의식적인 결단에 이르기까지, 
친구를 구조하게 만드는 유일한 원인이  유전자는 아니라는 것에 주의하기  바란다. 학습과 
경험 또는 환경의 영향이 행동의 발달에  관여하는가 여부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않고 있다.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다른 조건이 같고, 또 다른 다수의 중요한 유전자나 
환경 요인이 존재하고 있다면 한 단일 유전자가 대립 유전자에 비해서 물에 빠진 친구를 더
한층 잘 도와줄 법한 몸을 만들 수가 있음직도 하다는  것이다. 두 개의 유전자간의 차이가 
실은 어떤 단순한 양적 변수의 근소한 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때도 있을 것이다. 배발생
의 상세한 과정은 흥미를 끄는 것이기는 하지만 진화적인  고찰에는 관계가 없다. 로렌츠는 
이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유전자는 종합 기본 프로그램이다
  유전자는 종합 기본 프로그램이고 자기의 생명을 위해 프로그램을 짠다. 유전자는 자기의 
생존 기계가 생애에서 부딪치는 모든 위험을 극복할 수 있도록 만든 프로그램의 성공 여부
에 의해 심판받는다. 그 심판은 생존하느냐 소멸하느냐 하는 냉혹한 것이다. 유전자의  생존
이 일견 이타적 행동처럼 보이는 것에 의해 재촉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후에 또  다루
기로 하고, 여하튼 생존 기계와 생존  기계를  위해 결단을 하는 뇌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개체의 생존과 번식이다. 이 '군체' 내의 모든 유전자는  이 두 가지에 우선권을 인정하기로 
합의하고 있다. 그래서 동물은 먹이를 찾아 잡기 위하여,  자기가 잡혀 먹히지 않기 위하여, 
병이나 사고를 피하기 위하여, 자기가 잡혀 먹히지 않기 위하여, 병이나 사고를 피하기 위하
여, 매우 나쁜 기후 조건에서 몸을 지키기 위하여, 이성을 보고 교미를 유도하기 위하여, 그
리고 자기들이 향수하고 있는 것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어쨌든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구태여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원한다면 주위의 야생 동물을 잘 관찰해 보라. 그러나 
특별한 종류의 행동에 대해 한 가지만 말하고 싶다.  후에 이타주의와 이기주의의 이야기를 
할 때에 재차 이 문제를 언급해야만 할 것  같아서이다. 그것은 대체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생존 기계의 커뮤니케니션
  한 생존 기계가 다른 생존 기계의 행동 또는 신경계의 상태에 영향을 끼칠 때 그 생존 기
계는 그의 상대와 커뮤니테이션했다고 할 수가 있다. 이것은  끝없이 주장하고 싶을 정도의 
정의는 아니지만 당면한 목적에는 충분하다. 영향이라 함은 직접적인 인과적 영향을 말한다. 
커뮤니케이션의 예는 무수히 많다. 새와 개구리, 귀뚜라미의  울음소리, 개가 꼬리치는 동작
이나 털을 세우는 행동, 침팬지의 이빨을 내보이는 행동, 인간의 몸짓이나 말씨 등 생존  기
계의 많은 동작은 다름 생존 기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자기의 유전
자의 번영을 꾀한다. 동물들은 이 커뮤니케이션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
는다. 옛부터 새의 노랫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매료시켰다. 이미 다루어 보았듯이  흑고래의 
매우 정교하고 신비스런 노래는 그 음역이 무척이나 넓다. 즉, 그 주파수 범위는 가청  범위 
이하의 웅웅거리는 소리부터 초음파의 쌩쌩거리는 소리까지 인간의 청력 범위를 훨씬  넘고 
있다. 땅강아지는 착실히 옛 축음기의 나팔(hom)이나  메가폰과 같은 구멍을 뚫고 그  구멍 
아래에서 울어 자기의 울음소리를 큰 소리로 증폭한다. 꿀벌은  먹이의 방향과 거리에 대해 
다른 벌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하기 위해서 어둠 속에서 춤을 춘다. 그 커뮤니케이션의 교묘
함은 인간의 언어에 필적한다.
  동물 행동학자의 전통적인 이야기에 의하면 커뮤니케이션 신호는 송신자와 수신자 쌍방이 
서로 이익을 받도록 진화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병아리는 길을  잃든지 춥든지 하면 큰 소
리로 삐약거려 어미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이 음성은 보통 어미를  불러대는 직접 효과를 
가지고 있고, 어미는 그 병아리를 찾아 모은다. 이 행동은 자연 선택이 길을 잃고 울던 병아
리와 그 울음소리에 적절히 반응하는 어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의미로 상호 이익을 위
하여 진화했다고 할 것이다.
  바란다면(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이 울음소리를  어떤 의미를 가진 것, 즉  정보(이 
경에는 '길을 잃었다'라고 하는 정보)를 번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제 1장에서 말한 
새의 경계음은 '메가 있다'라는 정보를  전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  정보를 받아서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동물은 이익을 얻는다. 따라서 이 정보는 진실한 것이다. 그러나 동물들이 틀
린 정보를 전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동물들의 거짓말
  동물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은 오해를 초래하기  쉬우므로 미리 고려해 두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가드너 부처(Beatrice and Alen Gardner)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들의 유명한 '말
하는' 침팬지 와슈(Washoe; 이 침팬지는 아메리카식 수화법을 쓴다. 그 대단한 솜씨는 언어
학자간에도 큰 관심거리가 되었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를 상기한다. 청중 중에는 몇 사람
의 철학자가 있었다. 강의가 끝나자 그들은 와슈가 거짓말을  하는지 어떤지의 문제로 심한 
토론을 했다. 나는 가드너 부처가 토론할 더욱 흥미로운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나도 동감이었다. 이 책에서는 철학자들보다 훨씬 솔직하게 '속인다'든가 '거
짓말을 한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들은 속이려고 하는 의식적인 의도에 관힘을 표시했다. 
나는 단순히 속이는 것과 기능적으로 같은 효과를 가진다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예컨
대 어떤 새가 매가 없을 때에 '매다'하는 신호를 써서 그 때문에 동료를 겁주어  쫓아버리고 
먹이를 혼자 독점했다고 하면 이  새는 거짓말을 했다고 하겠다. 이  새가 고의로 속이려고 
의도하고 작정한 것은 아니다. 의미하고 있는 것은 거짓말쟁이 새가 다른 새의 희생에 의해 
먹이를 획득했다는 것과 다른 새가 도망친 것은 정말로 매가 있을 경우에 적합한 방법으로 
거짓말쟁이 새의 소리에 반응했기 때문이라는 것뿐이다.
      포식자도 의태한다
  먹어도 독이 없는 많은 곤충은 앞 장에서 말한 나비처럼 다른 맛없는 곤충이나 핌을 쏘는 
곤충의 모습을 흉내냄으로서 몸을 지키고  있다. 우리들 자신도 잘못하여  노란색과 흑색의 
얼룩이 있는 장수말벌을 벌로 오인하는 수가 많다. 꿀벌로 의태한 몇 마리의 장수말벌은 그 
속임수가 더한층 완벽하다. 포식자도 또한 속인다. 아귀(angler  fish)는 해저에 파묻힌 채로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유일하게 보이는  부분은 머리의 끝에서 뻗어  있는 디가란 '낚싯대' 
끝에 있는 지렁이같이 꿈틀거리는 몸의 부분이다. 작은 물고기가  접근하면 아귀는 그 작은 
물고기 앞에서 지렁이 닮은 미끼처럼 움직여서 숨어 있는 자기의 입 가까이로 유인한다. 그
러다가 아귀는 급속히 입을 벌려서 작은 물고기를 삼켜  버린다. 아귀는 꿈틀거리는 지렁이
와 같은 것에 접근한다는 작은 물고기의 성질을 이용하여 속이는 것이다. 아귀는  '지렁이가 
있다'라고 하여 그 거짓말을 '믿는' 작은 물고기는 모두 잡아먹는다.
  어떤 생존 기계는 다른 생존  기계의 성적 용망을 이용한다. 벌난초는  벌을 자기의 꽃과 
교미시킨다. 그 꽃은 암벌과 꼭 닮았다. 벌난초가 벌을 속여서 필요한 것은 화분을 옮겨  주
게 된다. 개똥벌레는 빛을 깜빡거려 교미 상대를 끈다. 각각의 종은 특유한 깜빡거림 패턴을 
가지고 있어서 그에 의해 종간의 혼란과 그 결과 생기는  유해한 난교를 방지하고 있다. 특
정 등대의 깜빡거림 패턴을 찾는 선원처럼 개똥벌레도 같은 종임을 신호하는 깜빡거림 패턴
을 찾는다.  Photuris 속의  암놈은 Photinus  속의 암놈의  깜빡거림 신호를   흉내낼 경우 
Photinus 속의 수놈을 유인할 수 있음을 '발견' 했다. Photuris의 암놈은 이것을 실행하고 있
다,. 그리고 Photinus의 수놈이 이 속임수에 속아서 접근하면, 그는 즉석에서 Photuris  암놈
에게 먹혀 버린다.  사이렌(Siren)과 로렐라이(Lorelei)의 이야기야  얼핏 떠오르는데, 콘  월
(Cornwall) 지방의 사람들이라면 오히려 초롱불을 가지고 배를 벼랑으로 유인하여 난파선에
서 나온 화물을 약탈했다는 옛 해적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 진화할 때에는 어떤 것이 그 시스템을 자기만의 목적에  이용하려
고 하는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우리는 '종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진화를 배워 왔기 때문
에 자칫하면 거짓말쟁이나 사기꾼은 포식자와 먹이 그리고 기생자 등과 같이 다른 종에 속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다른 개체의 유전자의 이해가 다양화되어가면, 항상  거
짓이나 속임이나 커뮤니테이션의 이기적 이용이 생길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동
일 종의 개체간에서도 말할 수 있다. 후술하는 바대로 아이가 어버이를 속이거나 남편이 처
를 속이고 형제끼리 거짓말을 한다든가 하는 것조차 예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동물의 커뮤니케이션 신호는 본래 서로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진화된 것으로 그  후에 
불순한 친구들에 의해 악용되게끔 되었다고 믿는 것도 역시 너무 단순하다 동물의 모든 커
뮤니케니션에는 처음부터 바로 속인다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동물
의 모든 상호 작용에는 적어도 무엇인가의 이해 충돌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 장에
서는 진화의 관점에서 본 이해 충돌에 관한 유력한 사고 방식을 소개하기로 한다.
            제5장
          공격-안정성과 이기적 기계
        개체는 이기적 기계이다
  이 장에서는 오해가 많은 공격에 대한 화제에 대부분을 맞추기로 하자. 이어서 개체를 자
기의 유전자 전체에 적합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무분별하게 행하도록 프로그램된  이기적 
기계라고 보기로 하자. 이것은 편의상의 말이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 또다시 개개의  유전자
의 말로 되돌아가기로 하자.
  한 생존 기계의 입장에서 보면(자기의 아이 또는 가까운 인연의  개체가 아닌) 다른 생존 
기계는 바위나 냇물이나 한 조각의 먹이 같은 환경의 일부이다. 그것은 방해물일 수도 있고 
이용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자칫 반격해 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생존 기계도 또한 미래를 위해 자기의  불사신의 유전자를 유전자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 기계이기 때문이다. 자연 선택에 의해 선택되는 것은 환경을 가장 효과적
으로 이용하도록 자기의 생존 기계를 제어하는 유전자이다. 이것에는  다른 종과 같은 종을 
불문하고 다른 생존 기계를 가장 잘 이용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두더지와 지빠귀
  어떤 경우에 생존 기계는 서로의 생활에 별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 예컨
대 두더지와 지빠귀는 먹거나 먹히거나 하지도 않고 교미를 할 필요도 없고 생활 장소를 가
지고 싸울 이유도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아주 독립된 존재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둘러싸고-한 예로  지렁이를 가지고-다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두더지와 지빠귀가 지렁이를 가지고 줄다리기라도 한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지빠귀
는 일생 동안 두더지를 보지 못하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두더지의 개체군을 근
절 또는 죽였다고 하면 지빠귀는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 상세한 것이 어떻고 어떠한 우
여곡절을 겪고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까지 마구잡이로 말하는 것은 나로서는  할 
수 없다. 종이 다른 생존 기계끼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들은  포식
자이기도 하고, 먹이가 되기도 하고, 기생자이기도 하고, 숙주이기도 하고, 어떤 부족한 자원
을 가지고 싸우는 경쟁 상대이기도  하다. 또 벌이 화분 운반자로서  꽃에게 이용당할 때와 
같이 특수한 방법으로 이용되고 있는 수도 있다.
      동종끼리의 경쟁
  같은 종의 생존 기계끼리는 더욱  직접적인 방법으로 서로의 생활에 영향을 끼친다. 여기
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자기 종에  속하는 개체군의 반수는 짝짓기 상대가 
될 수 있는 개체이고, 또한 그것은 자기의 아이들을 위해 이용할 어미가 되는 개체이고,  또
한 그것은 자기의 아이들을 위해 이용할 어미가 되는 개체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같은 종의 구성원이 서로 잘 닮아서 같은 장소에서 같은 생활 수단을 가지고 유전자를 지키
고 있는 기계이기 때문에 생활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둘러싼 직접적인 경쟁 상대라는 것이
다. 한 마리의 지빠귀에게는 두더지가 경쟁 상대라는 것이다. 한 리의 지빠귀에게는  두더지
가 경쟁 상대이기도 하나 다른 지빠귀만큼 중요한 경쟁  상대는 아니다. 두더지와 지빠귀는 
지렁이를 가지고 다니나, 지빠귀끼리는 지렁이 및  그 밖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싸우고  있다. 
그들이 동성이라면 교미 상대를 가지고도 다투게 될 것이다. 보통 수놈은 암놈을 가지고 싸
운다. 이것은 한 수놈이 경쟁 상대의 수놈에게 해로운 짓을 하면 자기의 유전자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신사적인 동물 
  그렇다면 생존 기계에게 논리적으로 바른 방침은 자기의 경쟁자를 죽여서 가능하면  먹어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같은 종을 서로 잡아먹는  좋을 실제로 자연계에서 졸 
수 없는 것은 아니나,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의 소박한 해석에서 예측되는 정도로 자주 일어
나는 일은 아니다. 사실 로렌츠는 동물의 싸움, 즉 '공격'은 억제 가능한 신사적인 것임을 강
조하고 있다. 그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동물의 싸움이 복싱이나 펜싱의 규칙처럼 규칙에 따
라 싸우는 형식적인 시합이라는 것이다. 동물들은 글러브를 낀  주먹과 끝을 둥그렇게 만든 
검으로 싸운다. 위협과 겁주기가 목숨을 건 결투를 대신한다. 승자는 항복의 몸짓을  인정하
고 때려 죽이거나 물어 죽이거나 하는, 우리의 소박한 생각에서 예견되기 쉬운 행동을 삼간
다.
        인간만이 카인의 후예이다
  동물의 공격은 억제가 가능한 형식적이라는 이 해석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특히 불쌍
한 호모 사피엔스만이 자기의 종을 죽이는 유일한 종이고 카인의 후예이며, 이 같은 멜로드
라마적인 죄를 품은 종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자연주의자가 동물의 공격의 
광포도를 강조하든가 억제를 강조하든가 하는 것은, 하나는 그  사람이 관찰하여 온 동물의 
종류에 따라, 또 하나는  그 사람의 진화론상의 선입관에  따라 좌우된다. 로렌츠는  요컨대 
'종의 이익'을 주장한다. 동물의 싸움을 글러브를 낀 주먹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표면적으
로 이것은 일종의 이타주의처럼 보인다.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은 이것을 설명한다는 어려운 
일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물들이 모든 기회를 잡아서 자기  종의 경쟁자를 죽이는 
데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이 물음에 대한 일반적인 답은 철저한 호전자에게는 이익(이득)과 동시에 손실도 있고, 더
욱이 그것이 시간과 에너지의 손실뿐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B와 C는 모두 나의 경
쟁자이고, 내가 마침 B를 만났다고 하자. 이기적 개체인  내가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당
연한 것으로 생각되나, 한편으로는 C도 또한 나의 경쟁자이고 동시에 C와 B도 서로 경쟁자
이기도 하다. 내가 B를 죽이면 친절하게도 C의 경쟁자 하나를 제거해 주는 것이 되지 않는
가. B를 살려 두는 편이 좋다. 그렇게 하면 그는 C와 다투거나 싸우거나 할 것이고 결국 나
에게는 간접적으로 이익이 될 것이다. 이 단순한 가정의 예에서  보여 주는 교훈은 그저 함
부로 경쟁자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뚜렷한 이점이 없다는 것이다. 크고 복잡한 경쟁 시스템 
속에서는 눈 앞의 경쟁자를 없앤다고 해도 반드시 좋은 결과만이  오는 것은 아니다. 한 경
쟁자의 죽음으로 인하여 당사자보다 다른 경쟁자가 이득을 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해충 방제 관계자들로부터 배운 쓰라린 교훈이기도 하다. 농작물에  심한 피해를 입히는 해
충이 있어 좋은 근절법을 발견하여 기꺼이 이 방법을 실시했다.  그 결과는 그저 이 해충의 
절멸에 의해 작물보다는 다른 해충이 득세하여 전보다 더욱 심한 상태로 될 뿐이다.
      바다표범과 하렘
  한편 어떤 특정한 경쟁자를 잘 계획하여 죽이거나 또는 적어도 싸운다는 것은 좋은 방법
이라고 생각된다. 만약 B가 암놈이 많이 있는 큰 하렘(harem; 한 마리의 수컷을 두러싼  여
러 암컷)을 가진 바다표범이고, 다른 바다표범인 나는 그를 죽임으로써 그의 하렘을 입수할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하고 싶어할 것이다. 대개 상대를  선택하여 싸움을 걸어 봤자 손실
과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B가 반격해서 가치 있는 재산을 지키는 것은 그의 이익에 연관
된다. 만약 싸움이 벌어졌을 경우 내가 죽을 확률을 상대와 같다. 아니 아마도 내가 죽을 확
률이 더 놓을지도 모른다. 그는 가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내가 싸움을 거는 원
인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해서  그것을 가지고 있는가? 아마도  그는 전승으로 그것을 
얻었을 것이다. 나보다 먼저 도전하여 다른 개체를 수없이 격퇴하여 그것을 얻었을  것이다. 
그는 뛰어난 전사임에 틀림없다. 비록 전승으로 하렘을 차지하더라도  나는 이 싸움에서 상
처 투성이가 되어 이익을 즐길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또한 싸움은 시간과 에너지를 탕진한
다. 이 시간과 에너지는 당장에는 축적해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당분간 싸움보다는  먹는 
것에 전념하고 분쟁에 말려들지 않도록 조심하면 장차에는 강대해질 것이다. 언제가는 하렘
을 가지고 그와 싸우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서두르기보다는 조금  기다리는 것이 결국 
승률이 높을 것 같다.
      유전자의 손익 계산
  이 독백의 예는 이론적으로 말하면 싸울 것인가 아닌가의 결단에 앞서  무의식적으로라도 
복잡한 '손익 계산'이 이상적으로 앞서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확실히 싸워서 이득을 
볼 때도 있지만 항상 싸울  때마다 그만큼의 이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싸우는 
동안 그 싸움을 확대시키느냐 하는 전술적 결단에는 각각 손실과 이득이 있어 그것은 원칙
적으로는 분석 가능한 것이다. 이 사실은 오랫동안 행동학자들에게 막연히 인식되어 왔으나, 
자신을 가지고 이 발상을 분명히 표현하게 된 것은 일반적으로는 행동학자로 인정되지 않는 
메이나드-스미스(J.Maynard Smith)의 힘이 필요했었다.  그는 프라이스(G.R. Price)와 파커
(G.A. Parker)와의 공동 연구로 게임 이론이라고  하는 수학의 한 분야를 이용했다. 그들의 
훌륭한 이론은 수학 기호를 쓰지 않고도 말로 표현할 수가 있다. 단, 엄밀도에서 어느  정도 
희생을 치러야만 된다.
  메이나드-스미스가 제창하고 있는 중요한 개념은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 ESS)'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원래는 해밀턴(W.D.  Hamilton)과 맥아서(R.H. 
MacAthur)의 착상이다. '전략'이라는 것은 미리  프로그램되어 있는 행동 방침이다.  전략의 
일례를 들어보자. "상대를 공격하라.  그가 도망치면 쫓아라. 응수해  오면 도망쳐라."이해를 
바라는 것은 이 전략을 개체가 의식적으로 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는 동물을 근육의 제어에 관해 미리 프로그램된 컴퓨터를 갖는 로봇 생존 기계라고 생각해 
온 것을 상기하기 바란다. 이 전략을 한 세트의 단순한  명령으로 하여 말로 표현하는 것은 
이것에 관해 생각해 나가는 데는 편리한 방법이다. 확실히 모르는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동
물은 마치 이들의 명령에 따르고 있는 양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 즉  ESS는 개체군의 대부분의 구성원이  그것을 채용하면 다른 
대체 전략에 의해 변화시킬 수 없는 전략이라고 정의된다.  그것은 미묘하고도 중요한 개념
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개체로서  최선의 전략은 개체군의 대부분이 행하고  있는 것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개체군의 나머지 부분은 각각 자기의 성공을  최대로 하려고 하는 개체
로 성립되어 있으므로 살아 남은 것은 어떤 이상 개체에 의해서도 개선될 수 없는 전략뿐이
다. 환경에 무언가 큰 변화가 일어나면 짧기는 하나 진화적으로 불안정한 기간이 생기고 아
마도 개체군 내에 변동이 보이는 일까지도 있다. 그러나 일단 ESS에 도달하면 그것은 그대
로 남는다. 선택은 이 전략에서 이탈되는 것을 벌할 것이다.
      매파와 비둘기파
  이 개념을 공격에 맞추기 위해 메이나드-스미스의 제일 단순한 가정적인 예 하나를 고찰
하여 보자. 어떤 종의 개체군에는 매파형과 비둘기파형이라고 하는  두 종류의 전략밖에 없
는 것으로 하자(이 이름은 세간의 관례적 용어에  따랐을 뿐이고, 이 이름을 제공하고 있는 
새의 습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실제로 비둘기는 어느 정도 공격적인 새이다.)우리의 가
정적 개체군의 개체는 모두 매파든 비둘기파든 어느 한편에 속하는 것으로 한다. 매파의 개
체는 가급적 항상 맹렬히 힘차게 싸우고 심하게 다쳤을 때가 아니면 굴복하지 않는다. 비둘
기파의 개체는 그저 무게 있고 규정대로 행하며 위협을 줄 뿐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다. 매파의 개체와 비둘기파의 개체가 싸우면 비둘기파는 그냥  도망치므로 다치는 일이 없
다. 매파의 개체끼리 싸우면 그들은 한편이 중상을 입거나 죽을 때까지 싸운다.  비둘기파끼
리 부딪힐 때에는 어느 편이든 다치는 경우가 없다.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 자세를 취하기만 
하다가 결국은 실증이 나거나 그 이상 버틸 필요가 없다고 결심하면 중지하게 된다.
  또 특정의 경쟁자가 매파인지 비둘기파인지를 미리 알 수 없는 것으로 가정해 놓자. 그는 
경쟁자와 싸워 보고서야 비로소 그것을 알 뿐 그를 유도하는 특정의 개체와의 과거의 싸움
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한다. 그래서 싸우는 양자에게 '즉점'을 주기로 한다. 예컨대  승
자에게는 50점, 패자에게는 0점, 중상자에게는 -100점, 장기전에 의한  시간 낭비에는 -10점
이라고 하는 식이다. 이들 '득점'은 유전자의 생존이라는 통화에 직접 환산되는 것으로 보아
도 좋다. 노은 득점을 얻은 개체, 즉 높은  평균 '득점'을 받고 있는 개체는 유전자 풀  속에 
다수의 유전자를 남기는 개체이다. 이  실제의 수치는 제법 넒은 범위  내로 어떻게 취해도 
분석에 지장이 없는 성질의 것인데 우리가 이 문제를 생각하는 데는 요긴하다.
  중요한 것은 매파가 비둘기파와 싸울 때 상대를 이기고  지고가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언제나 매파가 이기는 것은 뻔하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매파형
과 비둘기파형 중 어느 석이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ESS)인가 하는 것이다. 만약  한쪽이 
ESS이고 다른 쪽은 그렇지 않다면 ESS인 쪽이 진화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두 개의 ESS가 
있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있을 수 있다. 만약 개체군의 대세를 공격하는 전략이 종종 매파형
이든 비둘기파형이든 간에 어떤 개체로서 최선의 전략은 선례를 따르는 것이었다면 이와 같
이 말할 수가 있다. 이때에 개체군은 두 개의 안정 상태의 어느 것이든 좋으니까 종종 먼저 
도달한 쪽으로 고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 말하듯이, 실은 매파와 비둘기파라는  두 
개의 전략은 어느 것이나 그 자체로는 진화적으로 안정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어느 한쪽이 
확실하게 진화한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이 사실을 표시하려면 평균  득점을 계산하여야만 
한다.
  전원 비둘기파로 된 개체군이 있다고 하자. 그들은 싸워도 다치지 않는다. 다툼은  아마도 
긴 의식적인 시합, 더러는 노려보기만 하는 싸움이어서 어느쪽이든  기가 죽으면 결판이 난
다. 이때에 승자는 싸워서 자원을 차지했기 때문에 50점을 따나, 노려보기에 긴 시간이 걸렸
기 때문에 10점의 벌금도 내야 하므로 결국 40점이 되나. 패자도 역시 시간을 낭비했으므로 
10점 깎인다. 평균하면 비둘기파의 개체는 모두 다툼의 반은 이기고 반은 지는 것으로 생각
된다. 따라서 싸움당 그의 득점은 +40과 -10을 평균하여 +15점이다. 이와 같은 이치로 비둘
기파의 개체군 중의 비둘기파 개체는 모두 매우 잘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지금 이 개체군에 매파형의 돌연변이 개체가 나타났다고  하자. 그는 여기서 유일
의 매파이므로 그는 모든 싸움에서 +50점을 기록하게 되며, 이것은 그의 평균 득점이 된다. 
그는 순득점이 15점밖에 없는 비둘기파에 비해 막대한 이익을  누린다. 그것과 매파의 유전
자는 그 개체군 내에 급속히 퍼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매파의 각 개체는 이미 부팆
핀 경쟁자가 모두 비둘기파라고 기대할 수는 없게 된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매차의 유전자
가 순조롭게 퍼져서 개체군 전체가 매파로 됐을 때 이번에는 모든 싸움이 매파끼리의 싸움
이 되야만 할 것이다. 이제는 사정이 매우 다르다. 매파끼리 부딪치면 한쪽이 다치기 때문에 
-100점이 되는 반면, 승자는 50점을 딴다. 매파 개체군의 각 개체는 싸움의 반은 이기고 반
은 진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싸움당 평균 득점은 +50과 -100의 평균, 즉  -25점이다. 여기서 
매파의 개체군 내에 비둘기파가 한 개체 있다고 하자. 확실히 그는 모든 싸움에서 패하는데, 
그러나 한편 결코 부상하는 일이 없다.  매파 개체군 내의 평균 득점이  -25점인 데 비해서 
그의 평균 득점은 매파 개체군 내에서 0이다. 따라서  비둘기파의 유전자는 그 개체군 내에 
퍼지는 경향이 있다.
  이 이야기의 말투로 보면 마치  개체군 내에 부단히 진동이 있는  양 생각될지도 모른다. 
매파의 유전자는 압승하여 우세를 점한다. 그러면 대다수가 매파로  되는 결과로 인해 비둘
기파의 유전자가 유리하게 되어 수를 늘려 간다. 하지만  비둘기파가 많아지면 다시금 매파
의 유전자가 유리하게 되어 수를 늘려간다. 하지만 비둘기파가  많아지면 다시금 매파의 유
전자가 성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식으로 진행될 것 같으나 이와 같은 진동이 일어날 필요는 
없다. 어디에나 매파와 비둘기파의 안정된  비율이 존재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임의의 
득점 시스템으로 계산해 보면 안정된 비율은 비둘기파가 5/12, 매파가 7/12인 것을 알게 된
다. 이 안정된 비율에 달하면 매파의 평균 득점과 비둘기파의 평균 득점은 꼭 같아진다.  이 
때문에 선택이 이쪽보다 다른 쪽에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는다. 만약 개체군 내의 매파의 수
가 점점 늘기 시작하여 그 비가 7/12 이상으로 되면 비둘기파가 나머지 이익을 받기 시작하
여 그 비율이 원래대로 되고 안정 상태가 된다. 안정된 성비는 50대  50인 것과 같이 이 가
정적 예로는 매파 대 비둘기파의  비는 7대 5이다. 어떤 경우에도  안정점 부근에서 진동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대단히 큰 것이 될 수는 없다.
  표면적으로 이것은 그룹 선택설에 약간 유사한 것처럼 생각될지도 모르나 실제로는  전혀 
다르다. 그룹 선택설에 닮은 것 같이 보이는 것은 이  설명이 개체군에도 안정된 평형 상태
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흐트러뜨리며 또다시 그 점까지 되돌아오려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ESS는 그룹 선택보다는 훨씬 미묘한 개념이다.  그것은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성공하느냐 어떠냐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이 사실은 우리의 
가설적 예의 임의 득점 시스템을 사용하면 잘 설면된다. 매파  7/12, 비둘기파 5/12로 된 안
정된 개페군 내의 한 개체의 평균 득점은 6과 1/4인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 개체가 매
파이든 비둘기파이든 같다. 그런데 이 6과 1/4이라는  것은 비둘기파 개체군 내의 비둘기파 
개체의 평균 득점(15)보다 훨씬 낮다. 전원이 비둘기파로 되는 것을 동의만 한다면 어느 개
체도 유리하게 될 것이다. 단순한 그룹 선택설에 의하면 전원이 비둘기파로 되는 것을 동의
한 집단은 어느 것이나 ESS 비에  머물러 있는 경쟁자 집단보다 성공할  것이다(실은 전원 
비둘기파로 되려고 하는 합의된 집단이 성공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집단은 아니다. 매파 1/6
과 비둘기파 5/6로 되는 집단에서는  싸움당 평균 득점이 16과  2/3이다. 이것이 생각한 것 
중에서 가장 잘 된 합의인데  당장의 목적에서 하면 무시된다. 전원  비둘기파로 각 개체가 
15점의 평균 득점을 갖는 집단이 ESS 집단보다 모든 단일 개체에게 훨씬 좋다). 따라서 그
룹 선택설은 전원 비둘기파의 합의로 향해 진화할 것으로  예언함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매
파가 7/12의 비율로 포함되어 있는 무리는 그보다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러나 합의의 부수 조건의 난점은 장기간에 걸쳐 전원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합의마저 배신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확실히 어떤 개체도 ESS 집단에 있는 것보다 전원 비둘기파의 집단에 
있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나 안됐지만 합의를 한 비둘기파의 집단에 태어난 한 개체의 매파
는 너무도 팔자가 좋아서 아무도 매파의 진화를 막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합의된 집단
은 불신 행위에 의해 내부로부터  붕괴되어 가는 운명에 매여 있다.  여기에 이르면 ESS는 
안정하다. 그것은 ESS가 그것에 가세하고 있는 개체  입장에서 특히 유리해서가 아니고 단
지 내부로부터의 불신 행위를 억제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인간
  인간에게 있어 각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합의를 하거나 협정을 맺거나 하는 것은 가령 
그것이 ESS라는 의미로 안정되어 있지 않아도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에 이것이 되
는 이유는 개인이 전원 의식적으로 장래를 예견하고, 그 협정의 규약에 따르는 것이 자기의 
장기적 이익에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인간의 협정마저도 그 협정을 깨면 단기간에 큰 이
득이 되기 때문에 그러게 하고 싶은  유혹이 항상 우세하게 될 위험을 갖고  있다. 이 사장 
좋은 예는 아마도 가격 협정일 것이다. 가솔린의 가격을  인위적으로 고가로 정하면 가솔린 
업자 전원은 장기간 이익을 차지한다. 장기간 높은 이익을  의식적으로 예상하고 결탁한 가
격 협정 집단은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그런데 조만간에 자기만 가격을 인하하여 빨리 많
이 벌고 싶다는 유혹에 말려드는 업자가 생겨난다. 그러면 당장에 그의 인근 업자도 가격을 
내리게 되며 순식간에 인하 파동이 전국으로 퍼진다. 그래서  가솔린 업자 이외의 우리에게
는 안된 일이지만 그들의 장래에 대한 의식적 배려가 재차 머리를 들고 새로운 가격 협정이 
결성된다. 이와 같이 의식적으로 예견을 하는 재능을 갖춘  인간에게마저 장기적 이익에 기
초하는 협정 또는 합의는 내부로부터의  붕괴의 위험선에서 동요를 계속하고  있다. 하물며 
다투고 있는 유전자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야생 동물에서는 집단의 이익이나 합의의 전략이 
진화한다고는 거의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이라는 방식이 어디에
서나 볼 수 있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의 가설적 예에서는, 어느 한 개체는 매파나 비둘기파 중의 어느 한쪽이 된다고 하는 
단순한 가정을 했다. 그리고 결국 매파와 비둘기파는 진화적으로 안정한 비율로 됐다.  이래
서 매파의 유전자와 비둘기파의 유전자의 안정된 비율이 유전자  풀 내에 확립되는 것이다. 
유전학 용어로는 이 상태를 안정  다형(stable polymorphism)이라고 한다. 그러나 수학적으
로는 다형을 생각하지 않고도 다음과 같이 하여 똑같이 ESS가  달성될 수 있다. 어느 개체
라도 각각의 다툼에 있어서 매파처럼 또는  비둘기파처럼 행동한다고 하면 전 개체가  같은 
확률로, 즉 우리의 예대로 말하면 7/12의 비율로 매파처럼 행동하는  ESS가 달성된다. 실제
로 이것은 각 개체가 이때에는 매파처럼 행동할 것인가 비둘기파처럼 행동할 것인가를(대충
이기는 하나 7대 5의 비율로  매파편에 많이) 결단하여 각각의  다툼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매우 중요한 것은 이 결단이 매파쪽으로 기울었다고는 하나 어떤 다툼에도 경쟁자는 자기의 
상대가 어떤 행동으로 나올지를 추정하는  수단이 없다는 의미에서 무작위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7회의 다툼에 계속 매파로 행동하고 다음 계속해서 5회의 다툼에  비둘기파
로 행동하는 등등의 방식은 안 된다. 만약 어떤 개체가  이처럼 단순한 순서를 택했다고 함
면 그의 경쟁자는 얼른 이 순서를 깨닫고 이용할 것이다.  단순한 순서의 전략을 취하는 상
대를 이용하는 방법은 그가 비둘기파로 행동하려고  하는 것을 알았을 때에만 그에게  대해 
매파로 행동하는 것이다.
        전쟁 게임
  물론 매파와 비둘기파의 이야기  너무도 단순하다.  이것은 자연계에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으나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이해하기에 필요한 '모델'이다.  모델에는 이 모델처럼 극
히 단순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점을 이해하기에 또는 어떤 아이디어를 얻기에 필요한 
것이 있다. 단순한 모델은 보다 정교하게 할 수도 있고 점점 복잡해질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잘 되면 모델은 복잡해질수록 현실 세계에 닮아 온다.  매파와 비둘기파의 모델을 발전시키
는 시초는 다시 몊 개의 전략을 추가하는 것이다. 매파와 비둘기파만이 가능성이 있는 유일
한 전략은  아니다. 메이나드-스미스와   프라이스가 도입한 보다   복잡한 전략은 '보복파
(Retaliator)'라고 불린다.
      보복파형과 허풍파형
  보복파는 모든 싸움에서 처음에는 비둘기파와 같이 행동한다. 즉, 매파처럼 철저하게 심한 
공격을 하지 않고 규정대로의 위협 시합을 한다. 그러나 상대가  공격을 걸어 올 때면 보복
한다. 바꿔 말하면 보복하는 매파에게 공격당했을 때에는 매파처럼 행동하고 비둘기파를 만
났을 때에는 비둘기파처럼 행동한다. 보복파는 조건 전략자이다. 이러한 행동은 상대의 행동
에 따라 정해진다.
  또 하나의 조건 전략자는 '허풍파'이다. 허풍파는 누군가가  반격해 올 때까지는 누구에게
나 매파처럼 행동한다. 반격을 당하면 즉시 도망친다. 또 다른 조건 전략자는 '시험  보복파'
이다. 시험 보복파는 기본적으로는 보복파를 닮았으나 때로는 다툼을 조금 실험적으로 확대
시켜본다. 그리고 상대가 반격하지 않으면 이때 매파형의 행동을 계속한다. 그러나 만약  반
격을 당하면 비둘기파처럼 관습대로의 위협으로 되돌아간다.  공격을 받은 경우에는 보통의 
보복파와 똑같이 보복한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지금까지 말한 다섯 개의 전략자 모두를 서로 자유로이  행동하도
록 시키면 보복파만이 진화적으로 안정됨을 안다. 시험 보복파는 거의 안정적이다. 비둘기파
는 그 개체군이 매파와 허풍파의  침략을 허락하므로 안정이 안 된다.  매파도 그 개체군이 
비둘기파와 허풍파의 침입을 허용했으므로  안정적이지 못하다. 보복차의  개체군은 보복파 
자신보다 잘하는 전략이 다른 것에 없기 때문에 어느  전략자에게도지지 않는다. 그러나 비
둘기파는 보복파의 개체군 내에서는 같은 정도로 잘할 수 있다. 즉, 다른 조건이 같다면  비
둘기파의 수가 점점 불어나게 된다. 그런데 비둘기파의 수가  어느 정도까지 늘어나면 시험 
보복파가(그리고 덧붙여 말하면 매파와 허풍파도) 유리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비둘기파에 대해 대처하는 법이  보복파보다 좋기 때문이다. 시험  보복파의 개체군 
내에서 그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전략 중에서 보복파뿐이었고 이 전략으로서 어느 
정도 낫다는 데 지나지 않는 의미에서이다. 따라서 보복파와 시험 보복파의 혼합된 것이 아
마도 양자간의 조용한 진동을 유지하면서  소수파인 비둘기파의 수의 진동과  관련지으면서 
우세를 점하여 갈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경우에도 역시 어느 개체라도  항상 있는 정해진 
전략을 취한다는 다형을 상정할 필요는 없다. 각 개체는 보복파, 시험 보복파 및 비둘기파가 
복잡하게 뒤섞인 행동을 취할 수가 있을 석이다.
  이 이론상의 결론은 대부분의 야생 동물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동물의 공격 중 '글러브를 낀 주먹'적 측면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설명했다. 물론 상
세한 것은 승리나 부상이나 시간의 낭비에 주어진 '점수'의 정확도에 달려 있다. 바다코끼리
에 있어서 승리에 대한 보수는 큰 하렘을 독점할 수  있는 권리이다. 그래서 승리의 득점은 
매우 높게 해 놓아야만 한다. 싸움이 격렬한 것도, 중상을 입을 확률이 높은 것도 벼로 이상
할 것이 없다. 시간의 손실이라는 비용은 부상에 의한 비용과 승리의 이익에 비하여 아마도 
적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추운 지방에서 사는 작은  새에게는 시간의 낭비라는 
비용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손실일 것이다. 새기가  있는 박새는 30초마다 한 번꼴로 
먹이를 잡지 않으면 안 된다. 낮에는  일초일초가 귀중하다. 매파 대 매파 싸움에  소요되는 
비교적 짧은 시간까지도 이와 같은 작은  새들에게는 아마도 부상의 위험 이상으로  심각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현재 자연계의 모든 현상의 비용과 이익에  실제의 수치를 맞추어 보기
에는 아는 것이 너무도 부족하다. 우리는 제멋대로 정한 수치에서 결론을 간단히 내리지 않
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중요한 일반적 결론은 ESS가 진화하는 경향이 있는 것. ESS가 집단
의 합의에 따라 달성되는 최적 조건과 같지는 않다는 것, 그리고 상식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지구전
  메이나드-스미스가 생각한 또 하나의 전쟁 게임은 '지구전'이다. 이것은 위험한 싸움을 결
코 안하는 종과 다분히 부상 같은 것은 있을  수도 없는 갑옷으로 덮인 종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종에서의 다툼은 모두 형식적 자세에 의해 해결된다. 다툼은 항상 어느  편
이든 물러섬으로써 끝난다. 이기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은 상대가 등을  돌릴 때까지 자기 
진지에 버티고 서서 적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위협하기 위하여 무한히 시간을 쓸 정도로 
여유가 있는 동물은 없다. 달리 해야 할  큰 일이 얼마든지 있다. 그가 다루고 있는  자원은 
가치가 있을지 모르나 무한히 가치가 있을 리는 없다. 그것은  그래야 할 시간적 가치에 불
과하다. 경매할 때와 같이 각 개체는 그 자원에는 그럴 만한 가격밖에 쓰지 않을 각오를 하
고 있다. 시간은 이 두 경매인의 경매 통화인 것이다.
  이들 개체는 모두 어떤 자원, 가령 암놈이 어느 정도의  시간에 가치가 있는가를 미리 저
확히 산정하는 것으로 생각하자. 조금만 길게 계속할 각오를 한 돌연변이 개체는 항상 이길 
것이다. 따라서 정해진 경매값을 지킨다는 전략은 불안정하다. 가령 자원의 가치가 아주  정
확히 추정되어 전개체가 옳은 갑을 불렀다고 해도 이 전략은 불안정하다. 이 시간을 최대화
하는 전략에 의해 경매를 하는 두 개체는 똑같은 순가에 포기하여 어느편도 자원을 입수하
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이 경우 다툼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권리를 포기
하는 편이 개체에게는 상책이다. 지구전과 실제의 경합과의  커다란 차이는., 요컨대 지구전
에서는 경쟁자가 모두 희생의 치름에 반해 이익을 얻는 자는 한쪽뿐이라는 점이다. 딸서 대
항하고 버티는 시간을 최대화하려고하는 전략을 취하는 개체군 내에서는 처음부터 포기한다
는 전략이 성공하여 개체군 내에  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바로 포기하지 않고 
몇 초 기다렸다가 포기하는 개체에게 어떤 이익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 전략은 현재 개체군 
내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는 즉시즉각파에 대하여 행동할 때  유리한 것이 틀림없다. 거기서 
선택은 포기의 시간을 점점 연장하는 방향으로 돌려, 어쨌든  다투고 있는 자원의 참된경제 
가치에 따라 허용되는 최대치에 다시 접근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도 수식을 쓰지 않고 말로써 마치 개체군이 모든 전략을 두루 살펴보는 진
동을 말하는 듯이 묘사해 왔다. 그러나 수학적 분석에 따르면  이때도 역시 그 묘사는 옳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진화적으로 안정한 어떤 전략이 있다고 하자. 그것은 수학식으로 표시되
는데 그것과 같은 것을 말로 하면 이렇게 된다. 각  개체가 지구전을 계속하는 시간은 예언
할 수 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자원의 진가를 평균하는 것 외에는 예언을 못한다.  가령 
자원이 실제로는 5분간의 가치가 있다고 가정하자. ESS로  5분 이상 과시 행동을 계속하는 
개체가 있다면, 5분 이하밖에 계속 못하는 개체도 있고, 또 꼭 5분간만 계속하는 개체도  있
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 경우 어느 정도의 시간을 계속할 작정인가를 상대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분명히 지구전에서는 포기하려고 하는 눈치를 상대가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
엇보다도 중요하다. 수염을 조금 움직이든지 하여 패배를 드러내고  말까 하고 생각하고 있
을 때에 실수하여 그 눈치를 표출하게 되면 그 순간  불리하게 된다. 가령 수염을 움직이는 
것이 1분 후에 즉각  공격을 한다는 확실한  징조라면 극히 단순한 승리의  전략일 것이다. 
"상대의 수염이 움직이면 처음의 계획이 무엇이었든 1분간  더 참는게 좋다. 상대의 수염이 
아직 움직이지 않고, 게다가 자기가 포기하려고 했던 시간까지  이제 1분도 안 남았다고 생
각될 깨는 즉각 손들고 그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편이 좋다. 자기의 수염은 결코 부동
이다."이런 이유로 자연 선택은 수염을 움직이는 것이나 그  밖의 행동을 표출해 버리는 짓
을 즉시 벌할 것이다. 무표정한 얼군(포커 페이스)이 진화해 갈 것임에 틀림없다.
  철저하게 거짓말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무표정한 얼굴을 하는 편이 좋은 것은 왜 그럴까? 
역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안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개체가 지구전에서 정말
로 장시간 버틸 각오가 있기 전에는 목의 털을 세우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자. 상대의 반대
되는 계략이 진화될 것이다. 즉, 상대가 목털을 세우면  즉시 굴복하는 작전이다. 그러나 여
기서 거짓말이 진화되기 시작한다. 실제로는 장시간 버틸 각오가  없는 개체가 언제나 털을 
세우고 용이하게 빨리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거짓말쟁이의 유전자가 퍼져나
갈 것이다. 드디어 거짓말쟁이가 대세를 차지하면 선택은 이제  그 허점을 깨닫고 도전하는 
개체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이 때문에 거짓말쟁이는 다시 수가 감소할 것이다. 지구전에서
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진화적으로 안정하다고는 할 수 없다. 무표정
한 얼굴은 진화적으로 안정적이다. 결국 항복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돌발적이고 예측 불가능
한 일이다.
        자기 보호를 위한 싸움
  우리가 지금까지 검토해 온  것은 메이나드-스미스가 '대칭적'다툼이라고  하는 것뿐이다. 
즉, 경쟁자끼리의 싸움에 있어서 전략 이외의 모든 것은 똑같다고 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매파와 비둘기파는 같은 강도였고, 무기나  갑옷으로 동등하게 무장했고, 승리에 의해  얻은 
것도 동등한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이것은 모델을 이용하기에는  편리한 가정인데 별로 현
실적은 아니다. 그래서 파커와 메이타드-스미스는  비대칭적인 투쟁을 생각해 보았다. 예컨
대 만약 전투 능력과 몸의 크기가 개체에  따라 다르며 각 개체가 자기와 비교해서 상대가 
어느 정도로 큰가를 잴 수 있다고 하면 이 일이 거기에 생기는 ESS에 영향을 미칠까? 아마
도 영향을 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비대칭적인 다툼에는 세 가지의 주된 것이 생각된다. 첫째는 지금 말한 대로 몸의 크기라
든가 전투 능력이 개체에 EK라 틀리는 경우이다. 둘째는  승리에 의해 얻어지는 이익의 크
기가 개체에 따라 틀릴 경우이다. 가령 아무리 참고 버텨도  여생이 짧은 노인은 앞으로 긴 
생식 생활을 바라보고 있는 젊은이와는 달라서, 비록 부상을 입었다  해도 질 수는 없는 입
장일 것이다. 세 번째는 이 설의 색다른 결론인데, 완전히 임의적이고 일견하여 관계가 없는 
듯이 보이는 비대칭이 ESS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비대칭의 덕택으로 다
툼이 급속히 수습이 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경쟁자의 한쪽이  더러는 다른 쪽보다 
먼저 싸움터에 도착해 있을 경우 대개 이것에  해당된다. 그들을 각각 '거주자'와 '침입자'라
고 부르기로 하자. 논의의 편의상, 거주자나 침입자에게  일반적인 이익은 없다고 가정한다. 
후술하거니와 이 가정이 실제는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이유가  있으나 이것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가령 거주자가 침입자보다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이유는 없어도 이 비
대칭 그 자체에 의해 정해지는  어떤 ESS가 진화한다는 점이다. 간단한  예를 들면 인간이 
크게 떠들지 않고도 동전을 던져 분명하게 다툼의 결판을 내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거주자와 침입자
  조건 전략, 즉 "자기가 거주자라면 공격하고, 침입자라면 퇴각하라."라는 것이 ESS일지도 
모른다. 또 비대칭이 임의라고 하는 가정이 있으므로  "거주자라면 퇴각하고 침입자라면 공
격하라."라는 역의 전략이 안정적일 가능성도 있다. 어떤 개체군에 있어서 이 두  개의 ESS 
중 어떤 것이 채용될지는 어느 쪽이 먼저 대세를 차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대부분의 개체는 
벌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에 의하면 그것이 ESS인 것이다.
  이를테면 개체가 '거주자가 이기고  침입자가 도망'이라는 전략을  취한다고 하자. 이것은 
그들이 싸움의 반은 이기고 반은 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들은 결코 다치지 않고 시
간도 허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다툼이 임의의 규정에 따라 즉시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에 새로운 돌연변이의 반역자가 나타났다고 하자. 그는  항상 공격하며 결코 물
나지 않는 순수한 매파 전략을 취한다고 하자. 상대가 침입자일 경우에는 그가 이길 것이다. 
상대가 거주자하면 부상이라는 큰 위험을 당하게 된다.  평균하면 그는 ESS의 임의의 규칙
에 따라서 행동하는 개체보다 득점이  낮아진다. "거주자라면 도망하라. 침입자라면  공격하
라." 라는 역의 규정을 시도하려고 하는 반역자는 더욱 나쁘다. 그는 때때로 부상을 당할 뿐
만  아니라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무언가 우연한 일로 인하여 이 역의 규정에 따르
는 개체가 대세를 잡을 수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때에 그들의 전략은 안정된 규범이 
되어 이에서 벗어난 자는 벌을 받는다. 한 개체군을 여러  세대에 걸쳐 관찰하다 보면 때마
침 한 안정 상태에서 다른 안정 상태로 돌변해 버리는 모습을 보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생활에 있어서 정말 임의의 비대칭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거주자
는 대개 침입자보다 실제로 유리한 입장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 토지의 지형을 잘 알고 
있다. 또 거주자가 오래도록 거기에 있었음에 반해 침입자는  싸움터에 출전해 왔기 때문에 
숨을 죽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연계에서 두 개의 안정  상태 중 "거주자는 이기고 침입자
는 진다."라는 상태의 편이 보다 가능성이 높다는 데는 더 깊은 이유가  있다. 즉 "침입자가 
이기고 거주자가 진다."라는 역의 전략은 자기 붕괴를 초래할 경향을 본래 가지고  있다. 메
이나드-스미스는 이것을 '역설적 전략'이라고 했다.  이 역설적 ESS의 상태에  있는 개체군 
내의 개체는 항상 거주자로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즉, 어떤 다툼에 있어서도 
항상 침입자인 양 애써 노력할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움직이고 
돌아다니는 수밖에 없다. 그 시간과 에너지의  손실은 따로 하고라도 이 진화 경향은  '거주
자'라는 범주를 자연히 소멸시키는 성이 된다. "거주자는 이기고 침입자는 진다."라는 또 한
편의 안정 상태에 있는 개체군에서는 자연 선택이 거주자가 되려고 애쓰는 개체에게 유리하
게 작용한다. 각 개체에게 있어 이것은 어떤 구역에 틀어박혀  가능한 한 그 곳에서 이탈하
지 않고 그 곳을 '지키자'라고 할 것이다. 지금은 잘  알려져 있거니와 이와 같은 행동은 자
연계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영역의 방위'라고 한다.
      가시고기의 영역 싸움
    이 형의 행동적 비대칭에서 내가 알고 있는 가장 훌륭한 실례는 우수한 행동학자인 틴
버겐(Niko Tinbergen)이 스스로 터득한 천재적인 단순 명쾌한 실험에  의해 제시한 것이다. 
그는 두 마리의 큰 가시고기 수놈이 들어 있는 수조를  갖고 있었다. 물고기는 각기 수조의 
반대측의 구석에 집을 짓고 자기 집 둘레의 영역을 '지키고 '있었다. 틴버겐은 이 두 마리의 
물고기를 각각 큰 유리 시험관에 넣어 이 두 개의 시험관을 가지고 물고기들이 시험관을 통
하여 싸우려고 하는 것을 관찰했다. 그래서 매우 흥미 있는 결과를 얻었다. 두 개의  시험관
을 수놈 A의 집에 가까이 접근할 경우에는 A가 공격 자세를  취하고 수놈 B는 퇴각하려고 
했다 그런데 시험관을 수놈 B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니까 형세는 역전됐다.  틴버겐은 단순히 
두 개의 시험관을 수조의 한 끝으로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수놈이 공격하고 어떤 수놈
이 퇴각하는가를 알 수가 있었다. 어느쪽 수놈도 분명히 단순한 조건 전략을,  즉 "거주자가 
되면 공격하고 침입자가 되면 퇴각한다."라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생물학자는 자주 영역 행동의 생물학적 '이점'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에는 여러 가지의 
가능한 답이 있는데 그 중의 몇 가지에 대해서는 후에 언급하겠다. 그런데 이제 이 질문 자
체가 무용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영역 '바위'란 그저 두 개체와 토지 구확과의 관
계를 정하는 도착 시간의 비대칭  때문에 생긴 ESS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임의가 
아닌 비대칭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몸의 크기와 일반적인  전투 능력일 것이다. 체구가 크다
는 것은 필히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고 할 수 없으나 역시 그  하나이
기는 하다. 싸움에 있어 큰 편이 항상 이긴다면, 그리고 각 개체가 자기가 상대보다 큰지 작
은지를 화실히 알고 있다면 무언가의 의미 있는 전략은 단  하나 밖에 없다. 즉 "상대가 자
기보다 크면 도망가라. 자기보다 작은 놈은 공격하라." 크기의 차이가 그다지 확실하지 못하
게 되면 일은 다소 복잡해진다. 체구가 크다는 것이 조금이라도 유리하다면 지금 말한 전략
은 아직 안정하다. 그런데 부상의  위험이 크게 되면 제 2의  '역설적 전략'도 생각된다. 즉, 
"자기보다 큰 놈에게 싸움을 걸고 작은 놈은  피하라!"이 전략이 역설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것은 완전히 상식에 반한다고  생각된다. 이 전략이 안정하다는 이유는  이것이
다. 모두가 역설적 전략을 취하는 개체군에서는 누구도 부상을 입지 않는다. 이것은 모든 다
툼에 있어서 관계자의 한쪽, 즉 몸이 큰 편이 항상 도망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작은  상대를 
괴롭힌다는 '상식적'전략을 취하는 평균적 크기의 돌연변이가 나타나면 그 개체는  맞부딪친 
상대의 반수와 격한 다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자기보다 작은 상대에게 부딪치
면 공격을 하고 그 작은 개체는 역설적 전략을 취하고 있으므로 심하게 응전해 오기 때문이
다. 상식적 전략파는 역설적 전략파보다  이길 확률은 높으나 한편 저서  크게 다칠 위험도 
많이 있다. 개체군의 대부분이 역설적 전략을 취하고 있으므로  상식적 전략자는 어느 역설
적 전략자보다 다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사회성 거미
  역설적 전략은 가령 안정하다고 해도 아마도  이것은 학문적으로 흥미 있는 것에  불과하
다. 역설파가 상식파보다 높은 득점을 올릴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수적으로 상식파보다 현저
히 많을 때에 한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상태가 처음에 어떻게 해서 생길 수 있는가를 상
상하기는 어렵다. 가령 그것이 생겼다 해도 개체군 내의 역설파에 대한 상식파의 비율이 아
주 조금 증가하는 것만으로 또 하나의 ESS, 즉 상식파의 ESS '유인 지역'에 들어가 버리고 
말 것이다. 이 경우 유인 지역이라는 것은 상식파가 유리하게 되는 개체군 비율의 집합으로 
정의되는 영역이다. 즉, 한 개체군이 이 유인 지역에 도달하면 상식적 전략의 안정점을 향하
여 피할 수 없이 말려드는  것이다. 자연계에서 역설적 ESS의 예를  발견하는 것은 흥분할 
만한 일이기는 하나 정말로 그것을 기대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나는 너무 빨랐던  것 같
다). 이 글을 쓴 후에 나는 메이나드-스미스 교수로부터 버제스가 멕시코 산의 사회성 거미
인 Oecobius civitas의 행동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쓴 것을 들었다. "이  거미는 어떤 방해물 
때문에 숨었던 장소에서 쫓겨나면 바위 위로 올라가 몸을 숨길 수 있는 빈틈을 찾지 못하면 
같은 종의 다른 개체의 집으로 달려든다. 도망쳐 들어온 침입자가 들어왔을 때에 거기에 거
주하던 거미는 침입자를 공격하지 않고 바로 나와 자기의 숨을  곳을 새로이 찾는다. 이 때
문에 일단 최초의 거미가 쫓겨나면 잇따른 도주가 계속되어 이것이 수분 사이에 종종 그 집
단의 개체가 자기의 살림집에서 옆집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사회성  거미", Scientific 
American 1976년 3월호)
        순위제
 만약 동물이 과거의 싸움에 관해 무언가 기억하고 있다면 어떠할까? 그것은 그 기억이 개
별적인 것인가 일반적인 것인가에 따라 다르다. 귀뚜라미는 과거  싸움에서 있었던 일에 대
해서 일반적인 기억을 갖고 있다. 최근에 많은 싸움에서  승리한 귀뚜라미는 매파적으로 된
다. 최근 계속 지기만 한 귀뚜라미는 비둘기파적으로 된다. 이것은 알렉산더(R.D. Aleander)
에 의해 자세히 제시됐다. 그는 모형 귀뚜라미를 사용하여 진짜귀뚜라미를 기습했다. 이  처
리를 가한 후로 그 귀뚜라미는 다른 진짜 귀뚜라미와의 싸움에서 지기만 했다. 각각의 귀뚜
라미는 자기의 개체군 내의 평균적 개체의 전투 능력과 비교한 자기의 전투 능력을 평가하
기를 부단히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과거의 싸움을  기억하는 귀뚜라미와 같은 동
물이 밀집된 집단을 이루고 지내면 모종의 순위제가 발달하는  것 같다. 관찰자는각 개체를 
순번대로 나열할 수가 이TEk. 순위가 낮은 개체는 순위가  높은 개체에게 항복하는 경향이 
있다. 개체끼리 서로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승리에 습관된 개체는 더욱더 이
기에 되고 패배에 버릇이 된 개체는 정해 놓고 지기만  한다는 것이 형상의 모두이다. 처음
에는 완전히 두서없이 이기고 지고 하다가도 자연히 어떤 순위에 따라 가는 경향이 있는 이
것은 집단 내의 심한 다툼을 점차로 줄여 가는 효과가 있다.
      ESS와 순번제
  이상과 같은 현상은 일종의 '순위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순위제라는 말을 
개체가 인지하고 있을 때에만 쓰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과거 싸움의 기억은 
일반적이라기보다 개별적이다. 귀뚜라미는 서로  상대를 개체로서 인지하고  있지는 않으나 
닭이나 원숭이는 인지하고 있다. 어떤 원숭이에게 있어 과거에 자기를 이긴 적이 있는 원숭
이는 앞으로도 자기를 이길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이럴 때의 개체로서의 최선의 전략은 이
전에 자기를 이긴 적이 있는 개체에 대해서는 비교적  비둘기파적으로 행동한다. 이전에 맞
부딪친 적이 없는 한 떼의 닭을 서로 맞세워 놓으면 보통은 마냥 싸움질을 한다. 그러나 때
가 지나면 결국 싸움은 약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귀뚜라미의  경우와 같은 이유에서는 아니
다. 닭의 경우, 각 개체는 서로 다른 개체에  대한 '자기의 지위를 배우기' 때문이다. 이것은 
종종 집단 전체에게 좋은 거이다. 그 증거로서 주목되고 있는 것은 순위가 확립되어 있어서 
심한 싸움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닭의  집단에서는 끊임없이 구성원이 갈리고 있으므로  그 
결과 항상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집단보다 산란율이 훨씬  높다는 것이다. 생물학자는 흔히 
숭위제의 생물학적 이점, 또는 '기능'은 집단 내의 공개적인 공격을 줄이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 방법은 옳지 않다. 순위제 그  자체는 진화적 의미로 '기능'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집단의 특성이지 개체의 특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집단 수준에
서 볼 때 순위제의 모양으로 나타나는 개체의 행동 패턴에는 기능이 있다고 할는지 모르나 
'기능'이라는 말을 아주 버리고, 개체의 인지와 기억이라는 두 개의 조건을 가미한 비대칭적
인 다툼의 ESS라는 점에서 이 문제를 고찰하는 편이 훨씬 좋다.
  지금까지 같은 종의 개체간의 다툼에 관해  고찰해 왔는데 종간의 다툼에 관해서는  어떨
까? 처음에 말한 바대로 다른 종의 구성원은 같은 종의 구성원에 비하면 그렇게까지 직접적
인 경쟁 상대는 아니다. 이 때문에 다른 종간에 자원을 가지고 다툼이 생기는 것은 적당 생
각되며 그 예상에는 확증이 있다. 가령 울새가 다른 울새에 대해서는 영역을 지키나 박새에 
의 영역 지도를 중복해서 그릴 수가 있다. 이 두 종의 영역은 완전히 불규칙하게 겹쳐저 있
다. 그들은 따로따로 다른 행성에 살고 있는 것 같다.
      ESS와 동종 사냥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다른 종의 개체들도 매우 심하게 충돌한다. 가령 사자는 영양을 잡
아먹고 싶어하나 영양은 자기 몸에 관해 전혀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보통 자원
을 걸고 다툰다고 볼 수 없으나 이론적으로 말하면 왜 인정되지 않는지 이해가 안 된다. 이
때의 자원은 고기다. 사자의 유전자는 자기의 생존 기계의 먹이로서 고기를 '좋아하고 있다.' 
영양의 유전자는 자기의 생존 기계를 위해 일하는 근육이나 기관으로서  그 고기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 두가지 고기의 용도는 서로 양보할 수 없으므로 이권의 충돌이 생긴다.
  자기 종의 구성원도 역시 고기로 되어 있다. 그러면 왜  서로 잡아먹는 것이 비교적 드문
가? 검은 머리갈매기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성숙한 것이 때때로 자기  종의 새끼를 먹는다. 
성숙한 육식 동물이 가지 종의 다른 성숙한 개체를 먹으려고 의도하고 적극적으로 추격하는 
일은 결코 없다. 왜 없을까? 우리는 여전히 진화에 대한 '종의이익'이라는 견해에 너무 익숙
해져 있어서 "사자는 왜 다른 사자를 사냥 않는가?"라고 하는 등의 아주  타당한 질문을 잊
어버리기가 쉰다. 또 하나 절대로 들을 수 없는 타입의 우수한 질문에 "영양은 왜 반격하지 
않고 사자로부터 도망하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
  사자가 사자를 잡지 않는 것은 그것이 그들에겐 ESS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 먹기 전략
은 앞의 예에서 매파형 전략과 같은 이유로 불안정하다. 보복의 위험이 너무도 크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다른 종간의 다툼에는 별로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대개 표적의 동
물이 보복을 않고 도망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것은 다분히  다른 종의 두 개체간의 상호 
작용에 있어서 같은 종의 구성원간의 경우보다  큰 비대칭이 조립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서로간의 다툼에서 큰 비대칭이 있을 때 ESS는 항상 그 비대칭에 의존하는 
조건 전략으로 되는 것  같다. 다른 종간의  다툼에서는 이용되는 비대칭이  많이 있으므로 
"작으면 도망하라, 크거든 공격하라."라는 식의 전략이  매우 진화되기 쉽다. 사자와 영양은 
다툼에 본래 존재하는 비대칭이 부단히 증대하도록  강조해 온 진화적 방식에 의해  일종의 
안정 상태에 도달해 있다. 그들은 각각 추격의 수완과 도주의 술책에 고도로 숙련되어 있다. 
사자에게 '맞서는' 전략을 취하는 돌연변이의 영양은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가고 있는 영양보
다 잘 될 것이 없을 것이다.
      ESS 개념
  우리는 다윈 이래의 진화론에 있어서 ESS  개념의 발명을 가장 중요한 진보의  하나로서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 개념은 이권 충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해당된다. 
즉, 그것은 거의 모든 장면에 통용된다. 동물 행동의 연구자는 '사회 조직'이라고  하는 것에 
관해 말하는 습관이 되어 있다. 사회 조직은 스스로의  생물학적 '이점'을 갖춘 독자적 실체
로서 취급되는 수가 너무도 많다. 지금까지 든 예로 말하면 '순위제'가 그것이다. 생물학자가 
사회조직에 관해 말한 여러 설의 배후에는 반드시 그룹 선택주의자의 가설이 숨어 있는 것
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메이나드-스미스의 ESS 개념이야말로 독립된  이기적인 단위의 
집합이 어떻게 해서 단일의 조직하된 전채를 닮게 되는가를 비로소 분명히 가르쳐 주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은 종 내의 사회 조직뿐만 아니라 많은 종으로 이루어진 '생태계'나 '군집'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다고 본다. 여하튼 나는 ESS 개념이  생태학에 혁명을 가져오게 될 것
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개념은 제 3장에서 기술했다. 좋은 팀워크를  필요로 하는 조정 선수(체내의 유전자에 
해당)의 예에서 생긴 문제에도 적용된다. 유전자는 그것 단독으로 '우수한 것'으로서가 아니
고 유전자 풀 내의 다른 유전자를 배경으로 해서 일할 때 우수한 것으로 되면 선택되어  남
는다. 우수한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와  양립하여 서로 도와 몇 세대에  걸쳐서 몸의 공유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식물을 씹는 이빨의 유전자는 초식  동물의 유전자 풀 내에서는 우수
한 유전자이나 육식 동물의 유전자 풀에서는 나쁜 유전자인 것이다.
  양립할 수 있는 한 세트의 유전자가 하나의 단위로서 정리하고 선택되는 것은 충분히 상
상할 수 있다. 제 3장에서 본 의태하는  나비의 경우에는 정말로 그랬었던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ESS 개념의 훌륭한 정도는 독립적인  유전자의 수준에서 선택에 의해 같은  결과가 
쉽게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시켜 주는 점이다.  유전자끼리는 같은 염색체상에서 연관
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실제로 이 점을 설명할 때 조정 선수의 예는 부적합하다. 이 점에서 가장 적합한 것은 다
음과 같은 예이다. 실제로 레이스에 이기기 위해 보트 팀의 선수끼리가 말로서 자기의 활동
을 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자.  또한 코치가 마음대로 하는 선수  풀에서 어떤 선수는 
영어밖에 못하고 어떤 선수는 독일어밖에 못한다도 하자. 영국인이 항상 독일인보다 배젓기
가 낫든지 서툴든지 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므로 혼합의 보트 팀은 
영국인만의 보트 팀이나 독일인만의 보트 팀에 비하면 이기게 되는 횟수가 적게 되기가 쉽
다.
  코치는 이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그는 그저 선수를 마구 섞어서 이긴 보트에 탔던 선수에
게 점수를 주고 진 보트에 탔던  선수는 점수를 뺀다. 이기는 선수 풀에  종종 영국 선수가 
많으면 보트에 타는 독일인은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함으로써 그 보트가 지는 원인이 되기 쉽
다는 것이다. 반대로 선수 풀에 종종 독일인 쪽이 많을  때에는 영국인이 레이스에 지게 하
는 원인이 되는 경향이 있다.  종합적으로 최상의 보트팀이 이루어지는 것은  두 개의 안정 
상태가 하나가 될 때, 즉 전원이 영국인이든지 전원이 독일인이든지 하는 상태이다.  겉으로 
보면 그것은 마치 코치가 언어별로 나눈 그룹을 단위로 하여  선택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
러나 그는 그럴 리가 없다. 그는 레이스에 이기는 외견상의 능력으로 한 사람 한 사람 선수
를 선발하는 데 불과하다. 한 선수가 레이스에 이기는 경향은  종종 후부자의 풀에 어떤 다
른 선수가 있는가에 달려 있다. 소수파의 후보는 자동적으로 벌을 받으나 그것은 젓는 것이 
서툴러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이 소수파이기 때문일 뿐이다. 이처럼 유전자가 서로 양립되기 
때문에 선택됐다는 사실이 있다고 해서 -나비의 예에서  본 것같이- 유전자의 집단이 단위
로 되어 선택된다고 생각해야만 하는 이유가 필히 있는 것은 아니다. 단일 유전자라고 하는 
낮은 수준에서의 선택이 더 높은 수준에서의 선택이라는 인상을 주는 수도 있다.
  이 예에서 선택은 단지 적합성만을 선택하고 있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서로 보완해 주는 
유전자가 선택되는 경우이다. 유추해서 말하면 이상적으로  균형잡힌 보트 팀은 오른손잡이 
네 사람과 왼손잡이 네 사람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하자. 그리고 이때에도  또한 코치는 이 
사실을 모르고, 맹목적으로 선수의 '성적'을 기준으로 하여 선발하는 것으로  가정하자. 그런
데 선수 풀에는 종종 오른손잡이가 많기 때문에 왼손잡이의 선수는 모두 유리한 상태에 있
다. 즉, 그는 자기가 타고 있는 보트를 이게 하는 경향이 있어서 우수한 선수인 것처럼 보인
다. 반대로 왼손잡이가 많은 풀에서는 오른손잡이가 유리함에 틀림없다. 이 것은 비둘기파의 
개체군 내에서 성공하는 매파의 개체나 매파 개체군 내에서 성공하는 비둘기파 개체의 경우
와 같은 것이다. 다른 점은 비둘기파와 매파의 예는 개체 간의, 즉 이기적인 기계 간의 상호 
작용임에 비해 이때에는 체내의 유전자간의 상호 작용이라는 점이다. 코치가 맹목적으로 '좋
은' 선수를 뽑아도, 결국은 왼손잡이 네 사람과 오른손 잡이 네 사람으로 되는 이상적인  보
트 팀이 된다. 그것은 마치 그가 균형잡힌  한 벌의 단위로서 그들을 몽땅 뽑은 양  보인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 그는 한 수 아래의 수준이고, 즉  개개의 후보 수준으로 선택되고 있
다고 생각하는 것이 명쾌하고 분명하다. 왼손잡이 네 사람, 오른손잡이 네 사람이라는  진화
적으로 안정된 상태(여기서 '전략'이라는 말은 오해를 갖기 쉽다)는 단순히 외견상의 성적에 
기초하는 낮은 수준에서의 결과로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유전자 풀은 유전자의 장기적인 환경이다.  유전자 풀에서 살아 남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것이 '우수한 '유전자인 것이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다. 관찰됐다는 사실조차 없다. 그것은 
동어 반복이다. 흥미를 끄는 문제는 유전자가 좋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라는 것이다. 나는 첫 
접근으로서 유전자가 좋다는 것은 유능한 생존 기계, 즉 몸을 만드는 능력이라고 썼다. 그러
나 이제는 이 견해에 단서를 붙여 두지 않을 수 없다. 유전자 풀은 진화적으로 안정된 유전
자의 세트, 즉 어떠한 새로운 유전자에 의해서도 침입받지 않는 유전자 풀로 정의되는 상태
에 도달할 것이다. 돌연변이나 재조합이나  이입에 의해 생기는 새로운  유전자는 대부분이 
자연 선택에 의해 벌을 받아 즉시 도태될 것이다. 그리고 진화저긍로 안정한 유전자 세트는 
복원된다. 때마침 어떤 새로운 유전자가  그 세트에 침입하는 데 성공하여  유전자 풀 내에 
퍼져나가는 데 성공하는 수도 있다. 그러면 불안정한 과도기를  거쳐 드디어 진화적으로 새
롭고 안정한 조합을 이룬다. 매우 적게  진화가 된 것이다. 공격전략의 예에서 말한  것처럼 
개체군에는 둘 이상의 대체 가능한 안정점이  있어 때때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돌연  비약이 
일어나는 수도 있다. 진화란 부단한 상승이 아니라 오히려  안정된 수준에서 안정된 수준으
로의 불연속인 전진의 반복인 것 같다.  마치 그 개체군 전체는 한 개의  자동 조절 단위와 
같이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것은 착각이다. 실제로 그것은 단일  유
전자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선택에 의해 생기고 있는 것이다. 유전자는  '성적'으로 선택된다. 
그러나 이 성적은 진화적으로 안정한 세트, 즉 현재의 유전자 풀이라는 배경 중에서의 행동
에 기초하여 판정되는 것이다.
  메이나드-스미스는 모든 개체에서 볼 수 있는 공격적 상호 작용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사태를 극히 분명히 할 수 있었다.  매파와 비둘기파의 안정된 비율을 생각하는 것은  쉽다. 
몸은 큰 물체이므로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각의 몸에 있는 유전자간의 이
와 같은 상호 작용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진화적으로 안정된 세트 중의, 즉 유전자  풀 
내에서의 유전자의 중요한 상호 작용의 대부분은 개개의 몸  속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들의 
항소 작용을 눈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들은 세포 내에서 특별히  발생 중인 배의 세포 내에
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잘 통합된 모이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이기적인 유전자의 진화
적으로 안정된 세트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주요 테마인 동물 개체간의 상호  작용의 수준으로 말머리를 돌려야겠다. 
공격을 이해하려면 개개의 동물을 독립된 이기적인 기계로 보은  것이 적절하다. 이 모델은 
관계하는 개체끼리가 형제자매, 사촌끼리, 친자와 같은 근친자일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
이다. 근친끼리는 그들의 유전자의 대부분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개의 이기적
인 유전자의 충성심은 다른 몸 사이에 분배되어 있다. 이것에 관해서는 다음 정에서 설명하
도록 하자.

            제6장
          유전자의 친족 관계
        이기적 유전자
  이기적인 유전자란 무엇일까? 그것은 다만 DNA의 물리적인 작은 조각만은 아니다. 원시 
수프에서 그랬듯이 그것은 세계에 분포하고 있는 개개의 특별한 DNA  조각의 모든 복제이
다. 원할 때 언제든지 알맞은 용어로 고칠 수 있는  자신이 없다면 부정확함을 안 후에라도 
유전자가 의식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양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개개의  이기적인 유전자의 목적은 무엇인가?" 유전자 풀 
속게 다시금 수를 늘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답할 수 있다. 그것은, 즉 개개의 유전자는  기본
적으로 그것이 생존하고 번식하는 장소인 몸을 프로그램하는 것을 도와줌으로써 이것을  행
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다수의 다른 개체 내에 동시에 존재한다. 분산된  존재라
고 하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장에서 중요한 것은  유전자가 남의 몸에 있는 자
기 자신의 복제까지도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개체의 이타주
의로 나타날 것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전자의 이기주의의 산물인 것이다.
      알비노 유전자
  인간의 알비노(albino;선천성 색소 결핍증)에 관한 유전자를 생각해 보자. 실제로 알비노를 
일으키는 유전자는 여러 개가 있으나 여기에서는 그 중 하나에 대해서만 말하기로 하자. 이 
유전자는 열성이다. 즉, 그 사람이  알비노가 되려면 이 유전자가  배수로 존재해야만 한다. 
이것은 약 2만 명 중 한 사람의 비율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약  70명 중 한 명은 이 유전자
를 단 하나 가지고 있는데, 이들  개체는 알비노가 아니다. 알비노 유전자와 같은  유전자는 
많은 개체에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론상 자기가 머물고 있는 몸이 다른 알비노 개체에 대
해(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이타적으로 행동하도록 프로그램함으로
써 유전자 풀 속에서 자기의 생존을 도울 수가 있다. 알비노 유전자가 들어 있는 몊 사람이 
죽음으로써 같은 유전자를 가진 다른 몸의 생존을 도와주는  것이라면, 알비노 유전자는 만
약 그렇게 될지라도 매우 다행 한 일일 것이다. 만약 알비노 유전자가 그것을 가진 한 몸이 
다른 몸의 10개의 알비노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그 이타주의가 죽더라도 유전자가 풀 속
의 알비노 유전자의 수의 증가로 충분히 보상되는 것이다.
  그러면 알비노 사람끼리는 특히 친절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까? 아마도 실제로는 
'아니다'라는 답일 거이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유전자를 의식적 존재로 생각
했던 비유를 그만두어야만 하겠다. 이  문맥에서 그것은 분명히 오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다소 긴 이야기가 될지는 몰라도 진지한 말로 바꿔 옮겨야겠다. 알비노 유전자가 실제로 살
고 싶다든가 다른 알비노 유전자를 돕고 싶다든가 하는 생각을  할 리는 없다. 그러나 알비
노 유전자가 종종 그것을 지닌 몸이  다른 알비노에 대해 이타적으로 행동하도록  시켰다면 
결과로서 싫더라도 자동적으로 유전자 풀 내에서 수가 불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 유전자가 몸에 대해 두 개의 독립된 효과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심한 백색 피부라는 보통의 효과를 주는 것만은 아니다.  심한 백색 피부를 한 사람
에 대해 선택적으로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경향까지도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이중 
효과를 가진 유전자가 만일 존재한다면 그것은 개체군 내에서 대단히 성공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래서 제 3장에서 강조한 대로 유전자에 다형질 발현  효과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백
색 피부이든 초록색 수영이든 그 밖의 유별한 특징이든 간에 겉으로 보이는 '표시'와 그  눈
에 잘 띄는 표시의 주인에게 특히 친절하게 하는 경향을 동시에 발현시키는 유전자가 생기
는 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단, 가능하다고는 하나, 가능성이 특별히 높을 리는 없다.  같
은 식으로 초록색 수염은 살을 파고들며 자라는 타입의 발톱이나 그 밖의 어떤 특징을 발달
시키는 경향과 결부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고, 초록색 수염에  대한 호기심은 프리지어의 냄
새를 맡는 능력이 없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같은 유전자가 있는 
표시와 그 표시에 대한 정확한 이타주의와의 양쪽을 생기게 하는 가망성은 아마도 없을 것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록색 수염 이타주의 효과'는 이론상 가능하다.
      이타적 유전자는 번영한다
  초록색 수염과 같은 임의의 표시는 유전자가 다른 개체 내에서 자기 복제를 '인지'하는 하
나의 수단이다. 다른 것에도 어떤 수단이 있을까? 직접 가능한 수단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타적 유전자의 소유주는 단순히 이타적  행위를 한다는 사실에 의해 알  수가 있다. 어떤 
유전자가 "몸아, A가 물에 빠진 자를 건지려다 도로 빠지면 뛰어들어 도와라."라고 하는 말
을 '했다'고 하면 이 유전자는 유전자 풀 속에서 번영할 것이 틀림없다. 이와 같은 유전자가 
성공하는 이유는 A가 같은 생명 구조 이타적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확률이 평균보다 높다
는 것이다. A가 다른 누군가를 도우려고 했다는 것은 초록색 수염과 같은 일종의 표시이다. 
그것은 초록색 수염만큼 자의적인 것은 아니나 그러하도 해서 너무 최상의 것으로도 여겨지
지 않는다. 유전자가 다른 개체 내에서 자기의 사본을  '인지하는' 어떤 최상의 방법이 있을
까?
  답은 '그렇다'이다. 근친자-혈연자(kin)-가 유전자를 나누는 확률이 평균보다 높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이 어미가 새끼에 대한 이타주의가 많은 이유일 것이라는 것은 이전부
터 알고 있었다. 피셔(R.A. Fisher), 헐데인(J.B.S. haldane),  특히 해밀턴(W.D. Hamilton)이 
분명히 한 것은 다른 근친자-형제 자매, 조카,  조카딸 그리고 사촌-이게도 같은 것을 적용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열 사람의 근친자를 구원하기 위해 한 사람이 죽었을 경우 혈연 
이타주의 유전자의 한 사본이 없어졌으나 같은  유전자보다 많은 사본이 구조되는 셈이  된
다.
  그러나 '보다 많은 수'라는 것은 다소 애매하다. '근친자'라는 것도 그러하다.  해밀턴이 지
적한 대로 이것은 조금 더 분명히  할 수 있다. 1964년의 그의 두  논문은 지금까지 쓰여진 
사회 동물 행동학의 문헌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정된다. 나는 이들 논문이 동물 행동 학
자들에게 왜 이렇게 무시되어 왔는지 이해가 안 된다(그의 이름은 1970년에 출간된(행동학) 
2권의 중요한 교과서의 색인에조차 없다). 다행히 최근 그의 생각이  추대되기 시작한다. 해
밀턴의 논문은 다소 수학적인데 어느 정도 지나친 단순화라는 대가를 치르면 엄밀한 수학을 
쓰지 않고도 직접적으로 기본 원리를 터득할 수 있다. 우선 계산하고 싶은 것은, 예컨대  자
매와 같은 두 개체가 특정한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확률이다. 
  이제 유전자 풀 전체 중에서 수가 작은 즁전자에 대해 말하기로 하자. 배부분의 사람들은 
서로 관련이 있든 없든 '알비노가 되지 않기 위한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 이 유전자가 그
와 같이 많은 것은, 자연계에서는 알비노가 알비노가 아닌 것에 비해 생존이 어렵기 때문이
다. 예컨대 태양이 그들의 눈을 부시게 하여 접근하는 포식자를 발견하기 어렵게 하기 때문
이다. 알비노가 되지 않기 위한 유전자와 같이 분명히  '좋은'유전자 알비노 내에 널리 분포
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생각은 없다. 이타주의라는 특수한  작용의 결과로서 유전자가 유
전자 풀에 퍼지는 경우를 설명하고  싶다. 따라서 이 진화 과정의  최초 단계에서는 적어도 
이들의 유전자 수가 적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체군 전체에서도 수가 
적은 유전자조차 가족 내에 서는 흔히 있는 유전자라고 하는 점이다. 나도 개체군 전체에서 
수가 적은 유전자를 많이 가지고 있고 당신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이 색다른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은 실제로 극히 드물다. 그러나 나의 누이가 나와 같은 색다른 유전자
를 가지고 있는 확률은 다소 있으며, 당신의 누이가 당신과 공통의 색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확률은 다소 있으며, 당신의 누이가 당신과 공통의 색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확률
도 같은 정도이다. 이 경우 확률은 정확히 50%다. 그 이유는 쉽게 설명된다.
        유전
  당신이 유전자 G의 사본 1개를 가지고 있다고 하자. 그것은 당신의 부친이나 모친 중  어
느편에서 받았음에 틀림없다(편의상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여러 가지의 가능성, 즉 G가 새로
운 돌연변이일 경우와 양친이 모두 그것을 가지고 있을 경우, 또는 양친 중 누군가가 그 사
본을 2개 가지고 있는 경우 등은 무시하기로 한다).  이 유전자를 당신에게 준 사람이 부친
이었다고 하자. 이 경우 부친의 체세포는 모두 G의 사본을 1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여기서 인간이 정자를 만들 때에 자기의 유전자를 절반씩  나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러므로 당신의 누이를 만든 정자가 유전자 G를 받았을 확률은 50%이다. 한편  당신이 모
친으로부터 G를 받았다고 하면, 같은 이유로 난자의 반수가 G를 가지고 이썼을 것이먀,  누
이가 G를 가지고 있을 확률 또한 50%이다.  이것은 당신에게 100명의 형제 자매가 있다면, 
그 중 약 50명이 당신과 같은 색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또 당신이 100개
의 색다른 유전자를 갖고 있다면 그 중 약 50개는 어느 형제의 몸에도 있다는 말이 된다.
      근친도
  어느 정도의 친족 관계인 개체에 대해서도 같은 계산이 된다. 중요한 것은 양친과 자식과
의 관계이다. 당신이 유전자 H의 사본을 1개  가지고 있다면 당신 아이들은 어느 아이라도 
그것을 가지는 확률이 50%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생식 세포의 반수가 H를 가지고 있고  어
느 아이도 그 생식 세포의 하나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당신이 유전자 J를 1개 가지고 
있다면 당신이 부친의 J를 가지고 있었을 확률은 50%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의 유전자의 
절반을 부친으로주터,   나머지 절반은   모친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편의상   '근친도
(relatedness)'라는 지표를 쓰기로 하자. 이것은 2인의 친족이 1개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확률을 나타내고 있다. 2인의 형제간의 경우,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의 절반이  다른 
사람에게서도 보이므로 그 근친도는 1/2이다. 이것은 평균적 수치이다. 즉  특정 2인의 형제
에 대해서는 감수 분열의 운 여하에 따라 공유하는 유전자가 이보다 많았다 적었다 할 때가 
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근친도는 반드시 1/2이다.
  매번 하나하나를 최초의 원칙에 따라 세세하게 계산하는 것은  다소 지겨운 일이다. 그래
서 A와 B가 두 개체일지라도 그 근친도를 산출할 수 있는  매우 빠른 규칙을 제시하자. 그
것은 유언장을 만들 때나 자기 가족의 외견상의 닮은 점을 밝히는 데 필요한 것이다. 이 규
칙은 단순한 예라면 무엇에든지 적용되지만 근친 교배가 일어날 때나 후술할 어떤 종의 곤
충에게는 해당될 수 없다.
  우선 A와 B의 공통 조상을 모두 밝혀 보자. 가령 두  사촌끼리의 공통 조상은 그들 공통
의 조부와 조모이다. 공통 조상 중에서 한 사람이 밝혀지면 논리적으로 그의 조상의 조상은 
물론 A와 B 모두에게 공통 조상이다. 그러나 가장 최근의 공통 조상 외에는 모두 무시하기
로 한다. 그러면 사촌끼리의 공통 조상은 그 사람뿐이다. 만일 B가 A의 직계 자손으로 가령 
A의 증손이라면 A자신이 우리가 구하고 있는 '공통 조상'이다.
      세대 간격
  A와 B의 공통 조상이 발견되면 다음과 같은  세대 간격을 세어보자. 우선 A로부터 공통 
조상에 이르기까지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 거기서 다시 B까지 내려간다. 가령 A가 B의 숙
부라면 세대 간격은 3이다. 그래서 공통 조상은 A의 아버지이자  B의 조부가 된다. A를 출
발하면 공통 조상에 부딪치기 때문에 1세대  거슬러 오른다. 거기서 B에 달하기 위해  다른 
쪽에 2세대를 내려가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세대 간격은 1+2=3이다.
  공통 조상을 경유한 AB간의 세대 간격을  알았으면 다음에 그 조상에 관계하는  AB간의 
근친도를 계산하자. 거기에는 세대 간격의 각 단계마다 1/2을 곱하여 간다. 세대 간격이 3이
라면 1/2*1/2*1/2, 즉 (1/2)3이 된다. 특정 조상을 경유한 세대  간격이 g라면 근친도 부분은 
(1/2)ㅎ이다.
  그러나 이것은 AB간의 근친도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공통  조상이 2인 이상 있을 
때는 각각의 조상에 관한 같은 식의 수치를 더해야 한다. 보통 두 개체의 공통 조상은 모두 
세대 간격이 같다. 그러므로 조상의 어떤 한 사람에 대해 AB간의 근친도를 계산할 경우 다
음에 해야 할 것은 조상의 수를 곱하는 것이다. 가령 사촌에게는 공통 조상이 2인 있고,  그 
각각을 경유하는 세대 간격은 4이다. 따라서 그들의 근친도는 2*(1/2)4=1/8이다. A가 b의 증
손이라면 세대 간격은 3이고 공통의  '조상'수는 1(B자신)이므로 근친도는 1*(1/2)3=1/8이다. 
유전적으로 말하면 사촌은 증손과 같다. 이와 같이 당신은 조부(근친도 2*(1/2)3=1/4)와 같은 
정도로 숙부(2*(1/2)3=1/4)와 '닮았다.'
  조부 또는 숙모가 사촌끼리인 먼 친족  관계(2*(1/2)8=1/128)에 서는 A가 가지고 있는 특
정한 유전자를 개체군 속에서 임의로 선택한  개체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확률에  다가간
다. 이와 같이 근친자는 이타적 유전자에 관한 한 지나가는  행인과 같다고 해도 과언은 아
니다. 육촌끼리(근친도1/32)는 어느 정도 가까운 친족일  뿐이다. 사촌끼리는 이것보다는 조
금 가깝다(1/8). 친형제와 친자식은 아주 가깝다(1/2). 그리고 일란성  쌍생아는 자기 자신같
이 가깝다(근친도 1). 숙부와 숙모, 조카와 조카딸, 조부모와 손자, 배다른 형제 자매는 근친
도가 1/4이기 때문에 중간 정도로 가깝다.
      혈연 이타주의 유전자
  그러면 혈연 이타주의의 유전자에 대해 좀더 정확하게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5인의 사촌
을 구조하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버리는 유전자가 개체군 속에 증가하는 일은 없으나 5인의 
형제나 10인의 사촌 때문에 생명을 버리는 유전자의 수는 불어날 것이다. 이타적 자살 유전
자가 성공하는 최소의 필요 조건은 그 유전자가 2인 이상의  형제(또는 자식이나 부모)나 4
인 이상의 배다른 형제(또는 숙부와 숙모, 조카와 조카딸, 조부모, 손자)또는 8인 이상의  사
촌 등을 구하고 죽는 것이다.  이미 이와 같은 유전자는 이타주의자에  의해 구조된 충분한 
수의 개체의 체내에서 살아가며, 이타주의자 자신의 죽음에 의한  손실을 보상받는 셈이 된
다.
  어떤 사람이 상대가 자기와 같은 일란성 쌍생아라는 것을 알면 누구든지 그 사람의 행복
을 자기의 행복과 마찬가지로 중요시할 것이다. 쌍생아 이타주의 같은 것이 있다면 그 유전
자는 어떤 것이나 쌍생아의 쌍방이 필히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 쪽이 다른 쪽을 살리고 영
웅적으로 죽어도 그 유전자는 살아 남는다. 9마리의  무리를 이루는 아르마딜로는 일란성의 
4마리 새끼로 출생한다. 내가 아는  한에서 아르마딜로 새끼에 대한  어미의 영웅적인 자기 
희생의 업적은 보고 되지 않고 있으나  어떤 종류에 강력한 이타주의가 있음이  틀림없다고 
한다. 이것은 누구나 남아메리카에 가서 한 번 보고 올 가치가 있음직하다.
  그러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수고는 혈연 이타주의의 특수한  예임을 알게 된다. 일반적으
로 말하면, 만약 갓난아기인 동생이 고아가 됐을 경우 형제들은 자기의 친자식처럼 어린 동
생을 열심히 돌보아 줄 것이다. 근친도가 똑같이 1/2이기 때문이다. 유전자 선택의 이론으로 
말하면 큰누나의 이타적 행동의 유전자는 부모의 이타주의 유전자와 같은 정도로 개체군 속
에 퍼질 확률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후술하는 여러 이유에서 지나치게 단순화한  형태이다. 
실제로 자연계에서 누나에 의한 수고는 부모의 수고만큼 많지는  않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부모 자식 관계가 형제 자매 관계에 비해 '유전적'으로 특별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부모는 실제로 자식에게 유전자를 건네주는  데 반해 자매간에는 유전
자의 주고 받음이 없다고 하는 지적은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자매는 어느 쪽이나 같은 양
친으로부터 같은 유전자의 복제물을 받기 때문이다.
      혈연 선택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형태의 자연 선택을 그룹 선택(그룹의 생존 차이)이나 개체 선택
(개체의 생존 차이)과 구별하여 혈연 선책(kin selection)이라고  한다. 혈연 선택이 가족 내 
이타주의의 원인이라고 한다. 혈연이 진하면 진할수록 선택이 강하게 작용한다. 이 말이  틀
렸다고 할 수는 없으나, 안됐지만 최근 그것의 오용이 현저하기 때문에 사용을  금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수년간  생물학자는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윌슨(E.O. Wilson)은 
그 밖의 다른 점에서는 훌륭하다고 해도 좋은 그의 저서(사회  생물학)에서 혈연 선택을 통
상의 의미로, 즉 내가 제 1장에서 쓴 의미로 '개체  선택'과  '그룹 선택'과의 중간에 위치하
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분명히  가리키는 그림이 하나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룹 선택은 
윌슨 자신의 정의에서도 개체의 집단 생존에 차이가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확실히 어떤 의
미에서 가족은 특수한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밀턴 설에서 중요한 것은,  가족과 
비가족 간에는 수학적 확률의 문제 이외에는 뚜렷한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해밀턴 설은 동
물이 '가족 구성원' 전원에 대해 이타적으로 행하고 다른 것에게는 이기적으로 행한다는  말
이 아니다. 가족과 비가족 간에 결정적인 하나의 선을 그을 수는 없다. 육촌을 가족에  넣을 
것인지 아닌지를 따질 필요는 없다. 육촌 아들이나 형제에  비해 이타주의를 받을 가능성이 
1/16이 된다는 예상이 있을 뿐이다. 혈연  선택은 절대로 그룹 선택의 특수한  예는 아니다. 
그것은 유전자 선택의 특수한 결과인 것이다.
  윌슨의 혈연 선택의 정의에는 더 중대한 결점이 있다. 그는 고의로 자식을 제외하고 있다. 
자식은 혈연으로 포함시키지 않았다. 물론 그는 자식이 부모의 혈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
으나,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이타적 수고를 설명하기 위해  혈연 선택설에 의뢰하기가 싫었
던 것이다. 말이야 어쨌든 자기 마음대로 정의할 자격이 그에게 있음은 물론이나 이것은 극
히 혼란을 초래하기 쉬운 정의이므로 나는 윌슨이  장래 영향력이 큰 책을 낼 때에 그것을 
변경해 주기를 바란다. 유전적으로 말하면  부모의 수고와 형제 자매의  이타주의는 완전히 
같은 이치로 진화한다. 즉, 어느 경우든  수익자의 체내에 이타적 유전자가 존재 할  확률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 자질구래한 혹평에 관해서는 일반 독자의 용서를 빌며  서둘러 주제로 돌아오자. 지금
까지 나는 어느 정도 단순화했다고 느끼며, 여기서 다소 수정을 해야만 하겠다.  지금까지는 
유전자가 근친도를 확실히 알고 있는 특정  수의 근친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살한다는 
초보적인 수법으로 이야기를 했다. 실제로 동물들이 자기가  구조하는 근친0자의 수를 정확
히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고, 가령 그들이  누가 형제이고 누가 사촌인가를 알 
수 있다고 해도 암산으로 해밀턴의 계산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확실한 자살과 완전한 
생명 '구조'가 실생활에서는 자기  자신과 타인들의 '통계적 사망  위험률'로 치환되어 있다. 
자기의 위험이 매우 적다면 육촌의 자식까지도 구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한편 자기가 구해 
주려고 하는 근친자는 모두 언젠가는 죽을 운명에 있다. 모든 개체에는 보험 계리사가 일정 
오차율로 산출하는 '평균 수명'이 있다. 수명이 짧은 늙은  근친자를 구하는 것은 이 노인과 
근친도가 같으면서 전도가 긴 근친자를 구하는 것에 비해 장래의 유전자 풀에게 주는영향은 
적다.
  우리가 행한 완전히 대칭적인 근친도의 계산은 골치 아픈 보험 통계의 조작에 의해 수정
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유전적으로 말하면 조부모와 손자가  서로에 대해 이타적으로 행
하는 근거는 같다. 그들은 서로 유전자의 1/4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자의 평균 수
명이 더 크다면 손자에 대한 조부모의 이타주의의 유전자 편이 조부모에 대한 손자의 이타
주의 유전자보다 선택상 유리하다. 연고가 먼 젊은이를 원조할  때의 순이익이 연고가 가까
운 노인을 원조할 때의 순이익보다 많다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덧붙여 말하면 물론 조부
모의 평균 여명이 손자보다 항상 적다고는 할 수 없다.  유아 사망률이 높은 종에서는 역이 
맞을 수도 있다).
      개체는 생명 보험업자이다
  보험 통계적으로 가정해 볼 때 개체는 보험업자라고 생각된다.  어떤 개체는 다른 개체의 
생명에 자기의 자산 일부를 투자한다. 또는 '돈내기 걸기'를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는  다른  개체와  자기와의  근친도를  고려하고,  또  보험업자  자신의  '평균  여명(life 
espectancy)'과 비교해 보아 그 개체가 '좋은 피보험자'인가 어떤가를 고려한다. 엄밀히 말하
면 평균 여명이라기보다는 '번식 기대치'라고 하는 것이 낫고  더 엄밀히는 '장래 자기의 유
전자에 필요한 일반적인 능력'이 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타적 행동이 진화기 위해서
는 이타주의자로서의 위험도가 근친도와 수익자로서의 순이익을 서로 합친 것보다 더  작지 
않으면 안 된다. 위험도와 이익은 앞에서 개요를 말 한 복잡한 보험 통계 방법에 의해 계산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설픈 생존 기계가 급히 행하기에는 얼마나 복잡한  계산일까! 위대한 수
리 생리학자인 헐데인까지도(해밀턴보다 먼저 물에 빠진 근친자를 건지는 유전자가 퍼질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한 1955년의 논문 중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두 번이나 빠지려는 사
람을 물에서 건져 낸 적이 있다(내 자신의  위험은 적었으나). 그러나 그때 그런 계산을 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헐데인으로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다행히 생존 기계가 암산
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복잡한 문제에  계산기를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
로 동물은 복잡한 계산을 하고 있는 양 행동하도록 미리 프로그램되어 있을지 모른다.
  이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공을 공중에 던져 올렸다가  다시 잡을 때 사람은 공의 
궤도를 예견하고 일련의 미분 방정식을  푸는 것같이 보인다. 모든 찬반과  예상할 수 있는 
모든 결과를 고려하여 어려운 결정을 행할 때, 사람은 컴퓨터가 하고 있는 것과 기능적으로 
같은 '가중 합계'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생존 기계가 이타적으로 행하는지 어떤지를 결정하는 시뮬레이션을 하기 위하여 컴퓨터를 
프로그램한다면 대개 다음과 같이 일을 추진하면 좋다. 우선 동물이 행하는 이타적 행동 전
부의 일람표를 만든 다음에 이들의 이타적 행동 패턴의 각각에 대해 가중 합계 계산을 프로
그램한다. 모든 이익에는 +기호를, 위험할 때는 -기호를 붙인다. 합계하기 전에 이익과 위험
의 양면에 적당한 근친도를 고려하여  '가중치'를 정한다. 이야기를 간단히  하기 위해 우선 
연령과 건강과 같은 그 밖의 조건은  무시하기로 하자. 어떤 개체이든지 자신에 대한  '근친
도'는 1이기 때문에(즉, 그 개체는 자신의 유전자를 당연히  100퍼센트 가지고 있다) 자신에 
대한 위험과 이익은 전혀 변동이 없다. 어쨌든 하나의 이타적  행동 패턴에 관한 총계는 아
래와 같다. 행동  패턴의 순이익=(자기  이익)-(자기 위험)+(형제의  이익1/2)-(형제의 위험
1/2)+(또 다른 형제의  이익1/2)-(또 다른 형제의  위험1/2)+(사촌의 이익1/8)-(사촌의  위험
1/8)+(자식의 이익 1/2)-(자식의 위험1/2)+등등...
      유전자는 순이익을 지향한다
  합계 결과는 행동 패턴의 '순이익  득점(net benefit score)'이라고 하는 수치이다.  다음에 
그 모델 동물은 자기의 이타적 행동 패턴의 레퍼토리의 각각에 대해 같은 식으로 합계한다. 
최후에 그것은 순이익이 최대로 되는 행동 패턴을 선택하여 실행한다. 가령 전체 득점이 마
이너스라고 해도 최고 득점의 행동을, 즉 가장 작은 불운을 택할 것이다. 어떠한 플러스  행
동에도 시간과 에너지의 소비가 있고, 그것들은 어떤 것도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기
억하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순이익의 득점을  최고로 하는 '행동'이라면 모델 동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매우 단순화된 예를 들어보자. 이번에는 컴퓨터에 의한 시뮬레이션이 아닌 주관적
인 독백식으로 이야기하자. 내가 8개의 무더기 버섯을 발견한 동물이라고 하자. 나는 그  영
양가를 고려하여 그것들이 독이 있을지도 모를 근소한 위험에 대해 어느 정도를 감하고 그
것들이 각각 +6단위(이 단위는 앞 장과  같이 임의의 득점이다)라고 추측한다. 버섯이 크기 
때문에 그 중 3개밖에 먹을 수 없다. 나는 "먹을 것이 있다."라고 소리쳐  나의 발견물을 그 
밖의 누구에게 알려주어야 할 것인가? 들리는 범위에는 누가 있을까? 동생 B(나에 대한 근
친도 1/2)와 사촌 C(근친도 1/8), 그리고 D(특별한 관계는 없고 나에 대한 근친도는 매우 작
아 실제로 0으로 취급)가 있다. 나의 순이익 득점은  내가 발견물에 관해 가만히 있으면 내
가 먹을 수 있는 3개의 버섯에 관해 각각 +6을 더해 합계는 +18이다. 먹이가 있다고 알렸을 
때의 나의 순이익 득점은 계산을 요한다.  8개의 버섯은 우리 4인에게 균등히 분배된다.  내 
자신이 먹은 2개에서 얻은 득점은 각각 +6단위, 즉  합계 +12이다. 그러나 동생과 사촌이 2
개씩 먹었을 때 우리 3인은 공통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므로 내게도 얼마의 득점이 가해진
다. 실제의 득점은 (1*12)+(1/2*12)+(1/8*12)+(0*12)=+19 1/2이  된다. 이기적 행위를 취했을 
경우에 이에 상당하는 순이익은 +18이었다. 비슷하나  답은 분명하다. 나는 동료를 부를 것
이다. 나의 이타주의는 이 경우 나의 이기적인 유전자에 이익을 주는 것이 된다.
  나는 설명을 간단히 하기 위해 개개의 동물이 자기의 유전자로서 무엇이 최선인가를 산출
한다고 가정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몸에  영향을 준다. 즉, 이와 같은  계산을 하고 있는 
양 행동하는 유전자가 유전자 풀 속에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여하튼 이 계산은 이상적 상태로의 매우 예비적인 근사값에  불과하다. 그것은 관계 있는 
개체의 연령 등 많은 것을 무시하고 있다. 또 내가 꼭 배불리 먹고 버섯 한 개가 들어갈 여
유밖에 없다면 동료를 부를 순이익은 굶고 있을 때보다 더  크다.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해 
계산하면 계산의 정밀도는 한없이 오를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동물이 모든 면에서 최
선을 다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동물이 최적의  결단을 내릴 때에 극단적으로 자
세한 것을 전부 고려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금후, 야외 관찰과 실험을 통하여 동물이 실
제로 얼마나 엄밀히 이상적인 손득 분석을  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조사해  봐야겠
다.
      손실과 이득의 예측
  여기서 주관적인 예에 빠져들지 않았다는 것을 재확인하기 위해 잠깐 유전자 용어로 돌아
가자. 살아 있는 몸은 생존을 계속하고 있는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램된 기계이다.  생존하고 
있는 유전자는 과거에 '평균하여' 그 종의 환경을 특징지우는 경향이 있던 조건으로  생존해 
왔다. 따라서 손득의 '예측'은 인간이 결단을 할 때와 같이 과거의 '경험'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에는 유전자의 경험, 더 정확히 말하면 과거에  유전자의 생존 조건이란 특별한 
의미가 있다(유전자는 생존 기계에게 학습 능력을 주고 있으므로 손득의  평가가 있는 것은 
동시에 개체의 경험에 기초하여 행해진다고도  함). 조건이 터무니없이 변하지  않는 한 그 
평가는 틀림없고 생존 기계는 평균적으로 빠른 결단을 내릴  것이다. 조건이 극변하면 생존 
기계는 틀린 결단을 내릴 가능성이 높아져서 그 유전자는 벌금을  내게 될 것이다. 낡은 정
보에 따른 인간의 결단이 틀리기 쉬운 것과 같다.
  근친도의 평가에도 역시 오류와 불확실함이 따르게 마련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매우 
단순화된 계산에서는 마치 갱존 기계가 누가 자기의 친족이고 어느 정도 가까운 혈연인가를 
알고 있는 양 말해 왔다. 균치로 추정하는 데 불과하다. 가령 A와 B가 양친이 같은  형제인
가 배다른 형제인가를 모를 때를 생각해  보자. 그들간의 근친도는 1/4이거나 1/2인데 양친
이 같은 형제인지 양친 중 아버지가 다른 형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유효하게 쓰이는 수치는 
평균하여 3/8이다. 그들의 모친이 같다는 것은  확실하나 부친이 같다는 확률이 1/10이라면 
그들이 아버지가 다른 형제라는 것은 90% 확실하고 같은 양친을  가진 형제라는 것은 10% 
확실하다. 이때 유효한 근친도는 (1/10)*(1/2)+(9/10)*(1/4)=0.275이다.
  그러나 '그것'이 90% 확실하다고 말할 때 무엇에게 '그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오
랜 야외 연구를 한 박물학자에게 90% 확실하다는 것인가 아니면 동물에게 90% 확실하다는 
것인가? 다행히 이들 내용은 둘 다  거의 같다. 이것을 알려면 실제로  동물이 누가 자기의 
근친인가를 어떻게 판단하려고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누가 친족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듣고, 이름이 있으며,  결혼이라는 
형식, 사실의 기록과 뛰어난 기억력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회 인류학자는 자기가  연구하
고 있는 사회의 '친족 관계'에 몰두하고 있다. 그들은 진정한 유전적 혈연이 아닌 친족 관계
라는 주관적 문화 개념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관습이나 종족의 의식
은 친족 관계를 크게 강조하는 데 필요하다. 조상 숭배가  퍼지고 가족의 의무와 충성이 생
활의 대부분을 지배한다. 피로 갚는 복수나 씨족간의 싸움은  해밀턴의 유전학 이론에 따라 
용이하게 설명된다. 근친 상간의 금기는 인간의 위대한 친족 의식을 증명하고 있다. 근친 상
간 금기의 유전적 이익은 이타주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아마도 근친 상간에 의
해 나타나는 열성 유전자의 유해한 효과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몇 가지 이유에서 많은 인류
학자는 이 설명을 좋아하지 않지만).
  야생 동물은 누가 친척인가를 어떻게 알 수가 있는 것일까? 바꾸어 말하면 어떤 행동 규
칙에 그들이 따랐기에 그들은 마치 혈연 관계를 알고 있는 양 행동할 수 있는  것일까? "친
척에게는 친절히 하다."라는 규칙은  실제로 친척이 어떤  방법으로 인지되는가라는 문제를 
회피라고 있다. 동물은 자신의 유전자에 의해 활동을 위한 단순한 규칙을 부여받았다. 그 규
칙은 행동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인식시켜 주지는 않으나 적어도 평균적인 조
건들 속에서 그에 상응하는 필요한 규칙을  받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규칙에 익숙해  있다. 
우리는 별로 그러한 느낌이 없어도, 자기와 그 누구에게도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
으면서도 규칙 그 자체에 순종할 정도로 규칙은 강력하다. 예를  들어 일부 정통파 유대 교
도와 회교도는 비록 굶을망정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규칙을  지킨다. 동물이 따르는 단
순하고 실제적인 규칙은 어떤 규칙일까?  그것은 정상 조건하에서는 그들의 친척에  이익을 
준다는 간접적 효과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만일 동물이 육체적으로 자기와 닮은 개체에 대해 이타적으로 행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면 그들은 간접적으로 자기의 친족에게 어느 정도 좋은 일을 하는 셈이 될 것이다. 해당 종
이 나타내는 여러 특성이 크게 영향을 줄 것이다. 어쨌든  이 같은 규칙은 통계적 의미로 '
빠른' 결단으로 이끌어 갈 뿐이다. 조건이 변하면, 예를 들어  한 종이 훨씬 큰 집단에서 생
활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잘못된 결단으로 이끌지 모른다. 자칫하면, 인종 차별이란 육체적으
로 자기를 닮은 개체를 인지하고 외견상 다른 개체를 싫어하는 성질이 혈연 선책에 의해 진
화하여 그것이 비이성적으로 일반화된 결과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원숭이와 고래의 이타적 행위
  구성원이 별로 돌아다니지 않는 종이나 구성원이 작은 그룹을 이루고 돌아다니는  종에서
는 자기가 종종 만나는 개체가  누구이든 자기와 친척일 공산이 크다.  이 경우 "자기 종의 
구성원을 만나면 누구에게나 친절해라."라는 규칙은 유전자의 소유자를 이 규칙에 따르려는 
유전자가 유전자 풀 속에서 늘어난다는  의미로 '플러스 생존가(survival value)'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원숭이 무리와 고래 무리에서 이타적 행동이 자주 보고되는 이유일 것이다. 고
래와 돌고래는 공기를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아기고래가 상처를  입어 수면까지 뜨지 
못하면 동료 무리들이 도와서 수면으로 부상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래에게 누가 자기의 
친척인가를 아는 수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무리가 종종 만나는 
구성원이 친척일 공산이 매우 높으므로 이타주의가 손실을 맛보게  될 것이다. 덧붙여 말하
면 물에 빠진 사람이 돌고래에 의해 구출됐다는 말을 흔히  듣는다. 적어도 그 하나는 확실
한 증거가 있다. 이것은 무리가 빠지고 있는 구성원의 정의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수면 가
까이에서 숨을 못 쉬고 허우적대고 있는 기다란 물체"가 그것이다.
  성숙한 수놈 비비 원숭이는 표범 같은 포식자로부터 무리 중 나머지 구성원을 목숨을 걸
고 지킨다고 한다. 보통 성숙한 수놈은 무리 중 다른 구성원 속에 연결되어 있는 한 다수의 
유전자를 가질 가능성이 높다. 사실상 "신체야, 네가 성숙한 수놈이라면  표범으로부터 무리
를 지켜라."라고 '하는' 유전자는 유전자 풀 속에서 그 수를 늘릴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처
럼 잘 인용되는 예를 마치기 전에 적어도 한 권위 있는 학자가 보고한 전혀 다른 사실을 이
야기하는 셈이 공평할 것 같다. 그녀에 의하면 성숙한 수놈 비비 원숭이는 표범이 출현하면 
맨 먼저 지평선 저쪽으로 도망쳐 버린다는 것이다.
      병아리의 이타적 행위
  병아리는 가족 무리 속에서 모이를 쪼으며 모두 어미의  뒤를 따라 다닌다. 병아리에게는 
주로 두 종류의 울음소리가 있다.  전술한 크고도 예리한 삐약삐약 소리와  먹는 중에 내는 
짧은 노래와 같은 지저귐이 있다. 어미의 도움을 청하는 효과적인 삐약삐약 소리는 다른 병
아리에게 무시된다. 그러나 지저귀는 소리는 병아리에겐 매력적이다.  즉, 한 마리의 병아리
가 먹이를 찾으면 내는 지저귀는 소리가 다른 병아리를 먹이가 있는 곳으로 유인한다. 이전
의 가설적 예로 말하면 이 지저귐은 '먹이가 있다'라고 하는 소리이다. 이 경우와 같이 병아
리의 겉보기의 이타주의는 혈연 선택에 의해 용이하게 설명된다. 자연계에서 병아리들은 같
은 양친의 형제 자매이므로 지저귀는 병아리의 손실이 다른 병아리의  순이익의 1/2보다 적
으면 먹는 동안의 지저귐에 관한 유전자는 분포를 넓힐 것이다. 이익은 그룹 전체에 분포된
다. 그룹은 보통 둘 이상으로 구성되므로 이 조건이 성립되는 것은 상상하기 쉽다. 물론  가
끔 암탉이 자기 것이 아닌 알을 -칠면조나 오리알을- 품고 있을 경우, 이 규칙은 부당하다. 
그러나 암탉과 병아리는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의 행동은 자연계에서  보통 볼 수 
있는 조건 아래서 형성되는 것이고, 자연계에서는 보통 자기의 집  속에 낯선 것이 있는 일
은 없다.
  그러나 이런 오류는 자연계에서 때때로  일어난다. 무리를 이루고 사는  종에서는 고아가 
된 새끼가 다른 어미, 대개는 자기 자식을 잃은 어미의 양자가 되는 수가 있다. 원숭이 관찰
자는 때때로 양자를 가진 어미에게 '숙모'라는 말을 쓴다. 대개의 경우 그 어미가 실제로 숙
모라는 증거는 없고 어떤 친척이라는 증거마저 없다. 원숭이  관찰자가 유전자의 논리에 주
의했따면 '숙모'와 같은 중요한 말을  함부로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체로 양자를 키우는 
행동은 수고스럽게 보일지도 모르나 짜여진 규칙의 오용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관대한 어미
는 고아의 시중을 드는 것으로 인해 자기의 유전자에게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
다. 그녀는 자기의 친족, 특히 장래의  자기 아이들의 양육에 쓸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모성 본능이 잘 선택 되도록 하는 규칙 개정을 만들어 왔던 자연 선택
에서 절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오류이다. 말하자면 이와  같은 양자 결연은 거의 일어나지 
않으며 대개 고아는 죽는다.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
  단순한 오류가 아닌,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을 부정하는 증거라고  생각하고 싶은 극단적 
오류의 예가 있다. 새끼를 잃은  어미 원숭이가 다른 어미로부터 새끼를  훔쳐서 그 시중을 
들어준다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이것을 '이중 오류'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양모는 자기
의 시간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경쟁자인 암놈이 새끼를 키우는 부담에서 벗어나게 해 주며, 
또한 보다 빨리 다음 새끼를 낳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조사할 가치가 있
는 중대한 예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어느 정도의 빈도로 일어나는가. 양모와 양자 사이의 평
균 근친도는 어느 정도인가. 자식을 잃은 진짜 어미의 태도는 어떠한가. 새끼를 양자로 뺏기
는 것은 결국에 가서는 진짜 어미의 이익이다. 어미들은 일부러 미숙한 젊은 암놈들을 속여
서 자기 새끼를 양육시키려고 할 것인가?(양모와 새끼 도둑이 중요한 양육 기술을 획득하는 
것으로 이익을 얻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조류의 이기성
  고의로 기도된 모성 본능의 오용의 예는 다른 새의 집에다 산란하는 뻐꾸기 같은 '탁란조'
에서 볼 수 있다. 뻐꾸기는 어미 새에게 인식된 "자기  둥지 속에 있는 새끼 모두에게 친절
하다."라는 규칙을 악용하고 있다.  뻐꾸기를 제외하면, 이 규칙은  본래 이타주의가 근친에 
한한다는 바람직한 효과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종종 자기의 둥지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자
기 새끼라고 할만큼 둥지와 둥지 사이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검은등 갈매
기의 어미는 자기의 알을 구별하지 못해 다른 갈매기의 알을 기꺼이 품으며, 인간이 실험용 
나무 모형과 바꿔치기 하면 그 모형의 알을 품는다. 자연계의 갈매기에게 있어 알의 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알이 몇 미터 떨어진 옆집까지 굴러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
나 갈매기는 자기 새끼를 인지한다. 알과는 달리 새끼는 걸어다니고, 결국은 옆집 가까이 까
지 가서 제 1장에서 말했듯이 종종 생명이 걸린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한편 바다오리는 자기 알을 표면의 반점 모양으로 구별하고, 알을 품고 있는 도중에는 그
것들을 더욱 조심스럽게 다룬다. 이것은 아마 그 새들이 평탄한  바위 위에 집을 짓기 때문
에 알이 굴러서 섞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왜 일부러 자기 알만 구별하여 
품을 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확실히 모든 어미가 덮어놓고 어떤 알이든 품는다면 각각의 어
미새가 자기 알을 품거나 다른 알을 품건 간에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그룹 선택주의
자의 논거이다. 지금 탁아 서클과 같은  집단이 조성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바다오리의 한 배의 알은 평균 한  개다. 이것은 공동 탁아 서클이 잘  되려면 모든 어미가 
평균 한 개의 알을 품어야만 된다는 것이다. 이때에 누가 게으름을 피워 알품기를 포기했다
고 하자. 그 암놈은 부화에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에 산란할 수 있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아름다운 점은 더 이타적인 다른  어미새가 그 암놈을 위해 알을 
돌보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집 옆에 흩어진 알을 발견하면  끌어당겨서 그것을 품어라."라
는 규칙에 충실히 복종해 나갈 것이다. 그러면 이 시스템을  잘 피하기 위한 유전자가 개체
군 속에 퍼져 아주 우호적인 탁아 서클은 붕괴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정직한 새가 유유낙낙함을 거부하고 보복하여 알을 단 한 개만 품는다고 결단하
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게으르고 못된 새의 뒤통수를 치는 꼴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자기의 알이 누구에게도 품어지지 않고 바위 위에 나뒹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므로 그
들은 곧 협력하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이 경우 새끼를 돌보는 새들이 개개의 알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가령 
정직한 새가 이 작전을 실행하여 게으름뱅이에게 대항했다고 해도 결국 소외된 알이 자기의 
알인지 게으름뱅이의 알인지 몰라서 대항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으른 새는  그래도 이익을 
받고 있다. 그들이 많은 알을 낳고 따라서 더 많은 새끼를 남기게 되기 때문이다. 성실한 바
다오리가 게으른 개체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적극적으로 자기의 알을 잘 보살피
는 것이다. 즉, 이타적인 것을 멈추고 자기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다.
  메이나드-스미스의 말을 빌면 이타적인 양자  키우기 '전략'은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이 
아니다. 이 전략은 정당한 할당보다 많은 알을 낳고 그것을 품는 것을 거부한다는 경쟁자의 
이기적인 전략에 의해 개선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불안정하다. 이 후자의 전략도 역시 불안
정하다. 왜냐하면 이용하는 이타적 전략이 불안정하여 곧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바다오리
에게 진화적으로 안정된 유일한 전략은 자기의 알을 인지하고 전적으로 자기의 알만을 품는 
것이며, 이것은 지금 실행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뻐꾸기 알을 대신 품는 명금류는 자기 알의 외관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종에 특유
한 모양이 있는 알을 본능적으로 잘 보살피는 것으로 맞서 왔다. 그들은 자기 종의 알을 품
을 염려는 없으므로 이 방법은 유효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뻐꾸기가 자기의 알의 색, 크기, 
그리고 모양을 대리모의 알에 더욱더 비슷하게 만들어 이에 응했다. 이것은 거짓의  예이고, 
종종 성공한다. 이 진화적 군비 경쟁의 결과, 뻐꾸기의  알에는 완벽한 의태가 생겼다. 뻐꾸
기의 알과 새끼는 어떤 비율로  '발견된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발견되지  않은 알과 새끼가 
살아서 차세대의 뻐꾸기의 알을 낳는다. 이 때문에 보다  효과적으로 속이는 형질의 유전자
가 뻐꾸기의 유전자 풀 속에 퍼진다. 이와 같이 뻐꾸기  알의 의태에 어떤 근소한 불완전성
이 있어도 놓치지 않는 예리한 눈을 가진 다른 종의 새는 동종의 유전자 풀에 크게  공헌하
는 개체이다. 그렇게 하여 의심 많고 예리한 눈이 다음 세대에 전해진다. 이것은 자연  선택
이 어떻게 해서 식별 능력을 키울 수가 있는가를 나타내는 예이다. 이 경우 식별 능력은 다
른 종을 염두에 둔 것으로 그 다른  종의 구성원이 식별하는 능력과 방법을 감추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고 있다.
      사자의 생식 습성
  그러면 동물 자신에 의한 다른 그룹  구성원과의 근친 정도의 '추정'과 야외 연구  전문의 
박물학자에 의한 같은 식의  추정을 비교해 보자. 버트람(Brian  Bertram)은 세런게티 국립 
공원에서 수년간 사자의 생태를 연구해 왔다. 그는 사자의 생식 습성을 기초 지식으로 하여 
전형적인 사자 집단의 개체간의 평균적 근친도를 추정하고 있다.  그가 추정하는 데 사용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전형적인 집단은 암놈 일곱 마리와 수놈 두 마리로 되고,  암놈
은 보다 영구적인 구성원이고 수놈은 이동성이 있다. 암놈의  반수는 동시에 출산하여 동시
에 양육하므로 서로간에 새끼를 분별하기 곤란하다. 전형적인 한 배의 새끼 수는 세 마리이
다. 사자 무리의 성숙한 수놈 사이에서 한 새끼의 아비일 가능성은 같다. 젊은 암놈은 그 무
리에 있는 늙은 암놈이 죽어나  하면 그 후계자의 위치를 차지한다.  젊은 수놈은 청년기에 
쫓겨난다. 이들은 성장하면 두 마리 내지 서너 마리의 혈연 집단을 이루어서 무리에서 무리
로 이동하는데 태어난 가족 무리로 되돌아오는 일은 거의 없다.
  전형적인 사자 무리에 있어서 이런 저런 여러 가정을 이용하면 두 개체간의 평균 근친도
를 알 수 있다. 버트람은 무작위로 뽑은 수놈 두 마리에  대해서는 0.22, 암놈 두 마리에 대
해서는 0.15라는 수치를 산출했다. 즉, 무리 속에서  수놈끼리는 평균하여 한쪽 부모를 가진 
형제보다는 좀 유연 관계가 멀고 암놈끼리는 사촌보다 조금 유연 관계가 가깝다.
  물론 어떤 두 개체는 양친을 같이 하는 형제이기는 하나 버트람은 이 것을 알 방법이  없
었고 사자도 그것을 모를 가능성이 높다. 한편 버트람이  추정한 평균치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자 자신으로서도 이용이 가능하다. 이들  수치가 실제로 평균적인 사자  무리에 전형적인 
것이라면 다른 수놈에 대해 마치 한쪽  어버이의 형제처럼 수놈을 행동하게 하는  유전자는 
플러스 생존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수놈의 이타적 경향을 과하게 하는 유전자, 가령 다른 
수놈을 완전히 형제로 대하도록 행동 할  것을 지시하는 유전자는 다른 수놈에게  친밀감을 
충분히 표하지 않는다. 예컨대 육촌을 대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밖에 생가하지 않는 유전자
와 같이 평균하여 벌을 받을 것이다. 사자의 생활이 실제로 버트람이 말하는 대로라면, 그리
고(중요한 것인데) 그들이 몇 세대에  걸쳐 그러했다면 자연 선택은  전형적인 사자 무리에 
있어서 평균적 근친도에 맞는 정도의 이타주의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예상된다. 이것
이 동물에 의한 근친도의 평가와 훌륭한 박물학자에 의한 평가가 대체로 같다고 말한 의미
이다.
  이러한 이치로 이타주의 진화에 있어서는 '진짜' 근친도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동물
이 어느 정도 근친도를 예견할 수 있는가  하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사실은 아마도 자연계에서 어미에 의한 보살핌이  형제 자매의 이타주의에 비하여 
왜 그렇게도 빈번하고 게다가 헌신적일까, 또 동물이 왜 자기  자신을 몇 명의 형제 이상으
로 높이 평가하는가라는 의문을 이해하는 열쇠인 것이다. 내가  말하려 하는 요점은 근친도
도에 더하여 '확실도 지수'라고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친자 관계는 유전적으로 
형제 자매 관계 이상으로 가깝지는 않으나 확실도는 훨씬 높다. 보통은 누가 자기의 형제인
가라기보다는 누가 자기의 새끼인가라는 편이 훨씬 확실하다. 그리고 누가 자기 자신인가라
는 것에는 더욱더 확신이 가는 것이다.
  앞에서 바다오리의 게으른 개체에 관해 고찰했지만, 다음 장에서는 사기꾼, 게으른 놈, 그
리고 착취자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하자. 다른 개체가 혈연  선택된 이타주의를 악용하여 자
기 목적을 수행하고자 부단히 기회를 엿보고 있는 세계에 있어 생존 기계는 자기가 누구를 
신용할 수 있나, 누구에게 진짜 확신을 가질 수 있나를 고려해야 한다. 만일 B가 정말 나의 
어린 동생이라면 나는 내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절반만큼 그를  위해 돌보아 줄 것이고, 내 
자식을 돌봐 주는 만큼 그를 돌봐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식을 확신하는 것처
럼 그를 확신할 수 있을까? 나는 그가 나의 동생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C와 내가 일란성 쌍생아라면 나는 내 자식보다 2배로 그를  돌봐 줄 것이며 확실히 나는 
내 생명과 똑같이 그의 생명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그렇다는 것을 확
신할 수 있을까? 그의 용모는 그럴듯하게 나를 닮았으나 단지 얼굴의 특징에 관한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그를 위해 내 생명을 내던질 일은 없다. 왜냐하
면 그가 나의 유전자를 100% 갖고 있을 가능성은 있으나, 나 또한 그의 유전자를 100% 가
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 이상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이기적인 유전자
의 어느 것이든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개체이다. 이론상 개체의 이기주의 유전자는 적어도 
일란성 쌍생아의 한쪽 자식이나 형제 둘 또는 손자 넷 등을 이타적으로 구하기 위한 유전자
에게 배제될 수 있는데,  개체의 이기주의 유전자는 개체의  정체성의 확실성이라는 점에서 
훨씬 유리하다. 경쟁자의 혈연 이타주의의 유전자는 전혀 우연히  또는 게으른 개체나 기생
자에게 꼬임을 당하여 정체성을 착각하는 위험을 범한다. 따라서 자연계에서는 유전자 혈연 
관계를 고려하여 예언했을 때보다 개체의 이기주의가 많다고 생각해야 한다.
        부모와 자식의 친자 관계
  많은 종에서 어미는 아비보다 자기 자식을 확신할 수 있다.  어미는 눈으로 보고 만져 볼 
수 있는 알이나 새끼를 낳는다. 어미에게는 자기의 유전자의 지참자를 확실히 알 좋은 기회
가 있다. 불쌍한 아비는 속기 쉽다.  그래서 아비는 어미만큼 육아에 열중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이유가 있으나 그에 관해서는 암수간의 다툼의 장(제9장)에서 기술하기로 하
자. 이와 같이 외조모는 친조모에 비해 자기 손자에게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친조모
보다 강한 이타주의를 나타낸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조모가 딸의 아이에게는  확신이 가나 
아들은 처에게 배신당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외조부는 친조모와 동등하게 손자에게 
확신이 간다. 왜냐하면 양자 모두 확실한 1세대와 불확실한 1세대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같
은 식으로 외삼촌은 친삼촌에 비해 생질의 행복에 더욱 관심이 있어 일반적으로 숙모와 동
등하게 이타적일 것이다. 실제로 남편의 외도가 매우  흔한 사회에서는 외삼촌이 '부친'보다 
이타적임에 틀림없다. 외삼촌 편이 그 아이와의 근친도에 대한  확신에 확실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아이의 모친이 적어도 자기의 아버지가 다른 자매라는 것을 알고 있다. 
'법률상의 부친'은 아무 것도 모른다. 나는 이들의 예언을  지지할 증거가 있는지 어떤지 알 
수는 없으나 누군가가 증거를 찾기 시작할 것을 기대하여 여기에 기술해 보았다. 특히 사회 
인류학자는 이 흥미 있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이타주의가 형제간의 이타주의보다 더 흔하다는 사실로 이야기를  돌
리면 '동일성의 문제'에 의해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부모 자식 관계의 기본적인 비대칭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부모 자식의 유전적 관계
는 대칭적이고 근친도의 확신은 어떤 입장에서 상대를 본 경우에도 똑같은데 부모는 자식이 
부모에게 대하는 것보다 훨씬 자식의 시중을 잘 든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부모쪽이 나이도 
많고 매사에 더 능숙해서 자식을 도울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아기가 부
모에게 먹이를 주려고 해도 아기는 실제로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
  친자 관계에는 형제 관계에는 해당되지 않는 또 다른 비대칭성이 있다. 아이들은 항상 부
모보다 젊다. 이 사실이 항상 그렇다고는 할 수 없으나 대개의 경우 자식의 평균 여명이 크
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강조한 대로 평균 여명은 동물이 이타적으로 행동할 것인가 아
닌가를 '결단할' 때에 가급적 정확히 '계산'에 넣어야만  할 중요한 변수이다. 자식이 부모보
다 평균 여명이 큰 종에서는 자식의 이타주의  유전자는 모두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될 것이
다. 그것은 이타주의 유전자는 모두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타주의자 자신
보다 노쇠사에 가까운 개체의 이익을 위해 이타적 자기 희생을 치르려고 계획하고 있기 때
문이다. 한편 부모의 이타주의 유전자는 그 계산식의 평균 여명의  항에 관한 한 그것에 상
응하는 분량만큼 유리할 것이다.
  흔히 혈연 선택은 학설로서는 더할 나위 없으나 그 실제  예는 거의 없다는 말을 듣는다. 
이러한 비판은 혈연 선택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아이를 보호
하거나 부모에 의한 시중의 모든 예, 그리고 젖샘이나 캥거루의  주머니 등 그 육체적 기관
이 사실상 혈연 선택 원리가 실제로 기능하고 있는 예이다. 비판자들은 물론 부모의 시중이 
널리 존재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데 부모의 시중이 형제 자매의 이타주의에 뒤지지 않는 
혈연 선택의 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예를 들어 보라 할 때는 부모의 시중 이
외의 예를 제시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예가 적은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이미 제
시했다. 형제 자매의 이타주의의 예를 들라고 하면 그것은  된다. 아주 적지만 있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  그것은 그렇게 하면 혈연 선택이  친자 관계 '이외'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전술한 바와 같이 윌슨이 좋아하는)을 강화하는 것이 되기 때문
이다.
  이 잘못이 커진 이유는 대체로 역사적인 것이다. 부모의 시중이 진화상 유리한 것은 너무
도 명백하고 해밀턴의 지적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그것은 다윈 이래 이해되어 왔다.  친자 
이외의 관계가 유전적으로 그것과 등가이며, 또 그것이 진화상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
다는 것을 제시함에 있어 해밀턴이 친자 이외의 관계를 강조해야만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
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는 앞으로의 장에서 말하는 대로  자매 관계가 특히 중요한 개미
나 꿀벌 등 사회성 곤충의 예를 들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점을 오해하여 해밀턴의 이론이 
사회성 곤충 외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까지도 있을 정도이다.
  부모의 돌봄이 혈연 선택의 작용의 작용의 예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이들은 부모의 이
타주의만을 예언하고 다른 친족간의 이타주의를 예언하지 않는 자연 선택의 일반론을  정식
화해 보일 책임이 있다. 아마도 이것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제7장
          가족 계획
        애낳기와 애키우기
  부모가 자식을 보호하려는 행동을 혈연 선택의 산물인 다른 이타적 행동과 별도로 취급하
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간단하다. 즉 자
식의 보호는 번식의 일환으로서 통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령 생질을 수혜자로 한 
이타 행동 등은 번식에 통합되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 이 양자간에는 실제로 중
대한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앞서간 사람들은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잘못 이해
한 것이다. 그들은 번식과 부모가 자식을 보호하려는 행동을 하나로 묶어서 다른 이타적 행
동을 이것과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나로서는 새로운 개체를 낳는 것과 현존 개체를 돌보는 
것 사이에 바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고 싶다. 이  두 활동을 각각 애낳기와 애키우
기라고 부르기로 하자. 하나의 생존  기계인 개체는 애낳기와 애키우기라는  극히 이질적인 
두 종류의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결단이란 말은 무의식적으로 행해
지는 전략적인 조처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애키우기의 결단은 다음과 같은 형식을 취할 것이다. "여기에 아기가 하나 있다.  이 아이
와 아이와의 근친도는 그저 그렇다. 만일 내가 이 아이에게  음식을 주지 않는다면 이 아이
가 죽어버릴 확률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나는 이  아이에게 음식을 주어야 할 것인가?" 
한편 애낳기의 결단 형식은 다음과 같다. "이 세계에 새로운 개체를 하나 낳기에 필요한 여
러 단계를 밟을 것인가, 즉 나는 애낳기에 뛰어들 것인가?" 애키우기와 애낳기는 개체가 이
용할 수 있는 시간 또는 다른 여러 자원을 둘러싸고 서로 어느 정도 경합하지 않을 수 없는 
책임을 지고 있다. 즉, 개체는 다음과 같은 선택을 강요당할 수도 있다. "이 아이를 키울 것
인가, 아니면 따로 하나를 낳을 것인가?"
      애낳기-안정된 전략
  종에 관한 생태학적 여러 특성의 세부에 따라  키우기와 낳기 양 전략의 여러 가지 혼합 
전략이 진화적으로 안정하게 될 수 있다. 그것은 순수한 애키우기이다. 만일 모든 개체가 현
존하는 애키우기에 몰두하여 아이를 낳지 않는  상태로 되어 버리면 이 개체군은  애낳기를 
전문으로 돌연변이한 여러 개체에 의해 곧 제거돼 버릴 것이다 애키우기는 혼합 전략의 일
부로서만 진화적으로 안정하게 될 수 있다. 즉, 적어도 누군가의 애낳기는 필히 실행되지 않
으면 안 된다.
  우리들에게 가장 낯익은 동물들-포유류와 조류-은 애키우기의 경향을 많이  나타낸다. 여
기서는 애낳기 결단에 이어 낳은 아이를 키우는 결단을 볼  수 있는 것이 보통이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이 애낳기와 애키우기가 공존하고 있는 것으로 양자를 혼동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대로 유전자의 이기성의 관점에서 보면 당신이 어린 형제를 키우
는 것과 어린 자식을 키우는 것 사이에는 원리적인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이다. 어느 아이나 
당신의 근친자이며, 당신과의 근친도는 어느 편이나 동일하다. 만일 당신이 양육 대상으로서 
어느 한편의 아이를 선택해야 한다 해도 그것이 당신의 자식이어야만 된다는 이유는 유전학
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당신이 형제를  아기로서 낳는다는 것은 정
의로 보아 불가능하다. 당신이외의 누군가가 그를 낳아 줌으로써  당신은 형제를 양육할 수
가 있게 되는 것이다. 앞 장에서 나는 기존의 다른 개체에 대해 개개의 생존 기계가 이타적
으로 행동할 것인가 어떤가를 결정할 경우 이상적으로는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
았다. 이 장에서는 새로운 개체를  출산할 것인가 아닌가를 정할 경우에  생존 기계가 어떤 
식으로 결정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자.
        개체수 조절과 인구 문제
  제 1장에서 '그룹 선택'을 가지고 논쟁을 소개했는데, 그 논쟁은  주로 이 장에서 다룰 문
제를 무대로 하여 전개됐다. 원인은 그룹 선택의 견해를 유포시킨 제 1의 책임자인 윈-에드
워즈에게 있다. 그 견해를 선포함에 있어 그는 '개체수  조절'의 이론을 기초로 했기 때문이
다. 그는 개개의 동물이 집단 전체를 위해 의도적이고  이타적으로 스스로의 출생률을 감소
시킨다고 제안했다.
  이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가설이다. 그것이 인간 개개인의 직무에 아주 잘 합치되기 때문
이다. 인류는 너무나 많은 아이들을 가지고 있다. 개체군의 크기는 출생수, 사망수, 이출  개
체수, 그리고 이입 개체수라는 네 가지 요인으로 결정된다. 세계 총 인구를 문제로 할  경우 
이출과 이입은 있을 수 없다. 남는 것은 출생수와 사망수다. 한 부부당 아이의 평균수가  출
산 가능시까지 생존하는 아이의 수로 하여 2인보다 많으면 신생아의 수는 매년 누진적으로 
증가해 갈 것이다. 어느 세대를  보아도 인구는 일정한 수로 가산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때 그때에 도달한 인구의 일정 비율로 증가해 간다. 각 시점에서의 인구 자체가 증가하기 
때문에 이것에 대응해 인구 증가수도 증대하는 것이다. 만약  저지되지 않고 증가가 계속되
면 개체군은 잠깐 사이에 천문학적 규모에 달하고 말 것이다.
      인구 조절
  여기서 인구 문제를 우려하는 사람들까지도 때때로 보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사
람들이 아이를 몇이나 낳느냐뿐만 아니라 몇 살때에 출산하느냐에 의해서도 인구 증가가 좌
우된다는 것이다. 인구는 각 세대마다 그때의 전체수에 일정한  비율로 증가하는 경향을 나
타내므로, 만약 각 세대의 간격을 전보다 길게 하면 매년  증가하는 인구는 완만하게 될 것
이다. 즉, '부부당 아이는 2인까지'라는  표어 대신에 '아이를 낳는 것은  30세부터'라고 해도 
거의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가 있다. 여하튼 인구의 가속적인 증가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
게 된다.
  이점을 분명하게 납득시킬 깜짝 놀랄 정도의 계산의 예를 아마도 우리는 모두 보아 왔을 
것이다. 예를 들면 라틴아메리카의 현재 인구는 약 3억이다. 그리고 현재 이미 그 많은 사람
들은 부족한 영양 조건하에 놓여  있다. 그러나 만일 현재의 비율로  인구 증가가 계속되면 
직립 자세의 인간이 빈틈없이 도열하여 전 대륙에 인간 양탄자를 깔아 버리는 상태에 도달
하는 데 500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뼈와 가죽만으로 되어 있다9이것은 결코 황당 
무계한 상상이 아니다)라고 가정하여도 이 사태는 변치  않는다. 천년이 지나면 꽉 찬 인가
들의 어깨에 각각 100만이 넘는 인간이 겹쳐 쌓이게 된다. 이 커다란 인간더미는 드디어 우
주를 향해 광속으로 팽창하게 되어  2,000년 후에는 현재 알려져 있는  우주 저편에 도달해 
버릴 것이다.
  독자 여러분은 이것이 가정에 의한 계산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
로는 위와 같은 식으로 인구 증가가 진해되지는 않는다. 이것을 저지하는 극히 유력한 현실
적인 이유가 몇 가지 있기 때문이다. 즉, 기아, 전염병, 또는 만일 운이 좋으면 산아 제한 같
은 것이 그 이유의 일부이다. '녹색 혁명'이나 그 밖의 농학상의 진보에 의뢰해도  소용없다. 
식량 증산은 인구 문제를 일시적으로 완화시킬는지는 모르나 그것이 장기적인 문제  해결이 
될 수 없음은 수학적으로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 의학의 진보가 인구의 위기 촉진에 일
익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농학의 진보도 인구 증가 속도를 촉진시켜 오히려 인구 문제를 
악화시킬지도 모른다. 매초 수백만 대의  비율로 로켓을 발사하여 우주로  대량 이민이라도 
보내지 않는 한 무제한의 산아수는 필연적으로 사망률의 놀라운  증가를 초래할 것이다. 이
것은 단순한 논리적 진리이다. 믿기 어려운 일이나 이 단순한 진리를 이해 목하고 효과적인 
피임 수단을 강구하는 것을 금지하고 신봉하는 지도자들이  있다. 그들은 인구를 '자연적인' 
수단으로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그들이 직면해 난처하게  될 수단이란 바로 하
나의 자연적인 수단이다. 그것은 기아라고 하는 수단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먼 장래에 대한 계산에 의해 우리가 불안하게 되는  것
은 그 전제로서 인류라는 종 전체의 장래 행복에 대한  배려 때문이다. 인구 과인의 파괴적 
귀결에 미리 주의를 주기 위한 의식적인 선견 능력을 인가(아니  일부 사람)은 서로 기다리
고 있다. 한편 생존 기계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유전자라는 이기적인 존재에 의해  지배되며, 
게다가 이 유전자라는 존재는 장래를 선취하거나 종 전체의 행복을 걱정하는 것으로는 아마
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 전제이다.  윈-에드워즈가 정통적인 진화학의 이론
가들과 구분되는 것은 이 점에서이다. 그는 진정한 이타적 산아  제한이 진화할 수 있는 길
이 있다고 한다.
      동물의 개체수 조절
  윈-에드워즈의 저작이나 그의 견해를 통속화한 아드리의  책이 강조하고 있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논의의 대립없이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야생 동물의 
개체군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천문학적 속도로 증가하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 때로는 출생
률과 사망률이 서로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야생 동물의 개체군이 어느 정도 일정하게 유지되
기도 한다. 또 유명한 나그네쥐의 경우와 같이 급격한 대번식과 급격한 개체수의 감소, 그리
고 절멸에 가까울 정도의 개체수의 저하가 교대로 일어나 개체군이 대폭적으로 변동하는 식
의 예도 많이 있다. 그 결과 가끔 적어도 국지적인 개체군이 완전히 절멸해 버리는 수도 있
다. 캐나다 스라소니의 예-이 예에서는 H회사가  판매한 모피수의 경년 변화에서 개체수가 
추정됐다-와 같이 개체군이 주기적으로 진동하는 수도 있다. 동물 개체군이  할 수 없는 일
은 제한 없이 증식을 계속하는 일이다.
  야생 동물은 노쇠하여 죽는 일이 거의 없다. 실제로 노화도  되기 훨씬 이전에 굶거나 병
들고 또는 포식자에게 먹혀 버리게 된다. 최근까지는 인간도 이 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
개의 동물은 어린 단계에서 죽고 알의 단계에서 생을 마치는  개체도 많이 있다. 기아와 그 
밖의 사망 원인이 궁극적 이유로 작용해 개체군의 무제한  증가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전에 
인간이라는 종에 관해 검토한 것으로도 분명하듯이 사태가 이렇게 되어야 할 필연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동물이 출생률을 조절하기만 하면  기아가 생길 필연성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물들은 정확하게  이것을 실행하고 있다는 것이  윈-에드워즈의 저서를 
읽고 상상할 정도로 큰 견해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이  출생률을 조절하고 있다는 견해
에는 유전자의 이기적 이론의 신봉자들도 즉시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종을 취해도 
한 둥지의 알 수(clutch-size) 또는 한배의 새끼 수(litter-size)는 어느 정도 일정한 수를 나
타내는 경향이 있다. 무제한의 새끼를 낳는 동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출생률이 조절되
는가, 바꿔 말하면 자연 선택 과정에 의해 가족 계획은  어떻게 진화했는가 하는 관점을 가
지고 의견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동물의 산아 제한은 집단 전체의  이익을 위해 실행되는 
이타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번식을 하고 있는 개체의  이익 때문에 실행되는 이기적인 
것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의견의 차이는 이 중의 어느 견해를 취하느냐에 있다. 이 두 이론
을 차례로 기술하기로 하자.
  동물들은 집단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가능한 한  출생률 이하의 새끼를 낳는다는 것이 윈-
에드워즈의 사고 방식이다. 그러나 그는 보통의 자연 선택에서  종의 이타주의는 진화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평균 이하의 출생률이 자연 선택에서  선택된다는 것은 언뜻 생각하
면 표현으로서는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제1장에서 소개한 바대로 그룹 선택의 이
론에 도움을 구한 것이다. 그는 구성원인 개체가 자기의 출생률에 제한을 가하는 식의 집단
은 구성원의 증식이 빠르기 때문에 먹이 공급에 위태로움을 받게 되는 대항 집단에 비하면 
절멸의 가능성이 적을 것으로 생각했다. 자기 규제적인 번식자로 구성되는 집단이 자연계에 
파급되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한다. 윈-에드위즈가 생각하는 개체의 자기 규제는 광의로 하
면 산아 제한과 같은 것이나, 그가 의미하는 것은 실은 더 특수한 것이다. 그는 동물의 사회 
생활 총체를 개체수의 조절 기구로 보려고 하는 하나의 웅대한 착상을 제안하고 있다. 예컨
대 제5장에서 이미 언급한 세력권제와 순위제는 많은 동물 종에 있어서 사회 생활의 두  중
요한 특징으로 되어 있다.
        세력권
  많은 동물들은 어떤 범위의 지역을  '방위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는데, 
박물학자들은 그 지역을 가리켜 '세력권'이라고 한다. 동물계에서 매우 흔한 현상이다. 이 현
상은 조류나 포유류, 어류뿐만 아니라 곤충이나 말미잘 등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세력권
은 울새의 경우처럼 넓은 임야일 수도  있다. 이 경우 그 지역은 새끼를  키우고 있는 새가 
먹이를 취하는 주된 장소로 되어 있다. 또 세력권은  검은등갈매기의 경우처럼 적은 면적일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세력권 내에 먹이는 없으나 중앙에 집이 있다. 윈-에드워즈는 세력
권을 가지고 싸우는 동물들이 한 조각의 먹이와 같은 현실적인 목적물 대신에 특권을 보증
하는 표가 되는 대용 목적물을 가지고 싸우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대개의 경우 암놈
은 세력권이 없는 수놈과는 부부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귀던 수놈이 패
하고 다른 수놈이 그 세력권을 차지하면 암놈은 얼른 그 승자쪽으로 자리바꿈을 하는 일도 
종종 있다. 성실히 일부일처제를 지키는 종의 경우에서도 암놈은 수놈과 개체적으로 결합된
다기보다는 오히려 수놈이 소유하는 세력권과 결혼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개체군이 너무 커지면 세력권을 못 가지는 개체가 생겨 그들은 번식 할 수 없게 될  것이
다. 윈-에드워즈에 의하면 세력권의 획득은  번식의 티켓 또는 허가증을 입수하는  것과 같
다. 성립될 수 있는 세력권  수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소위 번식  허가증 발행수가 한정되어 
있는 것 같다. 이런 허가증을 누가  획득하는가를 가지고 개체는 서로 싸울 것이다.  그러나 
개체군 전체가 낳을 수 있는 새끼의 총수는 성립 가능한  세력권 수에 의해 제한되고 만다. 
홍뇌조의 경우와 같이 한 번 보아서 확실히 개체가 자기 규제를 실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
는 에도 몇 개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경우 세력권을 획득 못한  개체는 단지 번식을 못 할
뿐더러 세력권의 획득을 향해 싸우는 것까지 포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
은 마치 한 마리도 안 남고 아래와 같은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인 것과도 같다. 즉,  서로 경
합하는 계절이 끝날 때까지 만일 네가 아직 번식을 위한 공인된 티켓을 입수하지 못할 경우
에는 너는 스스로 번식을 중지해야  하며, 또 번식 기간에는 행운의  친구에게 방해를 주지 
않도록 하며, 그들이 종의 번식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로운 순위제
  원-에드워즈는 순위제에 관해서도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동물의  많은 집단에서 다음과 
같은 것이 발견된다. 개체가 서로 개체로서의 특징을 배우고 다시 누구와 싸울 경우에는 이
길 수가 있고, 누구에게는 항상 패하는가를 학습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육 조건하의 동물 집
단에서 특히 잘 볼 수 있는  것인데 야생 상태의 동물 집단에도 그  예가 있다. 제 5장에서 
언급한 대로 어쨌든 이길 자신이 없는 것을 '알고 있는' 상대에 대해서는 그들은 싸우지  않
고 항복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박물학자는 순위제 또는 '세력순위(pexk order; 닭에서 최
초로 기재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를 다음과 같이 기재하게 된다. 순위제란 사회에 계 
층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며 그 질서 밑에 있는 모든 개체는 자기의 지위를 분별하여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은 생각지도 않는다. 물론 때로는 치열한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어떤 개체가 바로 위의 지위에 있던 상급자를 이기고  승진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제5장에
서도 언급한 대로 일반적으로는 하위의 개체가 자동적으로 복종하기 때문에 실제로  싸움이 
계속되는 일은 거의 없고, 심한 상처도 별로 입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 막연한 그룹 선택론자적인 방법으로 이 사태를 '좋은 것'으로 생
가가혹 있다. 그러나 윈-에드워즈는 훨씬 대담한  해석을 이것에 더하고 있다. 순위가 높은 
개체는 하위의 개체보다도 번식의 가능성이  크다. 암놈이 상위의 개체를 선택하거나,  또는 
하위의 개체가 암놈에게 접근하는 것을 상위의 개체가 힘써 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에
드워즈는 높은 사회 순위가 번식의 자격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티켓이라고 생각한다. 직접 
암놈을 둘러싸고 싸우는 대신에 개체는 사회적인  지위를 걸고 싸워 만일 상위의  사회적인 
지위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들은 번식의 자격이 없는  것으로 자인한다는 것이다. 물
론 하위의 개체는 부단히  높은 사회적 지위를  향해 애쓸 것이니까-'간접적'으로는 암놈을 
가지고 경쟁하고 있다-직접 암놈이 개입된 문제에 관해서는 자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
에드워즈에 의하면 순위가 높은 수놈만이 번식할  수 있다는 규칙이 이와 같이 '감수'  되는 
결과, 세력권 행동의 경우와 같이 개체수는 별로 증가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실제로 과잉한 
수의 새끼를 낳아 놓고서는 그것이 잘못이 있음을 깨닫고 나서 괴로운 표정을 짓는 대신에 
동물의 개체군은 순위와 세력권을 가지고 형식적인 다툼을 이용하여 실제로 기아에 의한 희
생자가 나올 수준보다 약간 적게 개체수를 제안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시 행동
  원-에드워즈의 착상 중에서 가장 놀랄 만한 것은 '현시(epideictic) 행동'이라는 사고 방식
일 것이다. 현시란 말은 그가 만든 말이다. 많은 동물은 자신의 생활의 많은 시간을 큰 무리 
속에서 지내고 있다. 이 종의 무리짓기 행동이 자연 선택에 의해 촉진되었다는 것은 어째서
일까. 이에 관해서는 다소간 상식적인  각종의 이유가 시사되고 있고 몇  개에 관해서는 제 
10장에서 말하고자 생각하고 있으나,  윈-에드워즈의 생각은 그것들과는 아주  먼 이야기이
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저녁 때에 찌르레기가 큰 무리를  이루거나 많은 모기가 문 기둥의 
상공을 윙윙거리고 있을 때 그들은  스스로 자기 개체군의 밀도 조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주장은, 개체군 밀도가 높을  때는 출생률을 감소시킨다는 것이므로, 그들이  개체군의 
밀도를 추정한 후에 어떤 수단을 강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치에  맞는 
말이다. 이것은 항온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내부에 온도계를 반드시 배치해야만 
하는 것과 꼭 같은 이유이다.  윈-에드워즈에게 있어 현시 행동이란 개체군  밀도의 추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는 동물이 의도적으로 모여  무리를 지어보는 것 외에는 별것이  아니
다. 그러나 그는 의식적인 개체수 추정이 행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개체군 밀
도에 관하여 개체가 수용한 감각 자극을 생식 시스템에 결부시키는 자동적인 신경, 또는 호
흐몬 메커니즘을 생각하고 있다.
  이상에서 간단하게나마 나는 윈-에드워즈의 이론을 올바르게  평가하려고 노력했다. 만약 
내가 이것에 성공했다면 독자는 지금 그의  이론이 언뜻 보아서 그럴듯하게 납득된  기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이 언뜻 보아 그럴듯하다고 해서 그 증거까지 유력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책의 여기까지를 읽은 독자는 의심하고 덤빌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안
됐지만 증거는 별로 쓸모없다. 증거를 구성하는 다수의 사례는 확실히 그의 견해에 따라 해
석하는 것도 가능하겠으나, 같은 식으로 보다 정통적인  '유전자의 이기성'의 관점에서도 설
명이 잘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 계획 이론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에 입각한  가족 계획 이론을 세운  제1인가는 위대한 생태학자 책
(David Lack)이었다. 더욱이 그는 그 이론을 유전자의 이기성에 입각했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의 연구는 주로 야생 조류의 한 둥지의 알  수에 관한 것이었지만, 그의 이론이나 
결론은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종류의 새도 그종에게 특유
한 한  둥지의  알 수를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   가령 북양가마우지(gannet)와 바다오리
(guillemot)는 한 번에 한 개의 알을 품는데,  제비는 3개, 박새는 6개 또는 그 이상의  알을 
품는다. 물론 이 한 둥지의 알 수에는 변이도  있다. 한 번에 알을 2개밖에 안 낳는  제비도 
있고, 박새처럼 12개의 알을 낳는 수도 있다. 한 마리의 암놈이 산란하여 품는 알의 수는 다
른 특성과 같이 비록 부분적이기는 한 유전적지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해도 이상할 것이 없
을 것이다. 실제로 사태가 그 정도로 단순한 것은 있을 수 없음에 틀림없으나, 말하자면  알
을 2개 낳게 하는 유전자, 4개 낳게 하는 대립 유전자 등등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자! 이렇게 되면 유전자 풀 속에서 수를 늘려 가는 것은 이들 유전자 중 어떤 것일까. 유전
자의 이기적 이론으로는 이 문제가 크로즈업 된다. 표면적으로 보면  알을 2개 또는 3개 낳
게 하는 유전자에 비하면 알을 4개 낳게 하는 유전가 유리한 것은 뻔한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르나 "많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식의 단순한 논의가 옳지 않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
면 분명하다. 만약 그 논의가 옳다면 4개의 알을 낳기보다는 5개가 더 좋고 또한 10개,  100
개가 좋고 나아가서 무한히 산란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 될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 논의
는 논리적으로 부조리에 부딪치게 된다. 다수의 알을 낳으면  이익뿐만 아니라 대가를 치러
야 함은 분명하다. 애낳기의 증가는  아이에 대한 보호 효과의 감소를  지불해야 할 운명에  
처한다. 임의의 환경 조건하에 있는 임의의 종에 관한 특정의 한 둥지의 최적 알 수가 존재
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 랙 이론의 요점이다. 랙과 윈-에드워즈의 견해가 갈라지는 것은 "누
구의 입장에서 보아 최적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답하는 방법에 있어서이다.  윈-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이다. 모든 개체가 목표로 하는 최적  알 수는 집단 전체에 있어서의 
최적 알 수라는 것이다. 한편 랙은  다음고 같이 주장한다. 각각의 이기적인 개체는  어미가 
키울 수 있는 새끼의 수를 최대로 할 수 있는 한둥지의 알 수를 선택하는 것이다. 3개의 알
이라는 것이 제비로서 만일 한 둥지의 최적의  알 수라면 이것에 대한 랙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된다. 네 마리의 새끼를 키우려고  하는 개체가 최종적으로 키워 낼 수  있는 수는 세 
마리밖에 키우지 않으려고 하는 경쟁자가 키울 수 있는 새끼 수보다 결국 적어지게 되는 것
이다. 명백한 이유로서 생각되는 것은 네 마리의 새끼를  키운다면 각각의 새끼에게 분배되
는 먹이의 양이 부족하기 때문에 성숙 단계에까지  자라 살아 남는 것이 거의 없게 된다는 
결론일 것이다. 이것은 4개의 알에게 분배되는 난황의 양, 그리고 부화 후 새끼에게  주어지
는 먹이의 양, 둘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다. 즉, 랙에 따르면 개체가 한 둥지의 알 수를 조절
하는 이유에는 이타적인 점 같은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산아 제한을 행하는 것
은 집단을 위한 자원을 과잉으로  이용 못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실제로 자기의 새끼 
수를 최대화하기 위해 그들은 산아 제한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 우리들이 산아 제
한에 결부시키고 있는 이유와는 아주 정반대의 목표이다.
      개끼 수 조절
  새끼를 키우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우선 알을 만들기 위해  어미 새는 대량의 먹이와 에
너지를 투자해야만 한다. 아마 배우자의 도움도  필요할 것이다. 어미 새는 알을 품고  알을 
보호하기 위해 집을 만드는 데도 많은 노력을 한다. 다시  어버이 새는 수주간에 걸쳐 인내
로서 알 품기를 계속한다. 그리고 새끼가 부화하면 어버이 새들은 자기를 혹사하여 거의 쉬
는 일도 없이 새끼의 먹이를 나르고 있다. 이미 소개했거니와  박새의 경우 한 마리의 어미 
새는 낮 동안 30초마다 평균 1회의 비율로 먹이를 둥지로 나른다. 우리 인간과 같은 포유류
의 경우 사정은 틀리다고는 하나, 특히 어미에게 있어 번식이  큰 일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
다. 만약 어미가 먹이와 양육을 위한 노력 등과 같은  한정된 자원을 새끼들에게 너무 많이 
분산시키면 어미가 키울 수 있는 새끼의 수는 어미 새가 적당한 목표로 출발한 경우에 비해 
적어지고 말 것이다. 어미 새는 애낳기와 애키우기 사이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한 마리의 어미 새 또는 한 쌍의 작이 구할 수 있는 먹이와 자원의 총량이 그들이 키
울 수 있는 새끼 수를 결정하는  제한 요인이 된다. 랙의 이론에 의하면  자연 선택은 이들 
한정된 자원ㅇ들로부터 최대의 유리함을 유도하도록 산한시의 한 둥지의 알 수(또는 한배의 
새끼 수)를 조정한다.
      합리적 출산
  새끼를 과다 출산하는 개체가 불리하게 되는 이유는 개체군 전체가 그 때문에 절멸해 버
리기 때문이 아닌 단적으로 그들의 새끼 중에 살아 남는  수가 적기 때문이다. 과잉 산란에 
관한 유전자군은 이것들을 지닌 새끼들이 거의  성숙할 수 없으므로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문명인 사이에는 가족 구성원의 크기가 개개의 부모가 조
달할 수 있는 한정된 자원들에 의해서는 이미 제한받지 않는다는 현상이 생기고 있다. 어떤 
부부가 자기들이 양육 가능한 이산의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구가, 즉 그 개체군 중 해당 부
부 이외의 부분이 개입하여 과잉분의  아이들을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한다.  물질적 자원을 
전혀 못 가지는 부부가 다수의 아이를 여성의 생리적 한계에 이르도록 낳아 기르려고 해도 
실제로 이것을 저지하는 수단은 없다. 그러므로 복지 국가라는  것은 극히 부자연적인 실체
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키울 수 있는  수 이상의 아이를 가진 부모는 손자를  많이 가질 수 
없고, 따라서 그들의 유전자가 장래의 세대에게 이어지는 일은 없다. 자연계에는 복지  국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출생률에 대해 이타적인 자제를 할  필요는 없다. 자제를 
모르고 방종을 가져오는 모든 유전자는 즉시 벌을 받는다. 그 유전자를 보유한 아이들은 굶
주리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과도한 인원을 거느린 가족의 애들이 굶어 죽어도 그냥 
두던 옛날의 이기적이 s방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래서 우리들은 가족을 경
제적인 자급 자족 단위로 하는 것을 폐지하고 그 대신에 국가를 경제 단위로 한 것이다. 그
러나 아이에 대한 생활 보장의 특권은 결코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
      피임
  피임은 종종 '부자연스럽다'고 비난된다. 그렇다. 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곤란한 무
제는 복지 국가에서도 매한가지라는 점이다. 우리들의 대부분은 복지 국가를 극히 바람직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부자연스러운 복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또한 부자
연스러운 산아 제한을 실행해야만 g나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 상태에  있는 것보다 더 비참
한 결과에 이를 것이다. 복지  국가란 지금까지 동물계에 나타난 이타적  시스템 중 아마도 
가장 위대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어떠한 이타적 시스템도 본래 불안정한 것이다.  그것
은 이용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이기적이 개체에 남용당할 여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가 키울 수 있는 이상의 아이를 가지고 잇는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무지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그들이 의식적으로 악용을 꾀한다고 비난할 이유는 못 된다. 다만 나는 그들이 다수
의 아이를 만들도록 의도적으로 선동하고 있는 지도자나 강력한 조직에 대해서는 그 혐의를 
풀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세력전과 번식 허가증
  야생 동물의 이야기로 되돌아가기로 하자. 한 둥지의 알 수에  관한 랙의 논리는 윈-에드
워즈가 인용하는 기타 모든 사례, 예컨대 세력권 행동, 순위제 등에 일반화시킬 수 있다. 예
를 들면 윈-에드워즈와 그의 동료들이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는 홍뇌조를  택하기로 하자. 
이 새는 히스속 식물을 먹이는데, 습원을 분할하여 소유자가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보다 다
량의 먹이를 포함하는 세력권을 만든다. 번식기 초기에 그들은  세력권을 두고 싸우는데 패
자는 자기의 패배를 인정하는지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력권을 갖지 못하는 낙오
자가 되며, 그 계절이 끝날 즈음에는 대체로 아사해 버린다. 번식할 수 있는 놈은 세력권 소
유자일 뿐이다. 그런데 세력권을 갖지  못한 새들도 생리적으로는 번식이  가능하다는 것이 
다음의 사실에서 밝혀져 있다. 세력권 소유자가 죽으면 낙오자 중의  한 마리가 즉시 그 후
계자 자리에 앉아서 번식을 시작한다. 이 극단적인 세력권 행동에 관한 윈-에드워즈의 해석
은 이미 알다시피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낙고자들은 번식을 위한 허가증 또는 티켓을 놓치게 
된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번식 행위를 보류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좀 귀찮은  일로 보인다. 낙오자들은 왜 
사력을 다하여 한사코 세력권 소유자를 내쫓으려고 하지 않을까. 비록 지쳐서 쓰러질지라도 
그들이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조금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잃는 것이 엄연히 있는 것이 아닌지. 위에서 보았듯이 만일 세력권 소유자가 사
망하는 일이 있으면 낙오자에게 그 세력권을 입수하여 번식할  시회가 돌아온다. 만일 낙오
자가 이 방법으로 세력권을 입수하여 번식할 기회가 돌온다. 만일 낙오자가 이 방법으로 세
력권의 후계자로 정착할 가능성을 기다리는 편이 투쟁에 의해 세력권을 얻을 수 있는 가능
성보다 크다면 비록 적은 에너지라도 무익한 싸움으로 허비하기보다는 세력권 소유자  중에
서 누군가가 죽기를 기대하며 대기하는 편이 이지적 개체로서  그에게는 유리하다. 윈-에드
워즈의 입장에서 보면 집단의 번영을 꾀함에 있어서 낙오자들의 역할은 대역자와 같이 무대 
옆에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집단의 번식을 위해 전시 무대  위에서 세력권 소유자 중 누군
가가 쓰러지면 즉시 그 놈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분명해진 것처럼 
낙오자가 나타내는 행동은 순수하게 이기적인 개체로서 그들의 입장에서 보아도 가장  좋은 
전략일지도 모른다. 제 4장에서 말한 대로 우리는 동물을 도박사로 볼 수가 있다. 때때로 도
박사로서 가장 좋은 방책은 공격 작전이 아닌 관망이 작전일지도 모를 일이다.
  같은 식으로 동물이 비번식자의 지위를 언뜻 보아서 수동적으로 '감수'하고 있는 듯이  보
이는 많은 다른 예도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에 의해 더 용이하게 설명할 수가 있다. 어떤 경
우에도 설명의 기본형은 같다. 즉, 그 동물의 가장 좋은 결정은 일단 자제하고 장래의 더 좋
은 기회에 희망을 거는 것이다. 하렘의 소유자들에게 새치기를  꾀하지도 않는 낙오된 바다
표범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좋은 기회가 닥쳐오기를 기다리
고 있는 것이다. 비록 호기는 오지 않고 결국 그가 자손을 못보고 죽을망정 이 도박은 이길
지도 모를 도박이었다. 그 한 마리에 관해서는 결과적으로 이 도박이 패배할 것을 알았다고 
해도 역시 그것은 이길 수도 있는 도박이었다. 또 개체수의 급증으로 번식의 중신 지역에서 
수백만의 큰 그룹을 이루고 쏟아져오는 나그네쥐들도  그들이 지나쳐 온 그 지역의  개체군 
밀도를 감소시키기 위해서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더 밀도가  낮은 생활 장소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이기적 존재인 그들 모두가 그러고 있는 것이다. 특정한 장소를 계속 고
집하면 그들은 새로운 생활 장소를 발견 못하고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
가 나야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도 다음의  가능성을 변명하는 것은 아니다. 즉, 원래
의 지역에 잔류하는 것은 더 좋지 못한 도박이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개체군 과밀-출생률 감소 초래
  개체군의 과밀이 때로는 출생률의 감소를 초래케 된다는 것은 많은 자료로 잘 알려진 사
실이다. 이 사실이 윈-에드워즈의 이론뿐만 아니라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과도 합치하기 때
문이다. 예를 들면, 옥외의 울타리 안에 먹이를 충분히 공급하고 생쥐를 자유로이  번식시키
는 실험이 행해진 적이 있다. 이 개체군은 어느 수까지는  증가했는데 그 후에는 평형 상태
가 되었다. 개체수가 평형 상태로 된 것은 과밀 결과  암놈의 번식 능력이 감퇴되었기 때문
임을 알았다. 새끼 수가 줄어든 것이다. 이와 비슷한  효과는 이외에도 종종 보고되고 있다. 
이 같은 종의 효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은 '스트레스'라고 할 때가 많다. 더욱이 원인에 그
런 이름을 붙여 보는 것만으로는 설명을 어떻게 연관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개체군의 과밀
화에 따라 출생률을 감소시킨다는 성질을 가진 암놈에게 자연 선택이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
은 도대체 왜 그럴까!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출산
  원-에드워즈의 답은 분명하다. 암놈이  개체군 밀도를 측정해 출생률을  조정하는 성질을 
가진 덕택에 먹이의 과밀 이용을 일으키지 않고 사는 집단이 그룹 선택에 유리하기 때문이
라고 한다. 상기 실험의 경우 먹이가 결코 부족하지 않았는데 생쥐가 이 조건을 이해한다고 
상정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들은  야생 생활에 적응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그리고 
야외 조건하에서라면 과밀은 앞으로 최래될 기근을 나타내 주는 지표가 될 것이다.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의 견해는 어떠한가? 거의 같은 의견인데, 단 하나의 결정적인 의견
의 차이가 있다. 동물은 그들 자신의 이기적인 입장에서 보아  최적 수의 새끼를 갖는 경향
이 있다고 하는 랙의 견해를 상기해야 한다. 그들이 낳은  새끼의 수가 적거나 또는 과다하
든지 하면 그들이 최종적으로 키워 낼 수 있는 새끼의 수는 만일 그들이 꼭 맞는 수의 개씨
를 낳아서 키울 때의 그 수보다 적어지고 말 것이다. 이 '꼭 맞는 수'라고 하는 것도 개체군
의 과밀한 해에는 개체군이 희박한 해에 비해 보다 작은 수가 될 것이다. 과밀이 기근의 전
조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는 본래부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만약 암놈이 기근을 예측하는 
확실한 증거에 접할 경우 스스로 자기의  출생률을 감소시키는 것은 명백히 암놈의  이기적 
이익에 걸맞은 것이다. 이 경고적인 징후에 이 방법으로 반응하지 않는 경쟁자들은 가령 그 
암놈보다 많은 새끼를 낳았다고 해도 최종적으로 키워 낼 수 있는 새끼수는 그 암놈보다 적
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최종적으로 윈-에드워즈와 거의  똑같은 결론에 도달
하게 된다. 단 우리들은 그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진화론적 추리를 거쳐 거기에 도달한다.
      밀도 조사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은 '현시 행동'의 문제도 쉽게 처리한다. 독자는 윈-에드줘즈의 다음
과 같은 가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즉, 동물들은 모든 개체가 개체군의 밀도 조사를  쉽
게 실행하여, 이에 따라서 자신의 출생률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큰 그
룹을 이루고 일제히 과시를 한다고 한다. 실제로 현시적인 집합이 있다고 하는 직접적 증거
는 없으나, 가령 그런 종의 증거가 있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은  당혹
할 것인가? 걱정할 것은 못 된다.
  찌르레기는 매우 많은 수가 한데서 잠을 잔다. 지금 가령  단지 겨울 동안의 과밀 상태가 
봄에 산란 능력을 감퇴시킨다는 것뿐만이 아니고  또한 서로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이  산란 
능력 감퇴의 직접적 원인이 됨을 알았다고 상정해 보자. 이 점을 증명하려면 찌르레기의 요
란한 잠자리 음과 조용한 잠자리 음을 테이프에 녹음해 놓고 각각의 음을 들려준 찌르레기
를 상호 비교하는 실험을 통해 전자의 음에 내놓았던 개체 쪽이 산란수가 적음을 제시하면 
좋을 것이다. 정의에 따르면 이로 인해 찌르레기의 울음소리는  현시적인 과시의 하나인 것
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은 생쥐의 예를 든 것과  거의 같은 방법으로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동물은 미래를 예측한다.
  유전자 풀 속에서 양육 능력 이상으로 가족을 확대시키는 유전자는 자동적으로  불리하게 
되어 그 수가 감소한다는 가정하에서 논의를 시작하자. 따라서 허실없이 산란하려는 개체에
게 주어진 일은 이기적인 개체로서 어미의 입장에서  본 한 둥지의 최적 알 수가 다가오는 
번식기에 있어도 도대체 몇 개로 되느냐를 예측하는 것이다. 예측이라는 말은 제4장에서 말
한 것 같은 특수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독자는 그것을 상기했으면 한다. 암놈은 대관절 
어떻게 해서 한 둥지의 최적 할 수를 예측하는 것일까? 어떤 변수가 어미의 예측에 영향을 
줄까? 우선 대부분의 종은 해마다 변화하지 않는 고정적인 예측을 세우고 있는 것 같다. 예
컨대 북양가마우지의 한 둥지의 최적 알 수는 평균 한 개로 정해져 있다. 물론 고기가 특히 
풍부한 해에는 일시적으로 두 개로 증가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북양가마우지에
게 어떤 특정한 해가 어류가 많은 해로  되는지의 여부를 사전에 아는 방법이 없다고 하면 
북양가마우지의 암놈들이 두 개의 산란으로 해서 가지고 있는 자원을 낭비하고 마는 위험을 
취하는 것을 예상할 수 없다. 알  두 개를 낳게 되면 평균적인 해의  조건에서 그들의 번식 
성적은 손해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찌르레기를 포함하여 상기와 다른 조건하에 있는 종에서도 볼 수 있을 것
이다. 이들 종에 있어는 봄에  특정한 먹이 자원의 생산이 양호하게  될는지 어떤지를 겨울 
동안에 예측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가능할지도 모른다. 농촌 사람들 사이에는 예컨대 호랑가
시나무 열매의 많고 적음이 봄날씨를 예측하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 등등 미래의 
단서가 되는 많은 속담들이 있다. 어떤 특정한 늙은  아낙네의 이야기가 정확한지의 여부는 
덮어놓고라도 논리적으로 존재 가능한 여지는 있다. 그렇다면 이름난 점쟁이가 자기의 이익
이 되도록 한 둥지의 알 수를 해마다 조정하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것이다. 호랑가시
나무 열매가 과연 신뢰할 수 있는 예측 수단인지는 몰라도 생쥐의 경우와 같이 개체군 밀도
가 좋은 예측 수단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많이 있다고 생각된다. 새끼를 낳고 먹이를 줘야 
하는 봄에 같은 종의 경쟁자들과 먹이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찌르레
기 암놈은 원칙적으로 알 수가 있다. 만약 겨울에 암놈이 같은 종 개체의 지역 밀도를 어떤 
방법으로 추정할 수 있다면 이것은 봄이 되어 새끼를 위해 먹이를 확보하는 것이 얼마나 곤
란할지를 예측하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겨울철에 개체 밀도가 현저히 높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산란수를 조금 감소시킨다는 것이 암놈의 이기적 견지에 맞는 신중한 대응
책이 된다. 즉, 자기의 한 둥지의 최적 알 수에 대한 암놈의 추정치는 감소하게 된다.
      Beau Geste 효과
  개체가 실제로 자기 손에 의해 개체군의 밀도 추정을 근거로 하여 한둥지의 알 수를 감소
신다는 성질을 나타내게 되면 즉시 다음과 같은 사태가 일어난다. 즉, 실제의 밀도가 어떻든 
경쟁자에 대해서는 개체군이 굉장히 큰 것처럼 꾸미는 것이 개개의 이기적 개체에게는 유리
하게 도는 것이다. 예컨대 찌르레기의 예에서, 가령 겨울 잠자리의 소란정도가 개체군의  크
기를 추정하는 수단으로 되어 있다면 개개의 개체는 있는 힘을 다하여 소리를 크게 지는 것
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동물은 마치 동시에 몇 개의 개체가 거기에 있는 것처
럼 보이게 하는 일이 있지나 않은가 하는 견해는 크렙스(J..R. Krebs)가 별도의 문제를 다루
었을 때에 시사했던 것이다. 그는 프랑스 외인 부대의 일단이  이와 같은 전술을 쓰는 장면
이 나오는 소설을 참조해 거기에 'Beau Geste 효과'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다. 찌르레기의 경
우 이 행위의 목적은 주위 동료들이 그것에 속아서 그들의 한 둥지의 알 수를 진짜  최적치 
이하로 감소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찌르레기의 그것처럼  이 목적을 잘 달성
한다고 하면 그것은 당신의 이기적인 이익에 합당한다. 당신은  당신과 같은 유전자를 지니
지 않은 개체를 감소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상의 고찰에서 나의 결론을 말하면 현시
행동이라는 윈-에드워즈의 착상은 실제로 우수한 고찰 방법일지 모른다. 아마도 그의 이 견
해는 그가 그것에 준 진화론적  설명이 오용된 점을 제외하면 시종  옳았을지도 모른다. 또 
상기의 고찰에서 더 일반적인 결론을 끌어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그룹 선택 이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떠한 증거가 나타났다고 해도 랙의 가설은 그것을 유전자의 이기
성에 의해 설명해 보이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장의 결론은 개개의 어미 동물이 가족 계획을 실행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공공
의 이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출생률의  최적화인 것이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살아 남는 자기 새끼의 수를 최대화하려고 힘쓰고 있고, 이것을 위해서는 새끼의 수가 과다
든 과소든 상관이 없다. 개체에게  과도한 수의 새끼를 가지도록 하는  유전자는 유전자 풀 
속에 거처할 수 없다. 그런 종류의 유전자를 체내에 가진  새끼들은 성체가 될 때까지 살아 
남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가족 크기의 양적인 고찰은 이상으로 매듭짓기로 하자. 다음에 다룰 것은 가족 내부의 이
해 충돌 문제이다. 모친으로서 자기의 아이를 모두 공평히 대하는 것이 이익일까  손해일까. 
자칫하면 모친은 특정한 아이를 편애하는 것은 아닌지. 가족과는  단일 협력 집단으로서 통
일되어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가족에게까지도 이기주의나 속임수가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
인지. 같은 가족 내의 전 구성원은  동일한 최적치의 달성을 향해 노력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간에는 무엇을 최적치로 할 것인가를 가지고 '의견의 불일치'가 있는 것일까. 다음 장에
서는 이들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 보자. 배우자간에 이해  충돌이 있나 없으나 하는 문제
도 이와 관련된 것인데, 그것에 관해서는 제9장으로 미루자.

            제8장
          세대간의 싸움
        가족 내부의 이해관계
  우선 앞 장의 마지막에 제기되었던 여러 문제 중에서 첫 번째 문제부터 취급하기로 하자. 
어머니는 아이를 편애할 것인가, 아니면 모든 아이에게  동등하게 이타적으로 대할 것인가? 
지루하게 생각될지는 몰라도 나의 습관적인 경고를 여기서도 다시 해야 한다. '편애'라는 말
에는 주관적인 의미가 없으며, '해야 한다'란 말도 윤리적인 용어로서 쓰이고 있지  않다. 나
는 어머니를 하나의 기계로 취급하고 있다. 이 기계의 내부에는 유전자가 제어자가 되어 삽
입되어 있다. 그리고 이 기게는 유전자의 사본을 증식시킬 수  있는 한 모든 노력을 기울이
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독자와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의식적인 목적을 갖는 것이 어떤 것
인지를 알고 있다. 생존 기계의 행동을 설명함에 있어서  목적에 관련된 용어를 비유적으로 
사용하면 편리하다.
      편애
  실제로 어머니가 아이를 편애한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답은 그녀가 이
용할 수 있는 여러 자원을 아이들에게 불균등하게 투자한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투자할 수 
있는 자원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먹이가 뚜렷한 예인데 그것을  취하는 데 드는 노력도 어
머니에게 어떤 부담이 되는 이상, 이것도 분명한 자원이다. 포식자로부터 아이를 지킬  때의 
위험은 그 '행사'나 회피가 어머니의 수중에 있는 또 다른  자원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집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쓰이는 에너지나  시간, 폭풍우로부터의 보호, 또한 일부  동물종에는 
새끼 훈련에 쓰이는 시간 등 어느 것이든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대해 공평히, 또는 어머니의 
'선별'에 따라 불공평하게 분배할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이다.
  어미 동물이 투자할 수 있는 이들 모든 자원을 측정하는 공통의 척도를 생각해 내는 것은 
어렵다. 인간 사회에서는 음식물, 토지, 노동 시간 등의  어느 것과도 변환 가능한 보편적인 
척도로서 화폐가 사용되고 있다. 그것과 꼭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개개의 생존 기계가 다른 
개체, 특히 새끼의  생명에 대해 투자하는 여러 자원을 측정하기 위한 단 하나의 척도가 필
요하게 된다.. 에너지의 척도인 칼로리 등이 적절하게 보이므로 일부의 생태학자들은 야외에 
있어서의 에너지 비용의 계산에 몰두해 왔다. 그러나 이 척도는 불충분하다. 중대한  의미를 
갖는 척도, 즉 진화의 '궁극적  척도'인 유전자의 생존에 그것을  실제로 적용시키려고 하면 
아무래도 애매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솜씨 있게 해결한 사람은 투라이버스  (R.L. 
Trivers)였다. 그는 1972년에 ' 부모에의한 보호 투자'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그것을 풀어 보
았다(단 20세기 최대의 생물학자인 피셔(R.Fisher) 경의 압축된 문장의 행간을 읽으면  그가 
1930년에 '부모의 경비'라는 말로 트라이버스의 '부모에 의한 보호 투자'와 거의 동일한 사건
을 지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모에 의한 보호 투자
  부모에 의한 보호 투자(parental investment, PI)는 '한 아이에 대한 부모의 투자 중 그 아
이의 생존 확률(그 때문에 번식에 성공할 확률)은 증가 시키지만  동시에 다른 아이에 대한 
부모의 투자 능력을 희생시키는 모든 것'으로서 정의도니다. 트라이버스의 부모에 의한 보호 
투자라는 사고 방식의 장점은 실제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궁극적 척도에 가장 가까운 단위
로 평가되는 것이다. 예컨대 한 아이가 모유의 일부를 마셔 버리면 모유의 소비량은 파인트
(pint) 또는 칼로리 단위로 측정되는 것이 아닌 이것에 의해 다른 형제가 입는 손해의  단위
로 측정된다. 지금 어떤 어머니가  X와 Y라는 두 아이를 키우는데,  X가 1파인트의 모유를 
마셔 버렸다고 하면 이때의 상기의 양의 모유에 대응하는 PI의 대부분은 그 모유를 못 마셨
기 때문에  Y의 사망 확률아 얼마큼  증가하는가에 따라 측정된다. P.I.는 이미 출생했거나 
또는 앞으로 출생할 다른 아이들의 평균 여명의 감소도에 의해 측정된다.
  그러나 부모에 의한 보호 투자도 이상적 척도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다른 유전적 관계를 
제쳐놓고 친자 관계만을 너무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상적으로  어떤 일반화된 '이타적 투자'
의 척도를 이용해야만 할 것이다. 개체 A가 개체 B의 생존 확률을 증가시킨다면 A는 자기 
자신 및 다른 친척에 대한 투자 능력을 희생하여 B에게 투자했다고 해도 좋다. 이때에 치러
지는 모든 희생은 적절한 유전적 근친도에 의해 가중치가 더해진다. 즉, 이상적으로 어떤 아
이에 대한 어머니의 투자는 다른 아이들뿐만 아니라 생질 혹은 그녀 자신 등의 평균 여명의 
감소에 의해 측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점에서 억지 주장이다. 실제로는 트
라이버스의 척도로도 충분하다.
  모든 어미 동물은 자신의 생애를 통산하여 새끼에게 투자할 수 있는 어떤 총량의 PI를 갖
고 있다고 가정하자(새끼뿐만이 아니라 다른  혈연자와 어미 자신에 대한  투자도 고려해야 
하나 여기에서는 간단하게 아이만을 생각한다). 이 양에는 어미가 일생 동안 노동을 통하여 
획득 또는 생산할 수 있는 음식물의 총량, 어미가 스스로 대처할 용기가 있는 유험의  총량, 
그 밖에 어미가 새끼의 복리를 위해 주입할 수 있는  모든 에너지와 노력이 포함되어 있다. 
성숙기에 달한 젊은 여자는 그녀의 생애에 자원을 어떻게 투자할 것인가? 그녀가 따라야 할 
현명한 투자책은 어떤 것일까? 랙의 이론에서 이미 밝혀졌듯이 많은 아이에게 투자를 할 수 
는 없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그녀는 충분한 수의 후손을 확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매우 많은 유전자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 아주 소수의 아이, 즉 과보호로  호강하는 
아이들에게 모두를 투자해 버릴 수도 없다. 그 경우  그녀는 확실히 '약간'의 후손을 확보할 
것이다. 최적수의 아이에게 투자한 경쟁자쪽이 최종적으로 보다 많은  손자를 얻게 될 것이
다. 공평한 투자책에 대해서는 이상으로 하고, 당면한 관심은 아이에 대해 불공평한  투자가 
어머니로서 득이 되느냐 하는 일이다. 바꿔 말하면 그녀는 아이를 편애할 것인가, 어떤가 하
는 문제이다.
      편애에는 유전적 근거가 없다.
  어머니의 편애에 관해서는 유전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 이  문제의 해답이다. 그녀의 아이
에 대한 유전적 근친도는 1/2로 같이 때문이다. 즉, 그녀의 최적 전략은 번식 연령까지 양육
해 낼 가장 큰 수의 아이에  대해 '공평한' 투자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6장에서 다룬 
바와 같이 일부의 개체는 다른 개체는  다른 개체보다 생명 보험의 피보험자로서  훌륭하게 
생장한다. 평균 크기 이하의 작은 아이도 더 성장이 좋은  한배 새끼들과 같은 수만큼 어머
니의 유전나를 갖고 있으나 그의 평균 여명은 다른 동료들보다  짧다. 바꿔 말하면 다른 형
제들과 최종적으로 같은 상태까지 그를 키워  보려고 하면 다른 형제들과 최종적으로  같은 
상태까지 그를 키워 보려고 하면  그만큼 공평한 배분량 이상의  부모에 의한 보호 투자가 
'필요하게 된다.' 사정에 따라서 이와 같은 작은 아이에게  급식을 거부하고 보호 투자의 배
분량을 모두 다른 형제 자매에게 분배하는 것이 어머니에게는  유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육에 실패한 새끼를 죽여서 그 형제 자매들에게 먹이거나 자기가 그 새끼를 먹
고 모유의 생산에 보탬이 되게  하는 편이 어미에게 득일지도 모른다.  때때로 어미 돼지가 
자기 새끼를 실제로 먹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미 돼지가 키울  수 없는 새끼를 
골라서 먹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평균 크기 이하의 작은 새끼의 문제는 특수한 예의 하나이다. 더 일반화하면 새끼에 대한 
어미의 투자 경향이 새끼의 연령에 따라 어떤 영향을 받는가에 관해 몇 가지 예측이 가능하
다. 우선 만일 어미가 어느 한편의 새끼의 생명만 구하고 구조를 못 받은 새끼는 죽일 수밖
에 없는 양자 택일을 하도록 되어 있다면 어미는 나이  먹은 새끼를구하려고 할 것이다. 나
이든 새끼가 죽는 것과 어리고 작은 새끼가 죽는 것을 비교하면 지금까지의 보호 투자량은 
전자쪽이 많기 때문이다. 단, 이것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만일 어미가 
작은 새끼를 구했다면 큰 새끼와 같은 연령까지 키우기 위해서는 다시금 귀중한 자원을 투
자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편, 만일 어미가 직면하는  선택이 상기와 같이 새끼의  생사를 가늠할 정도로엄격하지 
않을 때에는 어린 새끼에게 원조를 많이 하는 것이 안전하다.  예를 들어 어미가 한입 분량
의 먹이를 어느 새끼에게 줄 것인가라는  양자 택일에 직면한다면 자력으로 먹이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큰 새끼보다는 그럴 능력이 없는 작은  새끼에게 줄 것이다. 왜냐하면 어
미에 의한 급식이 중지되더라도 큰 새끼는 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스스로 먹
이를 얻을 줄 모르는 작은 새끼는 어미가 그 먹이를 큰 새끼에게 주어 버리면 죽을  가능성
이 커질 것이다. 이럴 경우에 어미는  비록 큰 새끼를 죽게 하느니 작은  새끼를 죽게 하는 
편을 선택하려는 경향에는 변함이 없을지라도 그 먹이를 작은  새끼에게 줄 것이다. 그렇게 
해도 큰 새끼가 죽을 염려는 없기 때문이다. 포유류의 어미가  새끼에 대해 일생 동안 급식
을 계속하지 않는 까닭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
  새끼가 그의 생애의 어떤 시기에 달하면 어미는 새끼에 대한 투자를 장래의 새끼에 대한 
투자로 대체하는 것이 유리하다. 이 시기가 오면 어미는  새끼를 이유시키려고 한다. 단, 최
후의 새끼를 안고 있는 어미는 만일 어떤 방법으로 그 새끼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면 남은 생애를 통하여 자신의 모든 자원을 그 새끼에게 투자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새끼
가 충분히 성장할 때까지 수유한다고 예상된다. 특히 이때에 막내에게 그렇게 투자하기보다 
손자나 조카 및 질녀에게 투자하는 것이 득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은 어미가 잘  '판단'해야 
한다. 손자, 조카 또는 질녀와 어미와의 근친도는 어미와 자식 사이의 근친도의 절반이지만, 
어미의 투자에 의해 그들이 받는 이익의 크기는 자식에게 한 것보다 두 배 이상이 될 수 있
기 때문이다.
      폐경기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여성이 중년기에 돌연히 생식  능력을 잃어버리는 현상, 
즉 폐경이라는 기묘한 현상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 보자. 우리의 선조들  사이에 이 현상은 
그리 일반적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 나이에 이르기까지 장생한 여성은 그다지 많지
는 않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의 생애에 있어서  이 갑작으런 변화와 남성의 
생식 능력의 점차적 감퇴와의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차이는 폐경에 관해 무엇인가 유전적으
로 '의도된 것'이 있는 것, 즉  폐경이 '적응'이라는 것을 생각하게끔 한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조금 귀찮은 일이다. 모친이  고령이 됨에 따라 아이의 생존은  점점 어렵게 된다고는 
하나, 여성은 죽을 때까지 산아를 계속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할지 모른다. 실제로  출산을 
계속하는 것을 해봄직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그녀가 
아이에 비하면 비록 절반 정도이기는 하나  손자들과도 친척 관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마도 메다워의 노화 이론(제3장 참조)과도 관련된 여러 가지  이유에서 자연 상태의 여
성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육아의 효율이 점점 감퇴할 것이다. 이 때문에 노령의 모친으로부
터 낳은 아기의 평균 수명은 젊은 모친이 낳은 아기의 수명에 비해 짧을 것이다. 이것은 가
령 어떤 여성이 자기 아기와 손자를 같은 날 받았다고 하면 손자가 자기 아기보다 장생한다
고 예상됨을 의미한다. 자기가 난 아기가 어른이 되는 평균 확률이 동갑내기 손자가 어른이 
될 가능성의 꼭 1/2을 기록하는 연령에 도달하면 자기 자식보다  오히려 손자쪽으로 투자하
려고 하기 때문에 그 유전자가 유리하게 되어 번창할 것이다. 이유전자는 손자 4명당 1명의 
비율로 옮겨지게 되는 한편 그것과 경쟁 관계에 있는 유전자는 자식 2명당 1명에게 옮겨지
게 된다. 그러나 손자의 수명의 길이가  이 관계를 역전시키기 때문에 '손자에 대한  이타적 
행동'을 재촉하는 유전자가 유전자 풀 속에  널리 보급된다. 자기 아이를 계속 낳는  여성은 
소낮에게 충분히 투자를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중년기에 이른 여성의 번식 능력을 상실하
도록 작용하는 유전자가 점점 증가했다. 이 유전자가 조모의  이타적 행동에 의해 살아가는 
데 도움을 받은 손자들의 몸 속에 옮겨졌기 때문이다.
  이상은 여성의 폐경의 진화에 관하여 생각할 수 있는  하나의 설명이다. 남성은 아이들에 
대해 여성만큼 큰 투자를 하지 않는다. 남성의 경우 생식  능력이 돌연히 사라지는 것이 아
니라 점차로 쇠퇴해 가므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만일 남성이  젊은 여성에게 아이를 
낳게 할 수 있다면 심지어 그가 고령의 남성일지라도 손자에게 투자하기보다는 자기 자식에
게 투자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앞 장과 본장의 여기까지에서는 모든 것을 부모의 관점, 특히 모친의 관점에서 보아 왔다. 
부모가 자식을 편애하게 된다고 예상되는지 어떤지, 더욱이 일반적으로 부모로서의 가장 좋
은 투자책은 어떤 것인가가 지금까지의 문제였다. 그러나 각 아이는 다른 형제 자매보다 자
기가 양친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투자를 받는가에 대해 스스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비록 부모가 자식을 편애하는  것을 '바라지' 않아도 아이들  사이에는 측별 대우를 
둘러싼 경쟁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이런 싸움은 아이들 자신을 위해 유리할
까, 더 엄밀히 말하면 유전자  풀 속에서 아이들 사이에 이기적인  고집을 부리는 유전자가 
각자가 공평한 분배량을 바라는 경쟁 유전자보다 다수가 될 수 있을까? 트라이버스는 '부모
와 자식간의 다툼'이란 제목의 1974년의 논문에서 이 문제를 잘 분석하고 있다.
      어미의 이타적 행동
  모친은 이미 출생했거나 지금 출생중이거나 상관없이 그녀의 모든 아이에 대해서는  같은 
유전적 근친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미 말 한 대로 유전적인 배경만을 문제로 삼는다면 
그녀에게는 아이를 편애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친이  실제로 편애를 
한다면 그 이유는 자식들간의 나이와 다른 요인에 의존하는 평균 여명의 차이가 있기 때문
에 그렇다. 다른 어떤 개체와 마찬가지로 모친도 그녀의 아이에 대한 근친도의꼭 두 배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그녀는  그 자원의 거의 모든 것을 자
기 자신에 대해 이기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조건이라는 것은 
실제로 같지 않다. 스스로 자원의 많은 부분을 아이들에게 투자하는 것이 그녀 자신의 유전
자에 대해서보다 더 잘 공헌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이들이 그녀보다 어리고, 따라서 단위 
투자량당 그들이 획득할 수 있는 이익이 그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크기 때문이
다. 자기를 제펴놓고 더 무력한 개체에 투자하려고 하는  유전자는 이타적 유전자가 수혜자
에게 극히 일부밖에 공유하고 있지 않은 경유에도 유전자 풀 속에 퍼질 수가 있다. 어미 동
물에 의한 이타적 행동은 이 때문이며, 특히 그들 사이에  혈연 선택에 의한 이타주의가 발
견되는 것도 모두 이 이유에서 기인하고 있다.
  이제 문제를 특정한 아이의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될 것인가. 형제자매 가각에 대한 그의 
유전적 근친도는 그 형제 자매에  대한 모친의 근친도와 같고, 모든  경우에 그 값은 1/2이 
된다. 따라서 그는 모친의 자원 중에서 어느 정도를 그의 형제 자매에게도 투자하도록 '바라
고 있다'라고 할 수 있다. 유전적으로 말하면 형제 자매에 대해 그는 모친과 꼭 같은 이타적 
경향을 나타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 자신에 대한 근친도가  어떤 형제 자매에 
대한 근친도의 꼭 2배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 때문에 다른 조건이 동일하면 그는 모친이 
다른 어느 형제 자매보다 자기 자신에게 많이 투자해 주도록 바라는 경향을 나타낼 것이다. 
이때에 다른 조건은 실제로 같아질 가능성이 있을 것같다. 가령  어떤 아이와 그 형제가 동
갑이고 게다가 양자 모두 모친의 1파인트의  모유로 같은 이익을 받을 입장에 있다면  그는 
그 공평한 배분량 이상을 탈취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며 그 형제쪽도 같이 공평한 배분량 
이상의 획득을 목표로 애써야 할 것이다. 어미 돼지가 수유를 위해 누우면 첫 번째 젖을 차
지하려고 새끼 돼지들이 꽥꽥거리며 크게 요동치는 것을 독자는  들어 본적이 있을 것이다. 
또 하나 남은 과자 조각을 가지고 어린 사내아이들이 앞을 다투는 광경도 본 적이 있을  것
이다. 이기적 욕심 근성은 아이들의 많은 행동에 특징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내가  한입의 음식물을 가지고 동생
과 경합하고 있고 게다가 동생은 나보다 훨씬 어리므로 그 음식물에 의해 그가 받을 수  있
는 이익은 내가 그것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크다고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도 
그 음식물을 그에게 양보하는 편이 나의 유전자를 위해서도  유리할 것이다. 연상의 형제는 
자식에 대한 모친의 경우와 꼭 같은 근거에서  어린 형제에 대해 이타적인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이미 본 바와 같이 어느  경우에도 근친도는 1/2이고, 두 경우 모두  젊은 개체편이 
연상의 개체보다 문제의 자원을 유효하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음식물을 포기하
는 유전자를 내가 가지고 있다고 하면 나의 동생이 같은 유전자를 소유할  가능성은 50%가 
된다. 이 유전자는 내 몸 속에 있는 유전자이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있을 가능성은 동생
의 경우의 2배, 즉 100%인데 내가 그 음식물을  필요로 하는 긴급한 정도는 동생의 경우의 
1/2이하로 될 수 있다. 이상을 일반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각각의  아이는 공평한 할당
량 이상으로 부모의 보호 투자를 얻으려고 애써야만 '할  것'이나, 거기에는 어떤 한계가 있
다. 그러나 어디가 그 한계인가? 그  한계량이란 그가 기존의 형제 자매  및 앞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있는 어린 동생이 입을 손실이 그가 얻는 이익의 꼭 2배로 되는 분량이라는  것이
다.
      이유 시기 결정
  다음은 이유 시기를 언제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기로 하자. 어머니는 태어날 자
식을 키우리 위해 현재 돌보고 있는 아이의 수유를 끊으려고 할 것이다. 한편 지금 젖을 먹
고 있는 아이는 아직은 이유할 수 없다고 바둥거릴 것이다. 젖은 편리하고 수고를 덜어주는 
음식물이고, 아이는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스스로  생활해 나가기 싫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며느 궁극적으로 아이는 어미에게서 떨어져 스스로 생활하려고 하는 것이다. 단, 그것은 
자기가 어미품에 있는 것보다 그 곳을 떠나 어미가 어린 동생을 자유로이 키우도록 하는 것
이 그 자신의 유전자로서도 유리하게 되는 시점이 될  때의 이야기다. 1파인트의 접에서 아
이가 받는 상대적 이익은 아이의 연령이 많을수록 적어진다. 아이가 커감에 따라 그의 요구
량 중에서 1파인트의 젖이 차지하는 비율은 적어져 가는 반면에 자활하는 능력은 점차로 증
대해 간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즉, 연상의 아이가 어린 아이에게 투자할 수 있었던 젖  1파
인트를 마신 경우보다 상대적으로 커지는 것이다. 아이가 커가면서  그에 대한 급식을 중지
하고 대신에 새 아이게게 투자하는 것이 어미로서는 유리하게 되는 시기가 온다. 일정한 시
간이 지나면 연상의 아이의 유전자 자신도 이유에 의해 유리하게 되는 시기가 올 것이다. 1
파인트의 젖이 그의 '체네'에 있는 유전자보다도 그의 어린 동생에게 있는 유전자  사본에게 
보다 큰 이익을 줄 수 있게 될 때가 바로 그 시기가 되는 것이다.
      모자간의의견 불일치
  모자간의 의견 불일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닌데, 이 경우는 시기를 맞추는 양적인 의견 차
이이다. 어미는 아이의 여명이 이미  그에게 가해진 투자량을 감안하면서  투자량이 그에게 
할당된 '공정한 '양에 달하는 시점까지는 현재 돌보고 있는 아이의 수유를 계속하려고 한다. 
의견의 불일치도 이 시기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때어날 아이들이 받을 불이익
이 그가 받는 이익의 2배 이상에 달한다면 이후 어미가 그에 대해 수유를 행하려 하지 않는
다는 점에 관해서도 모자의 의견은 일치한다. 모자간에 의견  불일치가 생기는 것은 중간적
인 기간 - 아이가 어미의  입장에서 본 공정한 배분량 이상으로  투자를 얻으면서도 또 그 
결과 초래되는 다른 아이의 불이익은 아직 그가 얻는 이익의 2배 이하로 머물러 있는  기간 
-에서이다.
  이유 시기는 모자간에 다툼이 생기는  문제의 한 예인데, 이것은 또  어떤 개체와 앞으로 
태어날 그의 어린 동생과의 다툼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때 어미는 장래에 생길 아이의 편
에 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배 자식인  형제들, 또는 같은 보금자리 형제들과 같은  연령의 
경쟁적 개체간에는 어미의 투자를 향한 더 직접적인 경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도 
어미는 아이들 간의 경쟁을 공정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이기적인 새끼
  많은 새끼새는 둥지 속에서 부모의 급식을 받는다. 새끼들이 큰 입을 벌리고 울어대면 어
미새는 그들 중 한 마리의  입속에 벌레나 또는 한입거리의 먹이를  넣어 준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개개의 새끼가 질러대는 소리의 크기는 그 새끼의 공복의 정도에 비례할 것이다. 만
일 그렇다면 가장 큰 소리를 내는 새끼이게만 항상 먹이를 주게 되면 아이들은 모두 공정한 
분배를 받을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실컷 먹이를 받은 새끼는 그다지 소리칠 필요가 없
기 때문이다. 개체가 속이기만 않으면 적어도 생각할 수  잇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하에서는 
그와 같은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의 이기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개체는 속
이려 할 것이고 새끼들은 공복도에 관해 거짓을 행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
기 행위는 차차 심해져서 분명히  무의미한 것에 이르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갰기가 
매우 큰 소리를 질러가며 속이려 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이젠 이 큰 소리가 표준 수준으로 
되어 그것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기 행위가 줄어들 가능성은 없다.  소
리를 작게 하는 방향으로 진해을 시작한  개체는 급식량의 감소라는 형태로 즉시  불리하게 
되어 굶어 죽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새끼의 소리가 한없이  크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은 
다른 이유도 있다. 이를테면 큰 소리는 포식자를 끌어들이기 쉽고, 또 에너지 소모도 클  것
이다.
      열등한 새끼
  이미 말했듯이 한배 자식 중 한  마리가 특히 작은 경우가 있다. 대개  이런 새끼는 다른 
형제들처럼 힘차게 먹이를 취하지 못하고 죽어 버리는 수가 많다. 어미에게 있어 이와 같은 
새끼는 죽게 놔두는 것이 실제로 유리하게 되는 수가 있다.  도대체 어떤 조건일 때에 그렇
게 되는지는 이미 고찰해 보았다. 직관적으로 생각하면 제대로 자라지 못한 새끼 자신은 최
후까지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유전자의 이기
성 이론으로는 반드시 이와 같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없다.  제대로 자라지 못한 작은 아이
의 여명은 소형화, 쇠약화에 의해 짧아지고,  부모에 의한 보호 투자나 그에게 주는  이익이 
동량의 투자에 의해 다른 아이들이 획득할 수 있는 이익의 1/2이하로 되면  그는 스스로 명
예로운 죽음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기의 유전자에게 가장 크게 공
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몸아, 만일 네가 다른 한배 자식 형제보다  훨씬 작았
다면 바둥거릴 것 없이 죽어라."라고 하는 지령을 내리는  유전자가 유전자 풀 속에서 성공
을 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에 의해 구조되는 개개의 형제 자매의 몸에는 그의 유
전자가 50%의 확률로 들어 있고 한편 잘못 키운 그의 체내에서 그 유전자가 살아  남을 가
능성은 어쨌든 극히 작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잘못 키운 아이의 생애에는 회복이 불가능하
게 되는 시점이 있음이 틀림없다. 이 시점에 달하지 않는 한은 그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 달하면 그는 즉시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자기의 몸을 한
배의 형제나 부모에게 먹히고 마는 편이 더 났다.
  랙의 한 둥지의 알 수 이론을  논할 때에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 해의  한 둥지의 최적 
알 수가 몇 개인지 미리 정하고 있는 어미에게는 다음과  같은 전략이 타당한 해답이 된다.
즉, 어미가 진짜 최적수이겠지하고 '생각하는  '알 수보다 1개만 여분으로 산란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 놓을 경우, 만일 그 해의 먹이가 예상보다 양호한 것을 알게 되면 어미는 추가해 
놓은 새끼를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역으로 먹이가 예상보다 적으면  밑지는 투자를 중지할 
수 있다. 새끼에게 급식을 항상 같은 순서, 이를테면 크기 순으로 행하도록 주의하면 어미는 
나머지 한 마리, 아마도 발육이 미숙한 새끼를 빨리 죽게 하여 그를 위해 애초의 난황, 또는 
이에 상당하는 다른 형태로 투자된 분량 이상의 과잉 음식물을 낭비하는 것을 확실히 회피
할 수 있다. 이것은 어미의 관점에서 본 경우의 발육 미숙아 출현 현상의 설명일지  모른다. 
그는 어미가 짜 놓은 투자의 손실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은 많은 
조류에서 관찰되고 있다.
      세대간의 싸움
  이 책에서는 동물 개체라는 것이 마치 유전자의 보존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는  생
존 기계인 양 보고 있다. 이 비유에 따라 우리는 부모와 자식 간의 다툼, 즉  세대간의 싸움
을 논할 수 있다. 이것은 양자 모두가 모든 수를 써서 전개하는 치열한 싸움이다. 아들은 부
모를 속일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는 실제 이상으로  배고픈 척하거나 실제보다 어리광을 
부리거나 또는 더욱이 실제 이상의 위험에 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할 것이다. 부모를 
물리적으로 위협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무력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허위, 위장, 이기적 이용 
등 자유로이 쓰이는 심리적인 무기가 있다. 그는 그것들에 의해 혈연자가 받는 불이익이 유
전적 근친도가 허용할 수 있는 한도를 넘는 아슬아슬한 선까지 그러한 모든 심리적 무기를 
구사한다. 한편 부모들은 사기나 위장에  대해 방심을 해서는 안 되고  그것에 속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언뜻 보아 간단한 것처럼 생각되나  공복도에 관해 자식들이 거짓맗
쟁이라는 사실을 부모가 안다고 하면 부모는 자식에게 일정량의 먹이밖에는 주지 않고 아이
가 계속 소리치더라도 그 이상은 먹이를 주지 않겠다는 방책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방책을 취할 때 문제가 되는 점은 아이가 거짓이 아닌 진실이었을 경우인데, 그래서 먹이를 
받지 못하고 죽고 만다면 그 부모는 귀중한 유전자를 잃고 말 것이다. 야생 조류는 단지 몇 
시간 동안 먹이를 받지 못해도 사망하는 수가 있다.
      공갈치는 새끼
  자하비(A. Zahavi)는 새끼가 철없이 악마적인 공갈을 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
다. 그에 의하면 새끼는 포식자를 집으로 불러들일 정도로 일부러 울어대는 수가 있다는 것
이다. 그 새끼는 "여우야! 여우야! 나를 잡아먹으러 오렴." 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새끼의 
울음 소리를 그치게 하기 위해 부모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것
이다. 그래서 새끼는 공정한 분배량 이상의 먹이를 입수한다는 것인데, 그 자신도 어떤 위험
을 각오해야 한다. 이 무자비한 전술의 원리는 몸값을 받지 못하면 자기를 비롯해 비행기를 
폭파한다고 협박하는 납치범의 행동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술이 진화 과정에
서 선택되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이다. 그  전술이 너무 무자비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공갈치는 아이가 그 전술에  의해 이익을 얻는다고는 조
금도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포식자가 나타나면 매우 난처한 사태가 되는 것은 그 
자신이다. 자하비는 다 s하나의 자식일 경우를 고찰했는데 이때 그 전술의 불리함이 분명히 
이해된다. 어미가 어느 정도의 투자를 새끼에게 했다고 해도  어미는 새끼의 유전자를 절반
밖에 공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새끼의 생명보다는 자신의 생명이 여전히 가치가 있을 것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 공갈자에게 형제가 있어 그의 약한 갓난아기들이 모두 같은 둥
지 속에 있다고 해도 그의 전술이 그에게 유리하게 되는  일은 없다. 공갈자인 새끼는 자기 
자신에게 100%가 걸려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전술에 의해 위기에 처해 있는  형제의 각각
에게 50%이 유전적인 '밑천'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단, 유력한 포식자가 둥지 속의 새끼 중 
가장 큰 것만을 먹어버리는 습성을 가졌다면 자하비의 이론에도 연구할 여지가 있을 수 있
다고 생각된다. 이 조건하에서라면 작은 새끼가  큰 위험에 처할 걱정은 없고, 따라서  그는 
포식자를 불러들이는 겁주기를 써서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자폭한다고 
겁주는 방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형제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는 방법과 흡사하다.
  뻐꾸기 새끼는 포식자를 불러들이는 공갈 전술로 이익을 얻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상기의 
예보다 진실성이 있을 것 같다. 잘 알려져 있듯이 뻐꾸기의 암놈은 다른 새 둥지에 한 개씩 
산란을 하고, 알아보지 못하는 양부모(아주 다른 종의 새)에게  자기의 새끼를 키우게 한다. 
이 때문에 뻐꾸기 새끼는 젖형제들에게는 유전적 밑천을 전혀 걸지  않는다(뻐꾸기 새끼 중
에는 젖형제를 갖고 있지 않는 종이 있다. 그렇게 되는  불길한 이유에 대해서는 후에 다루
기로 하고 여기서는 새끼 때에 젖형제들과 동거하는 종류의 뻐꾸기를 다루는 것으로 가정하
자). 뻐꾸기의 새끼가 포식자를 유인할 정도로 큰  소리를 지른다고 하면 그는 자기의 생명
이라는 큰 희생을 치를 가능성이 있으나 양모는 더욱 큰  희생을 치를 가능성이 있다. 자칫
하면 어미는 새끼를 4마리나 잃는 셈이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뻐꾸기 새끼가 큰 소리를 지
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 놈에게 특별히 많은 먹이를  주는 편이 양모에게 유리하다. 포
식자의 습격 위험보다 많은 먹이를 얻는 이익이 더 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쯤하고 존중해야 할 유전자 용어에 대한 문제를 풀어 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주관적 
비유에 너무 빠져들지 않았음을 재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뻐꾸기의 새끼는 "포식자야, 포식자
야, 이리 와서 나와 나의 젖평제를 잡아 먹어라."하고 큰 소리를 지름으써  양모를 공갈한다
고 하는 가설을 세운 것인데 실제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유전자의 용어로  그 
의미를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울음소리-공갈 유전자
  뻐꾸기 새끼가 큰 소리로 떠들면 양부모가 그에게 먹이를  줄 확률은 늘어난다. 그러므로 
큰 소리로 울도록 하는 유전자는 뻐꾸기의 유전자 풀 속에  수를 늘려 왔다. 새끼의 울음소
리에 대해 양모가 먹이를 준다는 형태로 반응한 것은 이와 같은 반응을 나타내도록 하는 유
전자가 이미 양모의 유전자 풀 속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 유전자가 양모에게 퍼진 것은 
울어대는 뻐꾸기 새끼에게 여분의 먹이를 주지 않은 양모들이 뻐꾸기 새끼에게 실제로 여분
의 먹이를 준 경쟁자보다 소수의 새끼밖에 키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뻐꾸기의 소리가 포식
자를 둥지로 불러들인 것이 그 이유이다. 큰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하는 유전자는 큰 소리
를 지르는 유전자에 비해 포식자에게 먹힐 가능성은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여분의 
먹이를 받지 못함으로써 더 큰 실점을 입은 것이다. 큰  쇠를 지르게 하는 유전자는 상기와 
같은 이유로 뻐꾸기의 유전자 풀 속에 퍼진 것이다.
  위와 같은 유전자 논의에서 우선 더 주관적인 논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즉, 어떤 종의 뻐꾸기의 유전자 풀 속에서 공갈 유전자가 퍼질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어도 보통의 종류의 새의 유전자 풀 속에서는 퍼질 것 같지 않다(적어도 울음소리가 포식
자를 유인하는 원인이므로 공갈 유전자가 증가한다는 가능성은 없다). 물론 보통 종에도 큰 
소리를 지르게 하는 유전자의 증가를 재촉하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앞에서 언
급했고, 이들의 부수적인 효과로서 때로는 포식자를 유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포식이 만일 무엇인가 선택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하면 울음소리를 작게 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설적인  예로서 소개한 뻐꾸기의 경우에는  일견 역설적이나 
포식은 최종적으로 울음소리를 더욱 크게 지르게 하는 것 같은 효과를 새끼에게 보급할 수 
있다.
      공갈 전술
  뻐꾸기 또는 유사한 '탁란' 습성을 가진 다른 새가 실제로 공갈 전술을 채용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잔인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예컨대 뻐꾸기처럼 
다른 종의 둥지에 산란하는 새로는 꿀잡이새(honey guide)가  있다. 이 새의 새끼는 깃털도 
없고 눈도 못뜬다. 또 아주 가냘픈 놈이면서도 끝이 뾰족하고 예리한 부리를 가지고 있어서 
그 부리로 젖형제를 마주 쪼아서 죽여버린다. 형제를 죽이면 먹이를 놓고 경합할 걱정은 없
어진다. 영국에서 보통 볼 수 있는 뻐꾸기는 이것과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같은 목적을 달
성한다. 알을 품는 기간이 짧으므로 그  뻐꾸기 새끼는 젖형제들보다 빨리 부화할 수  있다. 
부화된 새끼는 그 직후 맹목적. 기계적이라고는 하나 놀랄 만한 효과를 내는 방법으로 다른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낸다. 그는 알 밑으로 기어 들어가  그것을 등의 오목한 곳에 올려놓
고 두 개의 작은 날개로 알의 균형을  잡으면서 뒷걸음으로 서서히 둥지 벽을 기어 올라가 
알을 땅으로 떨어뜨린다. 그는 나머지 알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되풀이하여 결국은 둥지
와 양모의 관심을 독점한다.
      이종에 대한 이기적 행동
  지난 1년 사이에 내가 배운 가장 재미있는 사실의 하나는  스페인의 알바레즈(F.Alvarez), 
아리아스 드 레이나(L. Arias de Reyna), 그리고  세구라(H. Segura)가 보고한 제비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뻐꾸기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을 가진 양모가  침입자인 뻐꾸기 알이나 새
끼를 검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를 조사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련의 실험 중에서 
그들은 뻐꾸기의 알과 새끼를 까치 둥지에 넣어 본 적이  있다. 이때에 비교하기 위해 제비
를 위시하여 타종의 알이나 새끼를 까치 둥지에 넣었다. 또 그들은 제비 새끼 한 마리를 까
치 둥지에 넣어 보았다. 다음날 그들은 둥지 아래 지면에 까치 알이 하나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알이 깨지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그것을 주워서 다시 둥지에 넣고 어떤 일이 일어
나는가를 관찰해 보았다. 그들이 본 것은  정말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제비 새끼가  뻐꾸기 
새끼와 똑같은 동작으로 까치의 알을 내버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떨어진 알을 또 한번 둥지
에 넣어 보았다. 전과 똑같은 일이 되풀이됐다. 제비 새끼가 사용한 방법은 알을 등에  업고 
작은 날개로 알의 균형을 잡으면서 뒷걸음으로 둥지의 벽을 기어올라가서 알을 밖으로 떨어
뜨렸다는 것으로 보아 뻐꾸기와 같은 방법이었다.
  이 놀랄 만한 관찰에 알바레즈 등이 아무런 설명을 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현명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행동이 제비의 유전자 풀 속에서 진화할 것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가. 이 행동은 제비의 보통 생활의 어떤 측면에 대응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제비  새
끼로서는 까치 둥지 속에 있다는 사실에는 익숙하지 않다. 정상적인 경우에 그들이 같은 종 
이외의 둥지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결코  없다. 그렇다면 문제의 행동은  역으로 뻐꾸기에 
대항하는 수단으로서 진화된 하나의 적응일까. 뻐꾸기에  대한 대항책으로서 자기의 무기로 
뻐꾸기를 공격할 수 있는 유전자가 자연 선택에 의해 제비의 유전자 풀 속에 확산됐다는 것
인가. 그러나 통상 제비의 둥지가 뻐꾸기의  기생을 받는 것 같지는 않다. 더욱이  자칫하면 
이 설명이 옳을 가능성도 있다.  이설에 따르면 알바레즈 등의 실험에  제공된 까치의 알은 
뻐꾸기의 알과 같이 제비의 알보다 크기 때문에 뻐꾸기에 대하는 것과 같은 취급을 우연히 
받았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제비 새끼가 정상의  제비알과 그것보다 큰 알을 구
별할 수 있다면 아마도 어미 제비도 같은 능력을 가질 것이다. 만일 이 설이 옳다면 어미는 
왜 뻐꾸기의 알을 내던지는 짓을 하지 않는가. 알을 없애는  일은 새끼보다 어미가 더 손쉽
게 할 수 잇지 않은가. 새끼 제비의 행동은 본래 썩은 알아니 쓰레기를 둥지 밖으로 내버리
는 데 한정한다는 사고 방식도 하나의 설명이 되기는 하나 이에 대해서도 상기와 똑같은 반
론이 제기된다. 즉, 이 일도 어미가 더 잘 처리할 수 있을 것이며 실제로도 그렇다. 알을 버
리는 작업은 귀찮고 기술을 요하는 일이다. 어미 제비편이 훨씬  쉽게 이런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약한 새끼가 그 작업을 담당하고 있다. 여기서 결론지으면 어
미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새끼는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바른 설명은 뻐꾸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무서
운 생각일지도 몰라도 제비 새끼의 상호간에는 다음과 같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최초
로 출생한 새끼는 다음에 부화되는 동생들과 부모에 의한 보호 투자를 가지고 결국은 경쟁
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는 그의 생애의 첫 번째 일로서  우선 다른 알을 둥지에서 내던지는 
것이 이익이 될 수 있다.
      형제 살해 유전자
  랙의 한 둥지의 알 수 이론은 부모의 입장에서 본 최적 알 수를 문제 삼고 있다. 가령 내
가 어미 제비라고 하면 나의 입장에서 본 한 둥지의 최적 알 수는 예컨대 5개가 된다. 그러
나 만일 내가 새끼편이라면 이 입장에서 자기를 포함한 한 둥지의 알 수의 최적치는 전자의 
경우보다 작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모에게는 어떤 일정량의 보호 투자가 가능하고, 어
미는 그것을 5마리의 새끼에게 각각 균등 분배  '하고 싶어한다.'그러나 개개의 새끼편은 각
각 1/5의 할당분 이상의 투자를 강요한다. 그러나 뻐꾸기의 경우와는 다라서 개개의 새끼는 
부모에 의한 보호 투자의 독점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는 다른 새끼들과 혈연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알을 하나 내던지기만 해도 그는 부모의 투자의 1/4을 획득하는  것이 되고, 하나 
더 버리게 되면 투자의 1/3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 유전자의 말로 번역하면 형제 살해
를 하는 개체의 몸 속에서 형제 살해를 촉구하는 유전자는 100% 확률로 존재하는데 희생이 
되는 개체 속에는 50%의  확률로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형제  살해를 촉구하는 유전자가 
유전자 풀 속에 퍼질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형제 살해설에 대한 첫 번째 반론의 근거는, 실제로 그런  것이 행해지고 있다면 그 악마
적 행동을 지금까지 본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믿기는  매우 어렵다. 이에 관해서는 나
에게도 독자를 납득시킬 만한 설명은 떠오르지 않는다. 단, 우리는 세계 각지에서 품종이 다
른 제비를 볼 수 있다. 스페인의 제비는 몇 가지 점에서, 예를 들면 영국에 사는  제비의 품
종과는 다르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스페인의 제비에 관해서는 영국 제비에 관해서 
행해진 것과 같은 정도의 상세한 연구는 아직 실행되고 있지 않다. 스페인 제비에서도 실제
로 형제 살해가 일어나는데 단지 그것이 지금까지 발견되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형제 살해의 가설 같은 일견 있을 것  같지 않은 생각을 여기에 제시한 이유는 일반적인 
노점을 분명히 하고 싶어서이다. 즉, 뻐꾸기 새끼가 행한 무자비한 행동은 어느  가족에서도 
볼 수 없는 극단적인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뻐꾸기  새끼와 그 젖형제와의 
관계에 비하면 같은 양친을 가진 형제간에는 훨씬 진한 혈연 관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나 
이 차이는 단순히 정도의 차이인 것이다. 느닷없는 형제 살해가 진화될 수 있다는 데까지는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보다 정도가 약한 이기성의 많은  예는 아이들이 얻는 
이익이 형제 자매에게 피해의 형태로 그가 입는 손실의 2배 이상이 되는 조건하에서라면 많
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이유 시기의 예와 같이  부모 자식 간의 이해가 실
제로 대립한다.
        승리자
  세대간의 다툼에서는 누가 가장 많이 이길 수 있을까? 알렉산더는 그가 발표한 흥미로운 
논문 중에서 이 물음에 하나의 일반적인 해답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항상 부모가 이길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이 주장이 맞는다면 독자가 이 장을 읽는 것은 시
간 낭비가 된다. 알렉산더가 맞다면 흥미로운 일이 많이  파생될 것이다. 예를 들며, 이타적 
행동은 아이 자신의 유전자가 받는 이익 때문이 아니고 단지 부모의 유전자가 받는 이익만
을 이유로 해서도 진화할 수 있었다. 이 경우에 이타적  행동을 지놔시키는 원이이 되는 것
은 단순 명쾌한 혈연 선택이 아닌  알렉산더가 '부모에 의한 아이의 조작'이라고 하는  다른 
요인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알렉산더의 논의를  검토하여 우리가 왜 그
의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다. 본래 이 작업은 수학적으로 취
급해야 할 것이나 이 책에서는 수학의 명백한 사용은 피하고 있다. 그래도 알렉산더의 주장 
중에 잘못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직관적인 설명을 줄 수 있다. 
      부모가 이긴다는 논리
  그의 기초적인 유전적 논점이 다음의  일부 생략된 인용문에 내포하고  있다. "가령 어떤 
아이가... 부모로부터 이익 분배를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하여 그 결과  모친의 번식 성적을 
전체로서는 감소시킨다고 하자. 어릴 때의 개체의 적응도를 상기의 수단으로 상승시키는 유
전자는 부모가 되면 이번에는 먼저의 상승분 이상으로 자기의 적응도를 감소시키는  처지에 
빠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돌연변이 개체의 아이들 중에는 그 돌연변이 유전자
가 일단 더 많이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여기서 알렉산더가 새로운 돌연변이 유전자
를 생각하고 있는 점은 별로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양친의 한쪽으로부터 전달되
는 드문 유전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된다. '적응도'라는 것은 번식의 성공도를 
가르키는 특수한 전문적 의미를 가진 용어이다. 알렉산터의 기본적 논지는 다음과 같다.  어
린 시기에 부모의 번식 성과의 총량을 잡아채는 꼴로 공평한 분배량 이상이 투자를 자신의 
것으로 하는 유전자는 확실히 자기의  생존 확률을 늘리는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부모가 될 경우 이  죄과를 치러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같은 이기적인 유전자는 
그의 아이들에게 전해져 그 때문에 그의 번식 성과는 전체로서 감소하기 때문일 것이다. 제 
덫에 자기가 걸린 격이다. 즉, 그 이기적 유전자는 결국 번영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 다툼에 
이기는 것이 항상 부모쪽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자식이 이긴다는 논리 
  그러나 우리는 이 주장에 즉시 의심을 품게 될 것이다. 그 논의가 있지도 않은 유전적 비
대칭성을 전제로 하여 이루지기 때문이다. 알렉산더는 양자간에 마치 기본적인 유전적 차이
가 있는 것처럼 '부모'와 '자식'이란 말을 쓰고 있다. 전에도 보았거니와 부모와 자식 간에는 
부모가 자식보다 나이를 먹고 아이들이 모체로부터  출생한다든가의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
인 유전적 비대칭성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측면에서 상대를 보아도 근친도는 50%
이다. 나의 근본 취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알렉산더의 문장을 '부모', '자식' 및 기타 몇 개의 
관련된 말로 바꿔서 또 한 번 밝혀 보자. "가령 어떤 부모가 자식에 대한 이익 분배를 균등
하게 하려고 하는 유전자를 가진다고 하자. 어미 때에 개체의 적응도를 상기의 수단으로 상
승시키는 등의 유전자는 어린 시절에는 상기의 상승분 이상으로 자기의 적응도를  감소시키
는 어린 시절에는 상기의 상승분 이상으로 자기의 적응도를 감소시키는 지경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까." 그러므로 알렉산더와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한다. 즉, 부모와 자식간의 모든 다
툼에 있어서 항상 이기는 쪽은 자식임에 틀림없다.
  분명히 무엇인가 잘못이 있다. 어떤 논의도 너무 단순하다. 내가 위의 인용을 해 보인  목
적은 알렉산더와 반대의 결론을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고 단지 인위적으로 비대칭성을  가정
한 이 방법의 논의가 성립될 수 없음을 나타내려고 했을 뿐이다. 알렉산더의 논의를 뒤집어 
본 나의 논의도 모두 다 한 개체의 관점에서 사태를 바라보고 있는 점에서 예에서는 그것이 
어린 아이의 관점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잘못이 '적응도'라는 전문 용어를 사
용할 때에 극히 일어나기 쉬운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내가 이 책에서 이 용어의 사용을 피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진화에 있어서  그 관점이 실제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실체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이기적 존재인 유전자이다. 어린 아이의 체내에 있는 유전자는  성체
를 이기는 능력에 대해 선택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  부모의 체내에 있는 유전자는 자
식을 압도하는 능력에 대해 선택을  받을 것이다. 같은 유전자가 자식의  몸과 부모의 몸을 
순서대로 점거한다는 사태에 하등의 모순은 없다. 유전자는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최
대한으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선택된다. 유전자라는 것은 현실로 주어진 기회를 이용한다. 유
전자가 어린 아이의 체내에 있을 때에 이용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은 유전자가 부모의 체내
에 있을 때 이용할 수 있는 기회와는 다른 것이다. 즉, 유전자의 최적 방책은 생활사의 상기 
두 개의 단계에 있어서 서로 달라질 것이다. 알렉산더의 주장처럼 부모 단계에서 최적 방책
이 필연적으로 어린아이 단계의 최적 방책을  때려 없앤다고 상정할 만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알렉산더에 대한 반론은 또 다른 방법으로 제시할 수 있다. 그는 한편으로는 부모와 자식 
관계와 다른 한편으로는 형제 자매의 관계 사이에 있지도 않은 비대칭성을 암묵 중에 가정
하고 있다. 독자는 트라이버스의 논의를  기억할 것이다. 그에 의하면,  어떤 아이가 공평한 
분배량 이상의 투자를 입수하려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이에 대응하는 대가가 그에게  주어
지게 된다. 즉, 유전자를 절반씩 나누어 갖는 형제 가매을 죽음의 위험에 내놓는 것은 그 자
신의 대가를 치르게 되는 고로 형제 자매에 대한 가로채기 행위가 한정되어 있다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형제 자매라는 것은 50%의 근친도를 가진 혈연자의 하나의 특
례에 불과하다. 이 이기적인 아이로서는 그 자신의 장래의 아이들도 그의 형제 자매와 똑같
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공정한 분배량 이상의  자원을 가로챌 경우에 생기는 실
적적인 모든 개가는 그것으로 인해 잃게 되는 형제 자매만으로  잴 수는 없을 것이다. 이기
적인 개체의 아이들은 형제 자매 간에서 부모 상속의 이기성을  발휘 할 것이며, 이 때문에 
잃게 되는 아이의 수도 실제로는 상기의 대가 중에 가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린 시절에 
이기성을 발휘하는 개체는 그 성격이 아이에게 전승됨으로 인해 긴 안목으로 볼 때 번식 성
적을 저하시키게 된다는 알렉산더의 견해는  이렇게 되면 요점을 찌른  것이라고 생각된다. 
단, 그의 고찰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방적식의 대가의  항에 아이의 손실도 가하지 않으
면 안 된다는 것뿐이다. 이 점을 고려했다고 해도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이 '혈연자'중
에 형제 자매만이 아닌 장래 아이들까지도 포함하면 더 좋다. 개체는 자기의 복리를 형제보
다 두 배는 더 배려할 거시다라는 것이 트라이버스가 설정한 기본 전제였다. 그러나 동시에 
개체는 자기의 장래 아이 하나보다는 자시 자신을 두 배로 소중히 여긴다. 부모와 자식간의 
이해 대립에서 부모쪽이 본래 우세하다고 한 알렉산더의 결론은 잘못이다.
      자식의 히든 카드(hidden card)
  유전적 관계에 관한 상기의 기본 논점에 덧붙여 알렉산더는 더 실질적인 논의도 전개하고 
있다. 그것은 부모 자식간의 관계에서  볼 수 있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비대칭성을 논거로 
한 것이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에 있어서 적극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부모쪽이고 따라서 
부모는 양자의 관계를 결정하는 입장에 있다. 자식은 부모에 비하면 작고 부모를 공격할 수 
없다. 여기서 만일 부모가 일을 게을리하면 아이는 이에 대처할 방도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자식이 무엇을 바라든 부모는 자기의 의향을 자식에게 강요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이 논
의에 뚜렷한 잘못은 없다. 이 경우에 전제되는 비대칭성은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
는 '자식'에 비하면 확실히 몸도 크고 힘도 세며 또한  세상 일에 능하다. 모든 권한은 부모
가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식도 실은 몰래 에이스(ace)를 몇  장 감추고 있다. 
예를 들면 먹이를 가장 효율적으로 분배하기 위해 부모는 각각의 아이의 공복도를 필히 알 
필요가 있다. 물론 모든 아이에게 똑같이 먹이를 분배하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생각할 수 있
는 사장 이상적인 상태에서라면 먹이를 가장 유효하게 이용할 수 있는 아이에 대해선 다른 
아이보다 조금 많이 먹이를 준다는 방책이 상기의 방책보다  효율이 높아질 것이다. 각각의 
아이가 부모에게 자기의 공복도를 전하려고 하는 시스템은 부모를 위해서 이상적인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도 다룬 바와 같이 어쨌든 이런 종의 시스템이 진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
나 자식편에서 볼 때 거짓말을 하는 것이 매우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왜냐하면 아이
들 자신은 자기의 공복도를 정확히 알고 있음에 반해 부모는 아이들이 공복도를 정확히 말
하고 있는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추정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추정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면 부모도 알아차릴 수 
있겠으나 작은 거짓을 탐지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동시에 또 어린아이가 어떨 때 만족하는지를 아는 것이 부모로서 유리한 것이고 어린아이
측에서도 자기가 만족했을 때에는 그것을 부모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이 좋을 일이다. 미소와 
만족한 듯한 목소리를 내는 신호가 자연 선택되는 것은 어떤 행위가 아이에게 가장 유리한
가를 부모가 학습시킬 수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아이가 미소짓고 있는 모양이나 새끼 고양
이의 울어대는 소리는 어미에게 일종의 보수이다. 이것은 이로  속의 쥐에게는 먹이가 보수
가 되는 것과 똑같은 의미의 보수이다. 그러나 방실거리는 미소나 크게 지르는 소리가 일단 
보수로서 작용을 확립해 버리면 아이는 이것을 이기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입장에 있게 된
다. 미소나 만족한 듯한 소리를 이용해서 부모를 조정함으로써  아이는 공정한 배분량 이상
의 보호 투자를 부모로부터 받아내려고 할 것이다.
      무승부
  즉, 세대간의 다툼에서 부모와 자식간의 어느 쪽이 승률이 많은가라는 질문에는 일반적인 
해답이 없다. 최종적으로 부모와 자식이 서로에게 기대하는 이상적  상태 사이에서 어떤 타
협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 다툼은 뻐꾸기와 그의 양모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다툼과 유사하
다. 부모와 자식간의 다툼에서 적대자는 서로 어느 정도의  유전적 이익을 공유하고 있어서 
뻐꾸기와 양모의 경우만큼 대립이 심하지 않음은 확실하다. 부모와  자식은 일정한 한도 혹
은 일정한 감수 기간 중에서만 대립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은 자기의 부모에 
대해 뻐꾸기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전술이나 사기 수법, 그리고 이기적인 노동의 착취 수법 
등을 행사할 것이다. 더욱이 뻐꾸기의 경우에는 완벽한 이기성의  행사가 예상되는 데 반하
여 자식은 자기의 부모에 대해 뻐꾸기만큼 철저하게 이기적이지만은 않다.
  이 장과 배우자간의 대립 문제를 취급하는 다음 장은 형제 아이들에 대해 또는 서로 상대
에 대해 헌신하고 있는 인간의 부모들에게는 아주 냉소적일 뿐만 아니라 비참한 감을 주는 
셈이 될지도 모른다. 여기서 나는 또 한번 내가 "의식적  동기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
니다."라는 것을 강조해야 겠다. 나는 이기적인 유전자의 충동에 의해  아이들이 의도적으로 
부모를 속인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한 번 돌이켜봐야 할 것이 있다. "아이는 
사기나...거짓, 속임수, 이기적인 착취...등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라는 식
으로 내가 말할 경우 '해야  할'이라는 말을 내가 어떤 특수한  의미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행동이 도덕적이라서 바람직하다는 등의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단순히 그와 같이 행동하는 아이쪽이 자연 선택에서 반드시 유리할 것이며, 그 때문에 야생 
동물을 관찰할 경우 가족 안에는 사기 행위와 이기적 행위가 보일 것으로 기대할지 모른다. 
"아이는 속이는 행위를 해야 할 것이다."라는 표현의 진의도 아이에게 사기 행위를 하게 하
는 경향을 가진 유전자가 유전자 풀 속에서 유리하게 나타남을 지적하는 더 불과하다. 나의 
논의에서 인간적인 교훈을 도출한다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타주의를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들의 생물학적 본성의 일부에  이타주의가 심어져 있다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9장
          암수의 다툼
        배우자간의 대립
  유전자의 50%를 서로 공유하고 있는  부모 자식 사이에도 이해의 대립이  있는데 하물며 
서로 혈연 관계가 없는 배우자 사이의 다툼은 얼마나 격렬할 것인가? 배우자가 공유하고 있
는 것이라면 같은 자식에 대해 서로 똑같이 50%의 유전자를 투자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아
버지도 어머니도 그들의 자식들에게 투자한 50%의 유전자의 복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서
로 협력하여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양자 모두에게 어느정도 유리한 셈이 된다. 그러나 만일 
배우자의 한쪽이 각각의 자식에 대해 공평한 할당량 이하로 귀중한 자원의 투자를 끝낼 수 
있다고 하면 그 배우자에게는 유리하다. 왜냐하면 이로 인해 다른 배우자를 얻어 새로운 새
끼를 낳는 쪽으로 투자가 증가하므로 자기 유전자를 보다 많은 자손에게 전달하게 되기 때
문이다. 그러므로 배우자는 상대에게 더 많은 투자를 강요하기  위해 서로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개체라는 것은 가능한 한 많은  이성과 교미하고 자식 
양육은 모두 상대에게 떠맡겨지기를 '바라고'있다는 것이다(이것은 생리적  기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럴 가능성이  확실히 있음직하다는 말이다). 앞으로  보게 되듯이 동물 
중에는 주로 수컷이 그와 같은 습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 밖의 동물에서는 암수가 동등하
게 양육의 부담을 진다. 성적인 협력을 상호 불신과 상호착취의 관계로서 파악하고 그 관계
를 특히 강조한 사람은 트라이버스였다. 동물 행동학자에게 있어  이러한 관점은 비교적 새
로운 것이다. 우리 동물 행동학자는 성행위, 교미 그리고 이에 선행하는 구애 행동 등은  상
호 이익 또는 종의 이익을 위해 수행되는 본질적으로 협동적인 모험이라고 생각하는 데 습
관화되었던 것이다.
      암수의 근본적인 성질
  첫 번째 기본 윈칙으로 돌아와 암수의 근본적인 성질을  생각해 보자. 3장에서 우리는 기
본적인 비대칭성을 강조하지 않은 채로 성을 논했다. 우리는  어떤 동물이 수컷이라고 불리
고 어떤 동물이 암컷이라고 불리는 것을 단순히 받아들이고 이들 말이 본래 무슨 의미를 갖
는지는 불문에 부치고 있다. 그러면 수컷의 본질이란 대체 무엇일까? 근본적으로 암컷을 정
의하는 성질이란 무엇일까? 포유류인 우리는 페니스의  존재, 임신, 특수한 젖샘에 의한  수
유, 염색체의 모양 등의 여러 특성의 총계에 의해 두 성이 정의되는 것으로 본다. 어떤 개체
의 성을 판정하기 위한 이들의 기준은 포유류에 관해서는 어느  것이나 다 좋다. 그러나 위
한 이들의 기준은 포유류에 관해서는 어느 것이나 다 좋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동식물을 대
상으로 하면 상기의 기준은 옷을 입는 경향을  가지고 남녀 판정의 기준을 삼는 것과 같이 
더 이상은 믿을 수 없다. 예를 들면 개구리 같은 것은 암수 어느쪽도 페니스가 없다. 그렇다
면 암수란 말에는 일반적인 의미가 없다는 것일까? 결국에 가서 그것들은 단순한 부호에 불
과하고 말 것인가? 만일 개구리를 기재할 경우 그것들이 필요없다면 이들의 말을 마음대로 
표기해도 좋은지. 만일 바란다면 개구리에 대해 '성1'과  '성2'라는 등의 명칭을 제멋대로 붙
여서 성을 둘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동식물을 통하여 수컷을 수컷, 암컷을 암컷이라고  부
르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특징이  하나 있다. 수컷의 성세포, 즉 배우자(gamete)는 
암컷의 배우자에 비해 매우 작고 그  수가 많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  점은 동식물 어느 
것을 취급할 때도 해당된다. 대형의 성세포를 가지고 있는 개체의 한 그룹을 편리하게 암컷
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다른 그룹은  편리하게 수컷이라고 부르기로 하는데, 이쪽은  소형의 
성세포를 가지고 있다. 양자의 차이는  파충류와 조류에서 특히 뚜렷하다. 이들  동물에게는 
발육하는 새끼에게 몇 주 동안에 걸쳐 충분한 먹이를 공급할 만큼의 영양분이 적당한 크기
의 개개의 난세포에 갖추어져 있다. 알이 현미경적 크기밖에 안 되는 사람에 있어서도 난세
포는 정자보다 훨씬 크다. 나중에 밝혀질 것이나 다른 모든  성차는 이 하나의 기본적 차이
에서 파생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동형 배우자의 접합
  예컨대 곰팡이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어떤 윈시적인 생물에서는 다른 종류의 유성  생식을 
볼 수 있으나 암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동형 배우자 접합(isogamy)으로 알려진 이 시스템에
서는 개체를 암수로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어느 개체도 다른 임의의 개체와  교배된다. 
정자와 난자라는 두 종류의 배우자는 볼  수 없고, 성세포는 모두 같으며, 동형  배우자라고 
불린다. 감수 분열에 의해  만들어진 동형 배우자의 융합에  의해 새로운 개체가 형성된다. 
A,B,C라는 세 개의 동형 배우자가 있으며 A는 B, C중 어느 것 하고도, 또 B는 A, 중 어느 
것과도 융합할 수 있다. 정상적인 유성 시스템에서는 이 같은  식을 상상할 수도 없다. A가 
정자이고 이것이 B 또는 C와 융합이 가능하면 B와 C는 난자일 것이고 B와 c의 융합은  불
가능하다.
  동형 배우자가 융합할 경우, 새로운 개체에 기여하는 두  배우자의 유전자가 동수인 것은 
물론 두 배우자가 기여하는 음식물 비축량도 같다. 정자와  난자의 경우도 유전자의 기여수
는 같다. 그러나 음식물 비축에 대해서는 난자의 기여도가 정자를 훨씬 능가한다. 남자와 여
자의 경우 실제로 정자의 기여는  전혀 없다. 정자의 관심은 유전자를  가급적 빨리 난자로 
운반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따라서 수컷이 자식에 대해 투자한 자원량은 임신 시점에서 공
평한 분담량, 즉 50%보다 훨씬 적다. 개개의 정자는 아주 작아서 수컷은 매일  막대한 수의 
정자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은 따로따로 암컷을 상대할 경우  수컷이 단시간 내에 많은 수의 
새끼를 만드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도 개개의 배가 수정할 때 어
미로부터 충분한 먹이를 받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다. 배에 대한 영양분 공급의 필요에 
의해 암컷이 만들 수 있는 아이의 수는 일정한 한도가 있는 반면에 수컷이 만들 수 있는 아
이의 수에는 실질적인 제한이 없다. 수컷이 암컷을 상대로 한 착취의 출발점은 여기에 있다.
        성의 전략
  파커(G.A. Parker)등은 동형 접합의 상태를 근원으로 하여  이로부터 상기와 같은 비대칭
성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모든 성세포가  쉽게 융합할 수 있고 또
한 거의 같은 크기를 갖고 있던 기대에서도 그 중에는 다른 세포보다 좀더 큰 성세포가  있
었음에 틀림없다. 큰 동형 배우자는 평균 크기가 다른 배우자에 비해 어떤 점에서 유리했다
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런 배는 출발에서부터 남보다 다량의 먹이 공급을 얻을 수 있어서 
유리한 출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다 큰 배우자를  낳는 방향으로 진화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의 함정이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필요 
이상으로 큰 동형 배우자가 진화하면 그것을 이기적으로 이용하는 길이 열리게 됐다고 생각
되기 때문이다. 평균 이하의 작은 배우자를 만드는 개체는, 만일 그들의 작은 배우자를 확실
히 큰 배우자와 융합시킬 수 있다면 유리한 성과를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작은 배우자의 
운동성을 길러 적극적으로 큰 배우자를 탐색할 수 있게 하면 양자의 융합을 확실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작아서 활발히 운동하는 배우자를 만드는 개체의 유리한 점은 그에 의해 많
은 배우자의 생산을 가능케하고, 따라서 새끼의 수를 증가시키는 데 있다. 자연 선택은 대형
의 배우자를 융합 상대로 활발하게 찾아다니는 소형의 배우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동떨어진 성의 '전략'의 진화를 상상할 수 있다. 우선 대량 투자 전략이나 또
는 '정직한' 전략이 있었다. 이 전략은 투자량이 적고  착취적인 전략의 진화에 스스로 길을 
열게 했다. 일단 두 전략의 분리가  시작되면 이 경향은 일방적으로 추진됐을 것이다.  중간 
크기의 배우자를 만드는 전략은 큰 배우자 또는 작은 배우자를 만드는 더 극단적인 전략에 
끼어들지 못하기 때문에 선택상 불리하게  됐다. 착취적인 전략의 배우자는  점점 소형으로 
되어 민첩한 운동성을 가진 배우자로 진화되어 갔다. 정직한  전략이 만들어 내는 배우자는 
착취적인 배우자의 투자량이 점점 축소되어 가는 것을 메우기 위해서 계속 대형화하는 방향
으로 진화했고, 착취인 배우자  쪽은 항상 적극적으로 대형  배우자를 추구함으로써 후자는 
결국 운동성을 잃고 말았다. 개개의 정직한 배우자는 다른 정직한 배우자와의 융합을  '좋아
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착취적인 배우자를 배척하려는 선택압이 그 장해를 극복하려는 착
취인 배우자에 대한 선택압보다 더 약했던  것이다. 즉, 착취적인 배우자는 그 수가  많았기 
때문에 이 진화의 싸움에서 이겨 살아 남았다. 그래서 정직한 배우자는 난자로 되고 착취적
인 배우자는 정자로 되었다.
  이로 볼 때 수컷은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 '종의 이익'이라는 단순한 입장을 취하
면 수컷은 암컷보다 수가  적어질 것으로 예상하기  쉽다. 이론적으로는 한  마리의 수컷은 
100마리 정도의 하렘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정자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동물 집단 중에서 
암컷의 수는 수컷의 100배정도 있어도 가당하다는 것이 된다. 다른 것도에서 이것을 표현하
면 종에 따라 수컷은 더욱 '소모적'이고 암컷은 더욱  '가치 있는' 존재이다. 종 전체라는 관
점에서 보면 상기의 견해는 물론 완전히 타당하다. 여기서 조금 극단적인 실례를 들어 보기
로 하자. 바다코끼리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관찰된 모든 교미 예의 88%는 경우 4%의 수컷
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예뿐만 아니라 다른 예에  있어서도 아마 전생애 동안 교미
의 기회가 없었을 독신 수컷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들  독신 수컷도 다른 점에서는 정상
적인 생활을 하고 있고 개체군의 먹이 자원을 먹을 때의 왕성함은 그들도 다른 놈들에게 결
코 지지 않는다. '종의 이익'이란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놀랄 만한 낭비이다. 독신  수컷들은 
사회의 기생자로 간주되기 쉽다. 그러나 비록 수컷 중에서 실제로 번식에 참여하는 놈이 전
체의 극히 일부에 불과할 때도 암수의 수는 같아지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도 그룹 선택 이
론이 궁지에 몰리게 되는 또  하나의 예가 생긴다. 그러나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에 따르면 
이것도 무난히 해결된다. 상기와 같은  경우에도 암수의 수가 같아진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설명한 사람은 피셔였다.
      부모의 성 선택 전략
  암수가 각각 얼마나 많이 태어나느냐 하는 문제는 부모의 전략이 가진 문제의 특수한 경
우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유전자의 생존을 최대화하려고 하는 부모에게  최적의 아이 수는 
얼마인가라는 문제는 앞에서 이미 말했는데 그것과 똑같이 우리는 최적의 성비에  대해서도 
논할 수 있다. 귀중한 유전자를 아들에게 맡기는 것이 이익인가 아니면 딸에게 맡기는 것이 
이익인가? 한 어미가 자신이 갖고 있는 자원을 몽땅 아들에게 투자해 버리고 딸에게 나누어 
줄 것이 없다고 가정했을 때와 경쟁자의 어미가 모든 것을 땅에게 투자했을 때를 비교하면 
과연 누가 미래의 유전자 풀에 더 큰  공헌을 할 것인가? 아들에 대한 투자를 중히  여기는 
유전자와 딸에 대한 투자를 중히 여기는 유전자 중 어느쪽이 증가 할 것인가? 피셔의 결론
에 의하면 정상 조건하에서의 최적 성비는 50;50이  된다고 한다. 어째서 이와 같이 되는가
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결정의 메커니즘을 조금은 알 필요가 있다.
  포유류의 경우 성은 유전적으로 다음과  같이 결정된다. 모든 난자는  암수 어느쪽으로도 
발달할 수 있다. 성을 결정하는 염색체를 주는 쪽은 정자쪽이다. 수컷이 만드는 정자의 반은 
딸을 만드는 X정자이고 나머지 반은  아들을 만드는 Y정자이다. 어떤  정자도 같은 외관을 
하고 있다. 양자는 하나의 염색체를 달리하고 있을 뿐이다. 딸만 만들게 하려는 유전자는 수
컷이 X정자만을 만들도록 노력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어미에게 딸만을 
낳게 하려는 유전자는 어미가 Y정자를 선택적으로 죽이는 물질을 분비하거나 아들이 될 태
아를 유산하도록 노력함으로로써 그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진화적으로 안정
된 전략(ESS)에 상당하는 것을 성비에 관한 전략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전략이란 표현은 공격성을 다루었던 장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비유로서 생각하기 
바란다. 개체가 문자대로 아이의 성별을 선택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
처럼 어쨌든 한쪽 성별의 아이를 만들도록 작용하는 유전자를  상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지
금 가령 한쪽으로 기운 성비의  출현을 재촉하는 유전자가 존재한다고 하자.  이 같은 유전 
유전자가 같은 성비의 출현을 재촉하는 대립 유전자보다 유전자 풀 속에서 다수가 될 가능
성이 있는 것일까?
      진자 운동
  위에서 언급한 바다코끼리에게 거의 딸만을  만들도록 하는 돌연변이 유전자가  생겼다고 
가정해 보자. 개체군 속에 수컷이 모자라는 일은 없기 때문에 암컷들은 무난히 배우자를 골
라낼 수 있다. 그래서 암컷의 생산을  촉구하는 문제의 유전자는 증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집단의 성비는 암컷이 많아지는 경향으로 될 것이다.  먼저 말한 대로 가령 암컷
이 매우 많아진다고 해도 그것이 필요로 하는 정자는 극히 소수의 수컷으로도 넉넉히 감당
하므로 종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한은 상기의 변화는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단
순히 생각하면 암컷의 생산을 촉구하는 유전자는 계속 증가해서 결국은 성비가 매우 편중되
어 조금 남은 수컷이 전력으로 노력하여 암컷과 교미해 체력이 다 소모되고 마는 사태가 생
긴다고 예측할 법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조금 견해를 바꿔서 수컷을  만드는 극히 소수의 
바다코끼리가 막대한 유전적 이익을 향수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주기 바란다. 수컷에게 
투자하는 개체는 수백 마리에 달하는 바다코끼리의 조부모가 될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
기 때문이다. 암컷을 전문으로 낳는 개체는 아마도 확실히 몇 마리의 손자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수컷 만들기를 전문으로 하는 개체가 누릴 수 있는 절대적인 유전적 가능성에 비하
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수컷을  낳게 하는 유전자는 점차로 증
가하는 경향을 보이며 진자는 반대 방향으로 흔들리게 된다.
  이를 진자의 운동으로 설명한 것은 설명을 간단히 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암컷의 수가 
수컷을 압도할 만큼 진자가 크게 흔들릴 수는 없다. 성비가 편중됨과 동시에 수컷을 만들려
고 하는 압력이 재차 그것을 되돌려 놓기 때문이다. 암수를 동수로 낳는 전략은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이다. 이 전략에서 벗어나는 유전자는 손해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제한적인 성 유전자 효과 
  지금까지 나는 아들과 딸의 수로 이야기해 왔다. 이것은  이야기를 단순하게 하기 위해서
인데 좀더 엄밀한 논의를 하려면 부모에 의한 보호 투자의 양이라는 척도로 다루어져야 한
다. 이 양에는 먹이와 그 밖의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자원이 포함되는데,  그 계
량법은 앞 장에서 논한 방 있다. 결론을 말하면 부모는 아들과 딸에게 동량의 '투자'를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수적으로도 동수의 아들과 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과 딸에 대한 투자 자원량이 불균등한 경우에는 편중된 성비도 진화적으로 안정
될 수 있다. 바다코끼리의 예를 들면  암컷의 3배 정도로 하고 그  대신 각각의 수컷에게는 
암컷의 3배 정도의 먹이와 그 밖의  자원을 투자하여 그를 막강한 수컷으로 키우는  방책이 
안정된 전략이라고 할 것이다. 먹이를 많이 주어서 수컷을  크고 강하게 키움으로써 어미는 
자기의 새끼가 하렘이라는 더없는 상품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
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특수한 예이다. 수컷에 대한 투자량은  각각의 암컷에 대한 투자량
과 거의 동일한 것이 보통이고 따라서 수로 본 성비도 1:1이다.
  그러므로 평균적 유전자는 여러 세대를 경화하는 사이에 경과 시간의 약 반을 수컷의 몸, 
나머지 반을 암컷의 몸 속에서 지낸 셈이 된다. 유전자의  효과 중에는 한쪽의 성에서만 발
현되는 것이 있는데, 이를 '제한적인 성  유전자 효과'라고 한다. 페니스의 길이를  지배하는 
유전자라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수컷에게서만이 아닌 암컷의 몸에도 역시 있으며, 거기서는 
전혀 다른 효과를 나타내는지도 모른다.  긴 페니스를 가진 성질이  어미로부터 유전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생물체-이기적인 유전자들에 의해 프로그램된 기계
  암수의 어떤 몸 속에 들어 있든 간에 유전자는 거기서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으로 활용할 
것이다. 어떠한 기회가 주어지는지는 암수의 어떤 몸에 들어 있는지의 여하에 따라 어느 정
도 달라질 것이다. 편리한 근사법으로  다시 한 번 개개의 생물체는  이기적인 기계이고 그 
모든 유전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가정하자. 이기적 기계로서 그 종의 최선책은 자
기가 수컷인가 암컷인가에 따라 아주  달라질 수 있다. 간결히 하기  위해 개체에 의식적인 
목표가 있는 것같이 상정하는 방법을 여기서도 사용하기로 하자. 전과 같이 이것은 그저 비
유에 지나지 않음을 분명히 염두에 두기 바란다. 실제로  생물체는 이기적인 유전자들에 의
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기계이다.
  이 장의 처음의 화제였던 짝짓는 쌍의 문제로 되돌아가자. 암수 어느 것이나 이기적 기계
로서 동수의 수컷과 암컷을 '바랄' 것이다. 이점가지는 양자의 이해가 일치한다. 그들에게 불
일치가 생기는 것은 기르는 수고를 누가 하느냐는 점이다.  어느 개체이든지 간에 생존하는 
자식의 수를 가능한 한 늘리려고 한다. 어떤 자식에 대한  투자량을 줄일 수만 있다면 그만
큼 어미가 가질 수 있는 자식의 수는 증가한다. 이 바람직한 사태를 만들어 내는 데 이용되
는 명백한 수단은 배우자가 어떤 자식에게도 그 공평한 분담량 이상의 투자를 하도록 노력
하여 자기는 그 사이에 다른  파트너와 새로운 자식을 얻는다는 수법이다.  이 전략은 암수 
어느쪽이든 바람직한 일이다. 암컷이 이것을 실현하는 것은 수컷에 비해 매우 어렵다.  암컷
은 대형이고 영양은 많이 가진 난자의 모양으로 처음부터 수컷보다 많은 투자를 하고 있고, 
이 때문에 수태시에 있어서 이미 어미는 어느 자식에 대해서도 아비보다 더 깊이 '전념하고'
있다. 이 자식들이 죽을 경우 어미는 아비보다  많은 것을 잃는 입장에 있다. 또 죽은  자식 
대신에 '장래'에 새로운 자식을 하나 키운다 해도 잃은 자시고가 같은 단계까지 그것을 키우
기 위해 어미가 투자해야 할 양은 아비의 투자량보다 많을 것이다. 어미가 자식을 아비에게 
맡기고 다른 수컷을 찾아 도망치는 전술을 취하면 아비편에서도 자식을 버린다는 식으로 보
복한다. 더욱이 자식을 버릴 경우 수컷이  입는 손실은 암컷에 비해 적다. 그러므로  적어도 
자식이 아직 어린 시기에 배우자의 유기가 일어날 경우, 아비가 어미를 버리는 것은 보통이
지만 어미가 아비를 버리는 것은 드물다. 이와 같이 암컷은 처음뿐만이 아닌 자식의 생장의 
전기간에 걸쳐서 수컷 이상의 투자를 한다고 예상된다. 예컨대  포유류의 경우 자기 체내에
서 태아를 키우는 것도 암컷이고, 태어난 자식에게 젖을 주는 것도 암컷이며, 자식의 양육과 
보호의 부담을 지는 것도 암컷이다.  암컷이란 착취당하는 성이고 난자가  정자보다 크다는 
사실이 착취를 낳게 한 기본적인 진화적 근거이다.
      어미에 의한 독자적인 자식 양육
  물론 아비가 근면하고 충실하게 자식을 돌봐 주는 동물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
나 그와 같은 동물의 경우에도 자식에 대한  투자를 조금 덜하고 다른 암컷과 다시 여분의 
자식을 만들게 하는 진화적 압력이 어느 정도 수컷에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정상이라고 보
아야 할 것이다. 즉, 상대의 대립 유전자의 지시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배우자를 버리고 다른 
암컷을 쫓아붙도록 수컷을 유도하는 유전자 쪽이  유전자 풀 속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진화적 압력이 실제로 어느 정도의 강도를 나타내는가는 종에 따라 크
게 다르다. 뉴기니아에 사는 풍조처럼 암컷이 수컷의 원조를 안 받고 단독으로 새끼를 양육
하는 예는 흔히 있다. 한편 세발갈매기와 같이 충실한 일부일처의 짝을 이루어 암수가 협력
하여 새끼 기르기에 임하는 모범적인 예도 있다. 후자와 같은 경우에는 무언가 진화적인 반
대 압력이 작용해 왔다고 생각해야겠다. 즉, 배우자의 노동을 착취하는 전략에는 이익과  동
시에 비해 더 크게 작용한다.  어쨋든 처자를 버리는 것이 수컷으로서  유리하게 되는 것은 
암컷이 단독으로 자식 양육에 성공할 가능성이 어느 정도 존재할 때에 한하는 것이다.
      버림받은 암컷의 행동
  트라이버스는 배우자에게 버림받은 암컷이 그 후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는가를 고찰하고 
있다. 어미로서 가장 유리한 수단은 다른 수컷을 속여서 그에게 자기의 자식을 친자라고 '여
기도록'하여 양육하도록 시키는 것이다. 자식이 아직 뱃속에 있을 때라면 이 방법도 그리 어
렵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자식은 어미의 유전자의 반을 계승하고 있으나 속기 쉬운 
양부의 유전자는 일절 받지 않았다. 자연 선택에 있어서 수컷이 이처럼 쉽게 속는다면 매우 
불리하다. 실제로 자연 선택은 새로운 배우자를 취한 직후, 의붓자식일 가능성이 있는  자식
은 모두 죽여 버리는 방법을 쓰는 수컷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소위 'Bruce 효과'는 
이것에 의해 설명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 효과는 쥐에서 알려진 것으로 수컷이 분비하는 
어떤 화학 물질을 임신 중의 암컷이 맡으면 유산을 일으키는 수가 있다는 형상이다. 암컷이 
유산을 하는 경우는 이전의 배우자의 것과는 틀린 냄새를 맡았을 때에 한하고 있다. 수컷의 
쥐는 이 방법으로 의붓자식일 가능성이 있는  태아를 죽이고 새로운 암컷이 자신의  구애에 
응해 주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아울러 아드리는 이 Bruce 효과를 개체군 조절의 메커니즘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자에서도 유사한 예가 알려져 있다. 무리에 수사자가 새로이  끼
게 되면 그는 거기에 있는 새끼를 모두 죽여 버리는 수가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새끼들이 
그 자신의 새끼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수컷은 의붓자식을 죽이지 않고도 같은 효과를 달성할 수가  있다. 암컷과의 교미에 앞서 
수컷은 암컷에게 긴 구애 기간을 강요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수컷은 다른 수컷이 암컷에
게 접근함을 금하고, 또한 암컷의 도망을 저지한다. 이런 방법으로 수컷을 암컷이 뱃속에 의
붓자식을 배고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의붓자식을 수태했다면 암컷을 버리
면 된다. 교미에 앞서서 암컷이 긴 '약혼 기간'을 요구하고 싶어하는 이유를 후에 생각할 것
이나 수컷도 또한 그러기를 요구하는 하나의 이유가 여기서 분명해진 것이다. 만일 다른 수
컷과의 접촉에서 암컷을 격리할 수가 있다면 긴 약혼 기간의 존재는 수컷이 모르고 다른 수
컷의 자식에게 은혜를 주는 것을 회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면 버림받은 암컷이 새로운 수컷을  속이고 의붓자식을 양육시키는 수단을  성공시킬 
수 없다고 가정하면 암컷에게는 달리 어떤 방법이 남아 있을까? 이것은 새끼의 크기에 많이 
좌우될 것이다. 새끼가 아직 수태  직후의 단계였다면 어떨까? 이  경우까지도 이미 암컷은 
새끼에 대해 난자 한 개만이 아닌 아마 그 이상의  투자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우는 새끼를 유산하고 빨리 새로운 배우자를 찾는 것이 그녀에게는 그래도 유리할지도 
모른다. 수컷을 속여서 의붓자식을 양육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암컷에게  없다고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유산은 신랑 후보자  및 그 암컷 쌍방에게  유리함에 틀림없다. 이것은 Bruce 
효과가 암컷의 입장에서 보아도 유리하다는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버려진 암컷이 선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끝내 참고 단독으로 아이를 키워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만일 새끼가 충분히 자라면 이 선택은 특히 유리할 것이다. 새끼가 자라면 
자랄수록 이미 새끼에 대해 투자된 분량은 많아질 것이고, 따라서 그 새끼를 양육하기 위해 
앞으로 암컷이 투자해야 할 분량은 점점 적어져도 되기 때문이다. 비록 새끼가 아직은 어려
서 짝 잃은 암컷이 먹이를 주기 위해 지금보다 두 배나 정성을 쏟아 일을 해야만  할지라도 
초기의 투자를 허비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아직도 인연이 남아서인지 모른다. 새끼에게
는 수컷의 유전자가 반은 들어 있으므로 새끼를  버리는 것은 수컷에 대한 보복이 될 것이
다. 이것도 암컷에게 위로는 못 된다. 앙갚음은 그  자신에게 아무런 이점도 없기 때문이다. 
그 새끼에게는 암컷의 유전자도 반은 들어있다. 암컷은 이  딜레마에 혼자서 대처하지 않으
면 안 된다.
        이기적인 배우자
  역설적으로 들릴지는 몰라도 버림받게 된 암컷은 수컷에게 미움받기 전에 먼저 수컷을 버
려야 하는 대책을 취할 수도 있다. 가령 암컷이 이미  수컷보다 많은 투자를 새끼에게 했다
고 해도 이 대책은 암컷에게 유리할 수가 있다. 불쾌하게 생각될지는 몰라도 어떤 상황에서
는 암수 어느쪽이든 먼저 상대를 버리는 쪽이 유리하다.  트라이버스의 표현에 따르면 남겨
진 배우자는 가혹한 속박을 부담하게 된다. 이 논의는 좀 지겨우나 논지는 퍽 잘 되어 있다. 
암수 어느쪽이든 다음과 같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황에 이르면 상대를 버릴 가능성이 있
다. 
  "이 자식은 이젠 다 컸기 때문에 우리들 중 누구든  한쪽에서 키울 수 있다. 상대는 자식
을 버리지 않을 것이므로 이쯤에서  이별해 버리는 것이 나에게는 이득이  될 것이다. 만일 
내가 지금 이곳을 떠난다면 나의 배우자는 자기의 유전자에 대해 최선의 수법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나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겨진 배우자는  지금의 
나보다 더 어려운 결단의 압력을 받게 될 것이다. 나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면 자식들은 
확실히 죽어 버린다는 것을 배우자는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이기적인 유전
자에게 최선의 길을 선택함에 틀림없다. 그러면 먼저 사라져 버리는 것이 나의  최선책이다. 
확실히 이 방법이 좋을 것이다. 상대도 나와 똑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
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선수를 쳐서 내가 버림을 다해 고통받는 일이  없어야지." 언제나 
그랬듯이 이 독백은 단순히 설명을 위해 의도된 것이다.  나중에 자식을 버리도록 촉구하는 
유전자가 선택상 유리하지 않다는 것만으로  처음부터 자식을 버리도록 촉구하는  유전자가 
선택상 유리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이 이 논의의 요점이다.
      암컷의 최후 수단-교미 거부
  배우자에게 버림을 받았을 때에 암컷이 취할 수 있는 수단을 몇 가지 생각해 보았는데 이
것들은 모두 불리한 상태에서 최선을 다해 잘해 보려는 의지뿐이었다. 그러나 암컷이 그 배
우자로부터 가해지는 착취의 정도를 줄이기 위해서 스스로 선수를 취할 수 있는 어떤 일이 
있을까? 암컷에게는 강력한 최후 수단이 하나 있다. 즉, 교미를  거부할 수 있다. 암컷은 인
기품 매도자처럼 인기가 있다. 크고 영양이 풍부한 난자라는  지참금을 암컷이 가지고 있다
는 것이 그 이유이다. 교미에 성공한 수컷은 자식을 위한 귀중한 영양원을 얻는다. 교미  전
의 암컷이라면 혹시 힘들게 흥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교미가 끝나면 입장은 반
대로 된다. 난자가 수컷에게 이미  제공됐기 때문이다. 수컷에게 배짱으로 흥정하는  암컷의 
입장을 눌러 버리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만 어찌됐든 우리들은 이것도 하나의 비유에 불
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배짱을 부리는 흥정에 상대할 만한  사태가 자연 선택에 의해 진
화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도는 있는 것일까? 나는 대표적인 가능성 두 가지를 생각해 보고 
싶다. 그 하나의 가정의 행복을  우선으로 하는 수컷을 선택하는 전략과  또 하나는 용감한 
수컷을 선택하는 전략이다.
      암컷의 합리적 선택
  가정의 행복을 우선으로 하는 수컷을 선택하는 전략 중에 가장 단순한 예를 생각하자. 암
컷은 수컷을 미리 잘 조사하여 성실함과 가정적 성격을 잘 살펴보는 것이다. 성실한 남편이 
된다는 성격에 관해 수컷의 집단 중에는 변이가 보일 수도  있다. 그런 성질을 사전에 식별
하는 능력이 암컷에게 있다면 그러한 성질을 가진 수컷을 고를 경우에 암컷은 유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달성하는 하나의 방법은 괴팍하고 수줍어하는 암컷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암
컷이 최종적으로 동의하기까지 교미를 인내하지 못하는 수컷은 성실한 남편이 될 가망이 없
다. 긴 약혼기간을 강요하므로 암컷은 변절적인 구혼자를 제외하고 성실함과 인내라는 성격
을 사전에 인정받은 수컷만 골라 최종적으로 교미를 하면 된다. 사실 암컷의 수줍어하는 성
질은 긴 구애 행동 또는 약혼기간과 같이 동물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다. 이미 
기술한 대로 수컷이 속아서 다른 수컷의 아이를 양육하게 될 위험이 있을 경우 긴 약혼기간
은 수컷에게도 유리하다.
      구애 의식
  구애의 의식에 있어서 수컷은 종종 적지 않은 혼전 투자를  하는 수가 있다. 수컷이 집을 
완성할 때까지 암컷은 교미를 거절하는 수도 있고, 수컷이  암컷에게 충분히 먹이를 줘야만 
할 때도 있다. 암컷의 입장에서 보아 이것이 큰 이익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또한 이것은 가
정의 행복을 우선으로 하는 수컷을 선택하는 전략의 또  다른 설명이라고 생각된다. 암컷은 
교미에 응하기 전에 수컷으로 하여금 새끼에 대해 많은 투자를  하도록 하여 그 때문에 '교
미 후'의 수컷이 처자를 버려 보아야  결국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착상은 재미있다. 수줍어하는 암컷이 교미에  응하기를 기다리는 수컷은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셈이 된다. 즉, 수컷은 다른 암컷과의 교미 기회를 포기하고 있으며, 구애 때
문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수컷은  특정의 암컷이 최종적으로 교미에 
응할 때까지는 필연적으로 암컷이 최종적으로  교미에 응할 때까지는 필연적으로  암컷에게 
몹시 '전념하게 ' 될 것이다. 다른 암컷도 교미에 응하기에  앞서 이 암컷과 같은 방법을 알
고 있다면 수컷은 이 암컷을 버리려고 하는 유혹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다른 논문에서도 지적했지만 이 문제에 대한 트라이버스의 논의에는 실은 오류가 있었다. 
그는 과거의 투자 그 자체가 어떤 개체의 장래의 투자 방법을 구속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경제학은 틀렸다. 실업가는 '(예를 들면)콩코드 정기 여객기에  많은 투자를 했기 때문에 
이것이 쓸모가 없다고 해도 도저히 이것을  해체할 수는 없다."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장래의 이익을 문제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이미 그 프로젝트에 많은 투자
를 했다고 할지라도 투자를 중지하고 그 계획을 포기하는 것이 장래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면 즉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수컷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많은 투자를 강요하고 
있는 암컷이 만일에 그렇게 하는 것 자체로 수컷의 유기 행위를 앞으로 못하도록 할 수  있
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상기의 전략이 가정의 행복을  우선으로 하는 수컷을 고
르는 전략의 하나로서 성립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전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암컷은 같은 모든 전략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어야만 한다.  만일 집단 속에 행실이 나쁜 
암컷이 있어서 암컷을 버리고 온 수컷을 언제라도 환영한다면 비록 새끼에 대해 많은 투자
를 했다고 해도 수컷은 암컷을 버리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즉, 일의 절차는 암컷의 대부분의 행동  여하에 달려 있다. 암컷들 사이에서 결탁한  공동 
행위가 성립된다면 아무런 지장도 없다. 그러나 암컷들 사이의  공동 행위는 제 5장에서 고
찰한 비둘기파의 공동 행위와 같이 진화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메이나드-스미스가 공격적 
다툼 분석에 쓴 방법을 암수의 다툼 문제에 응용하기로 하자. 여기서는 암컷의 전략을  2개, 
수컷의 전략도 2개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매파와 비둘기파의 문제를 다룰 때보다 사
태는 조금 까다로울 것 같다.
      전략-행동 프로그램
  메이나드-스미스의 분석법에 따라 여기서도 '전략'이란 말은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인 행동 
프로그램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 암컷의 두 개의  전략을 '수줍어하는' 전략과 '경솔한 '전
략으로, 수컷의 두 개의 전략을 '성실한 '전략과 '바람둥이' 전략이라 부르기로 하자. 이들 네
가지 형의 행동 규율은 다음과  같다. 수줍어하는 암컷은 수컷이 수주간에  걸친 길고 힘든 
구애를 끝내지 않으면 수컷과 교미하지 않는다. 경솔한 암컷은 누구와도 즉시 교미한다.  성
실형의 수컷은 장기간 구애를 지속하는 인내력이 있고 교미 후에도 암컷의 곁에 머물러 양
육을 돕는다. 바람둥이형의 수컷은 암컷이 즉시 교미에 응하지 않으면 즉시 다른 암컷을 찾
아간다. 교미가 끝나면 암컷의 곁에  머물러 좋은 아비의 역할을 하지  않고 새로운 암컷을 
구하여 사라지고 만다. 비둘기파와 매파의 분석 예와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전략은 이
들 네 가지 형태로 한정된 것은 아니나 이들 전략의 거동을 따락 보는 것은 문제 해명에 보
탬이 된다.
  메이나드-스미스처럼 각각의 대가와 이득에  적당한 가설적 수치를 사용해  보도록 하자. 
더 일반적인 취급을 위해서는 그것들에게 대수적인 기호를 부여해야 할 것이나 수치를 사용
하는 편이 이해하기 쉽다. 자식이 무사히 컸을 때 부모가 얻는 유전적 이득을 +15단위로 하
자. 자식을 키우기 위한 대가, 즉 먹이,  돌보기에 필요한 시간, 자식을 지키기 위해  부모가 
당하는 위험 등의 모두를 합계한 것은 -20단위로 한다. 대가는  부모가 지불해야 하기 때문
에 음수로 표현하는 것이다. 긴구애로 시간을 낭비하는 대가도 마이너스가 된다. 이  대가를 
-3단위로 하자.
  지금 수줍어하는 형의 암컷과 성실형의 수컷만으로 구성된 집단을 생각해 보자. 이상적인 
일부일처제 사회가 된다. 하나의 자식을 키우는 데 있어서 어떤 부부라도 암수는 서로 같은 
평균 이득, 즉+15단위를 얻는다. 양육의  대가 -20 단위는 똑같이  분담하므로 암수 각각에 
대해 평균 -10단위로 된다. 긴 구애에 소비된 시간의 대가 -3단위가 다시 암수 각각에게 부
과된다. 그러면 암수 각각에 관한 최종적인 평균 이득이 +2단위(+15-10-3=+2)로 된다.
  그러면 이 집단에 경솔형의 암컷이 하나 끼여들었다고 하자. 그 암컷의 성적은 매우 좋다. 
긴 구애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의 개가를 치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집단 내의 수
컷은 모두 성실형이기 때문에 누구와 교미해도  상대는 자식을 위해 좋은 아비라고  기대할 
수 있다. 자식 한 명당 어미의 이득은 +단위(+15-10=+5)로 되어  수줍어하는 형의 상대보다 
성적이 3단위 더 좋다. 그러면 경솔형의 유전자는 집단 내에 퍼지기 시작한다. 
  경솔형의 암컷이 대성공을 하고 집단 내에서 우세하게 되면 수컷측에 사태 변화가 일어난
다. 지금까지는 성실형의 수컷의 독무대였으나, 여기서 바람둥이형의 수컷이 집단 속에 등장
하면 그 수컷은 성실형의 상대보다 좋은 성적을 올리기 시작할  것이다. 만일 집단 속의 암
컷이 모두 경솔형이라면 이 바람둥이형의 수컷의 성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 된다. 자식 하나
가 무사히 크면 수컷은 +15단위를 손에  넣고, 또한 두 종류 모두에게  지불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대가가 없는 것이  수컷에게 주는 주요한 이익은 그  덕분에 수컷이 제맘대로 
암컷을 버리고 새로운 암컷과 교미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불운한 암컷들은 모두 홀로 애키
우기에 분투해야만 한다. 구애 시간의 낭비라는 대가를 치를  필요는 없다고는 하나 암컷은 
자식 양육의 대가 -20 단위을 모두 자기가 지불하지 않으면  안된다. 경솔형의 암컷이 바람
둥이형 수컷과 우연히 만났을 때 암컷의 순이득은 -5단위(+15-20=-5)가  된다. 한편 바람둥
이 수컷은 그것으로 인해 +15단위를 손에 넣는다. 암컷이 모두 경솔형으로 구성된 집단에서
라면 바람둥이형의 유전자는 불타고 있는 벌판의 불꽃처럼 퍼져나갈 것이다.
  바람둥이형의 수컷이 크게 성공하여 집단 내의 수컷 대부분을 제압하게 되면 벌써 경솔형
의 암컷은 극단적인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수줍어하는 형의 암컷이 매우 유리
하게 된다. 수줍어하는 형의 암컷은 바람둥이형의 수컷과 우연히 만나더라도 교미는 안한다. 
암컷은 긴 구애 기간을 요구하지만 수컷은  이것을 거부하고 다른 암컷을 찾아 나선다.  즉, 
양자 모두 시간 낭비의 대가는 지불할 필요가 없다. 반면에 양자 모두 자식을 낳지 않기 때
문에 아무런 이득도 없다. 수컷이 모두 바람둥이형으로 된  집단에서는 수줍어하는 형의 암
컷의 평균 이득은 영이 된다. 영이 되면 더할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경솔형의 암컷의 평균 성적인 -5보다는 높다.  경솔형의 암컷이 바람둥이 수
컷에게 버림받을 경우에는 새끼를 포기한다는 결정을 했다고 해도 암컷은 난자에 상당한 대
가를 지불했을 것이다. 그래서 수줍어하는 형의 유전자는 다시 집단 내에 퍼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가설적인 사이클도 완결된다. 수줍어하는 형의 암컷이 수를 늘려 집단을 제압하게 
도면 지금까지 경솔형의 암컷을 상대로 느긋한 시간을 가졌던 바람둥이형의 수컷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 암컷이란 암컷은 모두 다 길고 열렬한 구애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바람둥이형
의 수컷은 암컷을 이리저리 바꿔  보지만 사태는 항상 같다. 만일  암컷이 모두 수줍어하는 
형이라면 바람둥이형의 수컷의 이득은 영이  된다. 이제 성실형의 수컷이  출현했다고 하면 
그 놈이야말로 수줍어하는 암컷이 교미하려고  하는 유일한 수컷이다. 그의  순이득은 +2가 
되므로 바람둥이형보다 높은 성적이다. 그래서 성실형의  수컷의 유전자가 증가하기 시작하
고 이야기는 한 바퀴 돈 셈이 된다.
  공격 행동 분석의 경우와 같이 나는 마치  끝없이 진동이 계속되는 양 사태를 설명해 왔
다. 그러나 전례와 같이 실제로 그런 진동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음이 증명된다. 이  시스템
은 어떤 안정 상태에 수렴된다.  계산을 해보면 암컷의 5/6가 수줍어하는  형, 수컷의 5/8가 
성실형으로 된 집단이 진화적으로 안정하게 되는 결과가 나온다. 물론 이 결과는 처음에 우
리가 가정한 임의적인 수치에 대응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다른 임의의 가정에 대해서도 
그 경우의 안정 상태를 주는 각 형의 비율은 용이하게 계산할 수 있다.
      배우자의 이기적 행동
  메이나드-스미스의 분석 예와 같이 반드시 두 가지 형의 암컷과 두 가지 형의 수컷이 있
다고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개개의 수컷이 그 5/8의 시간을 성실형,  나머지 시간을 바람
둥이형으로서 지내고, 한편 개개의 암컷도 5/6의 시간을 수줍어하는  형, 나머지 1/6 시간을 
경솔형으로 지낸다면 전기와 같이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이 달성될 것이다. 진화적으로 안
정된 전략을 어떤 형식으로 생각하든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암수 어떤 것이든 적당한 
안정 비율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나타내면 이성측의 전략의 상대비가 이에 응하여  변화함에 
따라 그 변이 경향은 되돌려져 변이를 일으킨 개체는 불리하게  된다. 이 때문에 이 진화적
으로 안정된 전략이 또다시 유지될 것이다.
  즉, 수줍어하는 형의 암컷과  성실형의 수컷이 대부분을 이루는  집단이 진화될 가능성은 
많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집안에 있어서는  가정의 행복을 우선으로 하는 수컷을 
뽑는 암컷의 전략이 실제로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는  수줍어하는 형의 
암컷이 서로 약속한 공동 행위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수줍어하는 성격 자체가 암컷의 이기
적 유전자에 실제로 이익을 줄 수 있다.
  암컷이 가정의 행복을 우선으로 하는 수컷을 선택하는 전략을 실제로 행사하는 방법은 여
러 가지가 있다. 먼저 지적한 대로 자식을 위한 집을 수컷이 완성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또
는 최소한도로 수컷이 집짓기를 돕지 않는 한은 그 수컷과의 교미를 거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실제로 일부일처제형의 조류에서는 집이  완성될 때까지 교미는 안한다. 그  결과 
수컷은 수정하는 순간에 이미 자신의 값싼 정자보다  자식에게 더 많은 투자를 한 것이 된
다.
  신랑 후보자에게 집짓기를 요구하는 것은 수컷을 덫에 빠뜨리기 위한 암컷의  수단으로서 
확실히 유효할 것이다. 그러나 수컷에 대해 많은 대가를 치르게 한다고 해서, 가령 그  대가
가 아직 낳지도 않은 자식에게 이익이 되는 형태로 되지는 않더라도 이론적으로는 같은 효
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집단 내 암컷이 수컷과의 교미에 동의하기에 앞서다 함께 어떤 곤란
하고 대가 높은 행위, 예를 들어 용을 잡아 온다든가 어떤 산에 오른다든가 하는 행위를 요
구한다면 이것으로 인해 암컷은 교미 후에 암컷을 버리려고 하는 등의 유혹에 수컷이 빠져
들려고 하는 r서을 이론적으로는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지 않을까. 배우자를 버리고 다른 
암컷을 찾아 유전자를 더 늘리고 싶다는 유혹에서라도 한 마리의 용을 잡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수컷은 틀림없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용잡기나 성배찾기 
같은 생각나는 대로 구혼자에게 마구 요구하는 암컷은 없다. 이유는 이렇다. 역시  곤란하나 
암컷과 자식을 위해 필요한 많은 일을 수컷에게 요구한 암컷이 경쟁자라면 수컷에게 무의미
한 사랑의   노력을 요구한  로맨틱한  암컷은 불리하기   때문이다. 용잡이나  헬레스폰트
(Hellespont) 해협을 수영해 건너는 것에 비하면  집짓기는 확실히 로맨틱하지는 않으나 훨
씬 필요한 것이다.
      구애 급식 현상
  암컷이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먼저 지적한 또 하나의 예는 수컷에게 구애의 급식을 요
구하는 것이다. 새의 경우 이 행동은 암컷이 어떤 종류의  퇴보를 일으켜 새끼 때의 행동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암컷은 새끼가 나타내는  것과 같은 제스처를 취하여 
수컷에게 먹이를 요구한다. 그와 같은 방법은 암컷의 어리숙한  유아적인 말투나 입을 삐죽
거리는 것을 수컷이 귀엽게 봐주는 것처럼 조류의 수컷에게는 뿌리칠 수 없는 매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이 시기의 암컷은 알을 만드는 일에 필요한 영양을 저장하기에 열중이
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면 전부 필요하다. 구애 급식은  아마도 수컷이 알 자체에게 직
접 투자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을 것이다. 즉, 구애 급식은 암컷과 수컷이 최초로  자식
에게 주는 투자량의 격차를 줄인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곤충과 거미 중에도 구애 급식의  현상을 보이는 것이 있다. 이들  중에는 때때로 별도의 
해석이 매우 분명해지는 것도 있다. 예컨대 사마귀의 경우에 수컷이 큰 암컷에게 먹히고 마
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암컷의 식용을 감퇴시키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수컷에게는 유
리할 것이다. 불운한 수사마귀는 몸으로 자식에게 투자한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무언
가 기분 나쁜 감이 돌고 있다. 수컷의 몸은 먹이로서 이용되어 난자의 생간을 도우며,  동시
에 알은 자신이 죽은 후 암컷의 체내에 저장되어 있는 자신의 정자에 의해 수정되기 때문이
다.
      암컷의 판단과 선택
  암컷이 가정의 행복을 우선으로 하는 수컷을 택하는 전략을 행사할 때에 수컷의 성실 정
도를 외관만으로 사전에 '판단'하려고 하면  역으로 속을 가능성이 있다.  매우 성실한 가정 
행복형을 나타내면서 실은 심중에 암컷을 버리거나 불성실이 강한 경향을 숨기고 있는 수컷
이 매우 유리하기 때문이다. 버림받은 암컷들에게 자식을 키울 수 있는 가능성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면 이 불성실형의 수컷은 착실한 남편이고, 또 착실한  수컷이 경쟁자 수컷보다 많
은 유전자를 자손에게 전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경우에는 암컷을 잘 속
이도록 작용하는 수컷의 유전자가 유전자 풀 속에서 유리하게 되는 경향을 나타낼 것이다.
  그것에 비해 자연 선택은 그 같은 기만을  잘 판단할 능력이 몸에 밴 암컷에게 유리하게 
되도록 작용한다. 암컷이 수컷의 기만을 알아차리는 데 한몫하는  방법은 수컷의 최초 구애
에 대해서는 특별히 까다롭게 대해 주고 그  후 번식기를 겪을 때마다 같은 수컷의 구애에 
대해서는 점점 빨리 응하는 것이다. 이 수단이 실행되면 비로소  번식에 참가할 수 있는 나
이가 된 젊은 수컷들을 사기꾼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궁지에 몰아넣게 될  것이
다. 물론 처음으로 번식에 참가하는 젊은 암컷이 낳으 자식에게는 불성실형의 수컷으로부터 
유래한 유전자가 비교적 많이 포함될 경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해 이후에 암컷
이 낳는 자식에 관해서는 성실형 수컷의 유전자가 우세하다. 성실형의 수컷은 두 번째 이후
에는 첫 번째와 같은 시간과 많은 에너지의 소모를 수반하는 기나긴 구애 의식을 의미 행하
지 않고 끝나기 때문이다. 집단 중의 개체의 대부분이 번식 경험이 있는 어미의 자식이라고 
하면-수명이 긴 동물이라면 이 가정은 타당하다- 착실하고  좋은 아비를 만들어 내는 유전
자가 유전자 풀에서 우세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를 단순하게 하기 위해 수컷에게는 순수한 성실형과 사기꾼형이라는 두 가지  형밖
에 없는 것처럼 설명해 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수컷도, 아니 수컷과 암컷을 포함한  모
든 개체가 조금씩은 사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고, 배우자를  착취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도
록 프로그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 배우자의 불성실을 짐작할 수 있는 능력은 자
연 선택에 의해 예민하게 단련되어 있으므로 공연한 사기는 숨겨 놓고 있다. 불성실에 의해 
이익을 얻는 확률은 수컷이 암컷보다 높다. 따라서 수컷이 자식에 대해 다소의 이타적 보호 
행동을 보이는 동물의 경우일지라도 수컷의 노력은 암컷보다 조금  약하고, 또한 수컷은 도
망가는 경향을 암컷보다 조금 강하게  보일 것이다. 이것은 새와 포유류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어류의 이기적 행동
  그러나 암컷보다도 수컷이 실제로 많은 노력을 자식의 보호에 쏟는 동물도 있다. 이와 같
이 아비가 자식 때문에 헌신하는 예는  새와 포유류에서는 극히 드물지만 어류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은 도대체 왜 그럴까? 이것은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으로서는 하나의 난제
이고 나도 오랫동안 이 문제로 고심해 왔다. 그러나 최근  칼라일(T.R. Carlisle)양이 교묘한 
해답을 나에게 개인 교수해 주었다. 그녀는 전술한  트라이버스의 '참혹한 속박'에서 아이디
어를 얻어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대부분의 어류는 교미를 하는 대신에 그냥 생식 세포를  물 속에 방출한다. 수정은 배우
자의 체내에서 일어나지 않고 물 속에서 이루어진다. 유성 생식이 처음 출현했을 때에도 아
마 이것과 비슷했을 것이다. 새, 포유류 그리고 파충류 같은 육상 동물은 이런 형태로  체외 
수정을 할 수 없다. 그들의 생식 세포는 매우 건조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컷의  운
동 능력을 가진 정자가 암컷의 젖어 있는 체내로 주입된다." 이상은 다만 사실의 확인일 뿐
이다. 칼라일 양의 아이디어는 이제 부터이다. "교미 후 육상 동물의 암컷은 얼마 동안 체내
에 배를 가지고 있게 된다.  만일 암컷이 교미 직후에 수정란을  낳는다고 해도 수컷에게는 
여전히 도망쳐서 암컷을 트라이버스의 '참혹한 속박'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 있
다. 즉, 수컷에게는 암컷의 선택을 마감하고 먼저 암컷을 버리는 결단을 내릴 기회가 필연적
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아이를 버려 죽게  할 것인가, 아니면 머물러서 양육을 할  것인가의 
결단을 모두 암컷에게 떠밀어 버린다. 그러므로 육상 동물의  자식 보호에는 아비보다 어미
에게 기회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물고기를 위시한 다른 수생 동물에서는 사정이 아주  다르다. 수컷이 암컷의 체내
에 정자를 주입하지 않는다면 암컷이 '자식을  뱃속에 품고' 혼자 남아 있을 필요성은  없게 
된다. 수정이 막 끝난 알을 상대에게 맡기고 급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암수 모두에게 가
능하다. 그러나 이때에 종종 수컷이 버림받는  경우가 되는 이유가 한 가지 있다.  어느쪽이 
먼저 생식 세포를 방출하는가를 가지고 진화적인 다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먼저 생식 
세포를 방출한 개체는 수정된 배를 상대에게 떠맡길 수 있는 점에서 유리하나 동시에 배우
자가 자칫하면 계속해서 구혼에 응하여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수컷쪽이 위험이 크다. 그냥 정자가 난자보다 가벼워서 확산이  쉽다
는 것만을 고려해도 그리 말할 수 있다. 암컷은 수컷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알
을 빨리 방출했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다. 알은 비교적  크고 무거워서 잠시 동안은 한덩어
리가 되어 거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고기의 암컷은  먼저 산란하는 '위험'을 
범할 가능성이 있다. 물고기의 수컷은 이 위험에 도전하지 않는다. 수컷이 서둘러 정자를 방
출해 버리면 암컷이 방출하기전에 정자가 흩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면 암컷은 산란을 
하지 않는다. 왜냐면 알을 낳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확산 문제 때문에  수컷은 
우선 암컷이 산란하기를 기다려 그 후에 알에게 정자를 뿌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덕
분에 암컷은 실로 귀중한 몇 조간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  사이에 몸을 감추고 난자를 수
컷에게 떠맡겨서 수컷을 트라이버스의 딜레마에 빠뜨릴 수 있다.  그래서 이 이론은 수컷에 
의한 자식의 보호가 왜 몰 속에서는 보통으로 보이고 건조한 육상에서는 보기 드문지를 솜
씨좋게 설명하고 있다.
        훌륭한 수컷을 선택하는 전략
  물고기 이야기는 그만하고 암컷이 사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주요한 전략, 즉 훌륭한 수
컷을 선택하는 전략을 거론하기로 하자. 이 방책을 이용하고 있는 종에서는 암컷이 자기 새
끼의 아비에게 원조를 받을 것을 실질적으로 포기하고 있고 그 대신에 좋은 유전자를 얻기
에 전력을 쏟고 있다. 여기서도 또  암컷의 무기는 교미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암컷들은 
상대에게 함부로 교미를 허락하지는 않는다.  암컷들은 수컷과 교미하기 전에  모든 주의를 
집중하여 상대를 선별하려고 한다. 수컷 중에는 분명히 남보다 좋은 유전자를 많이 가진 개
체가 있다. 유전자는 자식의 생존에 이익을 도모함에 틀림없다. 외관상의 단서를 가지고  암
컷이 어떤 방법으로 수컷이 지닌 좋은 유전자를 검출할 수가 있다면 암컷은 자기의 유전자
에 아비의 양질인 유전자를 결합시킴으로써 자기의 유전자를 유리하게  할 수 있다. 제 3장
에서 말한 조정 경기 팀의 비유로 설명한다면 암컷은 나쁜 선수와 함께 하여 자신의 유전자
가 질질 끌려가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다. 암컷은 자기의  유전자로서 유리한 조정 팀 동료
를 선정할 수 있다.
  선택 기준이 되는 정보를 대부분의 암컷이 고유한 결과 어떤 수컷이 최고인가 하는 점에
서 거의 모든 암컷이 같은 결론에 도달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극히 소수의 운 좋은 수
컷이 대부분의 교미에 관여하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 개개의  암컷에 대해 수컷이 제공해
야만 할 것은 다소 값싼 정자에 불과하므로 수컷은 그 일을 쉽게 할 수 있다. 바다코끼리와 
풍조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암컷은 극히 소수의 수컷에게
만 모든 수컷이 열망하는 이상적인 이기적 착취 전략의 행사를 허락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호강이 최량의 수컷에게만 허용되도록 항상 주의하고 있다.
      암컷이 찾는 수컷-생존 능력의 증거
  그러면 다른 증거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여러 가지의 가능성이  있다. 아마도 강한 근육
은 먹이를 포획하는 능력의 증거가 될 것이고, 긴 다리는 포식자로부터 도망치는 능력의 증
거일지도 모른다. 이들의 특성은 자식 모두에게 유용한 성질일 것이다. 그래서 암컷은  자기
의 유전자에 그와 같은 특성을 결합하는 것으로 자기의 유전자를 유리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러한 논의를 진행함에 있어서는 어쨌든 암컷이  완전히 충실한 표시 또는 
표지에 따라 수컷을 선택하고 있는 것으로 상상할 필요가 있다. 즉, 그 표시는 수컷의  체내
에 있는 우량한 유전자의 증명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재미있는 문제
가 생기게 된다. 이 문제는 다윈도 느꼈고 피셔도 명료하게 소개하고 있다.
  수컷이 서로 경쟁하여 암컷으로부터 훌륭한 수컷으로 지명을 받으려고 하는 사회에  있어
서 어미가 자기의 유전자에 대해 할 수 있는 최선책의 하나는 자식을 매력적이고 훌륭한 수
컷으로 성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성체가 됐을 때에 집단  속에서 대부분의 하렘을 독점하
는 소수의 행운을 잡은 수컷의 일원에 들어갈  수 있는 자식을 확실히 만들어 내면 암컷이 
획득할 수 있는 손자 수는 엄청나게 많아질 것이다. 이  결과 다음과 같은 일이 생긴다. 즉, 
암컷의 눈으로 볼 때에 수컷이 갖춰야 할 가장 바람직한 성질의 하나는 단적으로 성적 매력 
바로 그 자체이다. 특히 매력적인  훌륭한 수컷과 교미한 암컷이 낳은  자식은 다음 세대의 
암컷들에 대해서도 매력적인 수컷이 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이 자식들은 어미에게 많은 
손자를 갖도록 할 석이다. 물론 처음에는 암컷도 큰 몸체와  같은 분명히 유익한 성질을 기
준으로 하여 수컷을 선별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단 그 종의 기준이 동종의 암컷
들 사이에서 매력적인 것으로 널리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들의 성질은 단순히  매력적이라는 
것만의 이유로 자연 선택에 있어서 유리함을 계속 유지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풍조 수컷의 꼬리와 같은 사치스러움은 어떤 종류의 불안정하고 일방적인  과정
을 거쳐 진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옛날 풍조의 암컷은 보통보다 조금 긴 꼬리를 가진 수
컷을 바람직한 성질의 소유자로 보고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마도 튼튼하고 건강한 
체격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수컷의 꼬리가  짧은 것은 비타민 부족의 표시였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먹이 획득 능력이 빈약한 증거다. 혹은 아마도 짧은 꼬리를 가진 수컷은 포식자로부
터 도망치는 것이 서툴러서 그 때문에 꼬리를 잘려 먹혔을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따로 짧은 
꼬리 그 자체가 유전된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주의하라. 단순히 짧은 꼬리가 어떤 
유전적 열세의 하나의 지표로 되어 있다고 가정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어쨌든 이유가 무엇
이든 풍조의 선조였던 오래 전의 암컷은 평균보다 긴 꼬리를 가진 수컷을 선택적으로 찾아
다녔다고 가정하자. 수컷의 꼬리 길이의 자연적 변이에 '어딘가' 유전적 배경이 있었다면 집
단 속의 수컷의 꼬리의 평균 길이는 암컷의 상기의 선택에 의해 길어졌음에 틀림없다. 암컷
이 따르는 규칙은 단순하다. 모든 수컷을 보아서 가장 긴  꼬리를 가진 개체를 선택하면 된
다. 이 규칙에서 벗어난 암컷은 불리하게  됐다. 게다가 너무 긴 꼬리가 수컷에게는  실제로 
부담이 됐다고 해도 이 사정은 더더욱 들어맞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꼬리가 긴 자식을 낳을 
수 없었던 암컷들로부터는 매력적이라고 판정 될 수 있는 자식을 낳을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여성의 의상이나 미국의 자동차 디자인과 같이 보다 긴 꼬리를 가지는 경향은 이
렇게 시작되어 자기 스스로 세를 늘린 것이다. 꼬리가 너무 기괴한 길이에 달해 결국 그 때
문에 명백한 불리함이 성적 매력이라는 유리함을 압도하기 시작할 때야 이 경향이 겨우 정
지하게 됐다.
        핸디캡 원리
  이것은 간단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이고  다윈이 '성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이  방법을 
제창한 이래 부단히 회의주의자의 주목으로 표적으로 되어 왔다. '여우님, 여우님' 이론의 제
창자로서 소개된 자하비도 성 선택의 설명을 불신하는 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그 대신 
'핸디 캡 원리'라는 어처구니없고 비뚤어진  생각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우선 다음의 점을 
지적한다. 암컷이 수컷 중에서 우량  유전자를 가진 놈을 선별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실은 
수컷에 의한 사기 행위에 길을 터 주게 된다는 것이다.  강한 근육은 암컷에게 선택의 대상
으로 에누리없이 좋은 성질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덧대서 부풀게 한 어깨처럼 전
혀 실질적이 아닌 모조 근육이 수컷에게 발달하지 말라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수컷으로
서 진짜 근육을 발달시키는 것보다 가짜를 만드는 것이 쉽다면 성 선택은 가짜 근육을 만드
는 유전자에게 유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한다. 대항적인  선택
의 작용으로 머지않아 이 속임수를 간파할 능력이 암컷에게  진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수컷
이 성적인 거짓 선전을 해도 최종적으로는  암컷에게 발각되고 만다는 것이 자하비의  기본 
전제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의 결론을  내린다. 즉, 참으로 성공하는  수컷은 거짓 선전을 
하지 않고 오히려 거짓이 없다는 것을  상대가 즉시 알도록 표시하는 수컷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가령 강한 근육이 문제라면  간단히 시각적으로만 강하게 보이는  근육을 과시하는 
수컷은 곧 암컷에게 탐지되고 말  것이다. 이에 대해 실제로 무거운  물체를 들어올리는 등 
보라는 듯이 행동하므로 강력한 근육의 소유자임을 증명해 보이는 수컷이 암컷의 신용을 쟁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하비는 훌륭한 수컷이란 단지 우수한 수컷으로 보이
도록 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진짜 우수한 수컷이어야만 한다고 믿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회의적인 암컷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따라서 과시  행동은 진짜로 훌륭한 수컷에게만 
가능할 수 있도록 진화될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는 매우 좋다고 본다. 자하비의 이론은 앞으로 계속되는 부분이 걸림돌이 
된다. 풍조와 공작새의 꼬리, 사슴의 거대한 뿔들을 비롯하여 성적으로 선택된 형질은 그 소
유자에게 핸디캡을 주는 것같이 보여서 지금까지는 역설적인 존재라고 간주하는 것이  보통
이었다. 그런데 자하비는 이들 형질이  정확히 그것들이 핸디캡이 되기  때문에 진화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길고 거추장스러운 꼬리를 가진 수컷의 새는 실은 암컷에 대해 이런 꼬리를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살아 남아 있을 정도로 완강하고 훌륭한 수컷이다라고 선전
하고 있다고 한다. 두 남자가 달음박질하는 것을 여자가 지켜 보았다고 상상해보자.  양자가 
동시에 결승선에 도달할 때, 한 남자는 석탄을 넣은 자루를 등에 지고 뛰었다고 하면 그 여
자는 당연히 짐을 진 남자가 실제로 발이 빠르다고 결론지을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자하비 이론을 불신한다. 더욱이 나의 회의에 대해서는 내가 처음으로 이 이론을 들
었을 때만큼 확고한 자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이론을 들었을 때 나는 그 생각의 
논리적인 결론은 발도 하나, 눈도 하나밖에 없는 수컷이 진화해야만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스라엘 출신의 자하비는 즉석에서 이와 샅이 답하였다. "우리 나라 최고의 장군 중 한 사
람은 애꾸눈이다." 그럼에도 부구하고 핸디캡 이론에 근본적인  모순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
럼 보인다고 하는 문제는 아직도 남아 있다. 남일 핸디캡이  진짜라면 -이론의 본질상 핸디
캡은 진짜가 아니면 곤란한데- 그것은 암컷을 매혹할  수 있는 것 같은 확실함으로 자손에 
대해서 불리함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핸디캡이 딸에게  전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핸디캡 이론을 유전자의 말로 바꿔 말하면 다음과 같다. 수컷에게 긴 꼬리와 같은 핸디캡
을 발달시키는 유전자는 암컷이 그 핸디캡을 갖고 있는 수컷을 선택함으로써 유전자 풀 속
에서 점점 불어난다. 암컷이 핸디캡을  가진 수컷을 뽑는 것은 암컷에게  그와 같은 선택을 
하게 하는 유전자가 유전자 풀 속에서 빈도 증가가 일어나는가? 핸디캡을 짊어지고 있음에
도 불구하고 성체에 이르는 수컷은 그 밖의 형질에 관해서는 좋은 유전자를 갖고 있음에 틀
림없고, 따라서 핸디캡을 가진 수컷을 좋아하는 암컷은 자동적으로  다른 면에서 좋은 유전
자를 가진 수컷을 선택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우수한 '다른' 유전자는 새끼들의 
몸에 유리하게 작용하여 살아 남은 아이들이 핸디캡 그 자체의 유전자와 같이 암컷에게 핸
디캡을 가진 수컷을 선택하게 하는  유전자를 증식시킨다는 것이다. 가령  핸디캡을 만들어 
내는 유전자가 아들에게만 효력을 나타내는 한편 핸디캡을 만들어 내는 유전자가  아들에게
만 효력을 나타내는 한편 핸디캡을 가진 개체에 대한 성적인 호감을 촉구하는 유전자가 암
컷에게만 영향을 주게 된다면 이 이론도 혹시 유효할지  모른다. 그러나 말로서만 공식화되
어 있는 한에서는 이 이론이 유효한지 아닌지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이론이 어
느 정도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더 잘  검토하려면 수학 모델로 표현해 볼 필요가 있
다. 현재까지는 핸디캡 원리를 유효한 모델로 하려고 하는  수리 유전학자들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것들은 그것이 유효한 원리가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또는 도전한  수
리 유전학자가 충분히 총명하지 못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들 중에는 메이나드-스미스도 포함
된다. 내게는 어딘지 전자의 가능성이 타당한 것처럼 여겨진다.
  일부러 자기에게 핸디캡을 붙이는 흉내를 내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다른 수컷에 대한 우
위를 과시한다고 하면 그러한 방법으로 수컷이 자기의 유전자적 성공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예컨대 하렘을 만들고 그것을  유지하는 바다코끼리는 암컷을 향
해 심미적인 매력을 과시함으로써 그것을 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렘에 침입하려고 하
는 수컷을 모두 물리친다는 단순한 수단에 따르고 있다.  하렘의 소유자는 지금까지도 싸워  
이기고 하렘 소유자의 자리를 계속 지켜왔다는 명백한 사실만 해도 그 지위를 노리는 침입
자들과의 싸움에서 이후에도 이긴다는 예견이 있다. 침입자는 승산이 적다. 비록 이길 수 있
는 힘이 있어도 지금까지 패해 왔다는 이유로 하렘 소유자와만 교미하는 암컷은 많은 별볼
일 없는 독신 건달 수컷 중에서 되풀이 등장하는 도전자를 격퇴할 만한 완강한 수컷에게 자
기의 유전자를 결연시키는 것이 된다. 아비가 보여 준 하렘  소유 능력은 운이 좋으면 어미
의 자식에게도 유전할 것이다. 더더욱 바다코끼리의 암컷에게는 실제로는 별로 선택의 자유
는 없다. 암컷이 하렘을 이탈하려고 한다면 그 소유자가 그 암컷을 혼내 주기 때문이다.  그
러나 싸움에 이기는 수컷을 배우자로 하므로 암컷은 자기의 유전자를 유리하게 한다는 원칙
에 변함은 없다. 이미 본대로  암컷이 그 배우자로서 세력권 소유자나  높은 순위를 점하는 
수컷을 선호하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두 성간의 차이
  이 장의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해 보자. 동물계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다른 번식 시스
템, 예를 들면 일부일처제, 난혼, 하렘제 등은 모두 암수 사이의 이해 대립의 산물로서 이해
할 수가 있다. 암수 어떤 개체도 그 생애에 있어서  번식상의 전체 성적을 최대화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 정자와 난자의 크기 및 수에서 볼 수 있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수컷
에게는 일반적으로 난혼과 자식 보호의 결여 경향이 보인다.  이에 대항하는 대책으로서 암
컷에게는 두 가지 대표적인 전략을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내가 훌륭한 수컷을 뽑는 전략이
고 한 것, 또 하나는 가정의 행복을 우선으로 하는 수컷을 뽑는 전략이라고 하는 것이다. 암
컷이 이들 두 대항책의 어느 것을 취하는 경향을 나타내든,  또 수컷이 그것에 어떻게 대응
하든, 어느 것도 종을 둘러싼 생태학적인 상황이 결정할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위 두  전략
의 모든 중간형이 보이고, 이미  말한 대로 아비가 어미보다 열심히  자식의 보호에 임하는 
예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특정 동물종의 세부 사항은 관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종이 어떻게 어떤 번식 시스템을 나타내고 다른 시스템은 나타내지 않는가라는 요인론
은 다루지 않겠다. 그 대신에  일반적으로 수컷과 암컷 사이에서 널리  관찰되는 다른 점을 
들어서 그것들이 어떻게 해석되는지 생각하기로 하자. 이 때문에  두 성간에 조금의 차이밖
에 볼 수 없는 종, 즉 일반적으로 암컷이 가정의 행복을 우선으로 하는 수컷을 택하는 전략
을 좋아하는 종은 더 강조하지 않기로 한다.
      암수의 색채
  수컷이 성적으로 매력적이고 화려한 색채를 나타내는 반면에 암컷은 좀 충충한 색채를 나
타내는 경향이 있다. 암수 어느 개체도  포식자에게 먹히기는 싫어한다. 그러면 두 성  모두 
단조로운 색채를 나타내는 방향으로 어떤 진화적 압력을 받고  있을 것이다. 선명한 색체는 
배우자와 같이 포식자도 유인하기 때문이다. 유전자의 말로 말하면 우중충한 색채를 나타내
게 하는 유전자보다 선명한 색채를 나타내는 유전자 포식자로부터 생명을 잃을 가능성이 높
다. 한편 다음 세대로 전해질 가능성이라면 우중충한 색채를 띠게 하는 유전자가 선명한 색
채를 띠게 하는 유전자보다 아마 덜할지도 모른다. 색이  우중충한 개체는 배우자를 유혹하
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두  개의 서로 대립하는 선택압을 볼  수 있다. 즉, 
포식자는 유전자 풀에서 선명한 색채의 유전자를 제거하는 경향이  있고, 성적 파트너는 충
충한 색채를 띠게 하는 유전자를  제거하는 경향을 보인다. 많은 다른  경우와 같이 유능한 
생존 기계는 대립하는 선택압의 타협의 산물로 생각된다. 여기서  흥미가 있는 것은 수컷으
로서의 최적 타협점이 암컷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수컷이 큰  위험을 걸로 큰 벌이를 노
리는 도박꾼적 존재라고 보는 우리의 견해와도 완전히 합치하고  있다. 암컷이 만드는 난자 
한 개에 대응하는 수컷이 만드는 정자는 막대한 수에 달하므로 개체군 속의 정자의 수는 난
자를 휠씬 높아진다. 즉, 난자는  상대적으로 귀중한 자윈 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암컷은 
수컷의 경우만큼 성적 매력이 강하지 못해도 난자의 수정을 보증할  수 있다. 한 마리의 수
컷이 극히 많은 암컷에게 자식을 낳게 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화려한 꼬리가 포식자를 
유인하거나 덤불에 걸리거나 해서 단명해지더라도 수컷은 죽을 때까지 막대한 수의  자식을 
볼지도 모른다. 그런데 성적 매력이 없는 충충한 색채의 수컷은 암컷만큼 오래 살지는 몰라
도 자식을 거의 갖지 못하고 자기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만약 
세계를 손에 넣어도 불사신의 유전자를 잃어버리면 수컷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배우자 선택시의 행동
  두 성 사이에 널리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차이는 누구를 배우자로 뽑는가에 대해  암컷이 
수컷보다 신중하다는 것이다. 암수를 불문하고 신중함이 필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다른 종 
개체와의 교미를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잡은 여러 이유에서 불리하
다. 사람과 양 사이의 교미와 같이 교미의 결과가 배형성을  이루지 못하고 손실도 별로 많
지 않은 예도 있다. 그러나 말과 당나귀와 같은 가까운  종간에 교잡이 생기면 그 불이익은 
적어도 암컷의 파트너에 있어서는 매우 클 수 있다. 교잡의  결과 노새의 배가 형성되 가능
성이 있고, 그렇게 되면 그 배는 11개월에 걸쳐 당나귀의 자궁을 차지하게 된다. 노새  때문
에 당나귀는 전체의 보호 투자 중의 매우 많은 양이  지출되고 만다. 태반을 통하여 흡수되
는 먹이나 후에 우유로 흡수되는 것 뿐만이 아니라 가장 중대한 손실은 다른 자식을 키우는 
데 싸야 할 시간으로 소비되는 보호 투자이다. 성체에 이른 노새는 번식 불능이다. 아마  말
과 당나귀의 염색체는 매우 닮아서 서로 협동하여 수우하고 완강한 노새의 몸을 만들 수는 
있으나 감수 분열에서 적절한 공동 작업을 수행할 정도로는 닮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가 무
엇이든 간에 어미가 노새를 키우기 위해 지불한  적지 않은 투자 그 자체는 어미의 유전자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낭비가 되는 것이다. 암말은 교미의 상대가 말이 아닌 당나귀가 되지 
않도록 매우 주의해야만 한다. 유전자의 언어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말의 체내에서 "몸아, 
네가 암컷이거든 상대가 말이거나 당나귀이거나 어쨌든 나이가  많은 수컷과 교미하라." 등
의 지령을 내리고 유전자는 즉시  노새라는 주머니 속에 갇히고 마는  처지가 된다. 더욱이 
이 노새를 위한 보호 투자의 결과, 번식 가능한 망아지를  키우는데 필요로 하는 어미의 능
력은 다소 감소하게 된다. 한편 다른 수컷은 비록 다른 종의 개체와 교미해도 잃는 것은 적
다. 물론 그 때문에 수컷이 아무런 이익도 받지 못하는  것은 암컷의 경우와 같을지라도 배
우자의 선택에 있어서 수컷이 신중하지 못하다는 것은 예상할 수  있다. 이 점에 관한 관찰
은 모두 이 예상이 들어맞았다.
      암수의 성 선택 유형
  같은 종의 개체 사이에 있어서도 배우자 선택을 신중히 해야  할 이유가 여러 가지 있다. 
예를 들면 종잔 교잡과 같이 크나큰 유전적 손실을 낳기 쉽다. 이것은 근친 상간에 의해 치
사성 또는 반치사성의 열성 유전자의 작용이 표면에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도 또한 암컷이 입는 손실은 수컷보다 크다. 어느 자식에  대해서건 암컷이 수컷보다 큰 투
자를 하기 때문이다. 근친 상간의 터부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암컷이 수컷보다 엄격히 이 터
부를 지키려고 할 것이라고 예상된다.  근친 상간 관계에 있는 개체  중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연상의 개체라고 가정하면 근친  상간적 결합은 수컷이 암컷보다 연상의  경우일 
때가 그 반대의 경우보다 많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면 아비와  딸 사이의 근친 상간이 어미
와 아들 사이의 근친 상간의 빈도보다 높고  남매간의 근친 상간의 빈도가 중간 정도로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수컷이 암컷에 비해 상대를 가리지 않고 교미하는  경향이 강하다. 암컷은 한
정된 난자를 비교적 느린 속도로 생성하기 때문에 다른 수컷과 공연히 많은 교미를 거듭해
도 이익은 아무것도 없다. 한편 수컷은 매일 막대한 수의  정자를 만들 수가 있으므로 상대
를 가릴필요 없이 많은 교미를 해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지나친 교미는 약간의 신간
과 에너지 손실을 제하면 실제로는 암컷에게도 대단한 대가가  아닐지 모른다. 반면에 암컷
에게 있어 그것은 아무런 적극적  이익에 관련되지 않는다. 한편 수컷에게는  이제 더 이상 
많은 암컷과 교미를 거듭하지 않아도 좋다는 한계는 없다.  수컷에게 있어 과잉이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인간의 성 선택
  나는 지금까지 인간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장에서 거론한 바와 같
은 진화론적 논의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가 속하는 인간이라는 종과 우리의 개인적 경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수컷이 장기간에 걸쳐 성실함을  어떤 식으로 증명해 보일 때
까지 순결을 지키려는 암컷의 생각은 잘 알려진 감정에 호소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여성
이 훌륭한 남성을 고르는 전략이 아닌 가정의 행복을 우선으로 하는 남성을 택하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대부분의  인간 사회는 일부일처제를 취
하고 있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도 부모의 보호 투자는 어느 것이든 크고 분명히 불균형하
지 않다. 확실히 모친은 아이를 위해 부친보다 더 직접적인 일을 한다. 그러나 부친도  아이
에게 주는 물질적 자원을 얻기 위해 간접적이나 열심히 일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한편
에서는 난혼적인 사회도 있고 하렘제에 기초한 사회도 많다. 이 놀랄 만한 다양성은 인간의 
생활 양식이 아닌 오히려 문화에 의해 주로 결정됨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남성에
게는 일반적으로 난혼적 경향이 있고 여성에게는 일부일처제적인 경향이 있다고 한다. 진화
론적 입장에서 이 예상이 맞을 수 있다. 특별한 사회에 있어서 이 두 가지 경향 중 어느 것
이 남을 압도하는지는 문화적 상황의 세부적인 것에 의존한다.  이것은 다른 동물에 있어서 
그것이 바로 생태학적 세부 사항에 의존하는 것과 같다.
      인간의 성의 선전 행위
  우리가 소속하고 있는 사회의 양상 중에 결정적으로 차격적인 것의 하나는 두 성의 선전 
행위에 관한 일이다. 이미 본 바와 같이 성 차이가  존재할 때에는 진화론적 입장에서 다음
과 같은 것이 강하게 예상된다. 즉,  자기를 과시하는 것은 남성이고 여성은 충충한  색채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대 서구인은 이 점에 관해서 의심없이 예외적인 존재이다. 물
론 화려하게 치장하는 남성과 우중충하게 꾸민 여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평균적
으로 보면 우리의 사회에 있어서 공작의 꼬리에 상당하는 것을 과시하고 있는 것은 여성이
지 남성은 아니다. 여성은 얼굴에 화장을 하고 가짜 속눈썹을 붙인다. 배우와  동성연애자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남성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여성은 자신의 용모에 매우 관심을 가
지고 있고, 신문과 잡지가 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남성용 잡지는 남자의 성적 매력  문제
로 그렇게 열중하지 않는다. 자기의 의상이나 용모에 이상하게  관심이 있는 남성은 남성끼
리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경원시되기 쉽다. 이야기 중에 여성이 화제가 될 때에는 대개 정
해진 그녀의 성적 매력이나 그것의 부족함에 대하여 언급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말 상대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간에 변함없다. 남성이 화제에 오를 때에  사용되는 형용사는 성과는 관
계가 없는 것이 더 많을 것 같다.
  이런 사실에 직면하면 생물학자는 그가 보아온  인간 사회는 실은 여성이 남성을  가지고 
경쟁하는 사회이고 그 역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풍조의 경우에 암컷이 충충한 색
채를 나타내는 것은 그 암컷이 수컷을 가지고 경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생각
했다. 암컷이 유인술이 좋아서 신중하게 수컷을 고를 여유가  있으므로 수컷이 맑고 화려한 
색채를 나타낸다. 풍조 암컷의 유인술이 좋은 것은 난자가  정자보다 희소한 자원이기 때문
이다. 현대 서구인은 어떻게 된 것인가? 실제로 남성은 상대가 애써 찾는 성, 파는 사랑  마
음대로인 성, 즉 신중하게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는 측의 성으로  되고 만 것일까? 만일 그
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제10장
          내 등을 긁어 다오. 나는 데 등을 타고 괴롭히겠다
        집단 형성이 주는 이익
  지금까지 여러 장에서 우리는 같은 종에 속하는 생존 기계  상호간의 부모 자식 관계, 성
적 및 공격적 상호 관계를 고찰해 왔다. 그러나 동물의 상호 관계 중에는 이들 표제 속에는 
분명하게 포괄되지 않은 듯한 뚜렷한 영역이 있다. 이들 중  하나는 많은 동물이 보여 주는 
집단 생활의 경향이다. 새와 곤충이 무리를 짓고 물고기와  고래도 떼지어 헤엄치며 초원에
서 생활하는 포유류들도 무리를 형성하거나 집단으로 사냥하거나 한다. 이들 집단은 보통은 
같은 종의 개체만으로 구성되는데, 예외도  있다. 얼룩말은 종종 영양(gnus)와 무리를  짓고 
여러 종의 새들도 혼합된 무리를 지을 때가 있다.
  이기적 존재인 개체가 우리를 지어 생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여러 가지이다. 목
록을 모두 소개할 계획은 없으나 그 중 몇 가지에  관해서만 언급하기로 한다. 이들은 논함
에 있어서 나는 제1장에서 소개했고 설명하기로 약속했던 외관상 이타적 행동의 여러 가지 
남아 있는 예로 우선 돌아가려 한다. 그 다음 사회성 곤충에 대해 알아볼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없이 동물에 대한 이타주의의 설명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
서 나는 호혜적 이타주의라는 중요한 개념, 즉"내 등을 긁어 다오. 나는 네 등을 긁어 다오. 
나는 네 등을 긁어 주겠다."라는 원리에 관해 언급하고 싶다.
  만일 동물이 무리를 지어 함께 산다면 그들 유전자는 이 연합에 의해 그들이 지출한 것보
다 더 큰 이익을 얻고 있음에 틀림없다. 무리를 짓는  하이에나는 단독으로 먹이를 잡는 것
보다 훨씬 큰 먹이를 포획할 수 있다. 가령 먹이를 서로 나누어야 한다고 해도 떼지어 사냥
하는 것은 개개의 이기적 개체에게 유리하다. 어떤 종의  거미들이 협력하여 거대한 공동의 
망을 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황제펭귄은 서로 몸을 비벼 열을 보존한다. 혼자  있을 
때보다 풍우에 내놓은 몸의 표면적이 적어지기 때문에 모든 개체가 이익을 얻는다. 다른 개
체의 뒤에서 비스듬히 헤엄치는 물고기는 앞의  개체가 만든 물결 덕분에 유체  역학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물고기가 떼지어 헤엄치는 이유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공기의 
파동을 이용한 같은 요령이 경륜 선수에게 알려져 있고 새가  V자형의 편대로 비행하는 것
도 같은 이유에서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무리의 선두에 서는  것은 불리하므로 이것을 피하
려고 하는 경쟁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새들은 힘든 리더역을 교대로 떠맡고 있을 가능성
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이 장의 말미에서 논의하는 지연성의 호혜적 이타주의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집단 생활의 이점으로서 가장 많이 제안되는 것은 포식자에게 먹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해밀턴은 '이기적인 무리의 기하학'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이러한 이론에 대
하여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오해가 없도록 강조해 두지만 해밀턴이 말하는 '이기적인  무
리'란 '이기적 개체의 무리'를 뜻한다.
      위험 영역의 최소화
  다시 한번 단순한 '모델'에서부터  논의를 출발하자. 이것은  확실히 추상적이지만 현실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제 가장 가까이 있는 피식자  개체를 공격하는 경향이 
있는 포식자에게 잡히는 한 동물을 상상해 보자. 포식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에너지의 
소모가 적게 들고도 성취될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전략이다. 피식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
은 하나의 흥미로운 결과를 가져온다. 피식자 개체는 포식자에게  제일 가까운 위치에 있는 
것을 피하려고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만약 피식자가 멀리서 포식자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
는 재빨리 도망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포식자가 높다란  숲에 숨어 있다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모습을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면 이 경우에도 개개의 피식자 개체는 포식자에게 
가장 가까이 있게 될 확률을 최소화 하는 수단이 있다. 개개의 피식자는 말하자면 '위험  영
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둘러싸여 있다고 상정할 수 있다. 영역은 범위 내의 임의의 점부
터 그 개체까지의 거리가 그 점에서 다른 어떤 개체까지의 거리보다 짧은 영역으로 정의된
다. 예컨대 피식자 개체가 규칙적인 기하학적 대형을 짓고 행진하고 있다고 하면 개개의 개
체(변두리에 있는 개체는 별도로 하고)를 둘러싼 위험 영역은 대략 6각형을 나타낼 것이다. 
만일 개체 A의 6각형 위험 영역 내에 포식자가 잠복하고 있으면 개체 A는 먹히기 쉽다. 무
리의 변두리에 있는 개체는 특히  위험이 크다. 그들의 경우 위험  영역은 상대적으로 작은 
면적의 6각형이 아닌 무리의 바깥 방향에 넒은 범위를 가진 형태로 되기 때문이다.
  자, 현명한 개체가 자기의 위험 영역을 최소한으로 좁히려고 하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무
엇보다도 우선 피식자는 무리의 변두리에  위치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만일 자기가 
변두리에 있는 것을 알아 차리면 피식자는 즉시 중심  방향으로 이동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누군가는 변두리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데, 개개의 개체에 관해서  말하면 누구도 그런 역할
은 맡기 싫어서 집단의 외곽에서 중심 방향으로 향하여 개체가 부단히 이동하는 것을 보게 
된다. 만약 무리가 이전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다면 중심 방향으로의 개체 이동에 의해 즉
시 밀집된 덩어리가 되어 버릴 것이다. 모델의 조건으로서 피식 동물에 집합 경향을 가정하
지 않고, 또한 피식 동물이 처음에는 무작위적으로 분산하고  있다고 가정해도 개개의 개체
는 이기적 충동에 이끌려서 다른 개체의 중간에 위치를 차지하고 자기의 위험 영역을 좁히
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 결과 바로 집단이 형성되어 그것이 점점 밀집화될 것이다.
  더욱이 현실에서의 밀집화 경향이 이것과 반대되는 압력에 의해 제한될 것이라는 점은 명
백하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모든 개체가  중첩되어 신체가 견디지 못할 지경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극히 단순한 몇 개의 전제만으로 집단 형성을 예측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의 모델은 
흥미롭다. 이 모델보다 더 공들인 모델도 몇 개 제안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의 모델이  현실
적이라고 하는 사실이 있다고 해서 동물의 집단 형성 문제를 생각하기에 도움이 되는 단순
한 해밀턴 모델의 가치가 감소할리는 없다.
      경계음-집단의 이익
  이깆거인 무리의 모델에 협력적인 상호 관계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여기에는 이타주의가 
없으며 개개의 개체가 다른 모든 개체를 이기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실
제의 생활에 있어서는 같은 집단 중의 동족을 포식자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개체가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바로 생각나는 것은 새의 경계음이다. 이것을  들은 
새는 즉시 도피 행동을 취하므로 이 경계음은 확실히 경계  신호의 기능을 하고 있다. 그러
나 우는 놈이 '포식자의 공격으로부터  동족을 피하도록' 노력하는 기미는  없다. 그는 그저 
포식자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줄 뿐이다. 그러나 경고음을 발하는 행위는 적어도 첫 인상으로
서는 이타적 행위처럼 보인다. 그로 말미암아 우는 놈은  포식자의 주의를 자기에게 향하게 
하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말러(P.R. Marler)가 지적한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이것을 간접적으로 추론할 수가  있다. 경계음은 발신 지점을  알아차리기 힘들도록 
이상적인 물리적 특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포식자가 발신  지점에 근접하는 것을 어렵
게 하는 음을 음향 기술자에게 의뢰하여 만들었다고 하면, 그가  고안한 음은 많은 작은 새
들의 실제의 경계음과 아주 닮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면 자연계에서 울음소리를 이와 같은 
꼴로 만들어 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 선택이었음에 틀림없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
는지는 분명하다. 불완전한 경계음을 내기  때문에 죽은 개체가 많았다고  하는 것이다. 즉, 
경계음을 내는 행위에는 위험이 수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은 경계음
을 내는 행위에 위의 위험을 상쇄시키는 설득적인 이점이 있다는 것을 지시해 보여야만 한
다. 
  이것은 실제로 그다지 곤란한 것은 아니다. 새의 경계음은 다윈 이론으로서는 '다루기  어
려운'현상이라고 빈번히 여겨졌으므로 그것에 대해 설명을 짜내는 것은 일종의 스포츠로 되
어 왔다. 덕분에 지금은 훌륭한 설명이 산더미처럼 있어서 그들 모든 논의의 논점을 생각해 
내는 것은 어렵다. 우선 분명한 것은 무리가 가까운 인연의  혈연 개체를 포함하고 있을 경
우 경계음을 내도록 촉구하는 유전자는 유전자 풀 속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 경계음에 
의해 구조되는 개체 중에는 이 행위를 촉구하는 유전자를 체내에 갖고 있는 것이 있을 가능
성이 많기 때문이다. 포식자의 주의를  자기에게 집중시킴으로써 비록 발신자가  이 이타적 
행위에 높은 대가를 지불할 지언정 경예음을 내도록 촉구하는 유전자는 성공할 가능성이 있
다.
        집단 이타주의
  만일 독자가 혈연 선택적인 사고에 만족하지 못하면 이외에도 재료로 내놓을 많은 이론이 
있다. 동료에 대해 경고를 하므로 발신자 자신이 이기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도 여
러 가지 있다. 예를 들면 트라이버스는 다섯 가지 좋은 생각을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나로
서는 내가 생각해 낸 다음 두 가지의 이론이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케이비 이론
    챗번째 이론을 나는 '케이비(cave)'이론이라고 하는데,  케이비라는 것은 '조심하라'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온 말로 선생이  가까이 올 경우 학생들이 급우에게  알리는 데 쓰인다. 
이 이론은 위험에 처했을 때에 덤불 속에 몸을 숨기는 습성을 가진 위장하는 새들에게 해당
된다. 이와 같은 새의 한 무리가 초원에서 먹이를 찾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멀리서 매가 날
아가고 있다. 매는 아직 초원의  무리를 목격하지 못하고 있으나 그의  예리한 눈이 무리를 
발견하여 곧장 공격을 해 올 위험성이 있다. 이때 무리 속의 한 마리가 매를 발견했으나 다
른 새는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눈이 좋은 이 개체는 즉시 덤불 속으로 숨
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소용이 없다. 그의 동료들이 아직 주위에서 제멋대로  돌
아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 한 마리라도 매의 주의를  끌게 되면 무리 전체가 위험
에 처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이기적인 견지에서 보면 최초로 매를  발견한 개체의 최선의 
방책은 동료에게 빨리 경고를 주어 그들을 침묵하게 하여 그들이 자기도 모른 s사이에 매를 
불러들일 가능성을 될 수 있는 한 줄이는 것이다.
      '대열을 이탈하지 마라' 이론
  소개하고 싶은 또 하나의 이론은  '대역을 이탈하지 마라' 이론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이론은 포식자가 접근하면 숲속으로 숨어 버리는 새에게 적합하다.  다시 한번 먹이를 먹고 
있던 무리 중의 한 마리가 포식자를 발견했을 때를 상상해 보자. 그는 어떻게 행동할까? 그
는 동료들에게는 경고하지 않고 혼자만 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그는 한 마리
의 독립된 개체가 되어 버린다. 이미  무리의 익명직인 일원이 아니고 혼자 고립된다.  매는 
실제로 무리를 이탈한 비둘기를 노린다고 알려져 있으나 만약 그러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다고 가정해도 무리를 이탈하는 것이 자살 행위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 이론적 근거는 많
이 있다. 가령 후에 동료들이 그를 뒤따른다 해도 최초로  지상에서 날아 오르는 개체는 일
시적으로 자기의 위험 영역을 넓히는 것이 될 것이다. 해밀턴 이론의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무리 생활에는 어떤 중요한 이점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새들은 일부러 무리를 
짓지 않을 것이다. 그 이점이 무엇이든 최초로 무리를  이탈하는 개체는 비록 부분적이라도 
그 이점을 상실하게 된다. 대열을 이탈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  매를 발견한 새는 도대체 어
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평상시대로 행동을 계속하여 
무리의 일원으로 있는 것이 그에게는 이익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에는 큰 위험이 따른
다. 그는 여전히 열린 장소에 머물러 공경을 받기 쉬운 처지에 있기 때문에 숲속에 숨는 것
이 그로서는 훨씬 안전할 것이다. 최선책은 확실히 날아올라서 숲속에 수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다른 동료들도 모두 따라서  같이 날도록 부추길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되면 그는 
무리를 이탈한 못난이가 되지도 않고, 또한 군집의 일부라는  이점을 상실하지 않고 아울러 
숨을 수 있는 숲속으로 날아드는 이점을 얻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경계음을 내는 행위는 
순수한 이기적 이익을 가져올 것으로 간주된다. 차노프(E.L. Chamov)와 크랩스(J.R. Krebs)
도 같은 이론을 제안하고 있으나, 그 중에서 그들은 경계음을  내는 개체나 무리의 다른 개
체에 대해 취하는 행위를 '조작'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을 정도이다. 순수하고 공평한 이타
주의 같은 것은 아마 거리가 먼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들 이론은 경계음을 내는 개체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견해에  모순
되는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순되지 않는다. 경계음을 내지  않으면 
그는 더 큰 위험에 몸을 던지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계음을 냈기 때문에 죽는 개체
도 확실히 있을 것이다. 발신 지점을 알아내기 쉬운 음을 낸 개체는 특히 죽기 쉬웠을 것이
다. 그러나 경계음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죽는 개체는 더 많이 있었다. 그 이유는 여러 방법
으로 설명된다. '케이비' 이론과 '대열을 이탈하지 마라' 이론은  그 중 두 가지 예에 불과하
다.
      피식자의 위험 극복 행동
  제 1장에서 언급한 톰슨가젤의 높이 뛰기 위장은 어떻게 설명될 것인가? 아드리는 그 행
위가 명백히 자살적인 이타 행위로 보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룹 선택에 의 해서만 설명된다
고 단언할 정도이다. 이 예는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에 있어서 보다 힘든 난제이다. 새의  경
계음은 확실히 영향을 미치나 그것은 분명히 가능한 한 주의를 끌지 않고 신중히 하도록 계
획되어 있다. 영양의 높이뛰기는 이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분명한 도발이라고 해도 좋을  정
도로 허세를 부리는 짓이다. 영양들은 마치 고의로 포식자의 주의를 끌고 있는 것처럼 보인
다. 또한 포식자를 깔보고 있는 것  같이도 보인다. 이러한 관찰은 대담하고 매우  재미있는 
하나의 이론을 이끌어 냈다. 이 이론은 원래 스미스(N. Smythe)에 의해 예시됐으나 그 논리
적인 귀결을 결집한 사람은 틀림없이 자하비였다.
  자하비 이론은 다음과 같다. 그의 수평 사고의 결정적 생각은  높이 뛰기 위장이 다른 영
양에 대한 신호와는 전혀 관계없이 실제로 포식자를 향하여 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다른 영양이 그것을 보고  행동을 달리하는 수는 있어도 그것을 부수적인  것이고, 
어쨌든 그것은 포식자에  대한 신호로서  첫째로 선택된 것이다.  그것을 영어로  번역하면, 
"자! 나는 이처럼 높이 뛴다. 이렇게 활기차고 건강한 영양을 잡는다는 것은 네게는 무리다. 
나만큼 높이 뛸 수 없는 것들을 쫓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포식자는 쉽게 잡
힐 만한 먹이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높고 허세부리는 뛰기를 가능케 하는 유전자
는 포식자에게 쉽게 먹히지 않는다.  특히 많은 포식성 포유류는 늙은  개체와 건강치 못한 
개체를 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 뛰는 개체는 그가 늙지도 않고, 또 건강하다는  사
실을 과장된 방법으로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그 과시는 이타주의와는 관
계가 멀다. 어느쪽이냐 하면 이것은 이기적인 행위이다. 왜냐하면 포식자로 하여금 다른  개
체를 쫓도록 촉구하는 것이 그 과시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누가 제일 높이 
뛰는 가를 확이낳는 경쟁이다. 이 경쟁의 패자는 포식자의 먹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자기 희생적인 꿀벌
  내가 말했던 또 하나의 예는 자기 희생적인 꿀벌의 경우이다. 그들은 꿀도둑을 침으로 쏘
고 그 싸움에서 거의 확실하게 죽게 된다. 꿀벌은 고도의 '사회성'을 가진 곤충의 한 예이다. 
이외에도 장수말벌류, 개미류, 그리고 흰개미 등이 사회성  곤충으로 알려져 있다. 자살적인 
행위를 가진 꿀벌의 예에 한정하지 않고 사회성 곤충 일반에 관해 논의하기로 하자. 사회성 
곤충의 공적은 전설적이다. 그 중에서도 뛰어난 것은 그 놀랄  만한 협력 행동의 능력과 현
상적인 이타주의이다. 적을 찌르는 자살적인 행위는 그들이 가진  자기 포기의 경이적인 상
태를 상징하고 있다. 꿀단지개미에 있어서는 괴이하게 부풀고 꿀을  잔뜩 꾸려넣을 수 있는 
배를 가진 일개미가 있다. 그들의 전생애에 있어 오직 하나의  일은 집의 천장에 붙어 부푼 
전구처럼 축 늘어져 다른 일개미들의 먹이 저장소를 이용되는  것이다. 인간의 감각으로 말
하면 그들에게는 개체로서의 생활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개체성은 분명
히 사회의 복리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개미, 꿀벌이나 흰개미의 사회는 어느 것
도 더 높은 수준에서 한 종의 개체성을 달성하고 있다.. 먹이의 분배가 잘 진행되고  있어서 
'공동의 위' 라고도 표현된다. 화학적  신호와 꿀벌에서 유명한 '춤'  등에 의해 정보도 극히 
효율적으로 공유되어 있고, 하나의 사회는 마치 사람의 신경계와 감각기관을 가진 단위처럼 
행동한다. 외부로부터의 침입자는 몸의 면역 반응계가 나타내는 것과 같은 정확도로 식별되
고 배제된다. 개개의 꿀벌은 '온혛' 동물이 아니지만 꿀벌의  집 내부는 꼭 인간의 체온만큼
의 비교적 높은 온도로 조절되어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유추가 번식에까지 미
치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성 곤충의  집단 내의 대부분의 개체는  불임의 일벌레이다. '생식 
계열(germ line)'의 세포 -불사신의 유전자를 계속 전하는 세포  계열-는 극히 소수의 번식 
능력을 가진 개체의 몸 속을 흐르고 있다. 번식 능력을 가진 소수의 개체는 정소나 난소 중
에 들어 있는 우리의 생식 세포와 유사하다. 불임의 일번레들은 우리의 간, 근육 그리고  신
경 세포에 해당된다.
      일벌fp들은 불임이다
  일벌레들이 행하는 자살적 행위와 다른 형태의 이타주의 및 상호 협력은 그들이 불임이라
는 것을 이해한다면 놀랄 일은 아닌다. 보통의 동물체는  유전자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하여 
자식을 낳거나, 또는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다른 개체를 보호함으로써 조정된다. 이 경우, 
다른 개체를 보호하기 위해 자살 행위를 하게 되면 장래 자기의 자식을 만드는 일은 못하게 
된다. 자살적인 자기 희생이 거의 진화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일벌은 전혀  자
기의 자식을 만들지 않는다. 일벌들은 자식이 아닌 근친자를 돌보는 데 전력을 쏟고 스스로
의 유전자를 보존하려고 한다. 한 마리의 불임의 일벌이 죽는 것은 자기의 유전자에게는 사
소한 것밖에 안 된다. 그것은 나무의 유전자에게 가을에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 것과 똑같
은 사소한 것이다.
  사회성 곤충을 신비적인 품목으로 이끌려 하는  유혹이 있으나 실제로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이 사회성 곤충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해 조금 상세히 볼 가치
가 있다. 특히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이 일벌레의 불임성이라는  이례적인 현상의 진화적 기
원을 어떻게 설명하는가에 주목하자. 그 현상은 여러 가지 문제의 군원이 되기 때문이다.
  사회성 곤충의 한 집단은 거대한 가족이고 모든 개체는 같은 모친에서 유래하는 것이 보
통이다. 일벌레는 스스로 번식을 하는 일이 거의 또는 전혀 없고, 종종 몇 개의 분명한 계급
으로 구별된다. 이들에게는 예컨대 작은 일벌레,  큰 일벌레, 병정, 그리고 꿀단지개미  같은 
고도로 특수화된 계급도 있다. 번식 능력을 나타내는 암놈을 여왕이라고 부른다. 번식  능력
이 있는 수놈을 수벌(수개미) 또는 왕벌(왕개미)이라고 부른다.  고도로 발달된 사회적인 종
에서의 번식 개체는 자식 생산 이외의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 먹이와 보호는 일벌레에 의
해 성사되고 유충의 시중도 일벌레의 일이다. 그러나 유충 만들기에 관한 여왕의 능력은 놀
랄 만한 것이다. 개미와 흰개미의 몇몇 종에서 여왕은 토식토실하게 부풀어 오른 거대한 알
공장으로 된다. 몸의 크기는 일개미의 수백 배에 달하고 거의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이것이 
곤충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여왕개미는 계속 일개미의 시중을 받고  있다. 
일개미는 여왕의 몸을 돌보거나 먹이를 주기도 하고, 또한 여왕이 계속 출산하는 알을 공동
의 보육소로 운반하기도 한다. 이 거대한 여왕이 어떤 이유로 왕실에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될 때에는 고되게 일하는 많은 일개미의 등에 업혀서 운반된다.
      분업
  제7장에서 나는 애낳기와 애키우기의 구별을  소개하면서 애낳기와 애키우기를 결합시킨 
혼합 전략이 진화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지적했다. 제5장에서는  혼합 전략이 진화적으로 안
정하게 되는 경우에 두가지의 일반적인 형태가 제시된다고 했다. 하나의 형태에서는 개체군
중의 개개의 개체가 두 전략을 혼합한 생동을 한다. 이  경우 각 개체는 애낳기와 애키우기
가 잘 양립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또 하나의 형태에서는  개체군이 두 종류의 다른 형태
의 개체로 분할된다. 이것은 비둘기파와 매파 사이의 균형을 처음으로 예시했던 방법이었다. 
애낳기와 애키우기에 관해서도 후자의 형태에 따라 진화적으로 안정된 균형을 달성하는  것
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것이다. 애낳는 자와 애키우는 자로 개체군이 나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진화적으로 안정하게 되기 위해서는 애키우는 개체가 양육받는 쪽의 개체와 아주 근
친이 아니면 안 된다. 양자는 적어도 부모와 자식 관계 정도의 근친 관계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진화가 이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이론적으로는 있을지라도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
은 사회성 곤충에서뿐인 것 같다.
  사회성 곤충에서 개체는 애낳는 자와 애키우는 자의 두 주된 계급으로 나뉘어져 이다. 애
낳기를 담당하는 자는 번식력이 있는 암컷과 수컷이고 애키우기를 맡는 자는 일벌레들이다. 
일벌레 중에서 흰개미류의 경우는 암수가 불임의 벌레인데 기타의 모든 사회성  곤충에서는 
암놈이 불임이다. 애낳기와 애키우기의 어느 형태의 개체도 자기의 일에만 전념하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서는 아주 효율적으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도대체  누구의 입장에서 보아 효율
이 좋은가? 다윈 이론에 크게  반발하는 물음은 다음과 같다. "그런  짓을 해서 일벌레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일벌레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없다."라고 답할 사람도  있다. 그들의 생각에 의하면, 여왕
은 자기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일벌레에게 화학 물질에 의한 조작을 가하여 자신이 낳는 많
은 개끼의 시중을 들게 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이익은 모두 여왕이 차지하고 만다.  이것은 
제8장에서 소개한 알렉산더의 '부모에 의한 조작' 이론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이것과 정반
대의 사고에 의하면 일벌레는 번식충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 키우고 있다.' 이를테면 양산업
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일벌레들은 번식충에 조작을 가하여  번식충이 자기들의 
몸 속에 있는 유전자의 복제물을 더 많이 증식하도록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개미
류, 꿀벌류, 장수말벌류에서의 일벌레는 여왕 자신보다 한배새끼와의 근친도가 실제로  높아
진다. 이 점을 훌륭하게 착안한 사람은 해밀턴이었다. 이를 기초로 해밀턴, 그리고 트라이버
스와 헤어(Hare)는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의 가장 볼 만한 개가를 올리고 있다. 이제 그들의 
추리를 살펴보기로 하자.
        벌목의 성 결정 시스템
  개미류, 꿀벌류, 장수말벌류 등을 포함하는 그룹을 벌목(Hymenpatera)이라고 한다. 이 종
류의 곤충은 매우 특이한 성 결정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흰개미는 이 종류에 포함되지 않
으며, 또 이특이한 성결정 양식도 공유하지 않는다. 벌목의 전형적인 집에는 성숙한  여왕이 
한 마리밖에 없다. 여왕은 젊어서 결혼 비행을 한 번 했고, 그때에 저장한 정자로 나머지 전
생애 -십 년 또는 그 이상- 동안 애낳기를 해낼 수 있다. 이 기간에  암놈은 정자를 일정량
씩 방출하여 수란관을 통과하는 알을 수정시킨다. 그러나 모든 알이 수정되는 것은  아니다. 
미수정란이 발육하면 수놈으로 된다. 즉,  수놈에게는 아비가 없다. 수놈의  몸의 모든 세포 
중에 는 우리들의 경우와 같이 두 세트의 염색체(한 조는 어미, 그리고 한 조는 아비로부터)
가 포함되는 것이 아니고 그저 한조의 염색체(모두 어미 혈통)밖에 포함되지 않는다. 제3장
에서의 비유를 쓰면 벌목의 수놈의 세포 속에는 보통은 두 개의 염색체가 포함되어 있는 것
에 반해 각각의 '권'의 한 사본(염색체)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반면에 벌목의 암놈은 보통의 동물과 다름이 없다. 암놈에게는  아비가 있고 암놈의 체세
포들 속에는 보통과 같이 두  세트의 염색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암놈이 일벌레가 
되느냐 여왕이 되느냐는 유전자가 아닌 어떻게 자랐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다시 말해서 암
놈은 여왕을 만드는 유전자의 완전한 세트와 동시에 일벌레를 만드는 유전자의 완전한 세트
도 가지고 있다(후자에 대해서는 일벌레, 병정 등  개개의 특수화된 계급을 만들어 내는 유
전자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좋을지도 모른다). 어느 세트의  유전자에 '스위치가 켜질지'는 
그 암놈이 어떻게 양육되느냐, 특히 어떤 먹이를 받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있을지라도 벌목의 성 결정 시스템의 본질적인 상태는 위와 같다. 
어떻게 이와 같이 특이한 유성 생식 시스템이 진화되었는지는 아직 모르고 있다. 훌륭한 이
유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나 문제는 그것을 벌목이 나타내는 하나의 기묘한 사실로서 다룰 
수 밖에 없다. 이 특이한 시스템이 어떻게 유래했든 그 특이함 덕분에 제6장에서 소개한 근
친도의 간단한 계산법이 여기서는 심한 혼란을 일으키고 만다. 예를 들면, 인간의  경우라면 
한 사람의 남자에게서 유래하는 정자는 모두 틀린 유전 조성을 가지고 있는데, 벌목의 시스
템에서 한 마리의 수놈이 만드는  정자는 모두 똑같은 정자로 되어  버린다. 벌목의 수놈의 
몸 속 세포는 두 세트가 아니고 한 세트의 유전자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느 정자도 세포 중
의 유전자 세트에서 50%의 샘플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100%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
서 동일한 수놈에서 유래하는 정자는 모두 같다. 그러면 이와 같은 조건하에서 어미와 수놈  
자식의 근친도를 계산해 보기로 하자.  우선 지금 한 수놈이  유전자 A를 소유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면 어미가 이것을 공유하는 확률은 어떨까? 수놈에게 아비는 없고 모든 유전자는 
어미로부터 전수되었으므로 답은 100%가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역으로 여왕이 유전자를 
소유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수놈 자식은 여왕의 유전자의 절반밖에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
에 B 유전자를 공유하는 확률은 50%가 된다. 어딘가 모순된 것 같은 느낌일지 모르나 그렇
지는 않다. 수놈은 자기의 유전자를 '모두'어미로부터 받으나 어미는 자기 유전자의 '절반'밖
에 자식에게 주지 않는다. 이외견상의 패러독스를 푸는 해결은  수놈이 보통의 수의 절반밖
에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근친도의 '정확한' 지표가 1/2인지 1인지에 
대해 머리를 쓸 필요가 없다. 이 지표도 단순히 인공적인 척도이고 이것을 구체적인 사례에 
써서 사태를 해결하기 어렵게 되면 그것을 포기하고 펏번째 원리로 되돌아가야 할지도 모른
다. 여왕의 몸 속에 있는 유전자 A의  입장에서 문제를 고찰해 보면 이 유전자가 수놈에게 
전해지는 확률은 1/2로, 암놈에게 전해지는 확률과 같다. 그러므로 여왕의 입장에서 보면 자
기의 자식은 암수 관계없이 어느것이든 같은 정도의 혈연자가 된다. 이 혈연 관계의 정도는 
인간의 아이가 그들의 모친에 대한 것과 같다.
  자매 관계를 상대로 하면 사태는 다시 까다롭게 된다.  같은 부친으로부터 유래하는 자매
는 단순히 부친을 공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녀들은 수정시킨  두 개의 정자는 모두 유
전자에게 완전히 같다. 즉, 부친 유래의 유전자에 관한  한 그녀들은 일란성 쌍생아와 같다. 
만약 한 자매가 유전자 A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이것은 부모  누구에겐가로부터 유래했을 
것이다. 만약 그 유전자가 모친의 유전자라면 자매가 그것을 공유하는 확률은  50%이다. 그
러나 만일 그것이 부친으로부터 유래한다면 자매가  그것을 공유하는 확률은 100%이다. 따
라서 벌목에서는 같은 부모로부터 유래하는 자매간의 근친도는 보통의 유성 생식동물의  경
우 1/2이 아니라 3/4으로 된다.
  이에 따르면 벌목의 암놈의 경우 부모를 공유하는 자매에 대한 어미의 혈연 정도는 자기
의 양쪽 성의 자식에 대한 어미의 혈연 정도보다 가깝다.  해밀턴이 밝힌 바대로 위의 사정
은 효율이 좋은 자매 생산이계로서 이용하기 위해 모친을 봉양한다는 경향을 암놈에게 발달
시키는 요인으로 될 가능성이 있다(더구나 해밀턴은 여기서 내가 말한  것과 똑같은 설명법
을 취하고 있지 않다). 이 경우 간접적인 방법으로 자매를 만들게 하는 유전자는 직접 자식
을 만들게 한 유전자보다 급속히 증식한다. 일벌레의 불임성은 이렇게 해서 진화했다.  일벌
레의 불임성을 수반하는 '진실한 사회성'은  벌목에서는 '독립적으로' 적어도 11번  진화했고 
나머지 동물계 전체에서는 단지 흰개미에서 한 번 진화했을  뿐이다. 이것은 아마도 우연히 
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함정이 있다.  일벌레가 자매 생산 기계로서  어미를 봉양하기 위해서 성
공적이라면 자매와 동시에 같은 수의 형제를 일벌레에게 양육하도록 하는 어미의 당연한 경
향을 어떤 방법으로든 억제하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벌레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임의의 
형제가 어미의 유전자의 특정한 1개를 공유하는 확률은  1/4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만일 번
식 능력을 가진 암수의 자식을 동수로  낳는 것을 여왕에게 허락했다면 일벌레의  입장에서 
보면 한 여왕을 봉양하는 것은 아무런 이익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을 허용한다면,  일벌
레는 자신들의 귀중한 유전자의 증식을 최대화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일벌레가 누이를 증식하는 방향으로 성비를 기울게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에 착안한 이는 
트라이버스와 헤어였다. 그들은 최적 성비(앞장에서 취급한)에 피셔는 계산법을 응용하여 벌
목이라는 특수한 예에 관해 계산을 다시 고친 것이다. 그 결과 어미에 대한 최적 투자 비율
은 통상대로 1:1로 된다. 그러나 자매에 대한 최적 비율은  형제보다는 자매에 유리해서 3:1
이 된다. 만약 독자가 벌목의 암놈이라면 유전자를 증식하는 데   가장 유리한 방법은 스스
로 새끼를 낳는 것을 억제하고, 그 대신에 당신의 모친에게  번식 능력을 가진 누이와 아우
를 3:1의 비율로 낳아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돌자 자신이 자식을 낳아야만 하는 
처지가 되면 번식 능력이 있는 자식을 동수 출산하는 것이 당신의 유전자에게도 가장 유리
한 길이다.
      여왕과 일벌레의 차이
  이미 말한 대로 영왕과 밀벌레의 차이는 유전적인 것이 아니다. 유전자에 주목하는 한 암
놈의 배(embryo)는 3:1의 성비를 '바라는' 일벌레가 되든지 아니면 1:1의 성비를 '바라는' 여
왕이 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바람'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
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다. 만약 한  유전자가 여왕의 몸에 들어 있다면  그 유전자는 번식 
능력이 있는 아들과 딸에게 여왕의 몸이 1:1의 비로 투자를  실시할 때 최대의 효율로 증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유전자가 일벌의 몸에 들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 그 유전자는 일벌의 몸을 도와서 그 어미에게 작용하여 어미가 수놈보다 암놈을 많이 
만들도록 영향을 줌으로써 자기의 증식을 최대화할 수 있다. 여기서 모순은 전혀 없다. 유전
자는 이용할 수 있는 여건의 동력레버를 최대한으로 활용해야 한다. 여왕으로 될 개체의 발
육을 좌우할 입장에 놓인다면 유전자는 이에 걸맞는 최적 전략을 강구하여 그 제어력을 자
기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면 된다. 만약 일벌의 발육을 좌우할  수 있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면 전자와는 별도의 최적 전략을 취하여 그 힘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 활용해야 한다. 
  이상의 사정은 사회성 벌목류의 집이라는 양식장  속에 이해 대립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
다. 여왕은 암수에게 동등한 투자를 행하려고 하고 있다. 일벌은 성비를 수컷 1에 암컷  3의 
방향으로 이동시키려고 하고 있다. 일벌은 농부이고 여왕은 증식용의 암말이라고 하는 견해
가 옳다면 아마도 일벌들은 여왕이 바라는 3:1의 성비를 잘 달성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
의 견해가 틀렸다면, 즉 여왕이 실제로 그 이름에 걸맞게 행동을 취하고 있고, 일벌들은  여
왕의 노예이고 왕립 탁아소의 고분고분한 보육자라고 하면  성비는 여왕의 '바람대로' 1:1이 
될 것이다. 이 특수한 형태의 세대간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도대체 어느 쪽일까? 이것은 
검정 가능한 문제이고, 실제로 트라이버스와 헤어는 많은 종류의  개미를 가지고 그것을 테
스트했다.
  문제의 성비는 수놈의 번식충과 암놈의 번식충의 비이다. 이들은  큰 날개를 가진 대형의 
개체이고, 결혼 비행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개미집에서 빠져 나온다.  이 결혼 비행 중, 벎은 
여왕은 새 집단만들기에 착수한다. 위의  서이 추정치를 얻기 위해서는 이들  중 날개 달린 
형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그런데 많은 종에 있어서는 수놈과 암놈의 번식충의 크기에 커다
란 차이가 있고, 이것이 문제를 매우 복잡하게 한다. 앞의 크기에 커다란 차이가 있고, 이것
이 문제를 매우 복잡하게 한다. 앞장에서 언급한 대로 피셔의 최적 성비의 계산법을 엄밀하
게 말하면 수놈 암놈의 '수'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고 암수 각각에 대한  '투자량'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 점을 배려하기 위해 트라이버스와 헤어는 번식충의 성비에 무게를 참조하였다. 
그들은 20종류의 개미를 재료로 하여 암수의 번식충에 대한 투자량의 비로 나타내는 성비를 
추정하였다. 그들은 일벌레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집을 차지하고 있다는 이론에서 예측
되는 암수의 비가 3:1이라는 것에 상당히 납득이 가도록 잘 일치됨을 발견하였다.
  연구 대상이었던 위의 개미류에서는  일벌레가 이해 대립에서  '이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렇게까지 놀랄 정도는 아니다. 일벌레의 몸은 보육장의 관리자로 근무하고 있으므로 여왕
의 몸보다 실제로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 여왕의  몸을 매개로 하여 세계를 조작하려는 
유전자는 일벌레의 몸을 매개로 하여 세계를 조작하려고 하는 유전자에게 반역당하고 만다. 
그러나 반대로 여왕편이 일벌레보다 실제로 힘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은 없는지 그와 같은 특
수 사례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트라이버스와 헤어는  그들의 이론의 비판적 검
정에 사용할 만한 안성맞춤의 상황이 있음을 깨달았다.
      노예 사역종
  개미 무리 중에 노예를 사역하는  종이 있다는 사실이 이 일의  발단이다. 노예 사역종의 
일개미는 통상의 일을 전혀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솜씨가 좀 나쁘다.  일개미들이 잘할 수 
있는 것은 노예를 사냥하는 일이다. 대립하는 대군이 싸워서  상대방을 죽이는 진정한 의미
의 전쟁은 사람과 사회성 곤충에서만 볼 수 있다. 많은 개미류에서는 병정개미라고 하는 특
수한 일개미가 전투용의 거대한 턱을 가지고 집단을 위해 다른 개미 군대와 싸우는 일을 도
맡고 있다. 노예 사냥도 전투 행위의 특수한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노예 사역 개미는 다
른 종의 개미집을 공격해 집을 방위하고 있는 상대방의 일개미나 병정개미를 죽이고 우화전
의 유충을 빼앗아 간다. 유충은 포획자의 보금자리 안에서  우화되어 노예의 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신경계에 주입된 프로그램에 따라 일을 시작한다. 노예들은 자기와 
같은 종의 보금자리에서 보통 행해야 할 모든 일을 해치운다. 노예 개미가 보금자리에 머물
러 청소, 먹이구하기, 새끼돌보기 등 개미집을 유지하기 위한 일상적인 작업에 정성을  쏟고 
있는 사이에 노예 사역종의 일개미, 즉 병정개미는 다시 노예 사냥 원정을 계속한다.
  물론 노예들은 자기들이 시중들고 있는 여왕이나 새끼가 남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한
다. 모르는 사이에 노예들은 노예 사역종의 새로운 대군을 돌보고 있다. 노예 사역종의 유전
자에 작용하는 자연 선택은 틀림없이 노예화에 대항하는 여러 적응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작
용할 것이다. 노예 사역의 현상은 광범위하게 볼 수 있으나 대항책이 큰 효과를 못 올릴 것
이 명백하다.
  우리의 견해로 보아 관심을 끄는 노예 사역이라는 습성의 필연적 귀결은 다음과 같다. 즉, 
노예 사역종의 여왕은 자신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성비를 기울게 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적출의 자식들, 즉 노예 사냥꾼들은 이미 보육장의 실권을 잡고 있
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이 힘을 쥐고 있는 놈은 노예들이다. 물론 노예 개미들은 자기의 동
포를 시중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보통 노예들은 자기와 같은 종의 보금
자리 안에서라면 3:1이라는 암놈을 바라는  성비를 달성하는 데 확실히 일역을  할 수 있는 
각 노예 사역종의 여왕은 이들에 대한 저항 수단을 자 행사할 수 있다. 더욱이 노예 개미와 
자신들이 돌보는 새끼는 남이기 때문에 위의 대항 수단을 무력하게 하는 선택이 노예들에게 
작용할 여지는 없다.
  예컨대 어떤 종류의 개미에서 여왕이 수컷이 될 알에 암놈과 같은 냄새가 나도록 위장을 
'기도했다'고 생각해 보자. 자연 선택은 일개미가 나타내는 경향 중에서 이 위장을 '간파하는 
데' 역할하는 모든 경향을 촉진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말하자면 여왕이 부단히 암호를  바꾸
고' 일개미는 그 '암호를 바꾸고' 일개미는 그 '암호를 해독한다'고 하는 어떤 종의 진화상의 
다툼이 있다고 예상된다. 누구든지 번식충의 몸을 매개로 하여  다음 세대에 자기의 유전자
를 보다 많이 전달할 수 있는 자가 이 싸움의 승자가 된다.  이미 말한 대로 보통은 일개미
가 승자가 된다. 그러나 '노예 사육종'의 경우에는 여왕이  암호를 바꾸면 노예 개미에게 이 
암호를 해독하는 능력이 진화할 가능성은  없다. 노예 개미 몸에  '암호 해독용'의 유전자가 
존재해도 그 유전자는 그 보금자리에서 일어나는 어떤 번식충에게도 공유되지 않고 있기 때
문에 다음 세대에 전해질 리도 없다. 그 집에서 출생하는  번식충은 모두 이 노예 사역종에 
속해 있기 때문에 여왕과는 혈연 관계가 있으나 노예 개미와는  혈연 관계가 없다. 노예 개
미의 유전자가 어떤 번식충에 공유된다고 하면 그 상대는 유괴당하기 전에 자신들이 소속하
고 있던 본래의 집에서 출생하는 번식충이다. 즉, 노예의 일개미들은 오히려 노예  사역종의 
여왕이 쓰는 것과는 다른 암호를 해독하기에 바쁠 것이다. 노예 사역종의 여왕은 자신의 암
호를 해독해 버리는 유전자가 다음 세대에 전해지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여왕은 
자유로이 암호를 바꿔 일개미의 대항책에 대처해 나갈 수 있다.
  노예를 부리는 개미에게는 암수 번식충에 대한 투자  비율이 3:1이 아닌 오히려 1:1에 가
까운 값이 될 것이라는 것이 이상의 까다로운 논리의 결론이다. 이 경우에 한해서는 여왕의 
바람대로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종류의 노예 사역  개미에 관해서이기는 하지만 트라이
버스와 헤어는 실제로 이와 같은 비율을 발견했다.
      집단 분할 및 창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사태를 이상화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해 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 현
실 생활은 그렇게까지 정연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예컨대 사회성  곤충 중에서 가장 낯익은 
꿀벌은 전혀 '기대 밖의' 것같이 보인다. 꿀벌의 경우  여왕에게 주어지는 분량보다 훨씬 많
은 투자가 수벌에 대해 일어나고 있고, 이것은 일벌이나 모친인 여왕벌 어느 입장에서 보아
도 계산이 맞을 것 같지 않다. 이 수수께끼에 대해 해밀턴은 가능성이 있는 해답 하나를 내
놓았다. 그는 분봉시에 여왕벌이 일벌의 큰 무리를 동반하고 떠나 이 일벌들이 새로운 집단 
창설을 도와주는 것에 주목했다. 이들 일벌은 부모집으로부터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자신들
을 만들어 내는 데 필요한  대가는 번식의 대가의 일부로서 계산되어야만  한다. 집을 떠난 
여왕벌마다 많은 여분의 일벌이 만들어져야 된다. 이들 여분의  일벌에게 투자된 부분은 번
식 능력이 있는 암벌을 만들기 위한 투자의 일부로 간주되어야  한다. 성비를 계산할 때 이
들 여분의 일벌은 수벌의 반대축의  천칭에 놓고 무게를 재야만 한다.  그래서 꿀벌의 예도 
앞에서 기술한 이론으로서는 결국 그다지 심각한 난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해밀턴 이론의 훌륭한 활약을 저지하는 더 귀찮은  방해물이 있다. 그것은 사회성 
벌목 중에는 결혼 비행시에 젊은 여왕이 두 마리 이상의 수벌과 교미하는 종이 있는 사실이
다. 이와 같은 예에서는 그 여왕이 낳은 암컷끼리의 평균 근친도는 3/4 미만으로 되며 극단
적인 경우에는 1/4에 가까워진다. 너무 이론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여러 수벌과의 교미는 
여왕이 일벌에게 가하는 교묘한 일격이라고 보이는 것도 흥미있다.  그렇다면 만일 이와 같
이 생각할 때 일벌은 여왕벌이 교미를 한 번 이상 못하도록 결혼 비행에 따라다녀야 할  것
이라는 이야기도 나옴직하다. 그러나 그런 짓을 해도 일벌은  자기의 유전자에 아무런 도움
도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에 의해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다음 세대의 일벌의 
유전자이다. 동일한 계급으로서의 일벌들 사이에는 노동 조합 정신 같은 것은 없다.  각각의 
개체는 자기의 유전자에 대한 '배려'밖에 없다. 일벌은 가능하다면 자기 모친의 결혼 비행에 
따라붙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벌에게는 그러한 기회가 없었다. 그때에는 아직 수정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결혼 비행을 떠나려고 하는 젊은  여왕은 그 시점의 
세대의 일벌과는 자매이지 어미는 아니다. 따라서 그 시점의  일벌은 자신들의 조카에 불과
한 다음 세대의 일벌과 한편이 아니고 젊은 여왕과 한편이다.  이제 슬슬 이 문제를 매듭지
을 때가 온 것 같다.
      유전자 양식장
  벌목 곤충의 일벌레가 그들의 어미에게 가하고 있는 작용을 여기서는 양식업으로  비유했
다. 이 양식장은 유전자의 양식장이다.  자기들의 유전자의 사본을 생산하기 위해  일벌레는 
스스로 그 일을 하기보다 유전자 생산의 효율이 좋은 이유로 해서 어미를 그들의 유전자 사
본의 생산자로 이용하고 있다. 문제의 유전자는 번식충이라는 이름의  포장 속에서 일관 작
업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사회성 곤충은 전혀  다른 의미로 양식된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양식업의 비유를 이것과 혼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렵과 채집 생활보다 정착해서 먹이를 
양식하는 것이 훨씬 높은 효율을 올릴 수 있다. 사회성  곤충은 인간보다 훨씬 이전에 그것
을 발견했다.
  예컨대 아메리카 대륙의 개미와는 달리 멀리 떨어진 아프리카의 흰개미들은  균원(fungus 
garden)을 만드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남미의 우산개미(parasol ant) 종
족이다. 이들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한 집당 개미 수가 200만을 넘는 예도 있다. 그들의 집은 
지하에 퍼지는 통로와 길다란 방의 거대한 복합체로서 그 깊이는 3미터 또는 그 이상에  다
하기 때문에 파내는 흙의 양은 40톤이나 된다. 지하의 방에는 균원이 있다. 식물의 잎을  세
분하여 특수한 퇴비 못자리를 만들고 개미들은  일부러 거기에 특수한 종류의 균류를  뿌린
다. 일개미는 즉시 먹이가 될 만한 것을 구하러 나가는 것이 아니고 퇴비를 만드는 데 필요
한 잎을 수집하러 나간다.
  우산개미의 군집이 잎을 수집할 때의 식욕은 놀라워서 그들은 크나 큰 경제 피해를 주는 
해충이라고도 한다. 수집된 잎은 그들 자신의 먹이가 아닌 그들이 키우는 균류의 먹이로 되
는 것이다. 얼마 후 그들은 그 균류를 수확하여 자신도 먹과 새끼들에게도 먹인다. 개미보다 
균류가 높은 효율로 잎을 분해한다. 균원작이 개미에게 이익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편 
균류쪽에서도 물론 수확을 뺏기는 손해도 있으나 위의 상호 관계에 의해 이익을 얻을 가능
성이 있다. 포자의 분산이라는 메커니즘보다 개미의  도움쪽이 효율적으로 균류를 증식시킬 
것 같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미들은 균원의 '풀뜯기'까지 해 주고 다른 종의 균류가 침입 못
하도록 해 준다. 경쟁이 없어짐으로 해서 개미에게 재배되는 균류에게는 유리할지도 모른다. 
개미와 균류 사이게는 일종의 상호 이타주의적인 관계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계통적으
로 서로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각종의 흰개미들 사이에서 아주 잘 닮은 균류 재배 시스템이 
독립적으로 진화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진딧물과 만나
  개미류는 재배용의 식물뿐만 아니라 가축도 소유하고 있다. 예를 들면 진딧물이 그것이다. 
진딧물류는 식물의 즙을 흡입하기 위해 고도로 특수화된 곤충이다. 그들은 영양가를 조금만 
흡수하고 나머지 액체는 분비한다. 설탕을 많이 포함한  '꿀방울'이 몸의 후단에서 대량으로 
넘쳐 흘러 나온다. 자기 자신의 체중을 넘는 정도의 꿀방울을  매시간 분비할 때도 있을 정
도이다. 꿀방울은 비처럼  지상에 떨어진다. 하나님이  주신 양식으로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만나'는 실은 이 꿀방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개미 중에는 그 꿀방울이 진
딧물의 몸에서 이탈하는 순간에 즉시 그것을 탈취해 버리는  종류가 있다. 그들은 더듬이와 
다리로 진딧물의 궁둥이를 비벼서 '꿀을 짠다.' 진딧물도 개미에게 반응한다.  개미가 건드릴 
때까지 작은 꿀방울을 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예도  있고, 개미가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작은 꿀방울을 뱃속으로 되돌리고마는 예도 있다.  어던 종의 진딧물은 개미를 
쉽게 유인하기 위해서 개미의 안면과 닮은 외관과 감촉을 가진 엉덩이가 진화됐다. 이 상화 
관계로 진딧물이 얻는 것은 분명히 천적으로부터의 보호이다. 인간에게 사육되고 있는 소처
럼 그들도 보호받는 생활을 하고 있고  개미로부터 대폭적인 보살핌을 받고 있는  종류들은 
자기 방어 메커니즘을 잃고 만다. 개미가 자기들의 지하 집  속에서 진딧물의 알을 돌봐 주
는 예도 있다. 이 경우, 개미는 진딧물의 유충에 먹이를 주어 그들이 성장하면 그들을  보호
가 될 수 있는 목장으로 친절히 운반한다.
        상리 공생
  다른 종의 개체에게 상호 이익을 주고 받는 관계를 '상리 공생'이라고 한다. 다른 종의 개
체는 서로 틀린 '기능'을 가지고 협력할 수가 있으므로 때로는 서로 큰 이익을 주고받을  수
도 있다. 이와 같은 기본적 비대칭성은 진화적으로 안정된 상호 협력 전략을 발생하게 하는 
수가 있다. 진딧물은 식물의 즙을 흡입하기에 적합한 구기를 가지고 있으나 그와 같은 흡입
용의 구기는 자기 방어에는 별로 적합하지 못하다. 한편  개미는 식물의 즙을 흡입하기에는 
서툴지만 싸움에는 유리하다. 따라서 개미의 체내에는  진딧물을 보호하고 시중드는 유전자
가 개미의 유전자 풀 속에서 유리하게 됐다. 그리고 진딧물의 체내에는 개미와 협력을 바라
는 유전자가 진딧물의 유전자 풀 속에서 유리하게 됐다는 것이다.
  상호 이익을 가져오는 상리 공생적 관계는 동식물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예컨대 지의류
는 언뜻 하나의 식물처럼 보이나 실제로 그것은 균류와 녹조류가 밀접한 상리 공생적 결합
을 하고 있는 형태이다. 어느쪽도 다른 쪽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들의 결합이 좀더 밀
접했다면 지의류가 도저히 이중 생물이라고는 판별 못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아
직도 우리들이 알지 못한 이중 생물 또는 다중 생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우리들 자신
도 그 하나일지도 모른다.
  미토콘드리아와 바이러스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 속에는 미토콘드리아라고 불리는 작은 몸체가 들어 있다. 미토콘드
리아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화학 공장이다. 만일 미토콘드리아
를 잃으면 우리는 즉사하고 말 것이다. 이 미토콘드리아는 진화의 아주 초기 단계에서 우리
의 세포와 같은 형태에 억지로 밀어  넣어져 연합된 공생 박테리아가 지원이었다는  논의가 
최근에 설득력 있게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제안은 우리의 세포  속에 있는 다른 미세한 구
조물에 관해서도 행해지고 있다. 혁명적인 사고란 익숙하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리게 마련인
데 위의 설도 이와 같은 생각 중의 하나이다. 다만 이 설에  관해서는 이제 인정될 때가 도
래했다. 사람이 실은 우리의 유전자 하나하나의 고생 단위체라고  하는 나의 생각이 언젠가
는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공생적인 유전자들의 거대한 집합체인 것이
다. 이 생각을 지지하는 증거를 실제로 들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책의 제1장에서 내가  전하
려고 했듯이 우리가 유성 생식 생물의 유전자 작용을 생각할 때의 바로 그 사고 방식  속에 
이미 위의 생각이 실제로 내재하고  있다. 이 생각을 뒤집어 놓고  보면 바이러스는 우리의 
몸과 같은 '유전자 집합체'에서  이탈된 유전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순수한 
DNA(또는 이와 유사한 다른 자기 복제분자인 RNA)로 되어 있고 주위에 단백질의 옷을 입
고 있다. 그것들은 예외없이 기생적 존재이다. 위의 견해에 따르면 이와 같은 바이러스는 도
망쳐 온 '반역' 유전자로부터 진화된 것으로 이제는 정자와 난자라고 하는 통상의 운송 수단
에 매개됨이 없이 생물의 몸에서 몸으로  직접 공중을 여행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다. 이 견해가 옳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이러스의 집합체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이 
바이러스들의 일부는 상리 공생적 협력관계를 맺고 정자와 난자에 실려 몸에서 몸으로 이동
한다. 그들이 관례적인 '유전자'이다. 그 밖의 것은 기생적인 생활을 하고 가능한 각종의  방
법으로 몸에서 몸으로 이동한다. 이 기생적인 DNA가 만일에 정자와 난자에 실려 이동하면 
아마도 그것은 제 3장에서 소개한 '역설적인' 여분의  DNA로 될 것이다. 만일 그것이 공중 
경유 또는 다른 직접적 수단으로 이동한다면 통상적 의미의 '바이러스'라고 불려진다.
  이상은 장래를 위한 가설이다. 당장은 생물체 내부의 문제를  벗어나서 다세포 생물 상호
간의 관계라는 높은 수준으로 상리 공생을 생각하기로 하자. 상리 공생이란 말은 이종 개체
간의 상호 관계에 적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종을 위한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진화를 
보는 것을 삼가기로 한 이상,  이종 개체간의 교제를 동종 개체간의  교제와 특별히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는 논리적 근거는 없다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교제하는  두 개체가 각각 투
입량 이상의 이익을 그 관계에서 얻을 수가 있다면 상호 이익적인 교제 관계가 진화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같은 무리 중의 하이에나 개체간에 대해 말할 경우 또는 개미와 진딧물,  꽃 
피는 식물과 꿀벌 등의 서로가 동떨어진 별개의 생물 간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마찬가지이
다. 다만 진짜로 양쪽에 상호 이익을 가져오는 사례와 한편이 다른 편을 이기적으로 이용하
고 있는 사례를 실제로 판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유전자는 이익을 예측할 수 있다
  지의류를 구성하는 파트너들의 경우와 같이 양자가 이익을 동시에 주고받는다고 하면  상
호 이익적인 교제 관계의 진화를 상상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쉽다. 그러나 이익의 제공과 이
에 대한 갚음 사이에 시간적  차이가 개입할 때에는 문제가 생긴다.  왜냐하면 이익을 먼저 
받은 개체는 상대를 속이고 자기가 갚을 차례가 와도 그것을 거부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
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해결은 재미있기 때문에 자세히 논할 가치가 있다. 여기에서도 가설
적인 예를 내놓고 설명하는 것이 가장 알기 쉬울 것이다.
  어떤 종류의 새에게 해로운 병을 옮기는 매우 더러운  진드기가 기생한다고 가정하자. 이 
진드기에게 붙들리면 가급적 빨리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그  새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보통 
몸에 붙은 진드기는 깃털을 손질할 때 스스로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의 부리로도 미
치지 못하는 곳이 있다. 즉, 머리 윗부분이다. 인간이라면 즉시 해결책을 강구한다. 자기  부
리로는 머리 윗부분에 미치지 못해도 친구가 대신 쪼아주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은가. 이 
친절한 새는 후일에 자기에게 진드기가 옮았을 때에 전번에 베푼 친절에 대한 보답을 받을
지도 모른다. 사실 새와 포유류에서는 상호적인 털손질을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직관적으로 납득되는 해결책이다. 선견지명을 가진 자라면 서로 상대의 등을 
털손질해 주는 짝관계를 맺는 것이  현명한 해결책이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것에 대해 우리는 '조심하라'라고  배웠다. 유전자는 선견지명이 없
다. 친절행위와 이에 대한 갚음 사이에 시간적 지연이  개재하는 조건하에서 유전자의 이기
성 이론은 상호적인 등긁기 관계, 즉 '호혜적 이타주의'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을까? 윌리엄
스는 내가 이미 언급한 1966년의  저서중에서 이 문제를 간단히 논하고  있다. 그는 다윈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즉, 지연성 호혜적 이타주의는 서로를 개체로서 식별하고 또  기억하
는 종에서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트라이버스는 1971년의 노문에서 이문제를  더 상세히 
논하고 있다. 이 논문을 쓸 때에  메이나드-스미스의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ESS)의 개념
은 아직 그의 심중에 없었다. 나는 만일 이것이 이용되고  있었다면 그는 당연히 그것을 활
용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의 이론을 표현하기에 꼭 맞는 방법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 이론의 유명한 수수께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그
가 이미 메이나드-스미스와 비슥한 방식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B라고 하는 개체가 머리 윗부분에  진드기를 가지고 있다고 하자.  A라는 개체는 그것을 
잡아 준다. 얼마 있다가 이제는 A의 머리에 진드기가 붙었다. 그는 당연히 B를 찾아간다. B
가 전날의 친절에 보답을 해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B는 A을 까보고 사라져 버린
다. B는 사기꾼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기꾼이란 다른 개체의 이타적 행위의 이익을 방
아들이나, 상대에게 보답을 않는 개체 또는 불충분한 보답밖에 않는 개체를 말한다.  대가를 
지불할 것 없이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사기꾼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 이타주의자보다 
유리하다. 위험한 진드기를 없앤 이익에 비하면 다른 개체의 머리털을 손질해 주기 위한 대
가 같은 것은 분명히 사소한 것으로 생각되나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의 귀중
한 에너지와 시간이 쓰여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선심파와 사기꾼파
  집단을 구성하는 개체가 두 개의 전략 중 어느쪽이든 한쪽을 채택한다고 하자. 메이나드-
스미스의 분석과 같이 여기서 사용되는 전략이라는 말은 의식적인 전략이 아닌 유전자가 규
정하는 무의식적인 행동 프로그램을 가리키고 있다. 이 두 전략을 '선심' 전략과 '사기꾼' 전
략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선심파'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대라면 누구에게나 상관없이 털
손질을 해 준다. '사기꾼파'는 선심파의 이타 행동을 받아들이나 다른 개체에 대해서는 이체 
털손질을 하지 않고 비록 상대가 이전에 자기를 도와주었던 개체일지라도 무시한다. 비둘기
파와 매파의 분석의 경우와 같이 여기서도 각각의 이득에 적당한 수치를 줄 때 털손질을 받
았을 경우의 이익 쪽이 털손질을 해 줄 경우의 대가보다 크다면 각각의 수치의 실제값은 어
떻게 정하든 좋다. 진드기의 기생률이 높을  경우, 선심파 집단 중 임의 개체에게  털손질을 
해준 것과 같은 빈도로 자기도 털손질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선심파 집단중의 선
심파 개체의 평균 이득은 정의 값이 된다. 이때에 그들은  한 개체도 빠짐없이 실제로 잘해 
내고 있기 때문에 선심파라는 호칭은 부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사기꾼파 한 마
리가 집단 중에 출현하면 어떻게 될까? 사기꾼은 자기 한 마리뿐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개
체로부터 털손질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여 자기는 봉사를 일체 하지 않는다. 그의 평균 이득
은 선심파의 평균 이득 이상이 된다. 그러므로 사기꾼파의 유전자가 집단 중에 퍼지기 시작
하여 선심파의 유전자는 곧 절멸의  길로 몰리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집단 중의 구성비에 
상관없이 사기꾼은 항상 선심파보다 높은 성적을 올리기 때문이다. 가령 사기꾼과 선심파가 
50%씩인 경우를 생각해보자. 선심파의 평균 이득도, 사기꾼의 평균 이득도 선심파만으로 된 
집단의 임의의 개체의 평균 이득에 비해 둘 다 낮은 값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조건하에서
도 아직 사기꾼은 선심파보다 높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 사기꾼은  그 본성에 따라 누릴 수 
있는 이익을 모두 자기 것으로 하면서 일체 대가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기꾼의 구성
비가 90%까지 달하면 집단 속의 어떤 개체의 평균 이득은 매우 낮은 값이 되고 말 것이다. 
진드기가 옮기는 병 때문에 어떤 타입도 약간의 사암자를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사
기꾼은 선심파보다 높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 비록 집단 전체가 절멸로 향해도 선심파가 사
기꾼보다 높은 성적을 올릴 기회는 전혀 없다. 즉, 이들 두 전략만으로 생각하는 한  선심파
의 절멸은 피할 수가 없고, 뿐만 아니라 집단 전체의 절멸 가능성도 매우 높다.
      원한파
  그렇다면 '원한파'라는 제 3의 전략을 생각해 보자.  원한파는 처음 대하는 상대와 이전에 
그에게 털손질을 해 준 개체에 대해서는 자기도 털손질을 해 주고 그를 속인 일이 있는  상
대라면 그것을 잊지 않고 상대에게 한을 품는다. 즉, 그 후에는 그 개체의 털손질을  거부한
다. 원한파형과 선심파형의 개체로 구성된 집단 속에서의 양자의 구별은 불가능하다. 두  종
류 모두 다른 개체에게 이타적으로 행하고, 또한 두 종류 모두 같은 득점의 높은 성적을 올
리기 때문이다. 집단 속의 대부분의 개체가 사기꾼일 경우 고립된 원한파 개체는 별로 성적
을 올릴 수 없다. 집단 속의 모든 사기꾼에게 원한을 가지기까지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
다. 왜냐하면 그는 우연히 만난 거의 모든 개체의 털손질을 해 주게 되어 많은 에너지를 소
비할 처지에 빠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경우 보답으로 그에게  털손질을 해 줄 자는 하나
도 없다. 사기꾼에 비해 원하파가 드물 경에는 원한파의 유전자는 절멸하고 말 것이다. 그러
나 원한파의 수가 증가해서 집단 속에 차지하는 그들의 비율이 어떤 임계값에 도달하면 그
들끼리 만나는 확률이 충분히 높아져서 사기꾼을 돌봐 주기 위해 낭비되는 에너지를 상쇄할 
수 있다. 이 임계값에 도달하면 원한파는 사기꾼보다 높은 평균  이득을 올리게 되어 그 이
후 사기꾼의 절멸은 가속화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기꾼이 절멸 직전까지 감소하면 그들의 
감소율은 낮아지기 시작하며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 소수파로서  생존을 계속할 것이다. 소
수가 되면 사기꾼 개체가 동일한 원한파와 다시 우연히 만나는 확률은 극히 적어진다는 것
이 그 이유이다. 임의의 사기꾼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개체는  집단 속의 극히 일부에 한정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경쟁의 결과
  이상 세 가지 전략에 관해서 나는 마치 무엇이 일어날 것 같은 자명한 직관으로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자명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사전에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하여 
그 직관이 옳다는 것을 확인해 놓았다. 원한파 전략은 선심파 전략이나 사기꾼 전략에 대해 
실제로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을 취한다. 즉, 대부분이 원한파로 된 집단에는 사기꾼도, 선
심파도 침략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기꾼파도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이다.  대부분이 
사기꾼인 집단은 원한파나 선심파 양쪽 모두로부터 침략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집단은 이 
두 가지의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의 어느 편에 안주하게  된다. 장기적으로 보면 한편에서 
다른 편으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각각의 이득에 실제로  어떤 수치를 주느냐에 따라 이
들 두 개의 안정 상태의 어느 편이 큰 '유인권'을 갖는지를 결정하고, 따라서 어느쪽이 달성
되기 쉬운가가 결정된다(위의 컴퓨터 시뮬레이션에서도 이들의 값은 아주  자의적으로 가정
한 것이다). 아울러 좀 주의해 두고 싶다. 사기꾼 집단은 원한파의  집단보다 절멸의 가능성
이 클 것 같으나, 그렇다고 해서 사기꾼파가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의 지위를 잃어버리는 
것은 전혀 아니다. 만일에 한  집단이 그 자체를 절멸로 이끄는  식으로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에 도달해 버리면 확실히 절멸해  버릴 것이다. 이것은 그저 운이  나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압도적 다수의 선심파형 개체, 임계빈도를 조금 넘을 정도의 원한파형 개체, 그리고  원한
파와 거의 동수의 소수파 사기꾼형 개체의 조합을 출발점으로 하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하
여 그 진행을 보면 매우 재미있다. 우선 최초로 사기꾼의  무정한 착취 때문에 선심파 집단
이 심한 감소를 한다. 사기꾼 개체는 대단히 증가하여 최후의 선심파가 없어질 무렵에 그들
의 수는 장점에 이른다. 그러나 사기꾼은 아직 원한파를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심파형
의 급겹한 감소시에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사기꾼의 공세를 받고 원한파의 수도  점점 
감소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아직 겨우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최후의 선심파가 죽고 이미 
사기꾼이 지금처럼 쉽게 타임의 이기적 착취가 일어나지 않게 되면 이번에는 원한파가 사기
꾼을 희생으로 하여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개체수  증가는 차차로 기세가 높아
진다. 그리고 원한파가 크게 증가하여 사기꾼 집단은 절멸 직전까지 격감한다. 이후, 양자의 
개체수는 평형을 이룬다. 소수가 된 덕분에 원한을 품을 위험이 좀 감소한다는 소수자 특권
을 사기꾼이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기꾼은 서서히  그리고 냉혹하게 말살되어 드
디어 원한파가 집단 전체를 제압한다. 언뜻 보아서 모순되는 것 같으나 선심파의 존재는 당
초 원하파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그들의 존재는 사기꾼의 일시적 번영을 가능케 하기 때
문이다.
      쥐와 청소어의 상리 공생
  그런데 위의 가설적인 사례는 털손질을 받지 않으면 개체는 위험에 처한다고 가정한 것인
데 실제로 그러한 가능성은 많이 있다. 예컨대 쥐를 단독으로  키워 보면 스스로 닿지 못하
는 머리 부분에 불쾌한 종기가 생기는 경향이 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집단 사육된 쥐는 서
로 머리가 생기는 경향이 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집단  사육된 주는 서로 머리를 핥아줌으
로 해서 종기의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호혜적 이타주의의 이론이 실험적으로 검증된다
면 흥미로울 것이다. 쥐는 그와 같은 연구에 적합한 재료가 될 것이다.
  트라이버스는 청소어(cleaner-fish)의 대단한 상리 공생에 관해서도 논하고 있다. 대형  어
종의 체표면에 붙어 있는 기생충을 먹으면서 살고 있는 동물이 작은 어종과 새우류를 포함
해서 50종 가량 알려져 있다. 대형 어류는 대리 청소라는  분명한 이익을 얻고 있고 청소어
는 어느 정도의 먹이를 얻도록 되어 있다. 즉, 이 관계는 상리 공생적이다. 많은  경우, 대형
어는 입을 크게 벌리고 청소어가 입 속에 들어가 이를 쪼아 청소하면서 아가미를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 대형어는 충분히 깨끗해질 때까지 점잖게  기다렸다가 그 다음에 청소
어를 덥석 삼켜 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청소어는 아무런 위험 
없이 지나쳐 가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현상적인 이타주의의 굉장한 장면이다.  왜냐하면 
많은 예에서 청소어는 대형어의 통상 먹이와 비슷한 크니이기 때문이다.
  청소어는 특별한 세로줄 무늬를 가지고 있고 또한 특별한 춤으로 과시 행동을 한다. 이것
들이 청소어라는 표지인 것이다. 대형어는 세로줄 무늬를 하고  그럴듯한 춤을 추면서 접근
하는 작은 물고기에 대해 초식을 억제하는 경향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작은 물고
기와 우연히 만나면 그들은 어떤 종류의 황홀한 경지에 빠져들어 청소어가 그들의 체표면과 
입과 아가미 속에 자유로이 출입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기성이라는 유전자의 본성으로 말하
면 이 기회를 이용하여 냉혹하게 잡아먹으려고 하는 사기꾼이 있다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
다. 사실 대형어에게 안전하게 접근하기 위해 청소어와 똑같은  외양을 가지고 게다가 똑같
은 식의 춤을 추는 소형 어류가 있다. 이 사기꾼은  대형어가 청소를 기대하며 황홀한 경지
가 되면 그 지느러미에 붙어  살점을 뜯어 물고 줄행랑치곤 한다.  이런 사기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청소어와 그 불청객들의 관계는 대체로 우호적이고 안정되어 있다. 청소꾼이란 직
업은 산호초의 생물 군락의 일상 생활 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청소어는 각각 자
기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대형어들은 거기에 열을 지어 서서 마치 이발소의 손님처럼 자기
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이 사례로 지연성의 호혜적 이타주의의 진화를 가능케 한 
것은 아마도 위와 같은 특정 지역으로의 고집이라는 성질일  것이다. 대형어에게 있어 줄곧 
새로운 청소어를 찾는 대신에 같은 '이발소'에 계속해서 다님으로써 생기는 이익은 이  청소
어를 포식함으로써 생기는 대가보다 클  것이다. 청소어는 소형어이기 때문에  위의 추정은 
충분히 믿을 수 있다. 청소어로 의태한 사기꾼의 존재는  정직한 청소꾼에게 간접적으로 위
험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전자의 존재에  의해 대형어로 하여금 그러한  사기꾼 물고기를 
잡아먹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기 때문에 세로줄 무늬의 댄서를 위험에 빠뜨린다. 한펀 진짜 
청소어가 나타내는 특정 지역으로의 고집이란 성질은 손님들이 진짜 청소어를 발견하고  사
기꾼을 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개체 식별 능력
  인간에게는 오래도록 기억하는 능력과 개체 식별의 능력이 잘  발달되어 있다. 따라서 호
혜적 이타주의는 인간의 진화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예상된다. 트라이버스
는 다른 사람을 속이는 능력이나 사기를 알아차리는 능력,  사기꾼이라는 것을 간파하지 못
하도록 회피하는 능력 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한 자연 선택이 인간에게 갖추어진 각종
의 심리적 특성(질투, 죄책감, 감사하는 마음, 동정 등)을  형성했다고 주장해 왔다. 특히 재
미있는 것은 '교활한 사기꾼'이란 존재이다.  언뜻 보기에 그들은 보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항상 받은 분량보다 조금은 부족하게 갚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비대한 대
뇌와 수학적으로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 소질은 보다 연구된 사기 행위를 하고 동시에 타인
의 사기 행위를 보다 적절하게 간파하기 위한 메커니즘으로서 진화했을 가능성까지도  생각
된다. 이와 같은 견해로 보면 돈은 지연성의 호혜적 이타주의의 공식적 상징이다.
  호혜적 이타주의의 개념을 우리 자신이 속하는 종에 적용할 때에 생기는 이러한 매력적인 
사변에는 끝이 없다. 확실히 그것은 흥미 있는 문제이지만 이  같은 사변에 내가 특히 재능
을 가지고 있는 바도 아니고 해서 이후부터는 독자가 스스로 즐길 수 있도록 맡기고 싶다.
            제11장
          밈(Meme)-새로운 자기 복제자
        인간의 특이성
  지금까지 인간에 관해서는 특별히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러 인간을 제
외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내가 '생존 기계'라는 말을 써 온 이유는 '동물'이라고 하면 식물이 
제외될 뿐만 아니라 일부 사람의  머리 속에서는 인간까지도 제외되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내가 전개해 온 논의는 언뜻 보기에는 진화의 모든 산물에  해당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종
을 예외로 해서 제외하려고 한다면  특별히 타당한 근거가 없으면 안  된다. 우리가 속하는 
인간이라는 종을 특이한 존재로 보는 타당한  근거는 있는 것일까? 나는 그와 같은  근거가 
확실히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문화, 문화적 돌연변이
  인간에 관한 특이성은 대개 '문화'라고 하는 하나의 말로 요약된다. 물론 나는 이 말을 통
속적인 의미로서가 아닌 과학자가 쓸 때의 의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보
수적이면서도 어떤 형태의 진화를 일으키게 할 수 있는 점에서 문화적 전달은 유전적 전달
과 유사하다. 초서(Geoffrey Chaucer)와 현대 영국인은 사슬같이 이어진 20세대정도의 시간
적 간격이 계속 연결되어 있지만 대화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까운 세대의 사람들
이라면 자식이 아버지와 대화를 할 때처럼 서로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는 비유전적
인 수단에 의해 '진화'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게다가 속도는 유전적 진화보다 더 빠르다.
  문화적 전달은 인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이외의 동물에 관해서 내가 알
고 있는 적합한 예는 뉴질랜드 앞바다 섬에서 사는 안장새의 울음소리에서 볼 수 잇는 에로 
최근 젠킨스(P.F. Jenkins)에 의해 기록됐다. 그가 연구한 섬에서는 약 아홉 종류의 서로 다
른 새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각각의 수놈은 이들 소리  중에서 하나 또는 몇가지만 지저귄
다. 제킨스는 수놈들을 방언의 그룹으로 나눌 수가 있었다.. 예컨대 인접한 영역을 가진 8마
리의 수놈으로 이루어진 한 그룹은 'CC  song'으로 불리는 측정한 노래를 했다.  다른 방언 
그룹은 각각 다른 노래를 했다. 같은 방언 그룹에 속하는  개체가 둘 이상의 다른 노래법을 
공유하는 예도 있었다고 한다. 제킨스는 아비와 수놈 새끼의 노래법을 비교함으로써 노래의 
패턴이 유전적으로 아비에게서 수놈 새끼에게로 전해지는 것이 아님을 밝혔다. 개개의 젊은 
수놈은 근처에 영역을 갖는 다른 개체의  노래를 인간의 경우처럼 모방이라는 수단에  의해 
자기 것으로 삼는 것 같다. 제킨스의 체류 기간 중 섬에서 들을  수 있는 노래의 수는 거의 
정해져 있었다. 그들이 소위 '노래 풀'을 형성하고 젊은 수놈들은 그로부터 소수의 노래법을 
자기 것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제킨스는 운좋게도 젊은  수놈이 옛 노래법을 모방하다가 
새로운 노래를 '발명' 는 장면에 몇번 부딪치게 됐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새로
운 노래는 음의 고저의 변화, 같은 음성의 추가, 음성의 탈락 또는 다른 노래법의 부분적 편
입 등 각종의 방법으로 탄생한다.  새로운 노래의 형식은 돌연히 출현하는데  그 후에는 몇 
년에 걸쳐 극히 안정된 형으로 유지됐다. 다시 몇 개의  예에서 변이형의 노래가 그 새롱누 
형식대로 어린 초보자에게 정확히 전달되어 그 결과 잘 닮은 가수들의 그룹이 새로이 다른 
것과 식별될 정도로 됐다." 젠킨스는 새 노래의 출현을 '문화적 돌연변이(cultural mutation)'
라고 표현하고 있다.
  안장새는 노래는 분명히 비유전적인 방법으로 진화하고 있다. 또한 조류와 원숭이의 무리
에는 이외에도 문화적 진화의 예가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어느것이나 별다르고 흥미
로운 특수한 예에 불과하다. 문화적 진화의 위력을 정말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우리가 속
하는 인간이라는 종인 것이다. 언어는 그 많은 측면의 하나에 불과하다. 의복과 음식물의 양
식, 의식과 습관, 예술과 건축, 기술과 공예 등 이들  모두는 역사를 통하여 마치 극히 속도 
빠른 유전적 진화와 같은 약식으로 진화하는데, 물론 실제로는  유전적 진화와는 전혀 관계
가 없다. 그러나 유전적 진화와 같이 문화적인 변화도 진보적일 수 있다. 현대 과학은  실제
로 고대 과학보다 우수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우주에 관한 우리의 이해는 시대와 더불어 변
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개선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이해에 관해 현재와 같은 
폭발적 진보가 이루어지게 된 것은 확실히 오래 전 르네상스 이후의 일이다. 그네상스 이전
에는 음산한 정체기가 있었고 유럽의 과학  문화는 그리스가 달성한 수준에 동결되어  있었
다. 그러나 제5장에서 말한 대로 유전적 진화에도 닮은 현상이 보인다. 그것은 안정된  정체 
기간에서 일련의 돌발적 변화를 나타내어 진행하는 것 같다.
      문화적 진화와 유전적 진화의 유사성
  문화적 진화와 유전적 진화의 유사성은 종종 지적되고 있다. 때로 그것은 단지 전혀 불필
요한 신비적 함축이 있는 문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학의 진보와 자연 선택에 의한 유
전적 진화의 유사성에 관해서는 특히 포퍼(Karl Popper) 경이 해명을 하고 있다. 포퍼 경을 
시작으로 하여 유전학자 카발리 스포르자(L.L. Cavalli-Sforza), 인류학자  클록(F.T. Cloak), 
그리고 동물 행동학자 컬렌(J.M.  Cullen)등이 탐구하고 있는 방향을  더 끌고 나가고 싶은 
것이 나의 목적이다.
  열렬한 다윈주의자로서 나는 같은 열렬한 다윈주의자인 동료들이 인간 행동에 가하는  설
명에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인간의 문명이 나타내는 각종 특성의 '생물학적 유리
함'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 예를 들면 부족  종교는 집단으로서의 dflcprka을 높이기 위한 
나아ㅢ 메커니즘으로 간주되어 왔다 무리를 지어 수렵을 하는 동물의 경우 각 개체의 생존
은 크고 발빠른 먹이를 잡기 위한 협력에 의존하며, 상기의 메커니즘은 이와 같은 종에게는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 종의 이론을 짜맞출 때 그  전제로 되어 있는 진화론적인 견해가 
종종 은연중에 그룹 선택주의자적인 것이 되어 있는 수가  있은데, 그들은 정통적인 유전자 
수준의 선태으로 바꾸어 말할 수가 있다. 확실히 인간은 과거 수백만 년의 태반을 소규모의 
혈연 집단 단위의 생활로 지내 온 것 같다. 따라서  우리의 기본적인 심리적 특성이나 경향
은 대개 우리의 유전자에 대한 혈연 선택과 호혜적 이타주의를 촉진하는 선택이 작용한 결
과로서 만들어졌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생각도 그 자체로서는 훌륭한 것  같다. 
그러나 문화나 문화적  진화, 더  나아가 세계의 인간  문화가 나타내는  끝없는 차이-턴빌
(Cilin Tumbill)이 기록한 우간다의 IK 족의 극한적인 이기성과 미드(Margaret Mead)가 보
고한 아라페시(Arapesh) 족의 온화한 이타주의가  그 양극이다-를 설명한다고 하는 망막한 
난제는 아직 상기한 바와 같은 이론으로는 매우 대처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나의 생각으
로는, 우리는 또 한번 다시 고쳐 첫 번째 윈리로 되돌아가 보지 않으면 안되겠다.  현대인의 
진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화를 생각할 때에  유전자만을 그 유일한 기초로 보는  입장을 
버려야만 된다는 것이 내가 이제부터 전개하려는 논의이다. 만약 내가 이 책의 서문에서 이
와 같은 것을 말했더라면 놀랐을지도  모른다. 나는 확실히 열렬한 다윈주의자이다.  그러나 
나는 유전자라는 좁은 문맥에 비해 다위니즘은  너무나 큰 이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다. 이하의 나의 주장에서 유전자는 유추의 대상으로서만 등장할 것이다.
      유전자의 특성-자기 복제자
  도대체 유전자의 특성이란 무엇일까? 자기 복제자라는 것이  그 답이다. 물리학의 법칙은 
도달될 수 있는 전 우주에 타장하다고 보아진다. 생물학에도  이에 해당하는 보편 타당성을 
가지는 원리가 있는 것일까? 우주 비행사가 저 멀리 떨어진 행성에 도달하여 생물을 찾는다
면 우리는 상상도 못할 기묘하고 기괴한 생물을 우연히 만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에 살
고 있드, 어떤 화학적 기초를 가지고  살고 있든 모든 생물에 필히 타당한  그 무엇은 없을
까? 가령 탄소 대신에 규소를 혹은 물 대신에 암모니아를 이용하는 화학적 구조를 가진 생
물이 존재했다고 해도, 또는 가령 -100도에서 생존하는 생물이 발견된다면, 또한 가령 화학 
반으에 일체 의존하지 않고 전자 방향 회로를 기초로 한  생물이 발견되었을 경우, 이들 모
든 생물에 타당한 일반 윈리는 없는 것인가? 물론 나는 그  답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무언
가에 내기를 걸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 나는 어떤 기본 원리에  내 돈을 걸 것이다. 모든 
생물은 자기 복제를 하는 실체의 생존율의 차이에 의하여 진화한다는 것이 그 원리이다. 자
기 복제를 하는 실체로서 우리의 행성에 세력을 뻗친 것은 유전자, 즉 DNA 분자였다는 것
이다. 그러나 다른 것이 그 실체로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그와 같은 것이 존재하고 다
른 어떤 종의 여러 조건이 충족되면 그것이 어떤 종의 진화과정에 기초가 된다는 것은 거의 
필연적일 것이다.
  다른 종의 자기 복제자와 그 필연적 산물인 다른 종의 진화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아주 먼 
세계로 나갈 필요가 있을까? 내 생각으로는  신종의 자기 복제자가 최근에 바로 이  행성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과 현재 코를 맞대고 있다. 그것은 아직 미발달한 상태에 있
고 전과 다름없이 원시 수프 속에 꼴사납게 떠 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은 헐떡거리며 멀리 
뒤떨어진 옛 유전자를 버려 두고 일정한 속도로 진화적 변화를 이루어 나가고 있다.
      인간의 수프-문화
  새로이 등장한 수프는 인간의 문화라는 수프이다. 새로이 등장한 자기 복제자에게도 이름
이 필요하다. 문화 전달의 단위  또는 모방의 단위라는 개념을 함축하고  있는 명사여야 할 
것이다. 모방에 알맞는  그리스어의 어근을 따면  'mimeme'라는 것인데 내가  바라는 것은 
'gene(유전자)'이라는 말과 발음이 유사한 단음절의 단어이다. 그래서 상기한 그리스어의 어
근을 '밈(meme)'이라고 줄이기로 했다. 나의 친구인 고전학자들에게는  관용을 바라는 바이
다. 만약 위로가 된다면 밈이라는 단어는  '기억(memory)', 또는 이것에 상당하는 프랑스어
의 'meme'라는 단어에 맞추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또 이 단어는 '크림(cream)'과 같은 운
을 밟아서 발음해 주길 바란다.
  곡조나 사상, 표어, 의복의 양식, 단지 만드는 범, 또는 아치 건조법 등은 모두  밈의 예이
다. 유전자가 유전자 풀 내에서 번식함에 있어서 정자나 난자를 운반체로 하여 몸에서 몸으
로 날아다니는 것과 같이 밈이 밈 풀 내에서 번식할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이라고 할  수 
있는 과정을 매개로 하여 뇌에서 뇌로 건너다니는 것이다. 만약 과학자가 좋은 생각을 듣거
나 또는 읽어나 하면 그는 동료나 학생에게 그것을 전할  것이다. 그는 노문이나 강연 속에
서도 그것을 언급할 것이다. 그  생각이 평가를 받으면 뇌에서 뇌로  퍼져 자기 복제한다고 
할 것이다. 나의 동료인 험프리(N.K. Humphrey)가 이 장의 초기  원고를 솜씨 좋게 요약하
여 지적해 주고 있듯이 "...밈은 비유로서가 아닌 엄밀한 의미에서 살아 있는 구조로 간주해
야 한다. 네가 내 머리에 번식력이  있는 밈을 심어 놓는다는 것은 문자대로  네가 내 뇌에 
기생한다고 하는 것이다.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의 유전 기구에  기생하는 것과 유사한 방법
으로 나의 뇌는 그 밈의 번식용의 운반체로 되어 버린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사
후에 생명이 있다는 믿음'이라는 밈은 신경계의 하나의 구조로서  막대한 횟수에 걸쳐 세계 
속의 사람들 속에 육체적으로 실현되어 있지 않은가."
      신과 ala의 생존가
  신에 대한 생각을 고려해 보자. 그것이 어떻게 해서 밈 풀 속에서 발생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자칫하면 그것은 독립된 '돌연변이'에 의해서 몇 번이고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해서 자기 복제를 하는 것일까? 말하기에 따라 그리고 글쓰기에 따라서 위대
한 음악과 위대한 예숙이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면 그 밈은 왜 이와  같이 놓은 생종가를 
나타내는가. 여기서 말하는 '생존가'란 유전자 풀 속의 유전자로서의  값이 아닌 밈 풀 속의 
밈으로서의 값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상기의 의문이  의미하는 것을 과장되게 표현
하면 다음과 같다. 문화 환경 속에서 신의 관념이 안정성과  침투력을 주는 것은 도대체 그 
관념이 갖는 어떤 성질일까? 밈 풀 속에서 신의 밈이 나타내는 생존가는 그것이 갖는 강력
한 심리적 매력의 결과이다. 실존을 둘러싼 심원하고 마음을  괴롭히는 여러 의문에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한 해답을 주고 있다. 그것은 현세의 불공정이 내세에서 바로 고쳐진다
고 주장한다. 우리의 불완전함에 대해서는 '신의  팔'이 구원해 주신다고 한다. 의사가  쓰고 
있는 위약과 같아서 이런 것으로도 공상적인 사람에게는 효력이  있는 것이다. 이들은 사람
의 뇌가 세대에서 세대로 용이하게 신의 관념을 복사해 가는 이유의 일부이다. 인간의 문화
가 만들어 내는 환경 속에서 신은 가령 높은 생존가 또는 감염력을 가진 밈이라는 형태로만 
실재하는 것이다.
  신의 밈의 생존가에 대한 상기와 같은 나의 설명은 논의의 관점의 중심을 피하고 잇는 것
이 아니냐고 지적해 주는 동료가 있었다. 최종적으로 그들은 항상 정해 놓고 '생물학적 유리
함'에 되돌아오려고 한다. 그들은 신이 '갈력한 심리적 매력'이 있다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불
만일 것이다. 그들은 왜 그것이 강력한 심리적 매력을 가지는가를 알고 싶어한다. 심리적 매
력이라는 것은 뇌에 대한 매력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뇌란 유전자  풀 속의 유전자에 
대해 자연 선택이 작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은 상기와 같은 뇌를  가지는 것이 어떤 
방도로 유전자의 생존 촉진에 연계되어 있지나 않나 하는 것을 그와 같은 방도로 밝혀내고 
싶은 것이다.
      DNA-자기 복제자
  나는 이러한 태도에는 크게 공감을  가지고 있고, 또 현재와 같은  뇌를 우리가 소유하고 
있음으로 해서 유전적인 유리함이 있을 것이라는 견해에도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
러나 그 위에 더욱 나는, 만일 동료들이 그들 자신의 논의의 여러 전제를 그 근본에서 상세
히 검토한다면 그들 자신도 나와 똑같이 논의의 관점을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것
이라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생물학적 현상을 유전자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
이 좋은 방법이 되는 이유는 유전자가 자기 복제자이기 때문이다. 분자의 자기 복제를 가능
케 하는 조건이 윈시 수프 속에 갖추어지면 즉시 자기 복제자가 원시 수프에서 그 일을  떠
맡았다. 그리고 30억  년 전부터 이  지상에서 언급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자기 복제자는 
DNA였다. 그러나 DNA가 영원히 그 전매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새로운 
종류의 자기 복제자가 자기의 사본을  만들 조건이 생기기만 하면, 바로  그 새로이 나타난 
자기 복제자가 세력을 잡고 그  자체의 새로운 종류의 진화를 개시하게  된다. 일단 새롭게 
개시된 진화가 이미 낡은 타입이  된 진화에 따라야만 할 필연성은  없다. 유전자를 단위로 
하는 낡은 진화는 뇌를 만들어 내는 것에  의해 최초의 밈이 등장하면 그들은 낡은 타입의 
진화보다 훨씬 빠른 독자적 타입의 진화를 개시한다. 우리  생물학자는 유전자에 의한 진화
의 사고 방식에 완전히 숙달되어 있으므로 실은 그것이 가능한 여러 종류의 진화 중의 일례
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칫하면 잊어 버리게 된다.
      수명, 다산성, 복제의 정확함
  넓은 의미에서 모방은 밈의 자기 복제를 가능케 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자기 복제가 가능
한 모든 유전자가 성공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처럼 어떤 밈은 밈 풀 속에서 다른 밈보다 성
공적일 수도 있다. 이것은 자연 선택과 흡사한 과정이다. 밈에 높은 생존가를 부여하는  등
의 특성에 관해서는 이미 몇 개의 특수한 예를 들었다.  그러나 일반화하여 생각하면 그 득
성은 제2장에서 자기 복제자에 관하여 논한 것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즉, 수명, 다산성 그
리고 복제의 정확함이 그것이다. 밈의 사본이 표시하는 수명은  유전자의 경웨 비하면 그다
지 중요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내 머리 속에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선율은 
나의 수명이 있는 동안만 존재할 것이다. 내 수중에 있는 (스코틀랜드 학생 가곡집)에 인쇄
된 같은 선율의 사본도 상기한 사본에 비하여 그리 오래 사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같은 선
율의 사본은 종이에 인쇄되어 사람들의 머리  속에 남아 앞으로 수백년이라도 계속  존재할 
것으로 여겨진다. 유전자의 경우와 같이  여기서도 특정한 사본의 수명보다  다산성인 것이 
훨씬 중요하다. 문제의 밈이 과학적인 아이디어가 인용되는 수를  셈으로 해서 그 아이디어
의 대략적인 생존가를 측정할 수 있다. 가요곡이라는 밈의 경우, 밈 풀 속에서의 번식  정도
는 그곡을 휘파람으로 불면서 지나가는 사람의 수로 짐작할 수 있을지 모른다. 숙녀화의 스
타일이라는 밈이 문제라면 집단 밈 학자는 구둣방의 매상 통계를 이용할 수도 있겠다. 유전
자의 경우와 같이 밈 속에도 급격한 증식에  의해 아주 단기적인 성공을 달성하면서 밈 풀 
속에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는 것도 이싸. 유행가나 필요  이상으로 뾰족한 스파이크힐 등이 
그 예이다. 한편 유대교의 율법과 같이 수천 년에 걸쳐 자기 복제를 계속하는 것도 있다. 이
러한 밈은 기록된 언어가 가지고 있는 특출한 잠재적 영속성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보통
이다.
  계속하여 자기 복제자가 성공하기 위한 세 번째의 일반적 성질, 즉 복제의 정확도에 문제
가 있다. 이 점에 관해 나의 논의의 토대가 좀 불확실함을 인정해야겠다. 언뜻 보아서는  밈
이라는 자기 복제자가 복제상의 고도의 정확도를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과학자가 어떤 아이디어를 듣고 그것을 타인에게 전할 때 그는 그것을 어느 정도 
변화시키게 된다. 나는 이 책의 내용이 트라이버스의 아이디어에  힘입고 있는 것을 숨기려 
하지 않았으나, 나는 그의 아이디어를 그의 말 그대로 반복하지는 않았다. 나는 강조하는 점
을 바꾸거나 내 자신의 또는 다른 연구자의 아이디어를 혼합해서 그의 아이디어를 나의 목
적에 맞게 바꾸어 놓았다. 본래의 밈은 변형되어 독자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입자의 성
질같이 전부냐 아니냐 하는 성질을  가진 유전자 전달과는 전혀 닮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밈의 전달은 계속되는 돌연변이, 그리고 나아가서는 혼합에 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견 이 비입자적인 성질이 실은 착각일 수도 있고 유전자와의 유사성도 무너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인간의 신장이나 피부색과 같은 많은  유전형질의 유전을 보면 그것
들이 분할 불가능하고, 또한 혼합 불가능한 유전자의 손산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흑인과 
백인이 결혼하면 그들의 아이는 흑색도 백색도 아닌 그  중간의 피부색으로 나타난다. 그러
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해당 유전자가 입자적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피부
의 색에 관해서는 미약한 효과를 나타내는 유전자가 매우 많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언뜻 
보아 그것들이 혼합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밈이 하나의 단위로 구
성되어 있다는 것을 마치 확실한 것처럼 말해 왔다. 그러나  그것이 확실치 않다는 것은 분
명하다. 나는 하나의 곡조를 하나의 밈이라고 얘기했다. 그러면 하나의 교향곡은 어떻게  되
는가, 그것은 몇 개의 밈으로 되어 있는가, 각각의  악장이 밈에 해당하는가, 선율상으로 식
별되는 악구가 밈에 해당되는가, 각각의 코드가 밈인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제3장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말의 기교에 호소하기로 하자. 제3장에서 나는 '유전자의  복
합체'를 크고 작은 유전자 단위로 분할하고, 그것을 다시  더 작은 단위로 분할했다. 그리고 
나는 '유전자'를 엄격히 전부냐 아니냐 식이 아닌 편의적  단위로서, 즉 자연 선택의 단위로
서 지속적으로 일하기에 만족할 만큼의 복제상의 정확도를 갖춘 염색체상의 부분으로  정의
해 놓았다. 자, 이제 베토벤의 제9교향곡 중에 충분히 뛰어나고 외우기 쉬운 한 악구가 있다
고 하자. 더욱이 그것은 화가날 정도로 밀어붙이는 유럽의 한 방송국이 시그널 뮤직으로 쓸 
정도로 뛰어나게 외우기 쉬운 악구라고 하면 이 경우 그 악구는 상기 사정에 걸맞은 범위에
서 하나의 밈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아울러 말하거니와  이 밈 덕분에 원래의 심포니
를 즐기는 나의 능력은 크게 감퇴되고 말 것이다.
      다윈 이론과 밈
  이와 비슷한 예로서 가령 우리가 "오늘날 생물학자는 모두 다윈의 이론을 믿고 있다.:라고 
했다 해도 모든 생물학자가 다윈의 말을 정확히  그대로 머리 속에 새겨 넣고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개개의 학자는 다윈의 이론에 과하여 독자적 해석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칫하면 다윈 자신의 저작에서부터 그것을 배운 것이 아니고 보다 최근의 저자의 것으로부
터 배웠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다윈이 말한 것에는 자세히 말하면 다소의 잘못이 있다. 
더욱이 나는 그가 나의 설명법에  대해서는 마음에 든다고 말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으나, 
만약 다윈이 나의 이 책을 읽는다면 거기에서  그 자신의 본래 이론을 거의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모든 사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위니즘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
는 것은 이 이론을 이해하고 잇는 모든 사람들의 머리 속에 확실히 현존한다. 만약 그와 같
은 것이 있을 수 없다면 두 인간 사이에 서로 의견이 일치하는 것에 관한 모든 설명은 무의
미하게 되고 말 것이다. '아이디어의 밈'은 뇌와 뇌  사이에서 전달 가능한 실체로서 정의되
어야 할 것이다. 즉, 다윈 이론의 밈이란  이 이론을 이해하고 있는 모든 뇌가 공유하는  그 
이론의 본질적 원칙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 이론을  표현할 때의 수단상의 차이점은 
정의에 의하면 다윈 이론의 밈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또한 만약 다윈의 이론이 A와 B의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이때 가령 어떤 사람은 A를 믿는데 B는 안 믿고, 
다른 사람은 B를 믿고 A는 불신하는 상황이라면 A와 B는 다른 밈으로써 구별되어야 할 것
이다. 그러나 A를 믿는 사람은 대개 B도 믿는다. 유전학  용어, 즉 두 밈은 밀접하게 '연관'
되어 있다고 한다면 이 경우에는 양자를 합하여 하나의 밈으로 보는 것이 편리하다.
      밈과 유전자의 유사점
  밈과 유전자의 유사점을 더 조사해  보기로 하자. 이 책의 전체를  통하여 나는 유전자를 
의식을 가진 목적 지향적인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해 왔다. 그러나 유전자는 맹
목적인 자연 선택의 작용에 의해  마치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존재인  양 만들어져 있다. 
또한 목적 의식을 전제로 한 표현으로 유전자를 설명하는 편이 편리하다. 예컨데 "유전자는 
장래의 유전자 풀 속에서 가시의 사본 수를 늘리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표현할 경우 실제
의 의미는 "우리가 자연계에서 그 효과를 볼 수 있는 유전자는 장래의 유전자 풀 속에서 자
기의 수를 결과적으로 증가시킬 수가 있는 거동을 하는 유전자다."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의 
생존을 위해 목적 지향적으로 일하는 능동적인 존재로서 유전자를 생각하는 것이  편리했던 
것처럼 밈에 관해서도 같게 생각하면 편리하다는 것이다. 어느 경우에도 표현을 신비적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목적이란 생각은 어느 경우에서나 단순한 은유에 불과하다. 그러나 유
전자의 경웨 이 은유가 어떻게 유용했었는가는 이미 본  바대로이다. 우리는 그것이 단순한 
은유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나서 유전자에 대해 '이기적인'이나 '잔인한'이라든가  하는 형용
사까지 쓸 정도이다. 이들 경우와 똑같은 심정으로 이기적인 밈이나 잔인한 밈을 물색할 수
가 있을까?
        경쟁적인 유전자
  여기서 경쟁의 성질을 가지고 문제를 하나 생각해 두자. 유성 생식의 경우, 개개의 유전자
는 대립 유전자, 즉 염색체상의 같은  장소를 점하려고 하는 대립 유전자와 경쟁하고  있다. 
ala에는 염색체에 상당하는 것이 없으며, 대립 유전자에 상당하는 것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극히 작은 의미에서라면 많은 생각에는 '대립하는 생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적으로 밈은 적절하게 짝을 이룬 다수의 염색체 형태로 존재하는 오늘날의 유전자와는 별로 
닮지 않고, 오히려 그것은 예 원시 수프 속을 무질서하게 제멋대로 떠 있던 초기의 자기 복
제 분자를 닮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밈은 서로 경쟁하고 있는 것
인가? 대립하는 밈이 없는데로 밈이 '이기적' 이라거나 '잔인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마도 
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나의 답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서로 일종의 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디지털 컴퓨터를 사용한 적이 있는 독자는  컴퓨터의 연산 시간과 기억 용량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잘 알 것이다. 많은 대규모의 계산기  센터에서는 그것을 문자대로 요금에 
환산하고 있거나, 사용자에게 초 단위의 사용 시간과 '문자'의  수로 표시된 기억 용량을 각
각 일정량 씩 할당하고 있다. 인간의 뇌는 밈이 살고 있는 컴퓨터이다. 거기서는 시간이  아
마도 저장 용량보다 중요한 제한 요인으로 되어 있고, 심한  경쟁의 대상으로 되어 있을 것
이다. 인간의 노와 그 제어하에 있는  몸이 동시에 하나 또는 몇 종류  이상의 일을 해치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밈이 한 인간의 노의 처리 요구를 독점하고 있다고 하면 '라이벌'의 
밈이 희생되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밈이 경쟁의 대상으로 하는 필수품은 다른 것에도 있
다. 예컨대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방송 시간, 게시판의 공간, 신문 기사의 길이, 그리고  도서
관의 책장 공간 들이다.
      상호 적응적 밈
  유전자의 경우, 유전자 풀 속에 상호 적응하는 유전자의 복합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제3장에서 이야기했다. 예컨대 나비의  의태에 관여하는 다수의 유전자는  동일 염색체상에 
극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그것들 모두를  하나로 묶어 하나의 유전자로서 다룰  정도이
다. 제5장에서는 진화적으로 안정된 유전자 세트라는 더 복잡한 개념을 끄집어냈다.  예컨대 
육식 동물의 유전자 풀에서는 서로 적합한 이, 발톱,  소화관, 그리고 감각 기관이 진화하는 
한편 초식 동물의 유전자 풀에서는 위와는 다른 모든 특성이 안정된 세트를 형성하고 있다. 
밈 풀 에서도 닮은 일이 생길 것인가? 예컨대 신의 밈이  다른 특정 밈과 화합이 가능하고, 
또 이 화합이 각각의 밈들의 생존에 도움을  줄수 있을까? 자칫하면 독특한 건축, 의식, 율
볍, 음악, 예술, 그리고 문자로 이루어진 전통을 가진 교회  조직 등은 서로 돕는 밈의 상호 
적응적 안정 세트의 일례일지도 모른다.
      종교와 믿음
  하나의 특별한 예를 들어 보자. 사람에게 종교 의식을 강요하기 위해 유효했던 교의의 하
나는 지옥불이라는 협박이다. 많은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일부 어른들까지도 성직자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사후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중세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심리적 고통을 겪게 하는 극히 음험한  설득 기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이 기술은 효과적이다. 또는 심층 심리학적인 교화 기술의 훈련을 받은 권모술수적인 성
직자가 의도적으로 그러한 기술을 만들어 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성직자들이 그렇게까지 머리가 좋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체는 의
식을 갖지 않는 밈이 성공하는 유전자가  나타내는 것과 같은 모조적 잔인성이라는  특성을 
가진 덕분에 스스로의 생존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편이 당연하다는 기분이다. 지옥불이라는 
관념은 아주 단순히 그 자체가 가지는 강렬한 심리적 충격력 때문에 자기를 영속화하고 있
는 것이다. 그것이 신의 밈과 연관된 것은 양자가 서로 강하게 화합하여 밈 풀 속에서 서로
의 생존을 촉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하는 밈 복합체의 또 하나의 구성원에는 믿음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증거가 없어
도 -증거를 무시하고라도- 맹신한다는 것이다.  불신의 '도마(Thomas)의 말은 도마로 하여
금 믿도록 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그와  비교 대조함으로써 우리가 다른 사도들을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이야기인 것이다. 도마는 증거를 요구했다. 어떤 종류의 밈에게는  증거를 
찾는 경향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다. 다른 사도들은 아주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증
거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이야말로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지지받고 있는 것
이다. 맹신의 밈은 이성적인 물음을 꺾어 버리는 단순한  무의식적 수단을 행사함으로써 자
기의 영속을 확보하는 것이다.
  맹신은 어떤 것도 정당화할 수 있다. 만약 사람이 다른 신을 믿고 있으면 아니, 만약 사람
이 같은 신을 믿는데 다른 의식을 쓴다면 다만 그것만으로도 맹신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다. 십자가에 매단다, 화형을 한다, 십자군의 검으로 찌른다. 베이루트 노상에서 사살한
다, 벨파스트의 술집에 있는 것을 폭탄으로 날린다,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이다. 맹신이라는 
밈은 몸에 밴 잔인한 방법으로 번식해 가고 있다.  애국적, 정치적 맹신이든, 종교적 맹신이
든 상기의 성질은 똑같은 것이다.
      독신주의
  밈과 유전자는 종종 서로 강하게 화합하는데 때로는 서로 대립하는 수도 있다. 예컨대 독
신주의의 습관 같은 것은 유전에 의해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성 곤충에서 볼 수 있는 
매우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독신주의를 발현시키는 유전자는 유전자 풀 속에서 실패로 운
명지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신주의의 밈은 밈 풀 속에서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밈의 성공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시간
을 T는가에 의해 결정적으로 좌우된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 밈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 이외
에 쓰인 모든 시간을 그 밈의 입장에서 보면 시간 낭비로 보일 것이다. 독신주의의 밈은 성
직자들로부터 아직 인생의 목표를 정하지  않은 소년들에게 전해진다. 전달의  매체가 되는 
것은 각종의 인간적 영향력을 가지는 것, 예컨대 오가는 말, 쓰여지는 문자, 사람에 의한 모
범 등이다. 여기서 논의의 편의상 대중에 대한 성직자의  영향력이 결혼에 의해 약화된다고 
하자. 이는 결혼이 그의 시간과 관심을 크게 차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것은 성직자에
게 독신 생활을 강요할 때에  공식적인 이유로서 제시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위와 같은 
사태가 있을 수 있다면 독신주의의 밈은 결혼을 촉구하는 밈보다 높은 생존가를 나타 낼 수 
있다. 물론 독신주의를 촉구하는 유전자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독신주의의 밈과
는 완전히 역의 결과가 될  것이다. 승려를 밈의 생존 기계라고  한다면 독신주의라는 것도 
그에게 짜 넣어지면 필요한 속성이 된다. 독신주의는 다수의  호조적인 종교적 밈이 만들어 
내는 거대한 복합체의 작은 파트너인 것이다.
  나는 상호 적응한 유전자 복합체의 진화와 같은 방식으로 상호 적응한 밈의 복합체가 진
화한다고 추측하고 있다. 선택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문화적  환경을 이용하는 밈에게 유리
하게 작용한다. 이 문화적 환경은 같은 식으로 선택을 받고 있는 밈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
라서 밈 풀이 진화적으로 안정된 세트로서의 특성을 나타내게 되어 새로운 밈은 쉽게 침입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밈의 밝은 면
  지금까지는 밈의 어두운 면만을 이야기해 온 것 같다. 그러나 밈에도 밝은 면이 있다.  우
리가 사후에 남길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즉, 유전자와 밈이다.  우리는 유전자를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전자 기계이다. 그러나 유전자 기계로서의 우리는 3세대 정도 경과하면 잊
어버리고 말 것이다. 자식이나 또는 손자도  우리와 어딘가 닮은 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예컨대 얼굴의 모양새가 닮았을지 모른다.  음악적 재능이 닮았을지도 모른다. 또는  머리칼 
색깔이 닮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날 때마다 우리 유전자의 기여는 반감해 간
다. 그 기여도는 머지않아 무시할 정도로 될 것이다. 유전자 자체는 불사신일지 몰라도 특정 
개인을 형성하는 유전자의 집합은 붕괴될 운명에 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윌리엄 1세의 직
계 자손이다. 그러나 그녀가 옛날의 대왕의 유전자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할 가능성은 많
이 있다. 번식이라는 과정 속에서 불사를 희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세계 문화에 무언가 기여할 수가 있다면, 예컨대 좋은 의견을 내거나, 
음악을 작곡하거나, 발화식 플러그를 발명하거나, 시를 쓰거나 하면 그것들은 우리의 유전자
가 공통의 유전자 풀 속에  용해되어 버린 후에도 변함없이 길이  생존해 나갈지도 모른다. 
윌리엄스가 지적한 대로, 소크라테스의 유전자 중에서 금일 세계에 살아 남아 있는 것이 과
연 하나라도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누가 그런 것에 관심을 두고 있을 것인가. 
소크라테스, 레오나르도 다빈치,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마르코니 등등의 밈 복합체는 아직도 
건재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전재한 밈의 이론이 아무리 사변적이었다고 해도 여기서 또 한번 강조하고 싶은 중
요한 논의점이 하나 있다. 문화적 특성의 진화와 생존가를  문제삼을 때에는 누구의 생존을 
문제삼는가를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미 본대로  생물학자들은 유전자 
수준에서의 유리함을 탐구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다(취미에 따라서는 개체, 집단 또는 종
의 수준에서 유리함을 탐구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단지 그 자신에게 유리하다
는 이유만으로 문화적 특성이 진화할 수 있는 그런 진화의 양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
해 우리는 지금까지 생각조차도 해 보지 않았다.
  종교, 음악, 그리고 제식춤 등에는 생물학적인 생존가가 있는지 몰라도 그것에 관해 꼭 통
상의 생물학적 생존가를 찾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유전자가 그  생존 기계에 빠른 모방 능
력을 가진 뇌를 제공하게 되면 밈들은 필연적으로 득세한다.  모방에 유전적 유리함이 있다
면 확실히 도움이 되지만 그런 유리함의 존재를 가정할 필요는 없다.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뇌에 모방 능력이 없다면 안 된다는 것뿐이다. 이것만 충족된다면 그 능력을 충분하게 이용
하는 밈이 진화해 나갈 것이다.
      선견 능력
  새로이 등장한 자기 복제자의 화제는 이제 이 정도로 하고,  적당한 희망에 접하며 한 마
디의 말로 이장을 끝맺고 싶다. 그 진화가 밈에 의해  유래됐는지 어떤지 정해진 것은 아니
나, 인간에게는 의식적인 선견 능력이라는 하나의 독자적 특성이 있다. 이기적 존재인  유전
자는(그리고 독자가 이 장의 사변을 인정한다면 밈에게도) 선견 능력이 없다. 그들은 의식을 
갖지 않는 맹목적인 자기 복제자인 것이다. 그들이 자기 복제한다는 사실과 어떤 종의 부가
적인 여러 조건과를 조합하여 생각하면 그들은 이기적(이  책에서 쓴 특수한 의미로)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성질을 불가피하게 진화시킨  것이다. 유전자이든 ala이든 무지한 자기 복
제라는 것은 눈앞의 이기적 이익을 포기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는 경우에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한 예를 공격 행동을 다룬 장에서 보았다. 어느 개체이든 진화
적으로 안정된 전략보다는 '비둘기파의 공동  행위'를 취하는 것이 유리한데도 자연  선택은 
필히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쪽으로 유리하게 작용해 나간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진짜 이타주의의 능력이 인간의 또 하나의 독자적 성질일 가능성도 
있다. 꼭 그리됐으면 좋을 것이나 이 점에 관해 나는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논의할 생
각은 없고, 그것에 관한 밈적인 진화의 가능성을 이것저것 사변할 생각도 없다. 내가 여기서 
강조해 두고 싶은 것은 다음의 한 가지 점이다. 우리가 비록 어두운 측면으로 눈을 돌려 개
개의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우리의  의식적인 선견 능력, 
즉 상상력을 구사하여 장래의 사태를 시뮬레이트 하는 능력에는 맹목적인 자기  복제자들이 
일으키는 최악의 이기적 폭거에서 우리를  구출하는 능력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단순한 눈앞의 이기적 이익보다 오히려 장기적인 이기적 이익을 촉진시킬  정도
의 지적 능력은 있다. 우리는 '비둘기파의 공동 행위'에  참가하는 것이 장기적 이익에 이어
짐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같은 경쟁자와 함께 앉아 그  공동 행위를 잘 실행하는 방법을 
서로 말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낳은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하고 만일 더 필요하면 
우리를 교화시킨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는 자
연계에 안주할 여기가 없고 세계의 전 역사를 통해 과거에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
는 그것을 계획적으로 육성하여 교육하는 방법을 논하는 것까지는 할 수 있다. 우리는 유전
자 기계로서 조립되어 밈 기계로서  교화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들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상에는 유일하게 우리 인간만이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들의 전제적 
지배에 반역할 수 있다.

            제 12 장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 한다
        마음씨 좋은 놈, 마음씨 나쁜 놈
  "마음씨 좋은 놈이 꼴찌한다." 비록 일부 전문가는 그보다 먼저, 또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
다고 주장할지라도 이 문구는 야구의 세계에서 유래된 것 같다. 미국의 생물학자 하딘은 그
것을 '사회 생물학(sociobiology)' 또는 '이기적  유전자학(selfish genery)'을 요약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것이 어떻게 딱 맞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만일 '마음씨 좋은 놈' 이라는 구어
체의 의미를 그것에 대응하는 다원주의적 말로 번역하면 , 마음씨 좋은 놈이란 가기와 같은 
종의 다른 구성원들을 도와서 스스로의 희생으로 그들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하게 하는 
개체이다. 따라서 마음씨 좋은 놈의 수는 감소하게 될 운명에 있다고 생각된다. 마음씨가 좋
다는 것은 다윈주의적 죽음을 당한다. 그러나 '마음씨 좋은' 이란 구어적인 단어에는 또 하
나의 전문 용어로서 해석이 있다.  만일 이 정의를 일상회화에서 그다지  떨어져 있지 않은 
의미로 해용한다면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이 될 수 있다. 지금부터 보다 낙관주의적인 결론
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딜레마
  제 10장의 '원한파'를 상기하기 바란다.  그들은 분명히 이타적인 방법으로  서로 돕는데, 
이전에 자기를 돕기를 거부한 개체에 대해서는 한을 품고 도와주기를 거절하는 새들이었다. 
원한파는 집단 속에서 우세를 차지하게 됐다. 왜냐하면 '선심파'(무분별하게 남을 도와 자신
은 이용된다)와 '사기꾼'(무분별하고 무자비하게 이용하려고  시도해서 나중에는 서로 손해
를 입는다)의 어느 것 보다도 많은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해 줄 수 있기 때문 이다. 원한
파의 이야기는 트라이버스가 '호혜적 이타주의' 라고 한 중요한 일반 원리를 예증하고 있다. 
청소어의 예(제10장)에서 본 바대로 호혜적 이타주의는 단일  종의 구성원에 한정되지 않는
다. 그것은 공생이라고 하는 모든 관계에 있어서 작동하고 있다. 예컨대  개미는 그들의 '가
축' 인 진딧물에서 액을 짠다. 제 10장이 씌어진 후, 미국의  정치학자인 엑셀로드는 호혜적 
이타주의 라는 생각을 자극적인 새로운 방향으로 끌어들였다 내가 이 이야기의  첫머리에서 
조금 비친 전문적인 의미의 'nice'라는 단어를 새롭게 한 것은 엑셀로드였다.
  엑셀로드는 많은 정치학자, 경제학자,  수학자, 심리학자와 같이  죄수의 딜레마라고 하는 
단순한 게임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단순해서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그것을 아
주 오해하고 거기에 무언가가 더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
나 그 단순함은 그렇게 보일 뿐이다. 도서관의 몇 개의  선반이 이 현혹시키는 게임에서 파
생된 문제에 해당된다. 많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전략적인  방위계획의 열쇠를 그것이 쥐
고 잇고, 또 제 3차 대전 을 저지하기 위해서 그것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 생물학자로서 나는 많은 야생동식물이 진화적인  시간 속에서 행해지는 그칠 줄  모르는 
죄수의 딜레마라는 게임에 빠져 있는 엑셀로드와 해밀턴의 의견에 동의한다. 
      배신과 협력의 게임
  그 본래의 인간이 하는 형식에서 이 게임을 하는 방법을  설명하자. 물주가 아나 있고 두 
사람의 상대에게 판정을 내려 이득을 지불한다. 내가 당신과 내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각
각의 손에는 '협력'과 '베신' 이라 표시된 두 장의 카드 밖에 없다.  내기할 때는 각각의 손
에 있는 카드 한 장을 뽑아 책상 위에 엎어 둔다. 카드를 엎을 때는 어느 쪽도 상대의 움직
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한다. 즉, 실질적으로  쌍방이 동시에 움직인다. 그리고 물주
가 카드를 뒤집기를 조용히 보며 기다린다.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이유는, 승자는 자기가 어
쩐 카드를 뽑았나 하는 것 뿐만 아니라(그것에 관해서는 나도 당신도 각각 알고 있다) 상대
가 무었을 뽑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되기 때문이다.(그것에  대해서는 물주가 보여 줄 때까지 
모른다).
  카드는 2.2매 있으므로 조합은 네 가지가 된다. 각각의 경우에서 이득은 아래와 같다.
  결과Ⅰ: 나와 당신이 같이 '협력'을 냈을 때 물주는 양자에게  300달러를 지불한다. 이 금
액은 상호 협
력의 보수라고 한다.
  결과Ⅱ: 나와 당신이 같이 '배신'을 냈을  때 물주는 벌로서 양자로부터 10달러를 징수한
다. 이것은 상호 배신의 벌금이라고 한다.
  결과Ⅲ: 당신이 '협력'을 내고 내가 '배신'을 냈을 때 물주는  나에게 500달러를 지불하고
(배신에 대한 유혹료) 당신(속은 선심파)으로  부터 100달러를 장수한다.
  결과Ⅳ: 당신이 '배신'을 내고 내가  '협력'을 내면 물주는 당신에게  500달러의 유혹료를 
지불하고 패자인 나에게서 100달러를 징수한다.
  결과 Ⅲ과 Ⅳ는 분명히 경상 관계에 있다.  즉, 한쪽은 큰 이득을 얻고 다른 한쪽은  크게 
손해를 본다.
  결과 Ⅰ과 Ⅱ에서는 서로 손득은 같으나 우리 쌍방에게는 Ⅰ쪽이 Ⅱ보다도 보다 바람직하
다. 정확한 금액은 문제가 아니다. 그들 중에서 몇 번이 플러스(지급)이고 몇 번이 마이너스
(징수)인가도 문제는 아니다. 이 게임이 진짜 죄수의 딜레마로서의 자격을 가진 후에 문제인 
것은 그들의 서열인 것이다. 배신에  대한 유혹료는 상호 협력의 보수보다  높지 않으면 안 
되고 상호 협력의 보수는 상호 배신의 벌금보다도, 그리고 상호 배신의 벌금은 선심파의 손
실보다도 조건이 좋지 않으면 안 된다.(엄밀히 말하면  이 게임을 진짜 죄수의 딜레마가 되
게 하는 또 하나의 조건이 있다. 즉, 유혹료와 선심파의 지불의 평균이 상호 협력의  보수를 
초과해서는 안 된다. 이 부가적인 조건의 이유는 후에 또 나온다.)  
  네 가지 경우의 결과가 (그림 A)에서 수지표로 요약되어 있다.
  (그림 A)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나온 여러 가지 결과로부터 내가 얻은 보수와 지불
  당신이 협력을 내고 내가 협력을 낸 경우- 꽤  좋음, 보수(상호 협력에 대한), 예: 300 달

  당신이 배신을 내고 내가 협력을 낸 경우- 매우 나쁨, 선심파의 지불, 예: 100 달러 징수
  당신이 협력을 내고 내가 배신을 낸 경우- 매우 좋음, 유혹료(배신으로), 예 500달러
  당신이 배신을 내고 내가 배신을 낸 경우- 꽤 나쁨, 벌금(상호 배신에  대한), 예 10 달러 
징수
  그럼 왜 딜레마 일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수지표를 보고 당신과 게임을  하고 
있을 때에 나의 머리 속을 스치는 사고를 상상해 주기 바란다. 나는  당신이 냏 수 있는 카
드가 '협력'과 '배신'이라는 2장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차례대로 생각해 보자. 만일 
당신이 '배신'을 냈다면 나 또한 최선의 카드로 '배신'을 낼  것이다. 상호 배신으로 형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도 만일 '협력'의 카드를 낸다면 나는 선심파의 지불을 해야만 되
어 그 쪽이 더 나쁠 것이다. 다음에는 당신이 딴 짓을 한 경우 즉, '협력'의 카드를 냈을 때
를 상상해 보자. 이때에도 또한 '배신'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다. 만일 내가 협력하
고 있으면 두 사람 모두는 300달러의 높은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배신
하면 더 많은 500달러의 이득을 얻을 수가 있다. 결론은 당신이  어느 카드를 내든 그 것에 
상관없이 나의 최선의 행동은 '항상 배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무랄 데 없는 논리로 당신이 어떻든 나는 배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해답
을 냈다. 그 리고 당신은 그에 못지 않게 나무랄 데 없는  논리로 똑같은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이성적인 경기자가 만나면 모두 배신하여 같이 벌금 또는 약간의 
이득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만일 쌍방이 '협력'만을 낸다면 상호 협력의 이유로 비교적 높은 보수(우리
의 예로는 300달러)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있다. 이 게임이 왜  딜레마이며, 왜 
그것이 미칠 정도로 역설적으로 보이며, 왜 그것에 대항하는  법칙이 마땅이 존재해야 한다
고 제안되어 왔는가의 이유이다.
      죄수의 딜레마
  '죄수'란 하나의 특별한 상징적인 예에서 유래한다.  이 경우의 통화는 돈이 아닌 죄수의 
형기이다. 페터슨(Pwteraon)과 모리아티(Moriarty)는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 때문에 공범 혐
의로 투옥되어 있다. 
  그 죄수들은 각각 독방 속에서 공범자에 대한 불이익한 증언을 함으로써 동료를 배신하도
록 유혹당했다. 처분은 두 사람의 죄수가  어떻게 하는가에 딸 결정되며, 어느 쪽도  상대가 
어떻게 했는지 모른다. 만일 페터슨이 모리아티에게  완전히 죄를 뒤집어씌우고 모리아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협력했던 옛 친구가 마음을 바꾸어 배반자로서) 그 이야기를 믿
을 수 있게 되어 모리아티는 무거운 형기를 받게 되고 페터슨은 무죄석방이 되어 배신에 대
한 유혹에 굴복한 셈이 된다. 만일 각각이 배신하면 양자  모두 죄가 인정되나 증거를 제공
한 점으로 약간의 신용을 얻어 어느 정도 경감된 형기, 즉 상호 배신의 벌을 받게  된다. 만
일 양자가 협력하여(서로는 협력이지만 당국에 대해서는 반대)  증언을 거부하면 주요한 범
죄에 관해서 두 사람 중 어느 쪽이든 유죄가 될 충분한 증거가 없으므로 보다 경미한  죄로 
짧은 형기, 즉 상호 협력의 보수를 받는다. 형기를 '보수'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지도 모르나 양자 택일로 인해 오랫동안  옥중에서 보내게 된다면 그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이다. '지불'이 돈이 아니라  형기였지만 이 게임의 기본적 특징이 보존되어 
있는 것을 느낄 것이다(네 가지 경우의 바람직한 순서를 고찰해 보기 바람). 만이 당신 자신
이 각각의 죄수의 입장에서 양쪽모두 합리적인 자기 이익에  정신을 쏟는다고 가정하고, 서
로 협정을 위한 타협이 안 된다는 것을 상기하면, 어느  쪽도 서로 배신하여 그로 말미암아 
쌍방 모두 무거운 형기를 선고 받는 것 이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딜레마로부터 피하는 방법은 있는가? 쌍방 모두가 상대가 무엇을 하든 간에 자기 자신
은 '배신하는'이상으로 좋은 방책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또 두 사람이 협력하
기만 하면 각각 그것이 보다 이익을 얻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만일 ~만 한다면, 만일  ~만 
하면, 만일 동의에 도달하는 무슨 방법이  있기만 하면, 각각의 선수가 상대가 이기적인  큰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도록 안심시킬 방법만 있다고  하면, 협약을 지킬 수 있
는 무슨 방법이 있다면.
  죄수의 딜레마라는 단순한 게임에서도 신뢰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선수 중 적어도 한쪽
이 대단한 선심파이지만 진짜 성인과 같은 선심파가 아닌 한 최종적으로 이 게임은 쌍방에
게 역설적으로 빈약한 결과를 동반하는 상호 배신으로 끝나게 될 운명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 게임에는 또 하나의 설명이 있다  . 그것은 '반복' 또는 '되풀이'  죄수의 딜레마라고 한
다. 반복 게임은 보다 공이 드는 것이고, 그 복잡함 속에 희망이 있다. 
  이 일반적인 반복 게임은 동일한 경기자에  의해 제한없이 반복되어 행해질 뿐만  아니라 
또한 나와 당신은 서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 사이에는 물주가 앉아 있다. 또한 서로의 손 안
에는 '협력'과 '배신'이라는 2장의 카드  밖에 없다. 또한 우리는 이들  카드의 어느 한쪽을 
냄으로써 승부를 내고 물주는 먼저 제시한 규칙에 따라 돈을 지불하거나, 벌금을  징수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으로 게임이 끝나는 대신에 우리는 또다시 카드를 집어서 다음의 승부에 
대비한다. 몇 번 승부를 계속하는 사이에 우리에게는 신용 또는 불신을 쌓아 보답하거나 외
유하거나 용서와 복수를 하거나 하는 기회가 주어진다. 제한없이  긴 게임에서 중요한 점은 
서로가 손해를 볼 것 없이 물주에게 손해를 주어 쌍방이 이길 수가 있다는 것이다.
  10번 승부를 한 후, 이론적으로 나는 최대 5,000달러를 얻을 수 있으나 그것은 당신이  터
무니없이 어리석어서 (또는 성인처럼)내가 항상 배신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매번 ' 협
력'의 카드를 계속 내고 있을 경우에 그렇다.  보다 현실적으로는 쌍방이 10번의 승부 모두
에서 '협력'의 카드를 냄으로써 물주의 돈 3,000달러를 손에 넣는 것이 우리에게는 훨씬 간
단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특히 성인적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 카드를  내는 
상대의 버릇으로 보아 상대가 신용할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서로의 행동을 살필 수가 있다. 또 하나 극히 일어나기 쉬운 가능성이 높은 일은 우리들 누
구도 상대를 신용하지 않는 것이다. 즉, 쌍방이 10번의 승부  모두에 '배신'을 계속 내어 물
주가 우리 각각 으로부터 100달러를 얻는 것이다. 모든 것 중에서 가능성이 높은 것은 우리
가 서로 부분적으로 상대를 신용하고 '협력'과 '배신'을 다소라도 섞은 순서로 내고 최종적
으로 어느 정도 중간 금액을 얻는다는 것이다.
  제 10자에서 말한 서로의 깃털에서 진드기를  제거한 새들은 일종의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럴까? 새에게 있어 자기 몸에 붙은 진드기를 잡아 내는 것은 
중요하나 자기의 머리 꼭대기에는 부리가 못 미치고 자기를 대신하여 그것을 제거해 줄 친
구를 필요로 함을 생각하기 바란다. 후에 그가 갚아 준다는 것은 공평하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새에게 있어 이 서비스는 그다지 대단한 것은 아닐지라도 시간과 에너지 지불이 켰
다. 만일 새가 속이고 - 자기의 진드기를 잡게 한 후에 갚기를 거부하므로 -  도망칠 수 있
다면 그는 비용을 치르지 않고 모든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일어  날 수 있는 결과를 순서대
로 나열하면 거시에는 실제로 진짜  죄수의 딜레마게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자가 
서로 진드기를 잡아 주고 협력 하면 어느 정도 득이 되나 갚아 주는 대가를 지불하기를  거
부하고 보다 득을 얻으려는 유혹도 당연히 존재한다. 쌍방이  진드기 잡기를 거부하고 배신
하면 조금 손해를 보나 다른 새의 진드기를 잡기 위한 노력을 하면서 스스로는 진드기 꾸러
기가 되고 마는 것처럼 심한 손해는 없다. 그 수치 표는 (그림 B)와 같다
  (그림 B) 새의 진드기 잡기 게임의 여러 가지 결과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보수와 지불
  당신이 협력을 내고 내가 협력을 낸 경우 : 꽤 좋음, 보수, 나는 진드기 잡기를 받는다. 그 
대신 나도 당신의 진드기를 잡아 주는 비용을 지불한다.
  당신이 배신을 내고 내가 협력을 낸 경우 : 매우 나쁨,  패자의 지불, 나는 진드기를 내버
려 둔 채로 당신의 진드기를 잡아 주는 비용을 지불한다.
  내가 배신을 내고 당신이 협력을 낸 경우 : 매우 좋음,  유혹료, 나는 진드기 잡기를 받는
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진드기를 잡아 주는 비용을 지불하지는 않는다. 
  내가 배신을 내고 당신이 배신을 낸 경우 : 꽤 나쁨, 벌금, 나는 진드기를 내버려 둔 채로 
당신의 진드기를  잡아 주지는 않는다는 가냘픈 위안을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일례에 불과하다. 그것에 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인간의 생활 뿐
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의 생활까지도 반복 죄수 딜레마 게임에 말려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
게 된다. 식물의 생활이라니? 그레 왜 이상한가? 우리가 의식적인 전략(더욱이 우리 인간은 
때로 그럴 때도 있으나)에 관해서가 아닌 유전자가 미리 부터 프로그램 되어  있는 것 같은 
전략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을 기억하라. 후에 식물, 여러 가지 동물 그리고 박테리아 까지도 
모두 반복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게 된다. 지금 여기서 반복에 관한 매
우 중요한 일에 대해 더 자세한 검토를 해 보자.
      반복게임
  '배신'이 유일의 합리적인 전략임을 어느 정도 예측하기 쉬운 단순한 게임과는 달리 반복 
방식의 게임은 다수의 전략적 여지를 제공 한다. 단순한 게임에서 가능한 전략은 두 가지, '
협력'과 '배신' 이다. 그렇지만 반복 방식에서는 여러 가지 전략이 생각되기 때문에 어느 것
이 최선 인가는 결코 분명치가 않다. 예컨데 "대개의 경우는  협력하는데, 승부 중 10%정도
는 배신 카드를 낸다." 하는 전략은 몇 천 중에 겨우 일례에 불과하다. 또는 게임의 과거 역
사에 의한 조건적 전략이 될지도 모른다. 나의  '원한파' 가 그 예이다. 그것은 얼굴 생김새
에 관해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고 기본적으로 협력적인데 앞서 상대 선수가 배신한 적
이 있으면 배신하는 것이다. 이외에 보다 관대하고 보다  단기의 기억력을 가진다는 전략도 
있을 것이다.
  분명히 반복게임에서 취할 수 있는 전략을 제산하는 것은 우리의 창의적 재능 뿐이다. 어
느 것이 최선인가를 해명할 수가 있을  것인가? 이것은 엑셀로드가 스스로 맡겨서 한  일이
다. 그는 경쟁을 벌인다는 재미 있는 아이디어를 내서 전략을 제출하도록 게임 이론의 전문
가 에게 광고를 냈다. 이경우의 전략의 의미는 미리 프로그램된 행동의 규칙인 것이고, 따라
서 응모자는 작품을 컴퓨터 언어로 송부하는 것이 적절 했다.  14번째 까지 같은 전략이 제
안 됐다. 이에 그치지 않고  엑셀로드는 랜덤(random)이라는 15 번째의  전략을 추가 했다. 
이것은 '협력'과 '배신'을 아무렇게나 내는 것만으로 일종의 기준이 되는 '무전략'의 역할을 
했다. 만일 어떤 전략이 랜덤보다 득이 아니면 그것은 상당히 좋지 못함에 틀림없다. 
  엑셀로드는 15번째 전략을 모두 하나의 공통 프로그램 언어로 번역하여 대형 컴퓨터로 서
로 대전 시켰다. 각각의 전력은 다른 모든 전략과 순차적으로 짝지어져서 반복 죄수의 딜레
마 게임을 한다. 15번째의 전략이 있었기 때문에 컴퓨터로 행해지는 게임은 15×15, 즉  125 
가지가 있다. 각각의 대전에서 200 번의 승부가 끝나면 득점을 총계해서 승자를 선언한다.
  우리는 어느 전략이 어느 특정의 상대에게 이기는지, 즉 승부 여하에는 관심이 없다. 문제
는 어느 전략이 15회의 대전 모두를 합계했을 때에 최대의 '돈'을 누적 하느냐는  것이다. '
돈'이라는 것은 단순히 아래에 있는 도식에 따라  주어지는 '득점'을 의미한다. 즉, 상호 협
력은 3점, 배신에 대한 유혹료는 5점, 상호배신의 벌은1점, 패자의 지불은 0점이다. 
  하나의 전략이 달성할 수 있는 최고 득점은 1만 5000점 이다(매  라운드 5점으로 200라운
드, 그것을 매회마다 상대에게 모두 얻으면)이다. 최저 득점은 0 이다. 말할 것도 없지만 이
두 개의 극단 적인 예는 실제로 일어나기 않는다. 하나의  전략이 15회의 대전 동안 평균치
로서 획득할 수 있는 최대치는 600 점을 크게 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두 사람의 경기자
가 계속 협력하여 200라운드의 게임의 각 라운드에 3 점씩 획득해 갔을 때에 각각의 경기자
가 받는 득점이다. 만일 어느 쪽이든 한편이  배신의 유혹에 굴복하면 다른 경기자의 보복( 
제안된 전략의 대부분은 그 속에  어떤 종류의 보복 행동을 짜  넣고 있다. ) 때문에 600점 
보다 적은 득점으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600점을 게임의 기준으로 쓰고 모든 
득점을 이 기준의 백분율로 표시할 수 있다. 이 척도로는 이론적으로  최고 166%(1000점)까
지 될 수 있으나 실험적으로 평균 득점이 600점을 넘는 전략은 없다. 
  이 토너먼트 시합에서는 상대방이 인간이 아닌 컴퓨터 프로그램,  즉 미리 프로그램된 전
략이라는 것을 생각하라. 그 프로그램을  작성한 자는 육체를 프로그램하는  유전자와 같은 
역할을 연출한 셈이다. 전략은 그 작성자의 모형 '대리인' 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그 작성자
가 두 개 이상의 전략을 제안 할 수도 있었다. (더욱이 한 사람의 작성자가 경기에 복수 전
략을 '짜넣고' 그 중의 하나가 다른 전략으로부터 희생적인 협력이라는 이익을 받게끔 하려
면 부정 행위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엑셀로드도 아마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하면 갚는다'와 '소박한 시험꾼'
  몇 개의 교묘한 전략이 제안되었으나 당연히 그 작성자의 교묘함에 비하면 훨씬 못 미친
다. 승리를 거둔 전략은 놀랍게도 가장 단순하고 표면적으로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교묘함
이 부족했다. 그것은 '당하면 갚는다(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이 곱다,fit for fat)'로 불렸고 
제안자는 유명한 심리학자이자 게임  이론가인 토론토 대학의  라포포트 교수였다. '당하면 
갚는다' 게임의 최초의 승부는 협력으로 시작하고 그 이후는 단순히 전번에 상대가 뺀 손을 
흉내내는 것 뿐이다. 
  '당하면 갚는다'전략이 관여하는 게임은 어떻게 진행하는가? 언제든지  무엇이 일어날 후 
있는지는 상대의 경기에 달렸다. 최초의  상대선수도 '당하면 갚는다' 라고 상정해  보자(각 
전략은 다른 14개의 전략 외에 자기 자신의  사본과도 경기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라). 쌍
방 모두 협력부터 시작한다. 다음 번에는 각각 상대가 전번에 뺀 손을 흉내 내는데 그것 은 
'협력' 이었다. 양자 모두 게임의 끝까지 '협력'을 계속하여 600 점이라는 '기준'의  100%의 
득점을 얻게 된다. 
  자, 다음은 '당하면 갚아라'가 '소박한  시험꾼'(naive prober)으로 불리는 전략과  경기할 
때를 생각해 보자. '소박한 시험꾼' 은 실제로는 액셀로드의 경합에는 참가하지 않으나 그럼
에도 불구하고 유익하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당하면 갚는다'와 같으나 때로는 10회 중에 1
회는 함부로 이유없이 배신하여 유혹료로서  높은 득점을 요구한다. 이  시험에서 ' 소박한 
시험꾼'이 배신을 하기까지 경기자는 '당하면 갚는다'와 같을 것이다. 길게 그리고  상호 이
익이 있는 협력의 연속은 쌍방의 경기자에게 쾌적한 100% 의 기준점을  수반하면서 자연스
럽게 진행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돌연히 예고 없이, 예컨데 8회째 승부에서 '소박한 시험꾼'
이 배신한다. '당하면 갚는다'는 물론 이 승부에서는 '협력'을 내고 있었게 때문에 0 점이라
는 패자의 지불을 하게 된다. '소박한 시험꾼'은 그 유혹료 5점을 얻었기 때문에 득이 된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음의 승부에서는 '당하면 갚는다' 가 '보복 한다'. 그것은 그저 전번 
상대의 손을 흉내내는 규칙에 따라 '배신'을 내는 것이다. 한편'소박한 시험꾼'은 말려든 스
스로의 모방의 규칙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여 적의 '협력' 이라는 손을 모방하고 있다. 그래서 
패자가 0점을 얻는데 대해 '당하면 갚는다.' 는 5점이라는 높은 득점을 얻는다. 다음 승부에
서는 '소박한 시험꾼'이 -공정성이 없는 것으로 생각될지  몰라도- '당하면 갚는다'의 배신
에 '보복한다.' 그리고 그 역이 교대로 계속된다. 이 교대의  방법이 진행되는 동안 양 선수
는 한 승부당 평균 2.5점 (5점과 0 점의 평균)을 받는다. 이것은 양선수가 상호 협력을 계속
하여 모을 수 있는 착실한 3점 보다도 낮다(이것이  앞에서 설명한 '부가적인 조건'에의 이
유이다). '소박한 시험꾼'이 '당하면 갚는다'와 경기할 때에는 약자 모두  '당하면 갚는다'끼
리 경기하는 것보다 나쁜 점수가 된다. 그리고 만일 '소박한 시험꾼'끼리 경기하면 양자 모
두 오히려 더 나쁜 결과로 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배신의 상호 보복은 더 일찍부터 시
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후회하는 시험꾼'
  이번에는 '후회하는 시험꾼'(remoreseful prober) 이라는 또 하나의 전략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후회하는 시험꾼'은 ' 소박한 시험꾼'과 닮았으나 그저  교대로 반복되는 보복의 연속
을 타파하는 적극적인 방책을 강구하는 점만이 다르다.  그러기 위해서 이것은 ' 당하면 갚
는다'와 '소박한 시험꾼'의 어느 쪽 보다도 조금 긴 기억을 가질 필요가 있다. '후회하는 시
험꾼'은 자기가 그저 돌발적으로 배신했을 뿐인지  어떤지, 그리고 결과가 즉각적인 보복이
었는지 어떤지를 기억하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후회를 염두에 두고' 보복할 것 없
이 '한번만 자유로이 때리는' 것을 적에게 허락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호 보복의 연속이 아
직 새싹일 때 꺾임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여기서 '후회하는 시험꾼'과 '당하면 갚는
다' 와의 사이에 진행되는 상상의 게임을 계속해 보면 일어날 수 있었던  상호 보복의 연속
이 빨리 진압되는 것을 볼 것이다. 게임의 대부분은 상호  협력에 소비되고 양쪽 선수 모두 
그 결과와의 대전에서 ' 소박한 시험꾼' 보다도 좋은 점수를 딸 수 있으나 '당하면 갚는다'
가 자기 자신과 대전 했을 때만큼 좋은 점수는 아니다. 
  엑셀로드의 토너먼트에서 취급되는 전략 중에 어떤 것은 '후회하는 시험꾼'과 '소박한 시
험꾼'의 어느 것보다도 세련된 것이었으나, 그것들도 평균하면 단순히  '당하면 갚는다'보다
는 적은 득점으로 그친다. 실제로 모든  전략(랜덤 제외)중에서 가작 성공률이 낮았던 것은 
가장 공들인 것이었다. 그것은 '익명씨'는 누구인가? 펜타곤의 흑막일까?  CIA장관인가? 키
신저인가? 엑셀로드 자신인가? 결코 알 수 없다. 
  제출된 특정의 전략을 상세히 검토하는 것은 그다지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컴퓨
터 프로그램 작성자의 교묘함에 관한 책은 아니다. 어떤 범주에  따라 각 전략을 분류한 다
음 각각의 더 넓은 수분마다의 성공도를 검토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 엑셀로드가 인정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범주는 '마음씨 좋은' 이다. '마음씨 좋은'  전략은 자기부터 최초로 배신
하는 일이 결코 없는 것으로 정의된다. '당하면 갚는다' 는  그 일례이다. 그것은 배신할 수
가 있으나 보복으로 그것을 한다. '소박한 시험꾼'과 '후회하는 시험꾼' 은 얼마나 희소하든 
간에 도발당하지 않을 때 때때로 배신을 하므로 간악한  전략이다. 토너먼트에 참가한 15개
의 전략 중에 8개는 '마음씨 좋은' 이다. 득점이 높은 쪽부터 상위 8위까지 모두  8개의 '마
음씨 좋은' 전략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 깊다. '당하면  갚는다'는 평균 504.5점을 
얻는데 이것은 우리의 기준점인 600점의  84%로 , 비교적 고득점이다.  다른 '마음씨 좋은' 
전략도 이것보다 조금 낮게 83.4%에서 78.6%의 사이의  득점을 한다. 이 득점과 간악한 전
략 중에서 최고로 성공한 그래스캠프(Graaskamp)가 얻은 66.8%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다. 
이 게임에서는 마음씨 좋은놈이 잘된다는 것이 비교적 유력한 것 같다. 
      관용
  엑셀로드의 또 하나의 전문 용어는  '관용(forgiving)'이다. '관용'전략이란 것은 보복하는 
일은 있으나 단기의 기억 밖에 없다.  그것은 오래된 나쁜 일을 바로 잊어  버린다. '당하면 
갚는다'는 하나의 관용 전략이다. 배신자에 대해 즉시  한대 때려서 갚고 그 후에는 과거를 
씻은 듯이 잊는다. 제 10 장에서의 '원한파'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그 기억은 게임의전
기간을 통해 지속된다. 한번이라도 자기에게 배신한 적이 있는 상대에 대한 원한은 결코 잊
지 않는다.   형식상으로 '원한파'와  같은  전략이  엑셀로드의  토너먼트에서는 프리드만
(frideman)이라는 호칭으로 제출되었으나 성적은 별로 좋지 않다. 모든 마음씨 좋은 전략(구
분상 프리드만 전략은 '마음씨 좋은' 전략이면서도 전혀 관용이 없음에  주의)중에 '원한파/
프리드만'은 두번째로 나뿐 성적이다. 관용이 없는 전략이 그렇게 잘 안 되는 이유는 적이 '
후회하는' 전략일 경우에도 상호 보복의 연속을 타개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당하면 갚는다' 보다 더 관대할 수도 있다. '두 발에 안 발 갚는다'는 전략은 최종적으로 
보복할 때까지 적이 연거푸 두 번 배신하는 것을 용납한다. 이것은 지나치게 도량이 넓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엑셀로드는 누군가가  이 토너먼트에다 '두 발에 한
발 갚기'를 제안했었다면 그것이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상호 보복의 연속을 회피하는 데 능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승리하는 전략에 두 가지 특징이 있다는 것을 상정할 수 있다. 즉 '마음씨 
좋기'와 '관용함'이다. 거의 유토피아적인 경향의 이 결론- 즉 마음씨 좋기와 관용함이 합당
하다는 결론-은 미묘하게 간악한 전략을 제출함으로  인해 지나치게 교묘히 하려고 시도한 
전문가들을 많이 놀라게 했다. 또 한편 마음씨 좋은 전략을 제출한 사람까지도 '두 발에 한
발 갚기' 라 할 정도로 관용적인 전략을 굳이 제출하는 일은 없었다. 
  엑셀로드는 두 번째 토너먼트를 광고했다. 그는  62명으로부터 응모를 받고 거기에다 '랜
덤'을 부사하여 전부 63명으로 했다. 이번에는 한 게임당 승부의 정확한 회수를 200회로 고
정하지 않ㄱ소 미정으로 했는데 그렇게 해야 할 이유에 관해서는 후에 다시 논하기로 하자. 
이번에도 역시 득점을 '기준점', 즉 '항상 협력적'인 득점의 백분율로 나타낼 수 있다. 다만 
그 기준점은 더 복잡한 계산을 필요로 하여 이미 600점으로 고정될 수 없다. 
  두 번째 토너먼트 프로그램 '당하면  갚는다'와 그 밖의'마음씨 좋은''관용한'  전략이 왜 
모두 그렇게 까지 잘 되느냐에 관한 엑셀로드의 분석을 포함해 첫 번째의 결과를 제공하게 
되었다. 선수가 이 배경의 정보를 어쩐 모양으로든 고려할 것이라는 것은 당연히  예상된다. 
실제로 그들은 두 가지 사고 의 유파로 나뉜다. 한 사고 의 유파는 마음씨 좋기와 관용함이 
확실히 승자로 되는 성질이라고 생각하여 이에  따라 '마음씨 좋은'과 '관용함'전략을 제출
했다. 메이나드-스미스는 초관용의 '두 발에 한발 갚는'전략을 제출하는데 까지 갔다. 또 다
른 사고의 유파는 그들의 많은 동료가 엑셀로드의 논문을 읽고 이번에는 '마음씨 좋은' '관
용한' 전략을 제출할 것으로 생각하고 간악한 전략을 제출하여 예상되는 약자들을 착취하려
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다시 간악함은 갚지 못했다. 또한 라포포트에 의해 제출 된 '당하면 갚는다' 가 
승자가 되고 기준점이 96%라는 훌륭한 득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또다시 마음씨 좋은 전략
은 대체로 간악한 전략보다 더 성공했다. 상위 15위중 하나만 제외하면 모두 '마음씨 좋은' 
전략이고 하위 15위중 하나만 제외하면 모두 '간악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두 발에 한발 갚
기'는 만일 첫 번째의 토너먼트에 제출 했으면  이겼을 것이나 두 번째에는 이기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번 전쟁터에는 그와 같이 사기치지 않는 약자를 무정하게 용서 없이 포식할 수 
있는 더 미묘하고 간악한 전략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이와 같은 토너먼트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점의 하나를 강조하고 있다. 즉 전략의 
성공은 다른 어떤 전략이 제출되는가에 달려 있다. 그야말로 '두 발에 한발 갚기'가 순위 중 
비교적 하위에 랭크되는 두 번째의 토너먼트와 '두 발에 한발 갚기'가 승자로 되는 첫 번째
의 차이를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책은 컴퓨터 프로그램 
작성자의 독창력에 관한 책은 아니다. 보다 일반적이고 보다  자의적이 아니라는 의미로 어
느 것이 참으로 최선의 전략인지를 판단하는 객관적인 방법이 있을까? 여기까지 읽은 독자
는 이미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이라는 이론에서 그 답을 발견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엑셀로드는 그이 초기의 결과를 여러 사람에게 회람하여 두 번째의 토너먼트에 전략을 제
출하도록 초청했는데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것에 응하지 않고 대신에 하나의 
제안을 했다. 엑셀로드는 이미 ESS의 용어를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 경향이 매우 중
요하다고 느끼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해밀턴과 접촉하도록 편지로 권했던 것이다. 당시 엑셀
로드는 해밀턴과 접촉하였고, 그 후에 행해진 두 사람의 공동 연구의 성과가 1981년의  <사
이언스>지에 발표되었다. 이 논문은 전미 과학 진흥협회의 뉴콤 클리브랜드 상을 획득했다. 
반복 죄수의 딜레마가 유쾌하고 기발한 생물학적 실례 몇 가지에 관하여 논한 것과 더불어 
엑셀로드와 해밀턴은 내가 그것을 ESS적 접근의 정당한 인식으로 간주하도록 하고 있다.
        순차 순환 대기 방식
  ESS적 접근을 액셀로드의 두 번째 토너먼트에 적용된 '순차 순환 대기 방신(round-robin 
system)'과 비교해 보자. 순차 순환 대기 방식이란 축구의 리그전과 같은 것이다. 각각의 전
략이 다른 전략의 각각과 같은 회수만 대전하다. 한 전략의  최종 득점은 다른 전략 모두와
의 대전에서 획득한 득점의 총계이다. 따라서 리그전의 토너먼트에서 승리하려면 사람은 제
출한 모든 다른 전략에 대해 잘 대항해야만 한다. 폭넓은 다른 전략에 대해, 잘 되는 전략에 
대해 액셀로드가 붙인 이름은 '강건함(robust)'이다. '당하면 갚는다'는 '강건한'  전략인 것으
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제출한 일련의 전략은 자의적인 세트이다. 이것이야말로 전에 
우리를 골탕먹인 점이다. 그리고 종종 액셀로드의 최초의 토너먼트에는 참가자의 거의 절반
이 '마음씨 좋은' 전략이었다. 이와 같은 풍토 속에서 '당하면 갚는다'가 이기고 또한  '두 발
에 한 발 갚기'가 제출된다면 이 풍토 속에서는 이겼을 것이다. 그러나 참가자의 거의  모두
가 '간악한' 전략이었다고 상상해 보자. 이것은 쉽게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결국에는 제출된 
14번의 전략 중 6번은 '간악한' 것이었다. 만일 13번 전부가 '간악한' 것이었다면  '당하면 갚
는다'는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 '풍토'는 '당하면 갚는다'에게는 나빴을 것이다. 획득 상금
뿐만이 아니고 각 전략 사이의 성공도의  순위도 종종 어떤 전략이 제출되었는가에  의존한
다. 바꾸어 발하면 인간의 불안정하고 자의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다. 이 자의성을 어떻게 하
면 덜 수가 있을 것인가? 그것은 'ESS를 생각'함에 의해서이다.
  여기까지의 장에서 독자는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ESS)의 중요한  특징이 만일 여러 가
지의 전략의 집단 중에서 이미 다수를 점하고 있을 때에는 그대로 잘해 나갈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당하면 갚는다'가 ESS라는 것은  '당하면 갚는다'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풍토 속에서는 '당하면 갚는다'가 잘해 나갈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특
별한 종류의 '강건함'으로 간주할 수 있다. 진화론자로서  우리는 이것을 그야말로 문제삼아
야 할 유일의 강건함이라고 보고 싶다. 왜 그것이 그렇게도  문제인가?  왜냐하면 다윈주의
의 세계에서 승리는 돈으로 지불되는 것이 아니라 자손의  수로 지불되기 때문이다. 다윈주
의자에게 성공하는 전략은 많은 전략 집단 중에서 다수로 된 것들이다. 어떤 하나의 전략이 
성공해 나가기 위해서는 그 전략이  다수로 됐을 때에, 즉 자기  자신의 사본들이 우세하게 
됐을 때에 특히 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액셀로드는 사실 문제로서 제3라운드의 토너먼트를 자연 선택이 행하는 식으로  실시하여 
ESS를 구하려고 했다. 실제로 그는 그것을 제3라운드라고 부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
것에도 새로운 참가자를 권유하지 않고 제2라운드와 같은 63을 그대로 썼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을 제3라운드로 부르는 것이 편리하다고 생각한 것은 그것과  앞의 두 번의 '순차 순환 
대기 방식' 토너먼트와의 차이가 두 번의 순차 순환 대기 방식 토너먼트끼리의 차이보다 더 
근본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액셀로드는 63번의 전략을 취하여 그것을 또다시 컴퓨터에 입력해서 진화적인 계승의 '제
1세대'를 만들게 했다. 따라서 '제1세대'의 '풍토'는 63번 모두의 전략을  균등히 대표하는 것
으로 되어 있었다. 제1세대의 끝에 각 전략의 승자는 '돈'이나 '득점'이 아닌 그(무성 생식형)
의 부모와 동일한 전략을 취하는 아이의 수로 지불된다. 세대가 진행함에 따라 어떤 전햑은 
수가 적어져서 최종적으로는 절멸한다. 다른 전략은 점점 수가 많아진다. 따라서 그  비율이 
변함에 따른 결과로서 게임의 장래에 대전이 일어나는 '풍토'도 변한 것이다.
  최종적으로 대략 1,000세대를 경과한 후에야 비율이 그 이상 변하지 않고 풍토도 그 이상 
변하지 않게 되었다. 안정에 도달한 것이다. 여기까지 여러  가지 전략의 운세는 내가 '사기
꾼', '선심파' 그리고 '원한과'의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했을 때와 똑같이 상승하거나 하강하곤 
했다. 몇 개의 전략은 최초부터 절멸로 향하고 대부분은 200세대까지 절멸했다. 간악한 전략 
중 하나 또는 둘은 빈도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출발했는데 나의 시뮬레이션에서 '사기꾼'과 
같이 그 번영은 잠깐이었다. 200세대 이상  산 유일한 '간악한' 전략은 '해링턴(Harrington)'
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해링턴'의 운세는 최초의 150세대쯤 급격하게 상승했다. 그 후  약간 
느리게 하강해서 1,000세대 근처에서 절멸에 접근했다. '해링턴'은 나의 원래의 '사기꾼'과 같
은 이유로 일시적으로 잘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두 발에 한 발 갚기'(너무 관대함)  등의 연
약한 상대가 주위에 있는 한은 그들을 착취했다. 그 후 연약한 패가 절멸당하게 되면  '해링
턴'은 간단하게 이용되는 포획물이  없게 되어 그들의 뒤를  쫓아 절멸하게 됐다.  싸움터는 
'당하면 갚는다'처럼 '마음씨 좋다'가 '분개하는' 전략의 독무대로 됐다.
  실제로 '당하면 갚는다'는 제3라운드의 6회의 실행 중  5회에 있어서 제1, 제2라운드와 같
이 제1위로 됐다. 마음씨 좋으나 분개할 수 있는  5개의 전략도 최종적으로 '당하면 갚는다'
와 거의 같이 성공했다(집단 내의 빈도에 관해). 실은 그 중 하나는 6번째의 실행으로 이겼
다. 모든 '간악한' 전략이 절멸에 임박하게 되면  어떤 '마음씨 좋은' 전략도 '당하면 갚는다'
와 또는 서로 상호간에 구별하는 방법이 없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마음씨가 
좋기 때문에 서로 협력의 카드를 내놓기 때문이다.
  이 구별 불능성의 귀결은, '당하면 갚는다'는 ESS와 닮았지만 엄밀하게는 진짜 ESS가 아
니라는 것이다. 어떤 전략이 ESS가 되려면 그것이  보편적으로 보일 때에 희소한 돌연변이
의 전략에 침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해 주기 바란다. 자! 그렇다면 '당하면 갚는다'
가 어떤 '간악한' 전략의 침입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인데, 또 다른 '마음씨 좋은 '전략
에 대해서는 다른 문제이다. 지금 본 대로 마음씨 좋은  전략의 집단 중에서는 어느 것이든 
모두 상대같이 보여 같은 식으로 행한다. 그래서 완전히 성인과 같은 '항상 협력'과 같은 다
른 어떤 마음씨 좋은 전략도 '당하면 갚는다'에 대해 선택상의 우위성이 명백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예고없이 집단에 끼여들 수가 있다. 그러므로  전문적으로 말하면 '당하면 갚는다'
는 ESS가 아니다.
  세계가 마치 마음씨 좋은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당하면 갚는다'를 ESS로 간주할 수
가 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에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보아주기 바란다. '당하면 갚
는다'와는 달리 '항상 협력'은 '항상 배신'과 같은 간악한 전략의 침입에 대해 안정하지 못하
다. '항상 배신'은 '항상 협력'에 대해  잘 해치울 수가 있다. 매번 '유혹료'의  고득점을 얻기 
때문이다. '항상 배신'과 같은 간악한 전략은 '항상  협력'과 같은 너무 '마음씨 좋은' 전략의 
수를 하락시키게 된다.
  그러나 '당하면 갚는다'는 진짜  ESS가 아니다. 그래서  실천적으로는 기본적으로 마음씨 
좋아서 보복적인 '당하면 갚는다'와 유사한 복수의 전략이 어느 정도의 비유로 혼합하고  있
는 것을 대략 ESS에 대응하는 것으로 취급하는 게 아마도  공정할 것이다. 그와 같은 혼합 
전략은 소량의 간악한  성분을 포함하고 있을지  모른다. 보이드(Robert Boyd)와  로버바움
(Jeffrey Lorberbaum)은 액셀로드가 한 아주 흥미 깊은 추적 연구에 있어서 '두 발에 한 발 
갚는다'와 '외의적인 당하면 갚는다'라고 명명한 전략의  '혼합'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회의
적인 당하면 갚는다'는 구분상으로 간악한 것이나 매우 간악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최초의 
대전 이후는 '당하면 갚는다.' 그 자신과 똑같이 행동하나  -이것이야말로 그것을 구분상 간
악한 전략으로 하는 이유인데- 게임의  최초의 대전에서는 꼭 배신한다.  '당하면 갚는다'가 
전면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식의 풍토에 있어서는 '회의적인 당하면 갚는다'는 번영할 수  없
다. 왜냐하면 그 최초의 배신이 이후 길이 끊어지지 않는  상호 역습의 방아쇠를 당기기 때
문이다. 한편 만난 상대가 '두 발에 한 발 갚는다'라면  '두 발에 한 발 갚는다'의 큰 관용성
이 이 역습을 아직 새싹일 때 꺾어 버린다.  양 선수 모두 적어도 '기준점', 즉 모든  협력의 
경우는 득점을 가지고 게임을 마치며 '회의적인 당하면 갚는다'는 최초의 배신분만큼 보너스 
점수를 얻는다. 보이드와 로버바움은 '당하면 갚는다'의 집단이 진화적 표현으로 '두 발에 한 
발 갚는다'와 '회의적인 당하면 갚는다'의 혼합이 침입하여 이 둘이 서로 우호적으로 번영하
는 것임을 보여 주었다. 이 조합이 이와 같은 형태로 침입할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은 아니다. 
아마도 조금 간악한 전략과 마음씨 좋은 매우 관용한 전략과의 혼합으로 양자가 함께 침입
할 수가 있도록 된 조합은 많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는 이것이 인간  생활에 흔한 양상을 
반영하는 거울로 보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
  액셀로드는 엄밀히 '당하면 갚는다'가 ESS가 아님을 인식하고 있고 따라서 그것을 설명하
기 위해 '집단적으로 안정된 전략'이라는 표현을 만들어 냈다.  진짜 ESS의 경우와 갚이 동
시에 둘 이상의 전략이 진화적으로 안정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어떤 전략이 하나의 집단
으로 우위를 점하는지는 운에 달렸다. '항상 배신'도 '당하면 갚는다'와 같이  안정하다. 이미 
'항상 배신'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 집단에서는 다른 어떤 전략도 잘해 나갈 수 없다. 우리는 
이 시스템을 쌍안정(bistable), 즉 한편에 '항상 배신'이라는 안정점이 있고, 다른  한편에 '당
하면 갚는다'(또는 주로 마음씨 좋아서 보복적인  몇 개의 전략의 혼합)라는 안정점이  있는 
시스템으로 취급할 수 있다. 어느쪽이든 먼저 집단 내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된 저냑
이 그대로 우위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우위'란 정량적인 표현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당하면 갚는다'가 '항상 배
신'보다 잘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수가 있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이 특별한 게임
에어 물주가 지불한 금액의 명세에 따라 변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칼날처럼 예리하게 운
명을 좌우하는 임계 빈도가 보통 존재한다는 것뿐이다. 칼날의 한쪽 면에서는 '당하면  갚는
다'의 임계 빈도를 넘고 선택은 점점 '당하면 갚는다'에 유리하게 되도록 작용한다.  이 칼날
과 동등한 것으로 이미 우리는 제10장의 '원한파'와 '사기꾼'의 이야기를 상기할 것이다.
  그러므로 집단이 칼날의 어느쪽에서 시작하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리
고 우리는 어떻게 하여 집단이 칼날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건너가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를 알 필요가 있다. 이미 '항상 배신'측에 위치하고  있는 집단에서 우리가 시작했다고 생각
해보자. 소수의 '당하면 갚는다' 개체는 호혜적인 이익을 얻을 만큼의 충분한 빈도로 만나지 
못한다. 따라서 자연 선택은 집단을 다시 극단적인 '항상 배신'측으로 민다. 만일 기회적  부
동에 따라 이 집단이 어떻게 해서 칼날을 건널 수 있는 경우에만 '당하면 갚는다'측으로  사
면을 미끌어 내리게 되어 누군가가 물주의(또는 '자연'의) 지출에 의해  더 잘해 나갈 수 있
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물론 집단은  그룹으로서의 의지를 갖지 않으며, 의도나 목적도  갖지 
않는다. 칼날을 기어오르려고 하는 노력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칼날을 기어오르려고  하는 
노력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방향성을 갖지 않는 자연의  힘이 종종 칼날을 건너도록 이끌 
때만 그들은 건넌다.
  그러한 것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그 답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은 종종 '우연'에 의
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연'이라는 것은 무지를 말하고 있음에 불과하다. 그것
은 '무엇인가 아직 잘 모를, 또는 특별한 수 없는 이유에 의해 결정된다'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는 '우연'보다는 조금은 더 좋게 행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소수파의  '당하면 갚는
다' 개체가 임계값 이상이 될 때까지 수가 불어나는 실제적인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
다. 이것은 어떻게 해서 '당하면 갚는다' 개체가 충분한  수만큼 뭉쳐서 당연히 물주의 지출
에 의해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될 수 있는가, 그 가능한 방법의 탐구로 이어진다.
      유전적인 유연 관계
  이 같은 선상에서 생각하는 것은  가능한 것 같으나 다소 막연하다.  서로 닮은 개체끼리 
도대체 어떻게 뭉치고 궁극적으로 집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일까?  자연계는 유전적인 유연, 
즉 혈연을 통해서 연결이 된다. 대개의 동물은 집단의  무작위적 구성원보다는 자기의 형제 
자매, 조카 등과 가까이서 살고 있다. 이것은 반드시 선별을 통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
다. 그것은 집단의 '점성(viscosity)'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한다. 점성이라는 것은 각  개체가 
자기가 출생한 장소 근처에서 살려고 하는 어떤 경향을  의미한다. 예컨대 역사의 대부분을 
통해서 그리고 세계의 대부분 지역에서(종종 우리가 사는  현대 세계에서는 다르나) 개개의 
인간이 자기의 출생지에서 몇 마일 이상 멀리까지 방황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 결과 유
전적으로 가까운 것이 국지적 집합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  아일랜드의 서해안에 있는 작은 
섬을 방문했던 일을 경향이 있다. 아일랜드의 서해안에 있는 작은 섬을 방문했던 일을 기억
한다. 그때 나는 섬의 거의 모든 사람이 물주전자의 손잡이처럼  생긴 매우 큰 귀를 가지고 
있는 사실에 놀랐다. 큰 귀가 그 곳 기후에 적합하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는 물론 말할 수 
없다(거기서는 바다를 향해 강풍이 분다). 그것은 섬주민의 대부분이 서로서로 밀접한 혈연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유전적 유연 관계는 단순히 용모뿐만이 아니라 그 밖의 모든 종류의 사항에 관해서도 닮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당하면 갚는다' 식으로 행하는(또는 행하지 않는) 유전적 경향에 관
해 서로가 잘 닮는 경향을 가질 것이다. 그래서  전체로서의 집단 속에서 '당하면 갚는다'가 
드물 때까지도 국지적으로는 아직 수가 많다고 할 수도 있다. 일정한 지역에서는 '당하면 갚
는다' 개체가 상호 협력 때문에 번영될 정도로  충분히 자주 만날 수 있다. 비론 집단  전체 
속에서의 총체적 빈도만을 고려한 계산이 그들의 빈도가 '칼날의' 임계값 이하라고 제시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
  만일 그렇다면 살기 좋은 작은 지역 집단을 이루고 서로 협력하는 '당하면 갚는다' 개체는 
매우 크게 번영할 수 있을 것이므로 작은 지역 집단에서  보다 큰 지역 집단으로 성장한다. 
이 같은 지역 집단이 많이 커져서 다른 지역으로까지 퍼지는 일은 있을 수 있다. 이런 지역
은 그때까지 수적으로는 '항상 배신'하는 개체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지역 집
단을 생각할 때, 내가 말한 아일랜드의 섬은 물리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고로 오해를 일으키
는 비교하고 할 수 있다. 그보다 오히려 내부 이동이 별로 없으므로 지역 전체에 걸쳐 교잡
이 끊임없이 존재할 경우, 멀리 있는 이웃보다도 옆에 있는 이웃과 닮는 경향을 갖는 큰 개
체군을 생각해 보자.
  그리고 '칼날'까지도 잡아 주면 '당하면  갚는다'는 그 곳을 넘을  수가 있다. 필요한 것은 
작은 지역 집단을 형성하는 것뿐이고, 이것은 자연 개체군으로서 일어나기 쉬운 일이다. '당
하면 갚는다'는 비록 소수인 경우라도 칼날을 넘어서 자기측으로  건너는 타고난 능력을 가
지고 있다. 마치 칼날의 밑을 빠져나가는 비밀 통로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통로는 일방 
통행만 할 수 있는 밸브가 있다. 즉, 비대칭이다. '당하면 갚는다'와 달리 '항상 배신'은 진짜 
ESS인데오 불구하고 지역적인 소집단이 되는 것을 이용하여 칼날을 건널 수 있다. 이에 반
하여 '항상 배신'의 지역 집단은 서로의  존재에 의해 번영하기에는 좀 멀고 서로의  존재에 
의해 특히 '불편'을 받는다. 서로가 평화롭게 도와 물주에게  지출토록 하는 것이 아니라 서
로가 공격한다. 따라서 '항상 배신'은 '당하면 갚는다'와는 다라서 집단 내에서 혈연 또는 점
성으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당하면 갚는다'는 다만 의심스러운 ESS일지 모르나 일종의 고도의 안정성을 가지
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일까? 확실히 안정은  안정인 것이다. 자! 여기서 
우리는 장기적 요인을 중요시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 '항상 배신'은 비교적 장기간에 걸
쳐 침입에 저항한다. 그러나 만약 충분히 길게, 아마도  수천 년이나 기다리면 '당하면 갚는
다'는 칼날을 저쪽으로 넘기에 필요한 만큼의 개체수를 최종적으로  획득하여 그 집단 전체
는 '당하면 갚는다'로 전환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는 없다. 이미 보았듯이  '항상 배신'은 
집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얻지 못하고 이 고도의 안정성도 누리지 못한다.
  '당하면 갚는다'는 이미 본  대로 '마음씨 좋은'전략이며, 처음부터  배신하는 일은 없지만 
그렇다고 '관용'도 아니다. 그리고 이  비관용은 과거의 나쁜 행동에  대한 단기의 기억밖에 
갖지 못한다. 자! 여기서 액셀로드의 , 또 하나의 환기시키는 전문 용어를 소개하자. '당하면 
갚는다'는 또한 '질투쟁이도 아니다.' 액셀로드의 용어법으로 말하면 질투쟁이라는 것은 절대
적으로 많은 돈을 물주로부터 따먹는 것보다는 상대보다 많은 금액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
을 의미한다. 질투쟁이가 아니라는 것은, 가령 상대가 당신과 같게만 돈을 얻었다고 해도 그
로 말미암아 두 사람 모두 보다 많은 금액을 물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한은 완전히  만족한
다는 의미이다. '당하면 갚는다'가 실제로 게임에 '이기는'일은 결코 없다. 잘 생각해 보면 그
것은 보복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배신하지 않으므로 어느 별개의 게임에 있어서도  '적' 
이상의 득점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기껏 잘돼야 상대와 비기게 될 뿐이
다. 그러나 그것은 비김으로써 같이 고득점을 달성하는 경향이 있다. '당하면 갚는다'와 다른 
'마음씨 좋은' 전략을 생각할 때 '적'이라는 말 그 자체는 부적절하다. 그러나 슬프게도 심리
학자들이 현실의 인간 사이에서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실시할 때에는 거의 모든 선수
가 질투의 유혹에 굴복하여 그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은 금액밖에  얻을 수 없다. 많은 사람
들은 아마도 그러한 가능성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상대와 협력하여 물주를 공격하기보다 오
히려 상대를 공격하려고 한다. 액셀로드의 연구는 그것이 어떤 오류인지를 보여 주고 있다.
        영합 게임과 비영합 게임
  그것은 어떤 종류의 게임에 있어서 하나의 오류에 불과하다. 게임 이론가는 게임을  '영합 
게임(zero sum game)'과 '비영합 게임(nonzero  sum game)'으로 나눈다. 영합  게임이라는 
것은 한쪽 선수의 승리가 다른 쪽 선수의 패배로 된다. 장기는 영합 게임이다. 왜냐하면  각
각의 선수의 목적은 상대에게 이기는 것이고, 그것은 다른 쪽의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수의 딜레마'는 비영합 게임이다. 돈을  지불하는 물주가 있고, 따라서 두  사람의 
선수는 팔장을 끼고 시종 물주를 봉잡고 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이 물주를 봉으로 한다는 표현은 셰익스피어의 즐거운 희곡 한 구절을 상기하게 한다.
  우선 처음으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모든 법률가를 살해하는 것이다. -(헨리 6세) 제2막-
      민사 분쟁
  민사 '분쟁'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크나큰 협력의 여지가 남아 있는 수가 흔히 있다. 영
합 게임적인 대립처럼 보이는 것을 약간의 선의에 의해 쌍방에서 이익을 주는 비영합 게임
으로 바꿀 수가 있다. 이혼에 관해 생각해 보자. 좋은 결혼은 분명히 비영합 게임이고  상호 
협력으로 넘쳐 흐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했을 때까지도  두 사람이 협력을 계속하여 
이혼까지도 비영합 게임으로서 처리하면 이익을 얻는다는 이유가 얼마든지 있다. 마치 아이
들의 행복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두 사람의 변호사에게 요금을 지불해버리면 가
족의 재정에 영향을 줄 것이다. 그래서 양식과 교양이 있는 부부는 둘이 같이 한 사람의 변
호사에게 상당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닌지.
  그러나 실질적인 답은 '아니오'이다. 적어도 영국에서는 또  극히 최근까지 미합중국 50개 
주에서는 법률상 또는 보다 엄밀히는(그리고 의미 깊게) 변호사 자체의 집업상의 규약이 그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변호사는 의뢰인 부부  중 어느편이든 한 사람밖에 수락할 수  없다. 
상대편은 문전에서 거절당한다. 법률적인 감정을  전혀 받을 수 없거나  다른 변호사에게로 
갈 것을 강요당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일이 시작된다. 두 사람의  변호사는 분리된 방에서, 
그러나 같은 목소리로 즉시 '우리들'과 '그들'에  관해 상의하기 시작한다. '우리들'이란 나와 
내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처와 변호사에 대립되는 나와 내 변호사를 의미한다. 이 소송이 
법정에 나오게 되면 현실로 '스미스 대 스미스'라는 식으로 기재된다. 그 부부가 적대적으로 
생각하고 있든 아니든 주의깊게 우호적인 것으로 노력하려고 특별히 동의하고 있든  아니든 
적대하는 것으로 '상정'되어 있다. 이혼을 '내가 이기고  너는 진다' 싸움으로 다룸으로써 누
가 이익을 얻는가? 기회는 변호사들에게만 있다.
  불행한 부부는 영합 게임으로 이끌리고 만다. 그러나 변호사들에게  있어 스미스 대 스미
스의 소송은 수지가 잘 맞는 비영합 게임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미스 부처에게 지불하도록 
하여 짜임새 있는 규정에 따른 협력으로 두 의뢰인의 구좌에서  짜낼 수 있다. 그들이 협력
하는 하나의 방법은 쌍방이 상대측이 수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제안을 하는 것이다. 이것
도 역시 쌍방이 수락할 수 없다고 알고 있는 대안을 상대측으로부터 부추긴다. 그리고 일이 
진행된다. 협력하고 있는 '적대자' 사이에서 왕래되는 모든 편지와 전화 요금은 청구서에 빠
짐없이 적힌다. 운 좋게 이 과정을 몇 개월 아니 몇 년까지  연장시킬 수 있다면 이에 평행
하여 요금도 가산된다. 쌍방의 변호사는 이 모든 것을 함에 있어서 결탁은 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얄궂게도 의뢰인의 지출을 가지고 행해지는 그들의 협력을 실현나는 주된 수단은 그
들이 양심적으로 연결을 끊는 것이다. 변호사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을지 모른다. 한 순간에 만나게 되는 흡혈 박쥐같이 그들은  매우 잘 의식화된 규칙에 따
라 경기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어떤  의식적인 감독이나 관리 없이 작동한다. 그것은  모두 
톱니바퀴 장치에 의하여 우리를 영합 게임으로 향하게 한다. 의뢰인에게는 영합 게임일지라
도 변호사로서는 매우 강한 비영합 게임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셰익스피어의 선택은 혼란을 낳을 뿐이다. 법률을 바꾸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회 의원들은 법률에 관계하는 직업인으로서 영합 게임적인 심성
을 가지고 있다. 영국하원 이상의 적대적인  분위기를 예상하는 것은 어렵다(법정은 적어도 
아직 논쟁의 예의 범절을 보존하고 있다. 왜냐하면 법률가끼리는  시종 물주를 봉잡을 만한 
매우 기분좋은 협력을 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선의의 입법부 의원이나 회한의 정
을 가진 변호사는 게임 이론을 조금이라도 교육받아야만 할 것이다. 공정을 위해 조금만 부
가하면 일부의 변호사는 이와 아주 정반대의  역할을 하여 영합적인 싸움을 하려고  애쓰는 
의뢰인에게 법정 외에서 비영합적인 해결로 착수하는 편이 좋다고 설득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활에서 다른 게임은 어떨까? 무엇이 영합적이고 무엇이 비영합적인 것인가? 한
편(사실과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인생의 어떤 측면을  우리들은 영합적 또는 비영합적으로 
느끼는 것일까? 인간 생활의 어느 측면이 '질투'를 조장하고 어느 측면이 '물주'에 대한 협력
을 조장하는 것일까? 예컨대 임금 계약 교섭과 '차별 임금'에  관해 생각해 보기 바란다. 우
리가 임금 인상 교섭을 할 때 '질투'에 의해 동기를 얻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실질적인  수
입을 최대로 하기 위해 협력하는 것일까? 우리는 심리학적인 실험에서와 같이 실생활에서도 
그렇지 않은 경우에 자기가 영합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상정하는 것일까? 여기서는 그저  이 
같은 곤란한 의문을 단순히 제출하는 것으로 그치자. 이에 답하는  것은 이 책의 범위를 넘
는 것이 될 것이다.
      축구 경기
  축구는 일종의 영합 게임이다. 적어도 통상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때로는 비영합 게임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종종 1977년의  영국 축구리그전에서 일어난(축구는 정식으로는 아식 
축구(association football)라고 한다. 럭비 풋볼,  오스트레일리언 풋볼, 미식 축구, 아일랜드 
풋볼 등, 풋볼로 총칭되는 다른 게임도 보통 영합  게임이다) 영국의 축구 리그 팀은 4부로 
나뉘어 있다. 각 클럽 팀은 자기의 부 내에서 다른 팀과 시합을  하여 시즌을 통해 승리 또
는 비김의 득점을 누계해 간다. 1부에 드는 것은 대단한 명예며 그것은 많은 관중을 보증해 
주기 때문에 클럽으로서도 이익이 된다. 매년 시즌이 끝나면 1부의  하위 3개 팀은 다음 시
즌에서는 2부로 격하하게 된다. 격하는 극히 비참한 운명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
기 위해서는 큰 노력을 해야 한다.
  1977년 5월 18일은 이 해의 축구 시즌의 마지막 날이었다. 1부에서 격하되는 3개 팀 중 2
팀은 이 토요일에 모든 것을 걸고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선더랜드는 제4위 팀(이팀의 1
부 잔류는 확실했다)과 시합을 하고 있었다. 브리스톨과 코번트리는 서로 시합을 하고 있었
다. 만일 선더랜드가 질 경우 브리스톨과 코번트리는서로 비기기만 하면 1부에 머무르게 된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선더랜드가 이긴다면  브리스톨과 코번트리의 시합 결
과, 어느편이 이기느냐에 따라 한편이 탈락하게  된다. 이 두 중대한 시합은 동시에  행해졌
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브리스톨과 코번트리 전이 5분 늦게 시작됐다. 그 때문에  선더
랜드 전의 결과를 브리스톨-코번트리 전의 종료 전에 알게 됐다.  거기에는 이 복잡한 이야
기의 모든 것이 걸려 있다.
  당시 신문 기사를 인용하면 브리스톨 대 코번트리 전의 대부분은 '빠르고 종종 격하고' 일
종의 흥분시키는(만일 당신이 그러한 것을 좋아한다면) 불꽃튀는 격전이었다. 쌍방은 굉장한 
득점력을 보여 시합 개시 80분 후의 득점은 2:2였다. 드디어 시합 종료 2분 전에 다른 경기
장에서 선더랜드 팀이 패했다고 하는 뉴스가 전해졌다. 즉시  코번트리 팀의 매니저가 경기
장의 끝 있는 거대한 전광  게시판에 속보를 내보냈다. 22명 선수  모두는 이미 어느측이든 
성의껏 경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탈락을 면하기 위해서 양  팀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슨 부였다. 실제로 득점을 오리려고 노력하는 것은  이제는 전적으로 나쁜 방책이었
다. 왜냐하면 어느쪽인지 모를 상대팀을 탈락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양 팀 모두 무승부를 확
보하는 데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때 신문 기사를 인용하면  "80분 경과 후 돈  질리스(Don 
Gillies)가 브리스톨을 위해 동점골을 얻을 바로 수초전까지만  해도 심한 경쟁 관계였던 팬
들이 돌연 하나가 되어 축제 분위기에 휩쓸렸다. 심판은 선수들이 공을 가지고 전혀 공격하
지 않고 가볍게 차면서 돌리고  있는 것을 어찌할 도리 없이  보고만 있었다." 그 전까지는 
영합 게임이었는데 외부 세계로부터 온 한편의 뉴스로 돌연 비영합 게임으로 변해 버린 것
이다. 앞에 언급한 우리의 용어로  말하면 그것은 마치 외부의  '물주'가 마법처럼 나타나서 
브리스톨과 코번트리 양 팀이 무승부라는 같은 결과에서 이익을 얻는 것을 가능케 한 것과 
같다.
  축구처럼 관객에게 보이는 스포츠가 보통 영합 게임인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관
중들은 선수들이 우호적으로 공모하는 것을 보기보다는 서로가 힘껏 싸우는 것을 보는 것이 
훨씬 흥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 생활에 있는 인간과 동.식물은 관중의 즐거움을  위한 
노리개가 아니다. 사실 문제로서 실생활의 많은 측면은 비영합 게임에 대응하는 것이다.  자
연이 종종 '물주'의 역할을 하고 따라서 개개인은 서로의  성공에서 이익을 얻을 수가 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반드시 경쟁자를 칠 필요는 없다. 이기적 유전자의 기본 법칙에서 이탈
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세계에 있어서까지 협력이나 상호 부조가 어떻게  번창하는
지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액셀로드가 말하는 의미로 왜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들이 되는가'
를 이해할 수가 있다.
      라운드 게임
  그러나 게임이 되풀이되지 않는 한 이러한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선수들은 지금 하고 
있는 게임이 최종회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액셀로드의 말처럼 '미래의 영상'은 
길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어느 정도  길어야만 하는가? 무한히 길 수는 없다. 이론적인 
관점에서는 게임이 얼마나 길든지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쪽 경지자도 게임이 언
제 끝나는지를 알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와 당신이 대전하고  게임의 회수가 꼭 
100번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우리 두  사람 모두 100회째가 최종 라
운드이며 단순한 1라운드의 '죄수의  딜레마' 게임의 동등함을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두 사람의 어느편에게도 제 100라운드에 있어서 유일한 합리적인 전략은 '배신'이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각각 상대 경기자가 그 일을 계산하여 최종 라운드에서 배신한다는 결정 
을 확실히 내릴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최종 라운드는  예상 가능한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99라운드도 1라운드의 게임과 동등하게 되어 각각의 선수
에게 이 최후에서 두 번째 게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리적인 선택은 역시 '배신'으로 될  것
이다. 98회째도 같은 논리를 따르게 되고  점점 거슬러 올라간다. 두 사람의 엄밀한  이성적 
선수가 각각의 상대도 엄밀히 이성적이라고 상정할 경우, 만일  게임이 몇 번째에서 끝나도
록 정해져 있는지를 쌍방이 알고 있다면 배신하는 것 이외에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 이유
에 의해 게임 이론가가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은 항상 게임의 
마지막은 예상 불가능이거나 또는 물주밖에 모른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게임의 정확한 라운드 수가 확실치 않더라도 현실 생활에 있어서는 그 게임이 어느 정도 
지속될지를 통계적으로 추측하는 것은 종종 가능하다. 이 평가는  전략의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있다. 만일 물주가 조급히 시계를 보면 나는 게임이 결말에 가까웠따고 충분히 추측되어, 
배신의 유혹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만일 내가 당신도 종말에 왔는지 주의하지 않나 의심하면 
당신도 또한 배신할 계획을 하고 있지 않나 하여 불안하게  될 것이다. 틀림없이 나는 먼저 
배신하려고 할 것이다. 특별히 나는 당신이 나의 배신을 겁먹고 있지나 않은가 하고 걱정할
지도 모른다.
  1라운드 '죄수의 딜레마' 게임과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 사이에 수학자가  만든 구별은 
너무 단순하다. 각 경쟁자가 게임이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에  관한 끊임없이 갱신되는 추측
치가 길면 길수록 그는 진짜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 관한 수학자의 예측에 보다 잘 따
르는 자세로 경기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보다 마음씨 좋게, 보다 관용으로, 보다  질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게임의 미래에 대한 추측치가 짧으면  짧을수록 그는 1라운드의 게임에 관
한 수학자의 예측에 보다 잘 따르는 자세로 경기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보
다 불쾌하고 보다 질투가 심하게 될 것이다.
      영국군과 독일군
  액셀로드는 미래 영상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감동적인 실례를 제1차세계 대전 중에 일어났
던 소위 '우리도 살고 남도 살리자' 방식이라는 주목할  만한 현상에서 인용했다. 그가 기본
으로 한 자료는 역사학자이며 사회학자인 애시워스(Tony Ashworth)의 연구이다.  크리스마
스에 영국과 독일 부대가 중간 지대에서 일시적으로  친하게 놀고 같이 술을 마신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비공식으로 암암리의 불가침 협정을 맺어 '우리도 살고 남도 살리자'
가 전선 모든 곳에서 1914년에 시작하여 적어도 2년간 착실히 지켜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별
로 알려져 있지 않으나 나에게는 이쪽이 더 흥미롭다. 참호에  순시를 나왔을 때 자군의 전
선 배후의 소총사격장 안을 독일병이 걸어다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한 상급 장교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우리편 군인은 전혀 관심도 안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아군이 우세하
게 됐을 때 이와 같은 일을 폐지하려고 결심했다. 이와 같은 일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
들은 분명히 전쟁 중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양 진영 모두 '우리도 살고 남도 살리자'의 
원칙을 굳게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액셀로드는 선명한 분석을 통해 이 시대에는 아직 게임 이론과 죄수의 디레마는 발명되어 
있지 않았으나, 때늦은 지혜를 가지고 분별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매우 명료하
게 이해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당시의 참호전에 있어서 개개의 소대로서의 미래의 영상은 
길었다. 말하자면 각각의 참호에 틀어박힌 영국 병사는 같은  독일병의 참호대와 몇 달이고 
대치한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일반 병사는 가령 부대의 이동이 있을 때에
도 그것이 언제인지 결코 알려지지 않았다. 군의 명령은  주지하는 대로 독단적이고 변덕스
러우며 명을 받은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미래의 영상은 '당하면  갚는
다' 형태의 협력을 촉진하기에 아주 충분히 길고 막연했다. 이제부터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
에 대응하는 조건이 있기만 하면 된다.
  진짜 죄수의 딜레마로서의 자격을 갖기 위해서는 지불이 특정한 우열의 순위에  따라야만 
함을 다시 한 번 기억하라. 양  진영 모두 상호협력(CC)이 상호 배신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상대의 진영이 협력하고 있을 때의 배신 (DC)은 그것으로 벌을 받는  일
이 없다면 한층 더 좋다. 상대의 진영이 배신(CD)하고 있을 때의 협력은 최악이다. 상호 배
신(DD0은 참모들이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군대가 기회가 있으면 언
제든지 독일변(또는 영국병)을 체포하기를 윈한다.
  상호 협력은 장군의 관점에서 보면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승에 도움이 되
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 진영의  병사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그들은 
전사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가 인정하듯이 (그리고 또한 이일이 진짜 죄수
의 딜레마의 상황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다른 지불 조건을 만족하는 것이  된다) 병사들이 
전재에 지는 것보다는 이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점은  장군들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것
은 일개의 병사가 받아들일 선택이 아니다. 전쟁 전체의 귀결이 그가 개인적으로 무엇을 하
느냐에 따라 실질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한편 무인 지대를 끼고 저쪽편
에서 당신과 대치하는 특정의 적병과의 상호 협력은 당신 자신의 운명에 극히 분명한 영향
을 주며 상호 협력은 상호 배신보다 훨씬 바람직하다. 비록 당신이 만일 벌을 받지 않을 수 
있다면 애국적 또는 규율상의 이유에서 종국에 가서  배신(DC)을 좋아하는 수가 있다고 해
도 말이다. 이 상황은 진짜 죄수의 딜레마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당하면 갚는다'와 같은 
것이 생겨날 것이 예상되는데 그것은 실제로 그렇게 됐다.
  참호 전선의 어떤 임의의 지점에서  국지적으로 안정된 전략은 반드시 '당하면  갚는다'에 
한하지 않는다. '당하면 갚는다'는 마음씨 좋고 보복은 하나  관용이라는 한 그룹의 전략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들 전략은 모두 전문적으로 말하면 안정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 번 생
겨버리면 그것에 침입하기는 곤란하다. 예컨대 당시의 기사에 의하면 이것은 '한 발에 세 발 
갚기'가 있는 지역에 국지적으로 생겼다.
   우리들은 밤에 참호 앞에 나왔다...독일군의 작업반도 밖에 나와 있었으므로 발포는 예의
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불쾌한 것은 소총 유탄이라는 것이다...참호 속에  떨어지면 
8~9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다...그러나  우리 편은 독일군이 상당히 심한  공격을 하지 않는 
한 결코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보복법으로는 이쪽이  한 발 쏘면 그 편
에서는 세 발 쏘아 오기 때문이다.
  '당하면 갚는다'그 그룹의 어느 전략도 경기자가 배신에 의해 벌을 받는다는 것이  중요하
하다. 보복의 위협은 항상 존재한다. 보복 능력의 과시는 '우리도 살고 남도 살리자'  방식의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양 진영에서의 총격은 적병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적병의 바로 가까
이에 있는 부동의 표적을 향한 것으로 그들은 놀랄 만한  사격 솜씨를 과시한다. 이 기교는 
서부 활극 영화에서도 쓰인다(촛불을 쏘아 끄듯이). 왜 최초의 2개의 실전용 원자 폭탄이 이
렇게 솜씨있게 촛불을 끄는 것처럼 사용되지 않고 두 도시를 파괴하는데 사용되었는가에 대
해 아직까지는 만족스러운 해답이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그 개발에 책임을  진 지도적인 물
리학자들이 강하게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당하면 갚는다'와 같은 전략의 중요한 특징은 관용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본 바대로 
그렇지 않으면 상처를 서로 주는 상호  역습의 반복에 견디기 어려운 사태를  진정시키기에 
한몫을 한다. 보복의 진정한 중요성은 다음의 한 영국인  장교의 회상록에 극적으로 표현되
어 있다.
   내가 한 사람의 아군과 차를 마시고 있을 때 매우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조사하러  나갔
다. 우리는 아군 병사와 독일병들이 각각의 낮은 방어벽 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일
제 사격이 시작됐으나 손상은 없었다. 양 진영 모두 당연하게 몸을 구부렸고 아군 병사들은 
독일병에게 욕설을 시작했다. 그때 돌연히 한 사람의 용감한 독일병이 낮은 방어벽 위에 올
라서 "대단히 미안하다. 부상자가 없어야  하는데...그것은 우리 책임이 아니고 터무니  없는 
츠로이센 포병대 때문이다."라고 외쳤다.
  이 변명에 대해 액셀로드는 "보복을 막기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서의 노력을 훨씬 넘는 것
이다. 그것은 신뢰의 상황이 깨진 것에 대한 도덕적인 후회의 느낌을 반영하고 있고, 또  누
군가가 부상하지나 않았나 하는 배려를 나타내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확실히 칭찬할 
만한 매우 용감한 독일병이다.
  액셀로드는 또 상호 신뢰의 안정된 패턴을 유지함에 있어서 예측 가능성과 의식의 중요성
까지도 강조한다. 이에 대한 좋은 실례는 영국군 포변대가 전선의 특정 부분에 시계처럼 정
확하게 정기적으로 행하는 '저녁  포격'이다. 독일병의 말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7시에 있었다. 너무도 정기적이어서 그때에 시계를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그것
은 언제나 같은 목표를 겨누었으며 조준은 정확하여 표적에서 벗어나거나 너무 멀거나 모자
라는 일이 결코 없었다...군인 중에는 탐구심이 강한 자도 있어...7시 조금 전에 그 포격을 보
기 위해 나가기까지도 했다.
  독일군의 포병대도 꼭 같은 행동을 했다. 영국군 측에서 본  다음의 기술이 보여 주는 대
로이다.
   그들(독일군)의 표적으로 선택, 총격의 횟수, 발사하는 포탄의 수, 그 밖에도 너무 규칙적
이었으므로...존스 대령은...다음의 포탄이 낙하할  상세한 장소를 알고  있었다. 그의 계산은 
매우 정확해서 그의 주의를 받지 않은 풋내기 참모 장교는 큰 위험을 당할 수가 있다. 존스 
대령은 표적으로 되어 있는 장소에 가해지는  포격이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그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액셀로드는 그와 같은 "형식적이고 정기적인 발포의 의식은  이중의 메시지를 보낸다. 수
뇌진에 대해서는 공격을, 적에게는 평화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논평한다.
      '우리도 살고 남도 살리자' 방식
  '우리도 살고 남도 살리자' 방식은 대화에 의한 교섭에 의해 또는 테이블을 둘러싸고 흥정
하는 의식적인 전략에 의해서도 실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것은 사람들이 서로의 '행동'에 반응하는 것을 통해 일련의 국지적인 협정으로서 출현한  것
이다. 개개의 병사는 아마도 그와 같은 협정이 생기고 있는  것에는 거의 느낌이 없었을 것
이다.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액셀로드의 컴퓨터에 입력된 전략은 명확히 무의식적인  것
이었다. 그것들을 정의하는 것은, 마음씨가 좋은가, 간악한가, 관용한가,  비관용인가, 질투가 
심한가 어떤가 등등의 행동이었다. 그것을 설계한 프로그래머는 그  같은 조건의 어디에 해
당됐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관계가 없다. 매우 간악한 인간은  마음씨 좋고 관용하고 질투가 
없는 전략을 간단하게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역도 가능하다. 전략의 좋은 마음씨
는 행동에 따라 식별되는 것이지 그 동기(가지고 있지 않은고로)도 아니고, 그 작자(그 프로
그램이 컴퓨터로 해치울 때 배경 속에 모습을  숨기고 있다)의 성격도 아니다. 컴퓨터의 프
로그램은 그 전략에 주의할 것 없이, 아니 실은 어떠한  일에 일체 주의를 않더라도 전략적
인 방법으로 행동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무의식의 전략 또는 적어도 의식이 어찌되든 관계하지 않는 전략이라는 사고 
방식에는 매우 숙달되어 있다. 이 책의 여러 페이지에는 무의식의 전략이 끊임없이  나온다. 
액셀로드의 프로그램은 우리가 이 책을 통하여 동물, 식물 그리고 실은 유전자에 대해 생각
해온 방법으로서 하나의 훌륭한 모델이다. 그래서  그의 낙관적인 결론(질투심 없고 광용하
며 마음씨 좋은 전략의 승리)이 자연계에도 적용되는지 어떤지를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이다. 답은 '예'이며 당연히 그렇다. 유일한 조건은 자연이 때때로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설
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미래의 영상이  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게임이 
비영합 게임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조건은 생물계의 도처에서 확실히 충족
시키게 된다.
  박테리아가 의식적인 전략가라고 하는 자는 아무도 없겠지만 기생성의 박테리아는 아마도 
그의 숙주와 끝없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전략에 액셀로드식의 
형용사 -관용, 질투심이 없는 등등-를 귀착시켜서는 안 된다는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액
셀로드와 해밀턴은 보통 무해하거나 이익을 주고 있는 박테리아가 상처 입은 인간에게는 간
악하게 변하여 치명적인 패혈증을 일으키는 수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의사는 그 사람의 
'자연적 저항력'이 부상에 의해 저하됐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마도 진짜 이유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박테리아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
통은 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람과 박테리아 사이에서 행해지는 게임에 있어 '미래의 
영상'은 보통 길다. 왜냐하면 게임을 어려서부터 시작하는 정상적 인간이라면 수년간은 산다
고 예상되기 때문이다. 한편 심한  상처를 입은 인간은 기생하는  박테리아에게 잠재적으로 
훨씬 짧은 미래의 영상을 줄지 모른다. '배신으로의 유혹'이 '상호 협력에 의한 복수'보다 매
력적인 선택권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말한 나위 없이 박테리아가 이 같은 것을 그들의 간악
한 작은 머리로 유도해 내는 것 같지는 않다. 몇 세대에 걸친 선택이 아마도 순수히 생화학
적인 수단에 의해 작용하는 무의식의 실제 경험으로 얻은 법칙을 박테리아의 유전자에게 틀
어넣었을 것이다.
      무화과나무와 벌레
  액셀로드와 해밀턴에 의하면 이것 또한 분명히 무의식적인 형태인데, 식물이 복수를 하는 
수까지도 있다고 한다. 무화과나무와 무화과벌레는 밀접한 협력적 관계를 공유하고 있다. 당
신이 먹고 있는 무화과는 진짜 열매가 아니다. 끝에 작은 구멍이 있어서 만일 당신이 그 구
멍 속으로 들어가면(들어가기 위해서는 무화과 벌레만큼  몸이 작아야만 한다. 무화과 벌레
는 너무도 작아서 무화과를 먹을 때 벌레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이다) 둘레의  벽에 수백 개
의 작은 꽃이 정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무화과는 꽃에게는 캄캄한 옥내 온실이며 옥
내 수분실이다. 그리고 수분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자는 무화과 벌레이다. 그러면 이  벌
레에게는 어떤 이익이 있을 것인가? 그들은 작은 꽃에다 알을 낳고 유충은 그 꽃을 먹는다. 
그들은 같은 무화과 열매 속의 꽃들을 수분시킨다. 무화과 벌레에게 있어 '배신'이란 하나의 
무화과 속의 꽃에만 너무나 많은 알을 낳음으로써 너무 적게 수분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때 
무화과나무는 어떻게 '보복'할 수 있을  것인가. 액셀로드와 해밀턴에 의하면  "많은 경우에, 
만일 젊은 무화과 속에 들어간 벌레가 종자를  결실케 할 충분한 꽃을 수분시키지 않고 그 
대신에 거의 모든 꽃에 알만 낳으면 무화과나무는 그 나무의 열매 발육을 얼마 안 가서  정
지시킨다. 그렇게 되면 벌레의 모든 유충은 사멸해 버리고 만다."
      농어의 협력과 배신
  자연계에서 '당하면 갚는다' 협정과  같이 보이는 유별난 예가  피셔(Eric fischer)에 의해 
암수한몸의 농어에서 발견됐다. 우리와는 달리 이물고기의 성은 수정 시점에서 염색체에 의
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어느 개체나 암수 양쪽의 기능을 발현할 수가 있다.  한번의 
방출에 의해 알과 정자가 불규칙하게 나온다. 일부일처적인 한 쌍을 형성하고, 한 쌍은 암수
의 역할을 교대로 한다. 이럴 경우 별다른 벌을 받지  않는다면 개체는 항상 수놈의 역할을 
하기를 '좋아'할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수놈의  역할 쪽이 지출이 적기 때문이
다. 바꿔 말하면 상대방에게 대부분의 시간 동안 암놈의  역할을 하도록 유도하기에 성공한 
수놈 역할을 하는 개체는 경제적 투자 이익의  모두를 얻기만 하고 다른 놈과 교미하는 등 
다른 일에 소비할 수 있는 자원의 여유를 가지게 된다.
  사실 피셔가 관찰한 것은 이 고기들이 어느 정도 엄밀한 교체 시스템을 작동시키고 있다
는 것이다. 그것은 만일 그들이  '당하면 갚는다' 전략을 취하고  있다면 예측되는 바대로인 
것이다. 이 게임은 다소 복잡하긴 하나 실제로 진짜  죄수의 딜레마처럼 보이므로 물고기가 
그렇게 하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나. '협력'의 카드를  내는 것은 자기의 차례가 돌아
올 때에 암놈의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가 암놈의  역할을 차지할 순번이 됐을 때 
수놈으로 행동하려는 유혹은 '배신'의  카드를 내는 것에 상당한다.  '배신'은 보복의 대상이 
된다. 상대방은 다음에 상대가 그렇게 해야 할 순번이 왔을  때 암놈의 역할을 인수받는 것
을 거부할 수 있다. 또는 단순히 모든 관계를 끝장내는 수도 있다. 피셔는 실제로  불평등한 
성 역할의 분담을 하고 있는 짝이 붕괴되는 경향을 보임을 관찰했다.
      박쥐의 헌혈
  사회학자와 심리학자가 때때로 묻는 질문은, 왜 헌혈자는 무료로 피를 제공하는 것일까라
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나는 그 답이 호혜성  또는 가장된 이기성에 있다고는 믿기 
어렵다는 것에 유의했다. 정기적인 헌혈자가 수혈의 필요가 생겼을 때에 우선적으로 취급받
는다는 관례는 없다. 헌혈증을 받는 것마저  문제가 안 된다. 너무 순진한 생각인지  몰라도 
나는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이해에 관계하지 않는 이타 행위라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 
있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흡혈 박쥐에서 혈액의 분배는 액셀로드의 모델에 매우 잘 맞는다
고 생각된다. 이것은 윌킨스(G.S. Wilkinson)의 연구에서 알 수 있다.
  잘 알려진 바대로 흡혈 박쥐는  밤에 피를 먹고산다. 그들에게 있어  식사를 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일단 먹이가 생기면 아마도 잔뜩 먹에 된다. 밤이 새면 불운하게도  굶
주린 채 돌아오는 놈도 있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희생물을 발견한 개체는 여분의 피까지 잔
뜩 빨아먹고 올 것이다. 다음날 밤에는 반대의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것은 약간의 
호혜적 이타 행동의 존재가 약속되어 있는 사례같이 생각된다. 윌킨슨은 그 밤에 행운을 만
난 개체가 때때로 실제 그 밤에 별로 운이 좋지 않았던 동무에게 토해 내는 식으로  헌혈하
는 것을 발견했다. 윌킨슨이 목격한 110회의 경우에서 77회는 어미가 새끼에게 먹였다는 사
실로써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 이외의 혈액 분배의  많은 사례는 다른 유전적 유연성
이 관여했다. 아직 혈연이 없는 박쥐들 사이에서의 혈액 분배의 예도 몇 개쯤 있다.  이들의 
경우에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설명은 사실과 걸맞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관
여한 개체들이 때때로 같은 잠자리 친구라는 사실이다. 즉, 그들은 반복 죄수의 딜레마에 요
구되는 것처럼 서로가 되풀이하여 상호 작용하는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죄수의 딜
레마를 위한 다른 요건은 충족됐을까? (그림D)에  제시한 지불표는 만일 그들이 그럴 경우
에 예상되는 내용이다.
  (그림D) 흡혈 박쥐의 헌혈 도식에서 여러 가지 결과로부터 내가 받은 보수와 지불
꽤 좋은, 보수: 나는 불운한 밤에 당신의 헌혈에 의해 죽음에서  구조됐다. 운 좋은 밤에 나
는 당신에게 헌혈하나 이것은 다소의 지불에 불과하다. 매우 나쁨, 패자의 지불: 나는 운 좋
은 밤에 당신을 구하기 위해 헌혈했는데, 내가 불운했을 때  당신은 나에게 피 한방울도 주
지 않아서 나는 죽음 직전에 놓였다. 매우 좋음, 유혹료: 당신은  내가 불운할 때 헌혈해 줘
서 나의 생명을 구했다. 그러나  나는 운 좋은 밤에 당신에게  헌혈한다는 작은 지불까지도 
하지 않았다. 꽤 나쁨, 벌금: 나는 운 좋은 밤에 당신에게  헌혈을 하지 않았으며 당신도 운 
좋은 밤에 나에게 헌혈을 하지 않아 나는 죽음에 직면하기 쉽다.
  흡혈 박쥐의 경제학은 참으로 이 표에 따르는 것일까? 윌킨스는 굶은 박쥐가 체중을 감소
시키는 비율을 조사했다. 이제부터 그는 배부른 박쥐가 아사하기까지에 요하는 시간, 공복의 
박쥐가 아사하기까지의 시간, 그리고 모든 중간 단계의 시간을 계산했다. 그것에 의해  그는 
연장되는 수명 시간의 통화로서 혈액을  이용할 수가 있게 됐다. 실제로서  놀랄 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 통화의 교환율이 박쥐가 얼마나 굶어 있었는가에 따라 변하는 것을 발견
했다. 일정량의 혈액은 별로 굶지  않은 박쥐보다 극도로 굶은 박쥐에게  더 장시간의 목숨 
연명 효과를 준다. 헌혈 행위는 헌혈자가 죽는 확률을 증가시킴에도 불구하고 그 증가는 수
혈자가 생존하는 확률의 증가에 비하면 극소이다. 경제학적 용어로  하면 흡혈 박쥐의 경제
학은 죄수의 딜레마의 법칙에 따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같이 생각된다. 암놈(흡혈 
박쥐의 사회 집단은 암놈의 집단이다)에게 헌혈자가 주는 피는 수혈자로서의  같은 양의 피
만큼 귀중한 것은 아니다. 암놈은 불운한 밤에 헌혈한 자신의 피의 선물로 이해 말할 수 없
는 큰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운 좋은 밤에는 만일  그것 때문에 벌을 받지 않는다
고 하면 배신(헌혈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부터  조금의 이익밖에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벌을 안 받는다'라는 것은 물론 박쥐들이 어떤 종류의 '당하면 갚는다' 전략을  채용하고 있
을 때에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당하면 갚는다'적인 응수가 진화하기 위한 
다른 조건은 충족되어 있는가?
  특별히 이들 박쥐는 서로를 개체로서 식별할 수 있는가? 윌킨슨은 사육한 박쥐를 실험하
여 그들이 식별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다른 개체에게는 피를  잔뜩 먹이고 한 마리만 하룻
밤 동안 굶겨 두는 것이 이 실험의 기본적 발상이다. 다음날, 윌킨슨은 굶겼던 박쥐를  다시 
잠자리로 옮겨 놓고 누가 그 개체에게 먹이를 주었는지를 관찰했다. 실험은 각 개체를 순서
대로 굶기면서 여러 번 되풀이하였다. 중요한 점은 이 실험  대상 박쥐들이 몇 마일 떨어져 
있는 다른 동굴에서 데려온 두 개의 다른 그룹의 혼합이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박쥐가 자기
의 시구를 식별할 능력이 있다면 실험적으로 굶겨진 박쥐는 자기 그룹의 박쥐로부터만 먹이
를 받는다고 판명한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과 잘 맞는다. 헌혈은 13번 관찰됐다. 그 중 12번이 굶은  희생자
와 같은 동굴에서 온 경우였다. 13번의 경우 중 단한  번만이 다른 동굴에서 데려온 것이었
다. '새 친구'에게 먹이를 주었다. 물론 이것이  우연의 일치일 수는 있으나 그 확률은  매우 
적다고 산정된다. 그것은 1/500이하이다. 박쥐가 실제로 다른 동굴에서  온 모르는 개체보다
도 오랜 친구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좋아하는 차별성을 가진다고 결론을 내려도 조금은 안
전하다고 본다.
  흡혈 박쥐는 여러 신화를 낳고 있다. 빅토리아 시대의 고딕 양식의 열렬한 애호가에게 흡
혈 박쥐는 밤에 공포를 주며 생명체액을 빨고 그저 목을 추기기 위해서 죄 없는 생명을  희
생시키는 사악한 힘이었다. 이것에게 '이빨과 발톱이 피범벅이 된 자연'이라는 또 하나의 빅
토리아 시대의 신화가 결부되어 흡혈 박쥐야말로  이기적 유전자의 세계에 관한 가장  심한 
공포를 구현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모든 신화에 회의적이다.  만일 특정 사례에서 
어디에 진실이 있는가를 알고 싶으면 자세히 보아야 한다.  다윈주의의 체계가 우리에게 주
는 것은 특정 생물에 관한 섬세한  예측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미묘하여 더 귀중한 
무언가를 주고 있다. 그것은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신화를 가져야  한다면 
흡혈 박쥐에 관한 진정한 현실은 또 다른 우화 소설을 말해 줄 것이다. 박쥐 자신에게 피는 
단순하 물보다 진하다는 것뿐만은 아니다. 들은 혈연의 쇠사슬을  넘어서 피를 나눈 성실한 
형제의 연분으로서 영속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흡혈 박쥐는 마음 편한 새로운 신화,  분배하
고 상호 협력한다는 신화의 선봉이 될 수 있다. 이기적 유전자에 지배되면서까지 마음씨 좋
은 놈이 일등이 될 수가 있다는 자비심 깊은 생각을 예고할 수 있을 것이다.

            제 13장
          유전자의 긴 팔
        유전자는 영원하다
  하나의 불안한 긴장이 이기적 유전자의 이론의 핵심을 교란하고  있다. 그것은 생명의 근
본적 담당자인 생물 개체의 몸과 유전자 사이의  긴장이다. 우리는 독립된 DNA 자기 복제
자라는 마음 설레이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샤모아처럼  펄쩍펄쩍 뛰면서 자유 분
방하게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옮겨지고  일시적으로 써버린 생존 기계에 붙어  모였다가 
각각 별개의 영원한 미래를 향해 전진하면서 죽을 생물체를 차례차례로 끝없이 벗어 버리는 
불멸의 코일이다. 또 한편에서는 생물 개체의  봄 그 자체를 보고 있는데 각각의 몸은 분명
히 하나의 긴밀히 연결되고 통합된 아주 다져진 기계이고, 뚜렷한 목적의 일치를  수반한다. 
그것이 실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정자나 난자에 실려 거대한  유전적 분산 집단(생물체의 
몸)의 다음 여정으로 떠나는 서로 대항적인 유전적 담당자의 느슨하고  일시적인 연합의 산
물이라고는 별로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지와 감각 
기관의 협조를 조정하는 충실한 뇌를  가지고 있다. 생물의 몸은 그  자체로서 매우 훌륭한 
주체인 것처럼 보이며 또 그와 같이 행동하고 있다. 
      유전자의 눈
  이 책의 몇 개 장에서는 실제로 생물 개체를 그의 모든 유전자를 미래의 세대에 최대한의 
성공도로 전하려고 노력하는 하나의 담당자로 생각해 왔다. 우리는  동물 개체가 여러 가지 
행동 방침에 관해 복잡한 경제학적 '의사' 계산을 하는 것처럼 상정해 왔다. 그러나 다른 장
에서는 근본적 이유가 유전자의 관점에서  제공됐다. 우전자의 눈으로 본  생물관과 생물이 
왜 자신의 장생보다 자신과 그 혈연자의 번식 성공도에 '마음을  쓸' 필요가 있는지 특별한 
이유가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생물을 보는 이 두 가지 방법의 패러독스를 어떻게 해소하면 좋을까? 이에 관한 내 자신
의 의도는'연장된 표현형' 에 자세히 적혀 있다. 이 책은 학자로서 나의 생애에서 달성한 어
떠한 성취보다도 자랑스럽소 기쁜 일이다. 이 장은 그 책의  몇 개 주제의 간단한 정수이지
만 실은 지금 당장 이 내용을 읽지 말고 '연장된 표현형' 으로 바꾸라고 권하고 싶다. 
  어쨌든 현명한 견해로  본다면 다윈주의적  선택이 유전자에  직접 작용하는  일은 없다. 
DNA는 단백질로 말려져 있고, 막으로 싸여 있어서, 바깥 세상으로부터 보호 받고 있으므로 
자연 선택에서는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만일 선택이 DNA분자를 직접 고르려고 시도 해도 
그것을 하기 이한 어떤 기준을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모든 유전자는 녹음 테이프 같아
서 어느 것이나 다 같은 것으로 보인다. 유전자간의 중요한 차이는 그것이 미치는 '효과'로 
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보통  배 발생 과정과 그로부터 몸체의  형성 그리고 행동에 
대한 효과를 뜻한다. 성공하는 유전자란 하나의 공통된 배에 속하는 다른 유전자에 의해 영
향을 받는 환경에서 그 배에 유리한 효과를 미치게 하는 유전자를 말한다. 유리하다는 것은 
성공할 것 같은 성인, 즉 잘 번식하여 그것과 똑같은  유전자를 미래의 세대에서 전해줄 수 
있는 성인이 되도록 배를 발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표현형(phenotype)'이라는 전문용어는 
하나의 유전자의구체적 나타남, 즉 유전자의 발생을 통하여 그  대립 유전자와 비교해서 신
체에 끼치는 효과에 대해 쓰인다. 몇 개의 특정 유전자의  표현형 효과는 녹색의 눈을 만들
지도 모른다.실제로 대부분의 유전자는 얘를 들어 녹색의 눈과  고수머리털 같은 둘 이상의 
표현형 효과를 가지고 있다. 자연 선택은  유전자 그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그 결과- 그의 
표현형의 결과- 때문에 한 유전자를 다른 유전자보다 선호한다.
      다윈주의자적 유전자론
  다윈주의자는 보통 표현형 효과나 생물체 전체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게 또는  불리하게 
작용하는 유전자에 관해 논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유전자 그  자체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
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 이론의 핵심에서 패러독스가  왜 통상 자각되지 못하는가
라는 이유의 하나이다. 예컨대 어떤 유전자는 포식자의 주행속도를 개선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포식자의 몸 전체는  그 모든 유전자를 포함하여 더  빨리 달리기 때문에 
보다 성공하기 쉽다. 그의 속도는 그것이 새끼를 가질 나이까지 생존을 도움으로써 빨리 달
리는 유전자까지도 포함하여 그 유전자 모두의 보다 많은 사본이 전해지게 한다. 하나의 유
전자에 대해 좋은 것은 모든 유전자에게  좋기 때문에 여기서 패러독스는 훌륭하게  해소된
다. 
  그러나 만일 하나의 유전자가 그 자신에게는  좋은 것이나 몸 속의 나머지  유전자에게는 
나쁜 표현형 효과를 끼친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결코 단순한 공상 같은 것은 아니다. 그
와 같은 사례는 예컨대 '감수 분열 구동(meiotic drive)' 이라 불리는 흥미있는 현상으로 알
려져 있다. '감수분열' 이란 염색체의 수가 반으로 되어 난세포와 정세포를 생성하는 특별한 
세포 분열이라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정상적인 감수분열은 완벽하게 공정한  제비뽑기이다. 
대립유전자의 모든 짝 중에서 운 좋게 정자나 난자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그 중의 한  쪽 
뿐이다. 그러나 하나의 짝 중 어느 것도 들어갈 확률은 같아 만일 다수의 정자(또는 난자)를 
평균하면 그 중의 반이 대립유전자의 한쪽을, 반이 또 한쪽을 포함하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
다. 감수 분열은 동전을 던지는 것과 같이 공정하다. 속담처럼 우리는 동전던지기가  무작위
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이것 까지도 바람이나 엄밀하게는 얼마나 강하게 동전을 튕기
는가 등 여러 사정에 따라  영향을 받는 물리적 과정이다. 감수분열  또한 물리적 과정으로 
유전자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만일 눈 색깔이나 머리카락의 말림 상태 등 눈에 보이
는 것에 대해서가 아닌 감수분열 그 자체에 종종 효과를 미치는 돌연변이 유전자가 생기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가끔 돌연변이 유전자 그 자체가 그것의 대립 유전자의 파트너보다 최
종적으로 난자로 되기 쉬운 경향을 감수분열에게  준다고 가정해 보자. 그와 같은 유전자를 
'분리 왜곡 인자(segregation distorter)'라고 하는데 실제로 존재한다. 그것은 악마적인 단순
함을 가지고 있어서 돌연변이에 의해 분리 왜곡인자가 생기면 대립 유전자를 희생으로 해서 
집단 내에 거침없이 퍼져 나간다. 감수 분열 구동이라고  알려진 것이 이것이다. 몸의 번영, 
체내의 다른 모든 유전자의 번영에 미치는 그 효과가 비참한 경우에도 그것은 일어난다. 
      쥐의 유전자
  이 책을 통하여 우리는 생물 개체가 미묘한 방법에 의하여 스스로 사회적인 동무를 '속일
' 가능성에 관하여 주의를 환기시켜왔다. 여기서 우리는 단일 유전자에 의해 하나의 생물체
를 공유하는 다른 유전자를 속이는 석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유전학자인 크로
(James crow)는 그것을 '시스템을 때려부수는  유전자' 라고 불렀다. 가장 잘  알려진 분리 
왜곡 인자의 하나는 생쥐의 t유전자이다. 한 마리의 생쥐가 두 개의 t유전자 를 가지고 있으
면 새끼는 죽거나 불임이 되거나 한다. 따라서 t는 동형접합 상태에서는 '치사적'이다. 만일 
수놈의 생쥐가 t유전자를 하나만  가지고 있을 경우, 한가지  주목해야 할 점을 제외하고는 
정상이고 건강한 생쥐이다. 만일 그와 같은 수놈의 정자를 조사해 보면 95%가 t유전자이며 
겨우 5%만이 그것의  대립 유전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분명히  예측치에서 대략 
50%정도 왜곡된 것이다. 야생의 개체군에서 t유전자가 돌연변이에 의해 종종 나타나면 그것
은 즉시 요원의 불처럼 퍼져 나간다. 감수 분열의 추첨에서  그와 같이 심하게 불공평한 유
리함이 있다고 하면 그렇게 되지 말라는 이유가 있을까? 그것은 너무 빨리 퍼져 나가기 때
문에 머지 않아 곧 집단 내의 대다수의 개체는  t유전자를 2배로 계승하게 된다(양친으로부
터 각각). 이와 같은 개체는  죽거나 불임이기 때문에 결국 그  지역 개체군 전체가 절멸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몇몇의  생쥐와 야생  개체군이 과거에 t유전자의 유행을 통하여 
절멸한 적이 있었다고 하는 증거가 몇 개 존재한다.
  반드시 모든 분리 왜곡 인자가 t와 같은 파괴적인 부차 효과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 대부분은 적어도 어떤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다(거의 모든 유전적 부차 효
과는 불리한 것이며, 새로운 돌연 변이는 보통 그 유리한  효과가 불리한 효과를 능가할 때
에만 퍼진다. 만일 불리한 효과와 유리한 효과가 같이 생물체 전체에 적용된다고 하면 생물
체에게 있어 그 차등 효과는 유리할 수 있다. 그러나 불리한 효과는 생물체에, 유리한  효과
는 유전자에게만 적용한다고 하면 생물체의 입장에서 볼 때의 차등 효과는 완전히 불리해진
다). 그 유해한 부차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만일  분리 왜곡인자가 돌연 변이에 의해 생긴다
면 그것은 확실히 집단 내에 퍼지게 될 것이다. 자연 선택(이것은 결국에 가서 유전자 수준
에서 작용한다) 은 가령 그 효과가 생물 개체 수준에서 불리하게 될 것 같더라도 분리 왜곡 
인자를 유리하게 한다.
  단 분리 왜곡 인자는 그다지 흔치는  않다. 왜 흔하게 볼 수 없느냐는  의문을 계속할 수 
있다. 그것은 왜 감수 분열 과정이 보통 균형 잡힌  동전을 전질 때처럼 빈틈없이 공평한가
를 또 다른 형태로 묻는 것이다. 그 해답은 생물체가  왜 존재하는가를 이해하는 순간에 자
연스럽게 나올 것이다. 
      생물 개체 - 로봇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은 생물 개체의 존재를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
유는 아마도 그 가 부분이  극히 일체화되고 통합된 방법을 서로  협조하고 이씩 때문이다. 
생물에 관한 물음은 보통 생물 개체에 관한 물임이다. 생물학자는 생물개체가 돼 그것을 하
고, 또 왜 저것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종종 생물 개체가 왜 모여서 사회를  이루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그들은 왜 - 본래 그렇게 물어야 하는데 - 생물 물질이 무엇 때문에 모여서 
생물체를 구성 하느냐고는 묻지 않는가? 왜 바다는 아직도 자유로이 독립된 자기 복제자들
의 원초적인 투쟁의 장이 아닌가? 왜 태고의 복제자들은 모여서 묵직하게 작동하는 로봇을 
만들어 그 속에서 살고 있는가? 그리고 왜 그 같은 로봇 - 생물 개체의 몸, 당신과 나 - 은 
이처럼 크고 복잡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일까?
  많은 생물학자는 도대체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조차 이해 못하고 있다. 문제를 새물 개
체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이 그들의 제 2의 천성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부 생물학자는 
앞질러 가서 생물 개체가 보기 위해서 눈을 사용하는 것처럼 DNA를  마치 생물 개체가 번
식을 위해 쓰는 도구라고 보고 있다. 이 책의 독자는 이 같은  태도가 당치도 않은 큰 오류
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거꾸로 된 진실이다. 독자는 또 그것에  대신하는 
태도, 즉 이기적 유전자라고 하는 생명관이 그 자체로서 심각한 문제를 갖는다는 것도 인정
하게 될 것이다. 그 문제 -  거의 정반대의 - 란 도대체  생물 개체가 왜 존재하느냐, 특히 
생물학자가 진실을 반대로 전도시킬 정도로 크고 긴밀한 목적성을 가진 형태로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잠자코 새울 개체를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
으로 간주하는 낡은 태도를 우리의 정신에서 제거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
면 문제의 요점을 회피하는 것이  될 것이다. 정신을 깨끗이 하기  위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장치는 내가 연장된 표현형이라고 부르는 사고 방식이다. 이 사고 방식에 대해, 그리고 그것
이 의미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하고 싶다. 
  하나의 유전자의 표현형 효과는 보통 그것이 속하는 생물체에 미치는 효과의 모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종래의 정의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제 하나의 유전자의 표현형 효과는 "그
것이 세계에 미치는 모든 효과"로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어떤 유전자의 효과가 사
실 문제로서 그 유전자가 대대로  속해 가는 몸에 한정된다는 것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단순히 사실에 대한 문제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정의, 
그 자체의 일부이어야 할 사항은  아닐 것이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한 유전자의 표현형 
효과라는 것은 그 유전자가 다음 세대에 스스로를 들어올리기 위한 도구였다는 것을 생각하
기 바란다. 내가 여기서 더 첨가하려고 하는 것은 이 도구가 생물 개체의 체벽 바깥까지 미
칠 수 있다는 것뿐이다. 유전자를 그것이 속하는 생물체  바깥의 세계에까지 미치는 표현형 
효과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마음에 떠오르는 실례는 
비버 댐, 새집 그리고 날도래 유충의 집과 겉은 건축물이다.
      날도래의 건축물
  날도래는 단지 특징이 없는 갈색 곤충이며 하천의 수면 위를 서툴게 날기 때문에 대부분
의 사람은 좀처럼 알아채지 못한다. 이것도 성충일때의 이야기이고 서충이 되기까지 그것은 
하천의 밑바닥을 기어다니는 유충으로서 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우리가 그 날도래의 유
충이 특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놀랄만한 동물중의 
하나이다.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낸 접착 물질로 하천 바닥의  재료를 가지고 관상의 집을 솜
씨있게 만든다. 이 집은 운반하기 쉬운 집으로서 달팽이나  소라게의 껍질처럼 짊어지고 다
닌다. 단 한가지 틀린 것은 그 껍질을 자기가 분비하는 물질이 아닌 외부 세계의 재료로 집
을 짓는다는 점이다. 날도래의 몇몇  종은 건축 재료로서 막대를 사용하고  다른 종은 죽은 
잎의 조각을, 도 다른 종은 소형의 달팽이 껍질을 사용한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주목할  만
한 날도래의 집은 그 지역의 돌로 만드는 것이다. 날도래는  돌을 주의 깊게 선택하여 벽의 
뚫린 공간이 너무 크거나 작은 것은  버리고 심지어는 꼭 들어맞을 때까지 각각의 돌을 돌
리기도 한다.
  아울러 왜 이것이 그처럼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일까? 만일 우리 스스로가 공평한  견해로 
생각한다면 이 날 도래의 집이라고 하는 비교적 적당한 건축물보다도 그의 눈이나 팔꿈치의 
관절 구조에 보다 강한 인상을 받아야 하는 것은 확실하다.  눈과 팔꿈치 관절은 집보다 훨
씬 복잡하게 '설계된' 것이다. 그리고 날도래의 눈과 팔꿈치의 관절은 우리 인간의 눈과 팔
꿈치 관절과 같은 형태로 발생한 것이다. 그 건축 과정에 관해 우리는 아무런 자만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한층 강한 감명을 받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본 줄거리를 떠났기 때문에 조금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되겠다. 우리는 날
도래의 집에 감명을 받을지 모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우리와 가까운 동물의 그
것에 필적하는 성취에 대해 느낄 정도까지 강한 감명을 받지는 못한다. 만일 해양 생물학작
가 자기 신장의 20배의 직경을 가진 크고 복잡한 어망을 짜는 돌고래 종을 발견했고, 그 기
사의 제목이 신문에 전단 크기로 난 경우를 상상해 보자! 우리는  거미의 집을 당연히 경이
로운 것 이라기  보다는 집 구석의  귀찮은 것으로 여긴다.  또 구돌(Jane Goodall)이  곰베
(Gombe)강에서 정성껏 선별한 돌을 짜임새 있게  쌓고 틈새를 잘 막으면서 훌륭한  지붕과 
울타리를 가진 집을 건조 중인 야생 침팬지의 사진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하면 어떤 열광적
인 일이 가다리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자. 그러나 우리는 날도래 유충이  바로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관심하기 일쑤이다.  거미나 날도래는 때로 이와  같은 차별적인 
기준을 옹호하는 것처럼 그 건축의 위업을 '본능'에 의해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래서 어떻다는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는  본능이 위업을 한층 더 강하고 
인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자! 본론으로 돌아와서 날도래의 집이 다윈주의적인 선택에 의해 진화래  온 하나의 적응
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 예컨대 그것은 바다가재의 굳은 껍질이 그랬던 것과 
똑같은 짓이어서 선택에 의해 유리하게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몸을 보호하는 덮개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생물개체 및 모든 유전자에게 이익을 가져온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자연 
선책에 관한 한 생물 개체의 이익은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함을 배워 왔다. 현실적으로 
고려할 만한 이익은 껍질에 보호적인  성질을 주는 유전자의 이익이다.  바다가제의 경우에 
그것은 매우 당연한 이야기 이다. 바다가재의 껍질은 분명히 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런
데 날도래의 집에 대해서는 어떨까?
  자연 선택의 소유자들은 효과적인 집을 만들도록 작용하는 날도래 조상의 유전자를  선택
했다. 이들의 유전자는 아마도 신경계의  발생에 영향을 줌으로써 행동에 작용했다.  그러나 
유전학자가 실제로 보는 것은 집의 모양과 그 밖의 성질에 미치는 유전자의 효과이다. 우전
학자는 집의 모양을 '위한' 유전자를  예컨대 다리 모양을 위한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것과 
엄밀히 같은 의미로서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더욱이 실제로  날도래 집의 유전학을 연구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사육해서 번식시킨 날도래의 세심한 가
계의 기록을 계속해야 하는데 날도래의 번식은 어렵다. 그러나  날도래의 집에 다른 영향을 
주는 유전자가 존재한다. 또는 전에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유전학을 연구해야만 하
는 것은 아니다. 필요한 것은 다윈주의적인 적응이다'라고 하는 정당한 이유뿐이다. 이 경우
에는 날도래 집의  변이를 통제하는  유전자가 존재함에 틀림 없다. 왜냐하면  자연 선택은 
선택하는 것들 중에 유전적인 차이가 없는 한 적응을 만들어 냏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전학자는 그것을 기묘한 생각이라고 할지 몰라도 우리가 돌 모양, 돌의 크기, 돌
의 견고함 등을 '위한' 유전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것이다. 이 말에 반대하는 
유전학자가 있다면 그는 눈 색깔을 위한 유전자나 콩의 주름을 위한 유전자 등에 관한 말에 
대해서도 반대해야만 한다. 돌의 경우에 이 사고 방식이 기묘하게 생각되는 이유 중의 하나
는 돌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돌의 성질에  대한 유전자의 영향은 간접적인 것
이라고 생각된다. 유전학자는 유전자의 직접적인 영향이 돌 그  자체가 아니라 돌을 선택하
는 행동을 유도하는 신경계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유
전학자에게 신경계에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를 신중히 고찰하도록 바라고 싶다. 유전자가 현실적으로 직접 영향을 끼칠 수 있
는 것은 단백질 합성뿐이다. 신경계에 끼치는 유전자의 영향과 눈 색깔이나 콩의 주름에 미
치는 영향도 항상 간접적인 것이다.  유전자는 하나의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을 결정하고 
그것이 X에 영향을 끼치고 그것이 또 Y에도 영향을  끼치고 그리고 그것이 또 Z에도 영향
을 끼치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종자의 주름이나 신경계 세포의 배선에 까지도 영향을 끼친다
는 것이다. 날도래의 집은 이 같은 인과의 계열을 다시 더 한층 연장해 갔음에 불과하다. 돌
의 견고함은 날도래 유전자의 '연장된' 표현형  효과인 것이다. 만일 콩의 주름이나 동물의 
신경계에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에 관해 말하는 것이 정당하다면(모든 유전학자는 그렇게 생
각하고 있다), 날도래의 집을  만드는 돌의 견고함에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에 관해 말하는 
것 또한 정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당치도 않은 생각이 아닐까?  그러나 이와 같은 
추론으로부터 도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달팽이의 껍질
  이로써 논의의 다음 단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즉, 하나의 생물 개체에 있는  유전자
가 다른 생물 개체의 몸에 연장된  표현형 효과를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점이다. 이 단계에 
오기까지는 날도래의 집이 도움이 됐다. 이번에는 달팽이의 껍질이 도와 줄 것이다.  달팽이
에게 있어 껍질은 날도래 유충의 돌집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달팽이 자신의 세
포에 의해 분비되는 것이며, 관습에 충실한 유전학자들도 다행히 두께라든가 껍질의 성질을 
'위한' 유전자에 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한 종의 흡충류가 기생하는 
달팽이가 특별히 두꺼운 껍질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 두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
까? 만일 기생당한 달팽이가 특별히 엷은 껍질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것을 달팽
이의 성질에 대한 명백한 쇠약화 효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꺼운 껍질이란? 
두꺼운 껍질은 아마 달팽이를 보다  잘 보호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기생자가 숙주에 대해 
그 껍질을 개량함으로써 실제로 도움을 주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좀더 조심스럽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두꺼운 껍질이  정말로 달팽이에게 유리하다면 도
대체 그들은 왜 두꺼운 껍질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 답은 아마도 경제적인 것에 있을 적
이다. 껍질을 만드는 것은 달팽이에게 지출을 요하는 일이다. 그것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용이하게 얻을 수 없는 먹이에서 섭취해야만 하는 칼슘과 다른 화학 물질을 필요로 
한다. 이 모든 자원이 만일 껍질을 만들기 위해 소비되지 않을 경우 더 많은 새끼를 만드는 
등 다른 유익한 것에 소비할 수 있을 것이다. 여분의 두터운 껍질을 만들기 위해 다량의 자
원을 소비하는 달팽이는 자기의 몸을  위한 안전을 확보한 셈이 된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지출을 요하는 것일까? 그 달팽이는 장생할지는 모르나 번식에는 그다지 성곡 못하고 그 유
전자를 전하는 데 실패할지도 모른다. 전하는 데 실패하는 유전자 중에는 여분의 두꺼운 껍
질을 만드는 유전자도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껍질이 너무 두껍다는 것은 껍질이  너무 
얇다는 것과 같다고 하는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흡충이  달팽이에게 여분의 껍질을 분비시
키도록 할 깨에 만일 껍질을 두껍게 하는 경제적 비용을 흡충이 부담하지 않는 한 달팽이에
게 친절한 행위를 요구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흡충이 그렇게도 씀씀이가 헤픈 
생물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정도  확실히 보증할 수 있다. 흡충은  달팽이에게 어떤 숨겨진 
화학적 영형을 끼쳐 달팽이가 스스로 '알맞은' 껍질의  두께를 변화시키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달팽이의 수명을 연장할는지는 모르나 달팽이의 유전자에게 도움을 주지 못
한다. 
  그러면 흡충에게는 어떤 이익이 있는 것일까? 왜  그런 짓을 하는 것일까? 다른 모든 사
정이 같다면 달팽이의 유전자도, 흡충의 유전자도 모두 달팽이의  생존에 의해 이익을 얻는 
입장에 있다. 그러나 생존은 번식과 갗응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종의 교환 거래가 있을 것 
같다. 달팽이의 유전자는 자신의 번식에 의해 이익을 엊는 입장에 있는데 반해 흡충의 유전
자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흡충도 자신의 유전자가 현재의 숙주의  자손의 몸 속에 
산다는 것에 과해 특별한 기대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는 살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경
쟁 흡충 유전자에 관해서도 같을 것이다. 달팽이의 수명이 그  번식 성공도 에서 다소의 손
실이라는 지출에 의해 대가를 줘야만 한다고 가정하면  흡충의 유전자는 '기쁘게' 달팽이에
게 비용을 지불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달팽이의 번식 그 자체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달팽이의 유전자는 그 비용의 지불을 꺼린다. 왜냐하면 장기적인 의미에서 그들의 
장래는 스스로의 번식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흡충의 유전자가 자기에게는 이
익을 주나 달팽이의 달팽이의 유전자에게는 달팽이의 껍질을 분비하는 세포에게 지출을  강
요하는 듯한 영향을 미치게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 이론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지만 가능
성이 크다.
  자! 이제 우리는 날도래의 교훈을 일반화 해야 할 상황에 왔다 만일 흡충이 하고 있는 것
에 관한 나의 가설이 옳다면 그 합리적인 결과로서 우리는 달팽이의 유전자가 달팽이의 몸
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과 똑같은 의미로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유전자가 '자신의'몸의 
바깥까지 도달하여 외계를 조작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날도래의 경우와  같이 이 말도 
유전학자들을 침착하지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몸의 내부에 한정된 유전자의 효과에
만 익숙해 있다. 그러나 또다시 날도해의 경우와 같이 유전학자가 '효과'를 가진 유전자라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자세히 고찰해 보면, 그와 같은 침착하지 못함이 잘못이라는 것
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달팽이 껍질의 변화가  흡충의 적응에 의해 생긴다는 것
을 인정만 하면 된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흡충의 다윈주의적 선택에 의해 생겼음이 틀림
없다. 우리는 한 유전자의 표현형 효과가 돌과  같이 생명이 없는 대상 뿐만 아니라 '다른' 
생물체에게도 연장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낼 수 있다. 
      유충 호르몬
  달팽이와 흡충의 이야기는 시작에 불과하다. 여러 형태의 기생자가  그 숙주에 대해 놀랄 
정도로 교활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다. 현미경으로밖에 볼 수 없는 
작은 기생 원생 동물인 Nosema(포자충의 일종)는 fluor beetle(밀가루에 꾀는 벌레) 에 기생
하는데, 이 원생 동물은 이 갑충에게서 극히 특이적인 화학 물질의 제조법을 발견 했다.  다
른 곤충과 마찬가지로 이 갑충도 유충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유충 호르몬이라고 하는 호르몬
을 가지고 있다. 유충에서 성충으로 제대로 변화하려
면 유충이 유충 호르몬의 생산을 정지해야 한다.  기생자인 포자충은 이 호르몬 (아주 유사
한 화합물)을 합성하는데 성공 한 것이다. 수백만의 포자충이 힘을 합하여 이 갑충의 몸 속
에서 유충호르몬을 대량 생산하고, 이에 따라 이것이 성충이 되는 것을 저지하고 있는 것이
다. 갑충은 생장을 계속하여 최후에는  정상적인 성충의 2배 이상이나  체중을 갖는 거대한 
유충으로 된다. 유전자의 증식에 있어서 그것은 갑충에게  바람직한  것이 아니나 기생자인 
포자충에게는 풍요한 입장이다. 갑충의 유충이  커지는 것은 원생 동물의  유전자의 연장된 
표현형 효과의 하나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 피터 팬 같은 갑충보다 더 강한 프로이트적 불안을 일으키는 하나의 사
례가 있다. '기생 거세'가 그것이다. 게에는 Sacculina라고 하는 동물이 기생한다. Sacculina
는 따개비 조개에 가깝지만 식물과 비유한다면 기생 식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것은 불
운한 게의 조직에 복잡한 뿌리 체계를  깊이 박고 그 몸에서 영양을 빨아  먹는다. 이 기생 
동물이 최초로 공격하는 기관의 하나가 게의 정소와 나소라는 것은 아마도 우연 만은 아닐 
것이다 .반면에 게의 생존에 필요한 - 번식을 위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  기관에는 해를 끼
치지 않는다. 게는 이 기생에 의해  실질적으로 거세된다. 거세된 살찐 소처럼 거세된  게는 
번식에 쓸 에너지와 자원을 자기 자체의 생장에만 사용한다.  기생자로서는 게의 번식의 희
생을 힘입어 풍부한 이득을 취한다. 내가 fluor beetle에 기생하는 Nosema와 달팽이에 기생
하는 흡충에 대해 추축했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이다. 이들 세 가지의 모든 예에서 숙주로서
의 변화는 만일 그것이 기생자의 이익이 되는 다원주의적 적응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기생
자의 유전자의 연장된 표현형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유전자는 '자신의' 몸 바깥까
지 손을 뻗쳐서 다른 생물체의 표현형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숙주와 기생자
  기생자의 유전자와 숙주의 유전자 사이의 이해 관계는 매우 큰 정도까지 일치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관점에서 보면 흡충의 유전자와 달팽이의 유전자 모두 달팽이의 
몸에 기생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양자 모두 같은 보호  껍질에 둘러싸여 있음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그러나 '더 좋은' 껍질의 정확한 두께에 관해서는 서로 이해 관계가 다르다.
이 분기(分岐)는 근본적으로 이 달팽이의  몸 속에서 떠나 다른  개체에 들어가는 기생자의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에서 생긴 것이다. 기생자가 달팽이의 유전자로서 떠나는 방법은 달팽
이의 정자나 알을 통해서 이다. 흡충의 유전자로서 그것은 아주 다르다.  상세히 (기가 막히
게 섬세한)관여하지는 않으나 문제는 그들의 유전자가 달팽이의 정자 또는  알 속에 들어가 
달팽이의 몸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떠한 기생자에 관해서도 묻지 않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물음은 다음과 같다.  즉, '그 
유전자는 숙주의 유전자와 같은 운반자를  통하여 미래의 세대로 전해지는가?'라는  물음이
다. 만일 '아니오' 라면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숙주에게 손해를 끼친다고  예측할 수 있다. 
만일 '예'라면 기생자는 숙주가 단순히 생존뿐만이 아니라 번식도 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
하여 도와줄 것이다. 긴 진화적인 시간이 흐르면 그것은 기생자라는 것을 멈추고 숙주와 협
력하여 최종적으로 숙주의 조직에 합세하여 이미 기생자라고는 인정받을 수 없게 되어 버릴 
것이다. 앞에서 시사한 바와 같이 자칫하면 우리의 세포도  이 진화적인 스펙트럼에서 생겨
난 것인지도 모른다. 즉, 우리 모두는 태고의 기생자들이 합쳐진 역사적 유물이라는 것이다.
  기생자의 유전자와 숙주의 유전자가 공통의 숙주를 공유할 때에 어떤일이 생기는가를  생
각해 보자. 
  나무에 구멍을 뚫는 ambrosia beetle(Xyleborus ferrugineus라는 종의  일종) 에는 박테리
아가 기생하는데, 이 박테리아는 숙주의 몸에서 살 뿐만 아니라 자기를 새로운 숙주에게 운
반해 달라는 수단으로 숙주의 알을 이용한다. 그와 같은  기생자의 유전자는 따라서 숙주의 
유전자와 거의 정확하게 같은 상황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두  세포의 유전자는 하나의 
생물 개체에 있는 모든 유전자가 보통 협조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 협조한다 ' 고 
예측할 수 있다. 그 중의 명 개가 종종 '갑충의 유전자'이며 다른 것이 종종 '박테리아의 유
전자'라고 구별하는 것은 이 경우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양쪽의 유전자 세트는 갑충의 생
존과 그 알의 증식에 '관심'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양자 모두 갑충의 알을 자기들의 장래의 
패스포트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박테리아의 유전자는 숙주의 유전자와 공통
의 운명을 공유하는데, 나의 해석에 따르면 박테리아는 그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갑충과 협
력한다고 예측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협력'이라는 것이 조심성 잇는 표현임을 알게 된다. 그들이 갑충을 위해 행
하는 것은 이 이상 있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친절한 것이다. 갑충류는 종종 벌이나 개미처
럼 단복상체(haplodiploid)이다.(제 10장 참조). 만일 알이 수놈에 의해 수정되면 반드시 암놈
이 발생하고 미수정란에서는 수놈이 발생한다. 바꾸어 말하면 수놈에게는 부친이 없다. 수놈
이 되는 알은 정자에 침입됨이  없이 자발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나 벌과  개미의 알과 달리 
갑충의 알은 실제로 무엇인가에 의해 침입될 필요가 있다.
  거기에 박테리아가 등장하는 것이다.  박테리아가 미수정란을 자극하여  활동을 개시토록 
해서 수놈의 갑충이 되도록 발생을  유발한다. 이들의 박테리아는 기생적인  것을 지양하고 
호혜적으로 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주장하는 그 같은 유의 기생자이다. 왜냐하면  박테리아
는 바로 숙주의 알 속에서 숙주 자신의 유전자와 함께  전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 자신
의 몸은 아마도 소실되어 '숙주'의 몸에 완전히 합체되어 버릴 것이다.
      히드라
  히드라(hydra)의 종 중에서는 오늘날도 계발적인 스펙트럼을 발견할 수가 있다. 히드라는 
육수의 말미잘처럼 촉수를 가진 작은 정착성 동물인데 그 조직에는 조류(algae)가 기생하는 
경향이 있다. Hydra vulgaris와 Hydra attenuata라는 종에서  조류는 히드라에게 진짜 기생
자이며 히드라를 병들게 한다.  이에 대해 Chlorohydra viridissima라는  종에서는 히드라의 
조직으로부터 조류가 없어지는 일은 절대로 없고, 히드라에게 산소를 공급함으로 해서 히드
라의 번영에 유익한 공헌을 하고 있다. 자! 여기에 흥미로운 점이 있다. Chlorohydra에 있어
서는 바로 우리의 예상대로 이 조류는 히드라의 알을 통하여 자기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
이다.양자 모두 Chlorohydra의 알의 증식을 위해 전력을 쏟는다. 그러나 다른 두 종의 히드
라 유전자는 자기에게 기생하는 조류의 유전자와 '의견의 일치'를 않는다. 어쨌든 같은 정도
로 일치하는 일은 없다. 양쪽의 유전자 세트는 모두 히드라의 유전자만이 번식을 마음에 둔
다. 그래서 조류는 친절한 협력을 향해 진화하는 것보다  오히려 상대를 약화시키는 기생자
의 마음에 매달린다. 중요한 점을  다시 되풀이 하면 자기의 유전자가  그 숙주의 유전자와 
같은 운명을 열망하는 기생자는 모든 이해 관계를 숙주와 공유하고 최종적으로 기생적 작용
을 멈추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박테리아
  이 경우에 운명이란 미래의 세대를 의미한다. Chlorohydra의 유전자와 조류의 유전자, 그
리고 갑충의 유전자와 박테리아의 유전자는 수구의 알을 통해서만  미래에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생활 분야의 최적정책에 관해 기생자가 행하는 모든 '계산'은 숙주의 유전자가 
같은 계산에 의해 빼낸 최적 정책과 같은 또는 거의 같은 것에 수렴할 것이다. 우리는 달팽
이와 그  기생자인 흡충의   경우 각각이 좋아하는   껍질의 두께는 다르다고  결론내렸다. 
Ambrosia beetle과 그의 박테리아의 경우, 숙주와 기생자는 날개의  길이와 그 밖의 갑충의 
모든 몸의 특징에 관해 같은  선호도를 취한다는 것에 일치할 것이다.  이것은 곤충이 그의 
날개 또는 그 밖의 무엇인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의 상세함을 전혀 몰라도 예측할 수 있다. 
우리는 갑충의 유전자와 박테리아의 유전자가 모두 같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 - 갑충의 알
의 증식에 바람직한 사건 -  을 계획하고 나서 그들의 능력  범위내의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이라는 추론에서 단순히 그렇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논의를 논리적인 결론까지 밀고 나가  정상적인 '우리 자신의'유전자에게 응용
할 수가 있다. 우리 자신의 유전자들이 서로 협력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로의 같은 출구 - 알이나 정자 - 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인간
과 같은 한 개의 생물체에 들어 있는
어떤 유전자도 만일 정자 또는 난자라고 하는 재래의 경로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을 넓히는 
등의 방법이 발견된다면 협력을 하지 않고 그 방법을 취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몸 속의 
다른 유전자에서 가져온 다른 세트의 장래 결과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감수 분열을 펴게 하는  유전자의 실례를 보았다. 아마도 
정자 내지는 알이라는 '적절한 통로'를 완전히 부수고 옆길을 개척한 유전자가 이미 존재할 
것이다. 
  염색체 속에 편입되지 않고 세포 특히 박테리아 세포의 액체 성분 속에 자유로이 떠다니
며 증식하는 DNA절편이 존재한다. 그들의 절편은  비로이드 라든가 플라스미드 라든가 하
는 여러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플라스미드는 바이러스보다 작고  보통은 극히 소수의 유
전자로 되어 있다. 일부 플라스미드는 이음새도  없이 자신을 염색체에 이어 붙일 수  있다. 
이어 붙임이 너무도 매끄러워서 이음새를 알  수 없다. 즉, 이 같은 플라스미드는  염색체의 
어떤 부분과도 구별이 어렵다. 같은 플라스미드가 또 한번 자신을 자를 수 있다. 신호가  떨
어지자마자 끊어지고 이어지며, 염색체에서  뛰어내리고 뛰어오르는 이  DNA의 능력은 이 
책의 초판이 나온 이후에 확실히 밝혀진 극히 흥미로운 사실 중의 하나이다. 실제로 플라스
미드에 관한 최근의 증거는 이 책의 제10장의 끝에서 기술한 추측(그 당시에는 아직 약간은 
난폭한 추측으로 생각되었다.)을 지지하는 실로 깨끗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몇 개의 관점
에 서 말하면 이들의 단편이 침입한 기생자에 서 유래하든지 아니면 이탈한 반란자에서 유
래 하든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그들의 단편의 행동은 다분히 같아질 것이다. 나는 나의 관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탈한 단편에 관해 말하려 한다.
  다음과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인간DNA의 반란  분자를 생각해 보자 . 그것은 자신이 그 
염색체로부터 끊겨져 나와 세포 내를 자유로이 부유하며 아마도 증식하여 여러 복사물을 낳
아 결국 자신을 다른 염색체에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미래를 향한 어떤 비정통적인 대
체 통로가 그와 같은 반란 자기 복제자를 개발할 수 있을까? 우리는 피부에서 끊임없이 세
포를 잃고 있다. 집안 먼지의 대부분은 우리가 벗어 버린 세포에서 비롯됐다. 우리가 서로의 
세포를 항상 마시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만일 당신이 입속의  살갗을 손톱을 긁어 보면 수
백 개의 살아 있는 세포가  긁혀져 떨어진다. 연인들의 키스나 애무는  서로 다수의 세포를 
주고 받고 있음에 틀림없다.  반란 DNA분자는 이 같은  세포의 어느것엔가에 편승할 수가 
있을 것이다.만일 유전자가 다른 몸에  통하는 비정통적인 통로의 틈  (정통적인 정자 또는 
알이라는 통로가 아닌)을 발견할 수 있다면  자연 선택이 그 편의 주의를  선호하여 그것을 
개선한다고 예측할 수가 있다. 그들이 쓰는 정확한 방법에 관해서  그것이 바이러스 책동 - 
연장된 표현형 이론가에게는 완전히 예상이 가능한 이기적  유전자 - 과 어딘가 틀린 곳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의 광견병
감기가 들거나 기침이 나면 보통 우리는  그 증후를 바이러스의 활동에 의한  부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몇몇 경우에는 한 사람의 숙주에서 다른  숙주로 이동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 바이러스에 의해 의도적으로 공작된 것일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바이러
스는 단순히 공기중으로 호흡을 통해 뿜어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에게 재채기나 기침
을 하도록 해서 힘차게 토해 내도록 한다. 광견병 바이러스는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을 물
었을 때에 타액에 섞여서 감염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개는 흉포하게  무는 개가 되어 
입에서 거품을 내게 된다. 또한 이 개는 불길하게도 - 보통 개의 행동 반경은 1마일이다. - 
행동권 범위를 훨씬 뛰어넘어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바이러스를 광범위하게 퍼뜨리게 된다. 
잘 알고 있듯이 물을 무서워하는 증후도 개가 입에서 거품을 - 이에 동반하여 바이러스 그 
자체마저도 - 뿌리고 다니며 퍼뜨리는 것을 조장하고 있음을 시사하기까지 한다. 나는 성적 
관계를 통해 전염되는 병이 감염자의 성충동을 높인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나 그것은 조사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적어도 미약(媚藥)이라고 하는 가뢰
류(Spanish Fly)가 가려움증 을  일으켜 작용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사람을 가렵게 
하는 것은 마치 바이러스가 뜻을 이루려고 했던 종류의 일이다.
  반역한 사람의 DNA와 침입할 기생적인 바이러스를 비교하는 요점은 양자 사이에 어떠한 
중요한 차이도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상 바이러스가 단편으로 된 유
전자의 집단에서 생길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만일 어떤 구별을 세우려고 생각한다
면 그것은 정자 내지는 난자라는 정통적인 통로를 따라 몸에서 몸으로 옮기는 유전자와 비
정통적인 '옆길'통로를 거쳐 이동하는 유전자 사이의 구별이 아니면 안 된다. 양쪽 모두 '자
신의 '염색체 유전자로서 생긴 유전자를  포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양쪽 모두 
외부에서 침입한 기생자에서 유래하는 유전자를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는 다분히 이 
책의 제 10장에서 내가 억측한 대로 우리들 자신의 모든 염색체 유전자는 서로가 기생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해양 할지도 모른다. 내가 말하는 두 가지 부류의 유전자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차이는 그것들이 장래에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되는 정황의 차이 속에 있다. 감기 바
이러스의 유전자와 단편화된 인간의 염색체 유전자는 자신들의 숙주가 재채기하는 것을  발
고 있는 점에서 서로 일치한다. 정통적인 염색체 유전자와  성교에 의해 전해지는 바이러스
는 자기들의 숙주가 성교하는 것을 열망하는 점에서 서로가 일치한다. 양쪽 모두 숙주가 성
적 매력을 갖기를 바랄 것이다라는 생각은 매우 재미있다.  더욱이 정통적인 염색체 유전자
와 숙주의 알 속에 들어가 전해지는 바이러스는 숙주가 단순히 구애에 성공할 뿐만 아니라 
성실하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와 조부모가 될 때까지 인생의 자세한 모든 측면에서 성공할 
것을 바라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할 것이다.
      비버 댐
  날도래는 자기 집 속에서 살고,  지금까지 내가 말한 기생자들은 숙주의  몸 속에서 살아 
왔다. 따라서 이들의 유전자는 유전자나 보통 그 표현형에 가까운 곳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
로 각각의 연장된 표현형 효과와 물리적으로 가까운 데 있다. 그러나 유전자는 거리가 떨어
져 있어도 작용할 수 있다. 즉, 연장된 표현형은 아주  머리까지 연장할 수 있다. 내가 생각
할 수 있는 최장의 범위는 하나의 호수이다. 거미 집이나  날도래 집과 마찬가지로 비버 댐
(beaver dam)은 아주 경이롭다. 그 다윈주의적  목적이 완전히 분명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목적을 가지고 있음에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비버는 댐을 쌓기 위해 매우 많은 시간과 에너
지를 소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만들어 내는 호수는 아마도  비버의 집을 포식자로부터 지
키는 역할을 다할 것이다. 호수는 또 이동하거나 통나무를  운반하기에 합당한 좋은 수로까
지도 제공해 준다. 비버는 캐나다 목재 회사가 하천을  이용하고 18세기의 석탄업자가 운하
를 이용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유체의 부력을 이용한다. 그것이 주는 이익이 어떻든 간에 
비버의 호수는 경관 중에서도 눈에 띄는 특징적 풍물이다. 그것은 비버의 이나 꼬리에 못지 
않게 하나의 표현형이며 다윈주의적인 자연 선택이 작용하려면 유전적 변이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선택은 좋은 호수와 그다지 좋지 않은 호수  사이에서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 선택
은 나무를 운반하기에 적합한 호수를 만드는 비버의 유전자에 작용할 것이다. 그것은 꼭 나
무를 자르기에 적합한 이를 만드는 유전자가 선택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비버의 호수는 유
전자의 연장된 표현형 효과이며 이것들은 몇백 야드도 연장할 수 있다. 얼마나 긴 팔 인가!
  기생자가 반드시 숙주의 몸 속에서  살 필요는 없다. 그들의 유전자는  멀리 떨어진 곳의 
숙주 속에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다. 뻐꾸기의 새끼가 울새나 개개비의  몸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뻐꾸기가 직접 울새나 개개비의 피를  빨아먹거나 조직을 뜯어 먹지도 
않는데도 우리는 그들에게 기생자라는 라벨을  붙이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양부모의 
행동 조작을 향한 뻐꾸기의 적응은 뻐꾸기의 유전자에 의한 연장된 표현형의 원격 작용이라
고 간주할 수 있다.
      뻐꾸기의 속임수
  뻐꾸기의 알을 품도록 속은 양부모에게 감정 이입하는 것은 쉽다. 알 채집인도 역시 뻐꾸
기의 알이 논종다리 알이나 개개비 알과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많이 속아 왔다(암 뻐꾸기는 
품종마다 각각 다른 숙주 종에 전문화 되어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번식기 후기에 거
의 둥지에서 날아갈 수 있기 직전의 뻐꾸기 새끼에 대해 양부모가 하는 행동이다. 뻐꾸기는 
보통 양부모보다 훨씬 체구가 크다. 나는 지금 바위종다리의 어미새 사진을 보고 있는데, 그 
괴물과 같은 양자에 비하여 양부모가 너무 작기 때문에 먹이를 주기 위해서는 그 놈의 등에 
올라타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우리는  숙주에게 별로 동정이 가지  않는다. 그 어리석음, 
속기 잘하는데 아주 놀란다. 틀림없이 아무리 바보 같은  동물일지라도 그러한 새끼를 보고 
어딘가 이상한 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뻐꾸기 새끼는 오히려 그 숙주를 그냥 '속임' 이상의, 단순히 진자 자기가 아닌 어떤 시늉
을 하는 이상의 것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즉, 숙주의 신경계에 상습성의 마약
과 같은 형태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비록  마약을 쓴 경험이 없는 사람
까지도 쉽게 공감할 수 있다. 남자는  여성의 육체 사진에 주의하게 되며 발기까지도  한다. 
그는 결코 인쇄된 잉크의 패턴이 진짜  여성이라고 생각하도록 '속고 있을'리는 없다. 그는 
자기가 종이 위의 잉크를 보고 있음에 불과한 것을 알고 있으나 그의 신경계는 진짜 여성에
게 반응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반응하고 만다. 우리는 비록 그 상대와의 관계가 장기적으로 
보아 누구의 이익에도 도움이 안됨을 바로 판단하게 될 경우에라도 특정 이성의 매력에 견
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물에 대한 참기 어려운 매력도 마친가지이다. 
바위종다리는 다분히 장기적으로 본 자기의 최선의 이익에 대해서 분명한 자각은 가지고 있
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 신경계가 특정한 종류의 자극을  참기 어려운 것으로 보는 것은 
훨씬 간단하기까지 하다.
  뻐꾸기 새끼의 크게 벌린 빨간 입은 너무도 유혹적이어서 조류학자들은 다른 새의 둥지에 
앉아 있는 뻐꾸기 새끼의 입에 먹이를 넣어 주는 다른 종의 어미 새를 쉽게 볼 수 있다. 이 
새는 자기 새끼의 먹이를 물고 집으로  오는 도중이었을 지도 모른다. 돌연히 눈에  뜨이는, 
전혀 다른 종류의 새 둥지 속에 있는 뻐꾸기 새끼의 특별히 크게 벌린 빨간 입을  발견하게 
된다. 이 새는 그 남의 둥지를 향해 방향을 바꿔 자기 새끼에게 주려고 했던 먹이를 뻐꾸기
의 입 속에다 넣어 준다. '불가항력설'은 양모가 '마약 중독자' 처럼 행동하여 뻐꾸기새끼가 
그들에게 '나쁜 버릇'으로서 행동한다고 말한 초기 독일 조류 학자들의 견해와 일치한다. 최
근 이 견해는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뻐꾸기의 벌린 입이 마약과 같은 강력한 초
자극이라고 상정하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쉽다.  괴물 같은 새끼 등에 
올라 탄 자그마한 어미 새의 행동에 줄곧 공감을 갖기 쉽다. 그  어미 새는 결코 바보가 아
니다. '속는다'라는 말은 잘못된 말투이다. 그 신경계는 마치  그것이 무력한 마약 중독환자
이며 마치 그 뻐꾸기가 양모의 뇌에 전극을 꽂는 과학자나 되는 듯한 상황하에서 억제할 수 
없도록 통제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조작된 양부모에게 우리가 더한층  개인적 공감을 가지게 됐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뻐꾸기에게 벌을 내리지 않는 자연 선택이 왜  허용되어 왔는가를 물어봐야겠다. 왜 
숙주의 신경계는 빨간 입이라는 마약에 대한 저항성을 진화시키지 않았는가? 자칫하면 그것
이 작용하는 만큼의 시간이 아직 부족한지도 모른다. 어쩌면 뻐꾸기는 겨우 수백 년 전부터 
현재의 양 부모에게 기생을 시작했고, 2,3백 년 사이에는 그것들을 써먹고 다른 종을 희생으
로 바칠지도 모른다. 이 이론을 지지하는 증거가 멏 가지 존재하는데, 나는 여기에서 그것보
다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뻐꾸기와 그 숙주가 되는 어떤 종 사이의 진화적인 '군비  경쟁'에는 실패의 불평등한 지
출에서 기인하는 일종의 타고난 불공정이 존재한다. 개개의 뻐꾸기  새끼는 조상 뻐꾸기 새
끼들이 길게 이어져 온 계열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이 계열에 속하는 모든 개체는 그 양부모
를 조작하는데 성공해 왔음이 틀림없다. 양부모에 대한 지배력을  만일 잠시라도 잃은 뻐꾸
기 새끼는 죽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개개의 양부모는  대개가 그의 생애에 한번도 뻐꾸
기와 만난 적이 없는 길게 이어져 온 조상의 계열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둥지 속에 실제로 
뻐꾸기 알을 받은 양부모 새도 그것에게 지고 있으면서도 살아 남아서 다음 번식기에는 다
른 한배의 새끼를 키울 수가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실패에 대한 지출에 비대칭성이 있다는 
점이다. 뻐꾸기의 노예가 되는 것에 저항 하여 손해를  보는 유전자는 울새나 바위종다리의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질 수 없다. 이것이야 말로 내가 '타고난 불공정'과 '실패에 대한 지출
의 비대칭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점은 다음의 이솝우화에 요약되어 있
다. 즉, "토끼는 여우보다 빠르다. 왜냐하면 토끼는 목숨을 걸고 달리나 여우는 먹이를 위해
서만 달리기 때문이다." 나의 동료인 크렙스와 나는 이것을 '생명/식사 원리'라고 명명했다. 
      생명/식사 원리
  생명/식사의 원리 때문에 때로 동물은 자기로서 최선은 아닌 듯한  방법으로 생동하여 다
른 어떤 동물에 의해 조작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어쩐 의미에서 자기에게 
최대의 이익이 되도록 행동하고 있다. 생명/식사 원리의 전체적인 요점은 이론상 조작에 저
항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비용이 너무도 과다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뻐꾸기에 의한 
조작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보다 큰 눈 또는 뇌를 가지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것은 간접적인 
지출을 수반할 것이다.조작에 저항하는 유전적 성향을 갖는 바이러스는 저항에 필요한 경제
적 지출 때문에 현실로는 자손에게 유전자를 전하는 데 그다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는 생물을 그 유전자보다 생물 개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것으로 후
퇴해 버렸다. 흡충과 달팽이에 관해 말했을때 기생자의 유전자는 숙주의 몸에 재해 모든 동
물의 유전자가 그 '자신의'몸에 표현형  효과를 끼치는 것과 정확히  같은 방법으로 표현형 
효과를 끼칠 수 있다는 생각에 젖었다고 본다. 우리는 '자신의' 몸이라는 생각 그 자체가 편
견을 갖고 있는 가정이라는 석을 표시 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몸 속에 있는 모든 유전
자는 우리가 그것을 몸 '자신의' 유전자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든 않든 간에 '기생적' 유
전자인 것이다. 뻐꾸기는 숙주의 몸 내부에 살지 않는 기생자의 일례로서 이 논의에 등장했
다. 그러나 뻐꾸기는 내부 기생자와 똑같은  방식으로 숙주를 조작하며, 그 조작은 몸  속의 
약물이나 호르몬처럼 강력하여 저항하기 어렵게 만든다.ㅏ 내부 기생자의 경우와 같이 우리
는 이제 모든 사실을 유전자와 연장된 표현형이라는 관점에서 바꿔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뻐꾸기와 숙주 사이의  진화적 군비 경쟁은 자연 선택에 의해 선택되는 유전적 돌연변이
라는 형태를 취한다. 크게 벌린 뻐꾸기의 입을 보고 숙주의 신경계에 마약과 같이 작용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유전적인 변이로서 생긴 것이 틀림없다.  이 돌연변이는 뻐꾸기 새끼
의 예컨대 크게 벌린 입의 색깔이나 형상 등에 대한  효과를 통해 작용했다. 그러나 이것마
저도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아니다. 그의 가장 직접적 가장 직접적 효과는 아니다. 그의  가
장 직접적 효과는 세포 내부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화학적인 현상에 미치게 됐던 것이
다. 크게 벌린 입의 색깔이나 형상에 대한 유전자의 효과 그 자체는 간접적인 것이다.  그리
고 여기에 문제의 요점이 있다. 그것보다 아주 조금 간접적인 것은 같은 뻐꾸기의 유전자가 
정신을 잃은 숙주의 생동에 미치는 효과이다. 뻐꾸기의 유전자가  크게 벌린 뻐꾸기의 입의 
색깔이나 형상에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엄밀히 같은 의미로 우리는 뻐꾸기의 유전자가 
숙주의 행동에 효과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기생자의 유전자는 단순히 기생자가 숙주
의 몸 속에서 직접적인 화학적 수단에  의해 조작될 경우뿐만 아니라 기생자가  숙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원격 조작할 경우에도 숙주의 몸에 효과를 끼칠 수가 있는 것이다. 
  뻐꾸기는 놀랄 만한 가르침을 많이 주는 생물이다. 그러나 척추  동물 사이에서 볼 수 있
는 모든 경이로움까지도 곤충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곤충에는 극히 많은 친구가 있다
는 이점이 있다. 나의 동료인 메이는 적절하게 "어림잡아 말하면  모든 종은 곤충이다."라고 
의견을 말했다. 곤충 '뻐꾸기'의 리스트는 거의 거론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사실 너무도 많고, 
그들의 습성은 너무도 빈번하게 재발견 되어왔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몇몇의 실례는 낯익
은 '뻐꾸기주의'를 통과하여 '연장된  표현형'이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가장 격렬한 환상을 
충족하고 있다. 
  새 '뻐꾸기'는 알을 낳고 사라진다. 어쩐 '뻐꾸기' 개미의 암놈  중에는 자신의 존재를 더 
극적인 형태로 표현해 주의를 끌게 하는 것이 있다. 나는  라틴어의 학명은 거의 안 쓰는데 
여기서는 Bothriomyrmex regicidues 와 B.  decapitans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된다. 이 두 
종은 모두 다른 종의 개미에 기생한다. 모든 개미에 있어서  새끼는 보통 부모가 아닌 일개
미에 의해 양육되므로 뻐꾸기 개미가 속이거나 조작해야 할  대상은 일개미 이다. 효과적인 
첫 번째 단계는 경합하는 새끼를 낳는 성향을 가진 일개미 자신의 어미를 말살하는 일이다. 
기 두 종에서는 기생자인 단 한  마리의 여왕이 다른 종의 개미 집에  숨어든다. 이 여왕은 
숙주의 여왕을 찾아내면 그 등에 올라타고  끔찍한 짓을 한다. 즉, 희생자의 머리를  천천히 
잘라 버린다. 그 후 이 살해자는 고아가 된 일개미  들에게 인정받고 개미들은 하등의 의심
도 없이 새로운 여왕의 알이나 유충의 시중을 든다. 일부는 양육되어서 일개미 자체가 되고 
그것들이 서서히 본래의 종류로 치환되어간다. 다른 것은 여왕이  되어 새로운 목초지나 아
직 상처 받지 않은 새로운 여왕의 머리를 찾아 밖으로 날아간다. 
      유혹
  그러나 머리를 자르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기생자는 만일 대신할 자를 생각
대로 할 수만 있다면 이 같은 짓을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윌슨의 (곤충사회) 중에서  내
가 맘에 드는 특성은 개미의 일종인 Monomorium santschii이다. 이 종은 긴 진화 과정에서 
일개미라는 계급을 완전히 잃어 버렸다. 숙주의 일개미가 기생자를 위해 모든 것을 하고 심
지어 모든 일 중에서 가장  무서운 일까지도 한다. 침입한 여왕의  명령에 따라 일개미들은 
자기 자신의 모친을 살해하는 일을 실제로 행하고 있다. 왕위  강탈자는 자기의 턱을 쓸 필
요가 없다. 여왕은 정신 지배를 사용한다. 어떻게 하느냐는 수수께끼이다. 아마도 여왕은 화
학물질을 사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개미의  신경계는 보통 화학 물질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만일에 여왕의 무기가 정말 화학 물질이라면  그것은 과학적으로 알려져 있는 모든  마약과 
같이 교활한 것이다. 그것이 해낼 것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일개미의 뇌를 채우고  근육의 
고삐를 잡아 깊이 새겨진 의무를 방기하도록  강요하여 일개미로 하여금 그 자신의  모친을 
적대하게 한다. 개미에게 있어 모친 살해는 특수한 유전적 광기의 행위이며, 일개미를  그렇
게 하도록 유인하는 마약은 정말로 무서운 것이다. 연장된  표현형의 세계에서 동물의 행동
이 어떻게 해서 그 유전자에게 이익을 주는가는 불문할 때 그것이 이익을 주는 것은 누구의 
유전자인가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 
  개미가 기생자, 그것도 단순히 다름 개미 뿐만이 아니라 마치 동물원과 같이 놀랄 정도로 
다양한 전문가의 수정을 드는 것들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다고 해도 거의 놀랄 일이 못 된
다. 일개미들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모은  먹이의 풍요함을 서서히 중앙  저장소로 옮기는데 
그 속은 공짜로 먹으려고 끼여드는  자에게 절호의 표적이 된다. 개미는  또한 훌륭한 보호 
담당자이다. 왜냐하면 잘 무장되어 있고 수도 많기 때문이다. 제 10장에서 말한 진딧물은 직
업적인 경호원을 고용하게 위해 꿀을 지불한다고 볼 수 있다. 몇 종류의 나비는 개미 집 속
에서 유충 시기를 지낸다. 일부는 무분별한 약탈자이다. 다른 것은 보호의 대가로  개미에게 
무엇인가를 준다.  종종 이들  나비에게는 보호자를  조작하기  위한 장비가  많다. Thisbe 
irenea라는 나비의 유충은 머리에 개미를 불러 모으기 위한 발음 기관을 가지고 있다.  그뿐 
아니라 꽁지 끝에는 유혹하는 게 쓸  꿀을 짜내는 , 마음대로 줄였다 늘렸다  하는 한 쌍의 
분출구를 가지고 있다. 어깨에는 또 다른 한 쌍의 분사구가  있는데 이것은 전혀 다르고 보
다 미묘한 마법을 발휘한다. 그 분비물은 먹이가 아니라 개미의 행동에 극적인 영향을 주는 
휘발성의 약물이라고 생각된다. 그 영향 속에 빠진 개미는 확실히 태도가 급변한다. 턱을 크
게 벌리고 공격적으로 되어 어떤 움직이는  대상에 대해서도 보통 이상으로 열심히  덤비고 
물고 찌른다. 흥미로운 것은 약물을 투여하고 있는 나비의 유충만은 예외라는 것이다.  거기
에 더 많은 마약을 뿌리는 유충의 영향하에 있는 개미는  마침내 집착 상태로 된다. 그러다
가 유충은 진딧물처럼 개미를 경호원으로 공용하는데 이 놈들은 한 발 앞선다. 진딧물은 포
식자에 대한 개미의 정상적인 공격성을 일으키는 마약을 투여하고 어떤 중독성ㅇ의 집착 생
태로까지 가는 인상을 준다. 
  나는 극단적인 예를 택했다. 그라나 더 온건한 방법이기는 하나 자연에는 동종 또는 다른 
종의 다른 개체를 조작하는 동물이나 식물이 많이 있다 자연 선택에 의해 조작하는 유전자
가 선택된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들의 유전자가  조작하는 생물체(연장된 표현형)에 효과를 
끼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다. 유전자가 물리적으로 어느 생물의 몸 속에 위치
하는가는 문제가 아니다. 그 조직의 표적은 같은   몸 일지도 모르고, 다른 몸 일지도 모른
다. 자연 선택은 스스로의 증식을 확실히 하도록 세계를 조작하는 유전자를 택한다.  이것이
야말로 내가 '연장된 표현형의 중심 정리' 라고 하는 것에 연결된다. 즉, "동물의 행동은 그
들의 유전자가 그 행동을 하고 있는 동물의 몸 내부에 있거나 없거나 그 행동을 위한  유전
자의 생존을 최대로 하는 경향을  가진다." 나는 동물의 행동이라는  문맥으로 썼는데 물론 
이 정리는 색깔, 크기, 형상, 그리고 그 밖의 무엇에나 응용된다. 
  거기서 겨우 최초로 우리가 내 놓은 문제, 자연 선택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
의 후보자로서 경쟁관계에 있는 생물 개체와  유전자 사이의 긴장으로 되돌아올 때가  왔다 
지금까지의 장에서 나는, 개체의 번식은 유전자의 생존과 같아서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문
제도 없다고 가정해 왔다. 여기서 나는 "생물 개체는  모든 유전자를 증식 시키도록 작용한
다."라고 해도 좋고 "유전자는 여러 세대의 생물 개체에 스스로를 증식하도록 작용한다." 라
고 해도 좋다고 가정한 것이다. 이것은 같은 것에 대한 두 가지의 대등한 표현인데 어느 표
현을 취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긴장은 남아 있다. 
      자기 복제자와 운반자
  문제의 전체를 정리하는 하나의  방법은 '자기 복제자'와  '운반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자연 선택의 근본적인 단위로 생존에 성공 또는 실패하는 기본적인 것, 그리고 때때
로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를 수반하면서 동일한 사본의 계열을 형성하는 것을 자기  복제자라
고 한다. DNA분자는 자기 복제자이다. 자기 복제자는 일반적으로  지금부터 기술하는 이유
에 의해 거대한 공동의 생존 기계, 즉 운반자 속에 모여든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운
반자는 우리 자신과 같은 개체의 몸이다. 그러나 몸은 자기 복제자가 아니다. 그것은 운반자
인 것이다. 이 점은 지금까지 오해되어 왔기 때문에 특히 강조해 둔다. 운반자 그 자신은 복
제하지 못한다. 그래서 운반자는 자기 복제자를 증식하도록 작용한다. 자기 복제자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또한 세계를 지각하지도 못하며 먹이를 잡거나 또는 포식자로부터 도망치지도 
않는다. 자기 복제자는 운반자로 하여금 그와 같은 모든 것을 하도록 작용한다. 여러 목적으
로서 생물학자는 그 관심을 운반자의 수준에 집중하는 것이  편리하다. 그러나 다른 목적으
로서 생물학자는 자기 복제자 수준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편리하다. 유전자와 생물 개체
는 다윈의 드라마에서 같은 주역의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는 아니다. 양자는 서로 다른 배역
이고 많은 점에서 똑같이 중요한 서로가 보완하는 역할, 즉 자기 복제자라는 역할과 운반자
라는 역할을 하다. 
  자기 복제자/ 운반자라는 용어법은 여러 면에서 필요하다. 이것은 예컨대 자영 선택이 적
용하는 수준에 대해서 좋지 않은 논쟁을 해결해 준다.  표면적으로는 선택의 수준을 의미하
는 일종의 사닥다리에 있어서 '개체 선택'은 제 3 장에서 주장한 '유전자 선택'과 제 7장에
서 비판한 '그룹선택'의 중간에 놓는 것이 그럴듯한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개체 선택'
은 막연히 양극단의 중간에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많은 생물학자와 철학자들이 이 잘
못된 길로 이끌려 그와 같은 것으로 취급해 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것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지금 생물 개체와 개체군이 운반자의 역할을 가지고서 싸우
는 진짜 라이벌이기는 하나 그 어느 것이든 간에 자기  복제자라는 역할의 '후보자' 마저도 
아님을 알고 있다. '개체선택'과 '그룸 선택'사이의 논쟁은  정말로 다른 운반자간의 논쟁이
다. 개체 선택과 유전자 선택 사이의  논쟁은 결국 논쟁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전자와  생물 
개체는 이 이야기에서의 다른 상호 보완 역할, 즉 자기 복제자와 운반자라는 역의 후보자이
기 때문이다. 
  운반자 역으로서의 개체와 개체군의 경쟁이 진짜 다툼이 되게끔  안정시킬 수는 있다. 불
행히도 나의 견해에 의하면 생물 개체의 결정적인 승리로  결론이 내려진다. 개체군은 하나
의 실체로서는 너무도 시시하다. 사슴, 사자 또는 늑대의 무리는 어떤 종의 근본적인 조화와 
목적과 일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 마리의 사자, 늑대 또는 사슴의 몸에서  목적
과 조화와의 일치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이제 널리 인정되고 있
다. 그러나 왜 그것이 사실인가?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연장된 표현형과 기생자가 도와 준
다.
  기생자의 유전자가 서로 하나가 되어, 그러나 숙주의 유전자(이것도 서로 하나가 되어 일
한다)와는 대립적으로 일할 때 우리는 그 이유를 두 세트의 유전자가 공통의 운반자, 즉 숙
주의 몸에서 떠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달팽이의 유전자는 달팽이의 정자 
또는 알을 통해서 공통의 운반자를 떠난다.  달팽이의 모든 유전자는 어느 정자, 어느  알에 
대해서도 갘은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유전자는 동일한 당파성이 없는 감수 분
열에 참가한다. 그래서 그들은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같이  일하고 달팽이의 몸을 결속하고 
목적을 가진 운반자로 하는 경향을 갖는다. 흡충이 그 숙주로부터 명료하게 분리할 수 있는 
진정한 이유, 그 목적 및 정체성을 숙주의 그것과 합체시키지 않는 이유는 흡충의 유전자가 
공동의 운반자로부터 이탈하는 방법을 달팽이의 유전자와 공유하지 않고 또 달팽이의  감수 
분열의 추첨에 같이 참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독자적인  추첨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런 방식으로 하는 한  두 개의 운반자는 달팽이와 그 몸  속의 분명히 다른 
흡충으로서 분리된 채로 남는다. 만일 흡충의 유전자가 달팽이의  알이나 정자 속에 들어가 
전해진다고 하면 두 개의 몸은 하나의 육체가 되도록 진화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두 운반
자가 있었다는 말까지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늑대 집단
  우리 같은 단일 생물 개체는  그와 같은 많은 흡수 합병의  궁극적이 통합체이다. 개체의 
그룹(새떼나 늑대 무리)이 단일 운반자에 합병되는 일은 없다. 그것은  바로 무리 속의 유전
자가 현존하는 운반자를 탈출하는 공통의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히 늑대 
무리에서 낭군이 떨어져 나가는 수도 잇다 그러나 어미 무리 속에 있던 유전자는 모든 유전
자가 똑같은 분배가 되도록 단일  용기로 낭군에게 전해지는 석은 아니다.  어떤 한 낭군의 
모든 유전자가 장래에 있어서 같은 일련의 사건에서 이득이 약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하
나의 유전자는 자신이 속해 있는 늑대의 개체를 다른 개체의 희생을 통해 유리하게 함으로
써 자신의 장래의 번영을 촉진할 수 있다. 따라서 한 마리의 늑대는 운반자에 해당한다.  그
러나 늑대의 무리는 다르다. 유전적으로 말해 이 이유는 한 마리의 늑대 몸 속의 생식 세포
를 제외한 모든 세포의 유전자가 같고, 한편 생식 세포에  관해서는 모든 유전자들이 그 중
의 하나에 들어갈 기회가 균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늑대의 한 무리에 속하는 세포군은 같
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것에서 갈라진 낭군의 세포에 들어갈 기회도 같지 않다. 
그들 모두는 다른 늑대의 몸 속에 있는  라이벌의 세포와 투쟁해서 이겨야만 한다.(늑대 무
리가 어떤 혈연 집단인 것 같다고 하는 사실에 의해 이 투쟁은 완화될 것이다).
  어떤 것이 실질적인 유전자의 운반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이 필수적인 속성이
다. 즉, 그것은 내부의 모든 유전자에게  공평한 미래를 향해서 이탈 통로를 가지지  낳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 마리의 늑대에 관해서는 진실이다. 이 경로는 감수 분열에  의
해 만들어지는 정자 또는 알이라는 작은 흐름이다. 이것은 늑대 무리에 대해서는 진실이 아
니다. 유전자는 늑대 무리의 다른 유전자를 희생하여 자기  자신의 개체의 번영을 이기적으
로 촉진함으로써 얻어지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분봉할 때에  꿀벌의 집은 늑대 무리처
럼 다른 개체의 집합된 출아에 의해 번식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더 주의 깊게 살펴
보면 유전자에 관한 한 그들의  운 병은 대체로 공통적이라는 것을  안다. 꿀벌의 분봉군의 
유전자의 미래는 적어도 대부분은 한 마리의 여왕의 난소 속에 숨어 있는 그야말로 벌의 군
체가 진짜 통합된 단일 운반자처럼 보여 그같이 행한 이유이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장의 에
시지를 표명하는 또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다. 
  사실 문제로서 우리는 생명이 도처에서 늑대의 개체나 벌집과 같이 분명히 갈라져서 개개
의 목적을 가지는 운반자로 묶여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연장된  표현형의 학설은 그것이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이론이 예상할 수 있는 모
든 것은 유전적인 미래를 가지고, 떠밀고, 속이고, 싸우는 자기 복제자들의 전쟁터라는 것으
로 그치고 만다. 싸움에서 무기는 효과이지만 최종적으로는  날개, 이빨, 나아가 원격효과가
지 포함한다. 이 같은 표현형의  모든 효과가 분명히 분리된 운반자로  묶이게 되는 경우가 
종종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각각의 운반자는 미래로 보내는 정자 또는 알이라는 공통
의 병목을 가진다는 예견에 따라 규제되고 질서 잡힌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넘길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의문을 불러 일으키는 경탄할 만
한 사실이다. 왜 유전자는 각각 단일 유전적 탈출 통로를 갖는 커다란 운반자로 모여들었을
까? 왜 유전자는 집단을 이루고 자기들이  살아가는 커다란 몸체를 만드는 선택을 했을까? 
나는 '연장된 표현형'에 있어서 이 곤란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리려고 시도했다 여기서는 
그 답과 같이 일부만 개설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때부터  7년이 지난 지금은 다소 전진
할 수 있다.
        유전자는 왜 집단을 형성했는가?
  문제를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유전자는 왜  세포 속에 집단을 이루고 있
는가? 세포는 왜 집단을 이루고 다세포체를 만들었는가? 그리고  생물체는 왜 내가 '병목을 
가진 형'이라고 하는 생활환(life cycle)을 채용했는가?
  우선 최초로, 유전자는 왜 세포 속에 집단을 이루었을까? 왜  태고의 자기 복제자는 원시 
수프 속의 자유를 버리고 거대한 군체에서 살기로 했는가? 왜 그들은 협력하고 있나? 오늘
날의  DNA 분자가 살아 있는 세포인 화학 공장에서 어떻게 협력하는가를 봄으로써 우리는 
답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다. DNA 분자는 단백질을 만든다.  단백질은 효소로 작용하고 특
정한 화학 반응을 촉매한다. 종종 하나의 화학 반응만으로는  유효한 최종 산물을 합성하기
에는 충분치 않다. 하나의 유효한 화학 물질을 합성하는데 있어 인간의 제약 공장에서는 생
산 라인이 필요하다. 출발점이 되는  화학 물질에서 원하는 최종 산물로  직접 변환될 수는 
없다. 일련의 중간 산물이 엄밀한 순서로 합성되어야만 한다. 대부분의 화학 연구자들은 출
발점이 되는 화학 물질에서 유효한  최종 산물의 합성을 달성할 수  없다. 하나는 원료에서 
최초의 중간 산물로의 변환을 촉매하고 또 하나는  최초의 중간 산물에서 제2의 중간 산물
로의 변환을 촉매한다. 결국 이런 방식에 의해 완전한 세트의 효소가 필요하다.
  이들 개개의 효소들은 하나의 유전자로부터 만들어진다. 만일 특정의 합성 경로에서 여섯 
개의 효서 계열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 효소를  만드는 모든 유전자가 존재치 않으면 안 된
다. 그런데 같은 최종 산물에 도달하는데 있어 두 개의  서로 다른 경로가 존재하여 각각이 
여섯 개의 다른 경로와 여섯 개의 다른 효소를 필요로 할 경우 두 경로 사이에는 아무런 선
택할 만한 차이가 없다는 사태가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같은 종류의 일은 화학 공장
에 있어서도 일어난다. 어느 경로가 선택되는가는 역사적인 우연이거나 아니면 화학자의 보
다 의도적인 계획의 문제일 것이다. 물론 자연의 화학 과정에 있어서 선택이 의도적일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  선택을 통하여 생길 수 있을  거시다. 그러나 자연 선택은 
두 경로가 혼선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적합한 유전자의 그룹이 출현하도록 계획할 수 있을
까? 그것은 독일인과 영국인 보트  경주 선수의 비유에서 내가 시사한  것과(제5장) 똑같은 
방법에 의해서이다. 중요한 것은, 경로 1의 한 단계를 위한 유전자는 경로 1의 다른 단계를 
위한 유전자군의 존재하에서는 번영할 것이나  경로2의 유전자군의 존재하에서는 번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만일 그 집단이 이미  경로 1을 위한 다른 유전자에 의해  우위를 뺏기고 
있다면 선택은 경로 1을 위한 유전자에게는 유리하게, 경로 2를 위한 유전자에게는  불리하
게 작용할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같다. 경로2의 여섯 개의 효소를 위한  유전자가 '그룹
으로' 선택되었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것은 확실히  잘못된 표현이다. 각각은 별개의 이기
적 유전자로서 선택되는데 다른 유전자의 바른 세트의 존재하에서밖에 번영하지 못한다.
      유전자의 협력
  오늘날 이 유전자간의 협력은 세포 내에까지 미치고 있다. 그것은 원시 수프(또는 무엇이
든 전에 존재했던 원시적 생활 조건) 속에서의 근본적인 협력에서 출발했음이 확실하다. 세
포벽은 아마도 유효한 화학 물지를 갖추어  온전하게 유지하여 새어 나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장치로서 생겼을 것이다. 세포 속의 대개의 화학 반응은 실제로는 내부의 막상 구조물 
위에서 진행된다. 막은 컨베이어  벨트에다 시험관의 랙을 조합시킨  것 같은 작용을 한다. 
그러나 유전자간의 협력은 세포 생화학의 범위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세포를 뭉쳐서(또는 
세포 분열 후 분리의 실패로) 다세포의 몸을 만들게 했다.
  이것이 나의 세 가지 의문  중 두 번째로 우리를 유도한다.  왜 세포는 집단을 이루는가, 
왜 쿵쿵거리며 움직이는 로봇이 됐는가?  이것은 협력에 관한 또 하나의  의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영역은 분자의 세계로부터 보다 큰 규모로 이동한다.  다세포 생물의 몸은 현미경으
로 관찰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생장한다. 코끼리나 고래까지도 될 수 있다. 크다는 것이 꼭 
좋다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생물은 박테리아이며  코끼리는 극히 조금밖에 없다. 그러나 
작은 생물을 위해 열려 있는 생활의 길이 꽉 차 있을 때,  큰 생물에게 필요한 최적의 생활 
양식은 아직 남아 있다. 예컨대  큰 생물에게 필요한 최적의 생활  양식은 아직 남아 있다. 
예컨대 큰 생물은 작은 생물을 먹을 수 있고 작은 생물은 큰 생물에게 먹히는 것을 피할 수
도 있다.
  세포가 클럽을 만드는 이점은 몸의 크기에 그치지 않는다.  클럽 속의 세포는 특수화되어 
이에 따라 각각의 특이한 임무를 보다 효율적으로 행할 수  있게 된다. 특수화된 세포는 클
럽 중의 다른 세포의 역할을  하고 동시에 다른 전문가의 능률적인  일에서 이익도 얻는다. 
만일 많은 세포가 있으면 어떤 세포는 먹이를 발견하는  센서로서 특수화하고, 다른 세포는 
메시지를 전하는 신경으로서, 또 다른 세포는 촉수를 써서 먹이를 잡기 위한 근육 세포, 먹
이를 분해하는 분비 세포로, 더 나아가서 그 소화된 액을  흡수하는 세포로 특수화될 수 있
다. 적어도 우리 인류와 같은 현대의  생물체에서는 이들의 세포가 클론(clone)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두 같은  유전자를 품고 있으나 그저 특수화된  각각의 세포마다 다른 
유전자의 스위치가 들어가는 것뿐이다. 각  형태의 세포의 유전자는 번식  때문에 특수화된 
각각의 세포마다 다른 유전자의 스위치가  들어가는 것뿐이다. 각 형태의  세포의 유전자는 
번식 때문에 특수화된 소수파의 세포, 즉 불사의 생식 계열의  세포 내에 있는 그들 자신의 
사본에 직접 이익을 주고 있다.
      병목형
  생물체는 왜 '병목을 가진 형'의 생활환을 참가하는 것일까? 이것이 나의 세 번째 의문이
다. 도대체 병목형이란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코끼리 한  마리의 몸에 얼마나 많은 
세포가 있는가에 상관없이 코끼리는 그 생애를 단일 세포인  수정란에서 시작했다. 이 수정
란이 좁은 병목이고, 이것이 배발생의  과정을 통해서 몇 조의 세포로  불어나서 한 마리의 
코끼리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세포가 얼마나  많은 특수화된 세포와 협력
하여 큰 코끼리가 달릴 수 있게 하는 상상도 못할 상세한 일을 진행하든지 간에 이들  모든 
세포의 노력은 단 한 종류의 단일 세포(정자 또는 알)의 생산이라는 최종 목표로 수렴한다. 
코끼리는 그 시작에 있어서 단일 세포, 즉 수정란이라는 것만은 아니다. 그 목표 또는 최종 
산물을 의미하는 그 목적도 다음 세대의 수정란이라는 단일  세포의 생산에 있다. 코끼리의 
폭넓고 거대한 생활환은 처음과 끝 모두에 좁은 병목이 있다.  이 병목은 모든 다세포 동물
과 거의 모든 식물의 생활환의 특징이다. 왜? 그리고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만일 그것이 없
었다면 생명이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대한 고찰이 없이 이 의문에 답할 수는 없다.
  Bottle-wrack과 Splurge-weed라고 하는 두 종의 가상적인 해초를 상상해 보면 알기 쉬
울 것이다. Splurge-weed는 바닷속에  헝클러진 부정형의 나뭇가지처럼 무럭무럭  자란다. 
때때로 가지는 끊어져서 표류한다. 이 같은 절단은 실물체의 어느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단편은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 정원의 삽목처럼 이들  단편은 본래 식물과 똑같이 생장할 
수 있다. 이렇게 몸의 일부가  절단되는 것이 이 식물의 번식법인  것이다. 느낀 바와 같이 
이것은 생장과 현실로는 다른 것이 없고 그저 생장부가 서로서로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Bottle-wrack도 겉모양은 닮아서 역시 무럭무럭 자란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가 하나 있
다. 이것은 단세포의 포자를  방출함으로써 번식한다. 포자는  바닷속을 표류하고 생장하여 
새로운 식물체가  된다. 이들의  포자는  이 식물체  외의 세포와   같은 세포에 불과하다. 
Splurge-weed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은 개재하지 않는다. 딸 식물체는 어미 실물의 세포
의 클론 동료인 세포로 되어 있다. 이 두  종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Splurge-weed가 불특
정 다수의  세포로  이루어진 자신의   조각을 분리 독립시킴으로써   번식하는 데  비하여 
Bottle-wrack은 항상 한 개의 세포로 되는 자신의 조각을 분리 독립시킴으로써 번식한다는 
것이다.
  이 두 종류의 식물을 상상함으로써 병목을 가진 생활환과 병목을 갖지 않은 생활환 사이
의 결정적인 차이에 영점 조준을 할 수 있다.  Bottle-wrack은 단일 세포라는 병목을 통해
서 모든 세대를 꿰뚫는다. Splurge-weed는  그저 생장하여 두로 갈라질 뿐이다.  이산적인 
'세대'를  갖든가,  또는   이산적인 '생물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Bottle-wrack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이제부터 자세히 설명할 텐데 이미 답을 이해할 수 있
다. Bottle-wrack은 보다 이산적인 '개체다움(organismy)'의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
각되지 않을 것인가?
      진화와 배발생의 관계
  이미 본 대로 Splurge-weed는 생장과 같은 과정에  의해 번식한다. 실제로 그것이 번식
한다고는 거의 말할 수 없다. 다른 ks편 Bottle-wrack에서 생장과 생식은 뚜렷하게 구별된
다. 이 차이에 영점 조준을 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그 의미는 무엇인가? 
어째서 그것이 문제인가? 나는 이것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왔고,  나로서는 지금 그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실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답을 생각하기보다 훨씬  어렵
다). 답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 처음 둘은 진화와 배발생의 관계에 상관이  있
다.
  첫째, 단순한 기관에서 복잡한 기관으로의 지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언제까지나 식물에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다. 동물쪽이 분명히 복잡한 기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논의가 이 단계
에 오면 식물에서 동물로 바꾸는 편이 좋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시점에서 유성 생식과 무성 생식은 본  문제에서 주의를 벗어나게 하는 미
끼이다. 우리는 무성적인 포자를  방출하면서 번식하는 동물을 상상할  수 있다. 이 포자는 
단일 세포로서 돌연 변이를 제외하면 몸 속의 다른 모든 세포와 유전적으로 동일하다.
  인간이나 쥐며느리(woodlouse)와 같이 발달된 동물의 복잡한 기관은 조상들의 단순한 기
관에서 서서히 단계적으로 진화해 왔다. 그러나 조상의 기관은  칼을 두들겨서 보습을 만들 
듯이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자손의 기관으로 변화한 것은 아니다. 단순히 그렇지 않다는 것
만은 아니다. 내가 분명히 하고 싶은 점은 대개의 경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칼에서 보
습으로'라는 방식에 의한 직접적 변환에 의해 달성할 수 있는  변화의 양은 극히 한정된 것
뿐이다. 진짜 근본적인 변화는 '제도판으로 돌아와서' 이전의  설계를 버리고 새로이 출발함
으로써만이 달성할 수 있다. 기사가 제도판으로 돌아와서 새로운  설계를 창조할 때 반드시 
헌 설계에서의 발상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헌물체를 문자 그대로 새 것으로 
변형시키려고는 하지 않는다. 헌 물체는 너무도 무거운 역사적 혼란을 짊어지고 있다. 칼은 
두들겨 보습으로 바꿀 수 있을지는 몰라도 프로펠러 엔진을 '두들겨' 제트 엔진으로 바꿀 수
는 없는 것이다. 프로펠러 엔진은 폐기하고 제도판으로 되돌아 와야 한다.
  무론 생물은 결코 제도판 위에서 설계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생물은 실제로 새로운 출
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들은 세대가 바뀔 때마다 새출발하는 것이다. 모든 새 생물체
는 단세포에서 시작되어 새롭게 생장한다. 그것은 조상의 설계 이념을 DNA의 프로그램 형
태로 이어받지만 그 조상의 육체적인 기관을 인수받지는 않는다.  그것은 부모의 심장을 받
지 않고 그것을 새로운(가능하면 개량된) 심장으로 고쳐 만든다. 단일 세포로서 재출발하는 
새로운 개체는 부모의 심장과 동일한 설계 프로그램을 써서 생장하고 더 나아가 거기에 개
선이 가해질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독자는 내가 이끌려고 하는 결론을  알게 될 것이다. '병
목형' 생활환의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제도판으로 돌아오는 것과 동등함을 가능케 했다는 점
이다.
  생활환의 병목화는 두 번째 관련된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발생 과정의 조절에 이용이 
가능한 '달력'을 제공한다. 병목을 가진 생활환에 있어서 새로운 세대는  모두 거의 같은 일
련의 사건을 거쳐간다. 그것은 단세포로 시작하여 세포 분열에 의해 생장한다. 그리고 그것
은 딸세포(daughter cell)를 송출함으로써 번식한다. 아마도 그것은 최종적으로 죽을 것이나 
그것은 우리가 죽음을 면치 못할 운명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이 논의에 관
한 이 생활환은 현재 생물이 번식하고 새로운 세대의 생활환이 시작됐을 때 끝난다. 이론적
으로 생물은 그 생장기에 언제나 번식하는데 최종적으로는 번식에 최적 시기가 나타날 것으
로 예측된다. 너무 젊어가 노년이 되어 포자를 방출하는 생물은 힘을 저축하여 인생의 전성
기에 많은 수의 포자를 방출하는 경쟁자에 비해 결국은 보다 적은 자손밖에 갖지 못할 것이
다.
  논의는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정형적인 생활환의 문제로 옮겨지고 있다. 각 세대가 단세포
의 병목처럼 시작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일정  기간을 거친 생장기, 즉 아동기를 갖는
다. 생장 기간의 일정성, 정형성은 마치 엄밀히 지켜지는 달력에 따르는 모양으로 배발생의 
특정시기에 특정한 사태가 생기는 것을 가능케 한다. 생물종에 따라 정도는 다르나 발생 중
의 세포 분열은 확정된 규칙 순서대로 진행되며 이 순서는 생활환이 반복될 때마다 재현된
다. 세포 분열시 각 세포는  정해진 위치와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몇 개의 경우에는 
그것이 너무도 엄밀하기 때문에 발생학자는 각 세포마다 이름을 붙일 수가 있어 어떤 개체
의 임의의 세포에 관해 정확히 대응하는 다른 개체의 세포를 알아맞힐 수가 있다.
  그래서 정형적 생장 주기는 발생학적인 사건의  방아쇠를 당기기 위한 시계 또는  달력을 
제공한다. 지구의 자전 주기와 공전 주기를 생활의 구축과 질서화를 위해 우리 자신이 얼마
나 용이하게 이용하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같은 식으로  병목을 가진 생활환에 
의해 강요된 끝없이 되풀이되는 생장 리듬은 -그것은 거의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발
생을 구축하고 질서를 잡는 데  이용될 것이다. 특정 유전자의 병목을  특정 시기에 넣거나 
자르거나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병목/생장 주기의 달력이  특정 시기라고 하는 재료의 존재 
그 자체를 보증하기 때문이다. 그처럼 잘 가감된 유전자 활성의 조절은 복잡한 조직이나 기
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발생 과정의 진화에서 불가결한 전제이다.  독수리의 눈이나 제비 
날개의 정확함과 복잡함은 언제 무엇을 만드는가를 정하는 시계 장치의 규칙이 없이는 출현
할 수 없다.
  병목을  가진  생활사에서  제3의  결과는  유전적인  것이다.  여기서  Bottle-Wrack과 
Splurge-weed의 예가 다시 필요하다. 또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기 위해 두 종 모두 무성
으로 증식한다고 가정하고 어떻게 진화하는가를 생각해 보자. 진화는 유전적인 변화, 즉 돌
연변이를 필요로 한다. 돌연변이는  어느 세포 분열  기간 중에도 우연히  일어날 수 있다. 
Splurge-weed에서 세포 계열의 선단은 폭이  넓고 병목과는 정반대이다. 절단되어 돌아다
니는 각 가지는 많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딸 개체 중  두 세포의 친족 관계의 간
격이 각 세포와 어미 식물 중의 세포군과의 친족 관계보다 더 멀다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친족'이라는 말은 문자대로 사촌, 손자  기타 등등을 의미한다. 세포는 뚜렷한  유래의 
계열을 가지고 있고 이 계열은 갈라져 간다. 그래서 몸  속의 세포에 관해서 별로 변명없이 
육촌 등의 말을 사용할 수 있다). 이 점에서 Bottle-wack은 Splurge-weed와 뚜렷이  다르
다. 딸 식물 중의 모든 세포는  단일 포자 세포에서 유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개체 중의 
모든 세포는 단일 포자 세포에서 유래하는 것이 때문에 한 개체 중의 모든 세포는 서로  다
른 개체의 어느 세포보다 밀접한 사촌(또는 무엇이든) 관계에 있다.
  이런 두 종 사이의 차이는  중대한 유전적 결과를 초래한다. 새로운  돌연 변이 유전자의 
운명을 우선  Splurge-weed에  관해, 그   다음에는 Bottle-wrack에 관해   생각해 보자. 
Splurge-weed의 새로운 돌연 변이는 식물체의 어느 세포, 어느 가지에도 생길 수 있다. 딸 
식물은 다세포의 출아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돌연변이 세포의 직계 자손들은 비교적 먼 
친척에 해당하는 비돌연변이 세포와 딸 식물체나 손자 식물체를 공유할 수 있다. 다른 한편 
Bottle-wrack에 있어서 한 식물체의 모든 세포의 가장 최근의 공통 조상은 그 식물체에 병
목의 발단을 제공한 포자보다 오래 될 수는 없다. 만일  그 포자가 돌연변이 유전자를 포함
하게 될 것이다. 만일 포자가 그것을 포함하지  않으면 모든 세포가 포함하지 않을 것이다. 
식물체 내에서 Bottle-wrack의 세포는  Splurge-weed의 세포보다 유전적으로  더 균일할 
것이다(때때로 역돌연변이가 있다고 해도). Bottle-wrack에서 식물 개체는 유전적인 동일성
을 가지는 단위로 개체의 이름에 걸맞게 될  것이다. Splurge-weed의 식물체는 보다 작은 
유전적 동일성밖에 없고 Bottle-wrack의 식물체보다 '개체' 이름에 걸맞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용어법의 문제가 아니다.  돌연변이가 생기기 때문에 Splurge-weed 식물
체 내의 모든 세포가  근본적으로 결코 같은 유전적  이해 관계를 갖는 일은  없을 것이다. 
Splurge-weed 세포 내 유전자는  그 세포의 번식을 촉진함으로써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 
그것은 반드시 그 식물 '개체'의 번식을 촉진함으로써 이익을 얻으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돌연변이는 한 식물체 내의 세포와 유전적으로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기관이나 새로운 식물
체의 제조에 있어서 서로가 성심 성의로 협력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자연 선택은 식물체
보다 오히려 세포 사이에서 선택을  할 것이다. 한편 Bottle-wrack에서는  한 식물체 내의 
모든 세포가 아마도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극히 최근의 돌연변이만
이 차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효율적인 생존  기계의 제조에 기꺼이 
협력할 것이다. 다른 식물체 내의 세포는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무엇
보다도 다른 병목을 통과한 세포군은 가장 최근에 생긴 돌연변이를 제거하는 다른 모든 세
포, 즉 대다수의 세포로 달라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은 Splurge-weed의 경
우와 같이 경쟁자의 세포간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라이벌 식물체 사이에서 판정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식물체 전체에 필요한 기관이나 장치의 진화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엄밀히 전문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만 그룹 선택을 둘러싼  논의와 
유사성이 있다. 우리는 생물 개체를 세포의 그룹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룹 내 변이에 대
해 그룹간 변이의 비율을  증가시키는 방도가 있으면  일종의 그룹 선택이  작용하게 된다. 
Bottle-wrack의 번식  습성은  정확히 비율을   증가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Splurge-weed 습성은 정확히 그 정반대의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  외에도 '병목을 가지는 
것'과 이 장을 특징짓는 다른 두 가지의 사고 방법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는데 그것들은 계
발적일지는 몰라도 여기서는 찾아내지 않는다. 첫째로 기생자는 그 유전자가 숙주의 유전자
와 같은 생식 세포에 들어가(병목을  통과하여) 다음 세대로 전해질  때에는 숙주와 협력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두 번째는 유성적으로  번식하는 생물체의 세포는 감수  분열이 공정할 
때만 서로 협력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요약하면 병목형의 생활사가 왜 분명히 구별된 단일 운반자로서 생물 개체의 진화를 촉진
하는가라는 세 가지의 이유를 봐 온 것이다. 이 셋에는 각각 '제도판으로 돌아옴', '규칙적인 
시간 주기' 그리고 '세포의 균일성'이라는 라벨을 붙일 수 있는 것이다. 병목이 있는 생활환
과 분명히 구별되는 생물 개체는 어느쪽이 먼저 왔을까? 나로서는 양자가 함께 진화했다고 
생각하고 싶다. 사실 나는 생물 개체를 본질적으로 정의해 온 특징은 처음과 마지막에 단세
포의 병목을 가진 단위라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생활환이 병목의 어떤 형이 된다면 
생명 물질은 분명하게 구별된 단일 생물 개체에 들어가게 될 운명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
고 생명 물질이 분명히 구별되는 생존 기계에 점점 묻혀 버릴수록 그 생존 기계의 세포들은 
그들과 공통의 유전자가 병목을 통과하여 다음 세대로 옮겨지도록 운명지어진 특별한  부류
의 세포를 위해 점점 큰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병목을  가진 생활환과 분명히 구별되는 생
물 개체라는 두 현상은 서로  손잡고 보조를 맞추어 나간다. 한쪽이  진화하면 그것이 다른 
쪽을 더욱 강화시킨다. 양자는 마치 진행 중의 연애 과정에  있는 남녀 사이에서 감정이 나
선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처럼 서로가 격려하고 있다.
  (연장된 표현형)은 방대한 책이라서 그 논의를 한  장에 간단히 묶어 놓을 수는 없다. 여
기서 나는 압축한 좀 직관적인 인상파적이라고까지 불려질 스타일을 어쩔 수 없이 채용했음
에도 불구하고 논의의 향미를 전하는 데는 성공했다고 믿고 싶다.
        불멸의 자기 복제자
  끝으로 간결한 선언을 가지고 매듭짓기로 하자. 그것은 이기적 유전자/연장된 표현형이라
는 생명관의 전체에 대한 요약이다. 나는 그것이 우주의 어떤 장소에 있는 생물에게도 적용
되는 생명관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모든 생명의 근본적인 단위  및 원동력은 자기 복제자이
다. 자기 복제자는 그 사본이 만들어지는 우주에 있는 어떤 것이다. 최초로 우연히 작은 입
자들이 마구 부딪침으로 해서 자기 복제자가 출현한다. 자기  복제자가 일단 존재하게 되면 
그것은 스스로 복제를 한없이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복제 과정도 완전하지는 
않고 자기 복제자들의 집단은 서로가 다른 몇 개의 변이를 품게 된다. 이 같은 변이의 어떤 
것은 자기 복제의 능력을 잃어서 그들 자신이 소멸할 때  그 동족도 아울러 소멸하고 만다. 
다른 변이는 아직 복제를 할 수 있으나 효율이 나쁘다. 아직도 다른 변이는 점점 새로운 방
법을 획득하여 자기의 조상이나 동시대의 것보다 훨씬 효율이 좋게 자기 복제된다. 집단 중
에서 우세하게 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자손이다. 이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계는 가장 강
하고 교묘한 자기 복제자에 의해 채워져 나가게 될 것이다.
  좋은 자기 복제자가 되기 위한 더욱 세련된 방법은 서서히  발견되어 갈 것이다. 자기 목
제자는 자기 고유의 성질 때문만이 아니라 세계에 대하여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 덕분에 살
아 남는다. 이 같은 결과는 극히 간접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필요한 것은 그저 얼마나 간접
적인 것이든간에 최종적으로 자기 복제자가 자기를 복제할 때의 성공률에 피드백하여  영향
을 준다는 결과일 뿐이다.
  어떤 자기 복제자가 이 세상에서 성공할 것인가의  여부는 그것이 어떤 세계 -기존의 조
건- 인가에 달려 있다. 이런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자기 복제자와  그것이 가져
오는 결과일 것이다. 영국인과 독일인 조정 선수의 예와  마찬가지로 서로가 이익을 주고받
는 자기 복제자끼리는 서로의 존재하에서 우위를 점하게 될 것이다. 우리 지구상의 생물 진
화의 어떤 시점에서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자기 복제자끼리의 그와 같은 집결이 분명히 구별
되는 운반자 -세포와 후에는 다세포 생물체-의  창조라는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병목이 
있는 생활환을 가진 운반자가 번영하여 보다 더 확실하게 구별되는 운반자 다운 것이 됐다.
  생물 물질을 분리된 운반자로 포함시키는 것은 그런 두드러짐과 우세함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생물학자가 이 세상에 등장하여 생물에 관한 물음을 시작했을 때 그들의 물음은 전
적으로 운반자, 즉 생물 개체에 관한 것이었다.  생물학자의 의식에 의하면 생물 개체가 먼
저 들장하였고, 자기 복제자(현재로는 유전자로 알려짐)는 생물 개체가 쓰는 장치의 일부로 
인정됐다. 생물학을 다시 정도로 돌려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중요성에 있어서도 자기 복제자
가 최초로 왔다는 것을 신중하게 명심시키기 위해서도 의식적인 정신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명심시키는 하나의 방법은 오늘에 있어서까지도 한 유전자의 표현형 효과가  반드시 
모두 그것이 위치하는 개체의 몸 속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원
칙적으로 말해 확실히 그리고 사실상 유전자는  개체의 체벽을 통과하여 바깥 세계에  있는 
대상을 조작한다. 대상의 일부는 생명이 없는 것이고, 또 어떤 것은 다른 생물이며, 어떤 것
은 매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아주 작은 상상력만  있다면 방사상으로 뻗은 연장된 표현
형의 힘의 그물 눈 중심에 위치하는 유전자를 볼 수 있다. 세계 속에 있는 하나의 대상물은 
여러 생물 개체 속에 위치하는 여러  유전자로부터 오는 영향력의 그물이 집중하는  초점인 
것이다. 유전자의 긴 팔에는 분명히 경계가 없다.  모든 세계에는 멀리 또는 가깝게 유전자
와 표현형 효과를 연계하는 인과의 화살이 종횡으로 난입하고 있다.
  부수적이라기에는 너무 실천적으로 중요하지만, 필연이라 하기에는 이론상 또한 불충분하
다는 사실을 하나 추가해 두자. 그것은 이들 인과의 화살이 뭉쳐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미 자기 복제자는 바닷 속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지 않다. 그들은 거대한 군체(개체의 몸)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표현형 효과의 결과는 세계 전체에 균일하게 분포하고 있
는 것이 아니라 대개의 경우 그 같은 개체에 응결해왔다.  그러나 이 지구에서 낯익은 개체
의 몸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이론은 아니었다. 우주의 어떤 장소이든 생명이 생기기 위해 존
재해야만 했던 유일한 실체는 불멸의 자기 복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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